서인아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그녀의 은은한 체향이 임유환의 코끝으로 전해졌다.그에 가슴이 두근거린 임유환은 말랑한 서인아의 몸을 느끼며 같이 팔을 벌려 안아주려는데 그 순간 서인아가 임유환에게서 몸을 떼어냈다.그래서 임유환은 허공에 두 머무른 두 팔을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기사 왔어, 나 갈게.”서인아는 그런 임유환을 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서인아의 웃음을 보니 아까 그건 고의가 분명한 건 같았지만 그렇다고 뭐라 할 수도 없었기에 임유환은 씁쓸히 팔을 거두었다.그때 점점 가까워지는 검은색 세단이 임유환의 생각을 멈추었다.이제 정말 서인아와 떨어질 때가 된 듯싶었다.“유환아, 나 갈게 이제. 며칠 뒤에 봐.”서인아는 부드럽게 말하며 임유환을 향해 웃어 보였다.“응, 도착하면 꼭 문자 해.”“그래.”서인아도 아쉬운 듯 입술을 말아 물며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그렇게 차 문이 닫히고 세단은 별장을 떠나갔다.“후...”임유환은 멀어져가는 차의 방향등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임유환은 아직도 아까 있었던 포옹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셔츠에 남아있는 서인아의 체향탓인지 좀처럼 미련이 가시지 않았다.“아!”그때 별장 2층에서 들리는 최서우의 외마디 비명에 깜짝 놀란 임유환은 한달음에 최서우와 조명주가 쓰는 방으로 달려갔다.“무슨 일이에요?”“내... 머리 왜 이래요?”잔뜩 긴장한 채 묻는 임유환에 최서우는 화장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정확히 말하면 거울에 비친 관자놀이 부근만 밀린 제 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다행히 무슨 큰일이 난 건 아니었기에 임유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하지만 저 때문에 최서우의 머리가 밀린 것 같아 임유환은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서우 씨, 그게... 수술할 때 의사 선생님이 밀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임유환의 말을 듣자 그제야 자신이 수술을 마친 사람이라는 사실이 생각난 듯 최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최서우도
“그럼 일단 앉아서 쉬고 있어요. 흑제님한테 모발제 좀 가져다 달라고 할게요.”“아, 그리고 내 방 옷장에 카키색 모자가 있던데 괜찮으면 그거라도 먼저 가져다 써요. 흑제님한테 올 때 여자 모자도 몇 개 더 가져다 달라고 할게요.”“괜찮죠 당연히, 고마워요 유환 씨.”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입을 여는 임유환에 최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임유환의 자상한 모습을 보니 그에 대한 호감이 조금 더 깊어진 것 같았다.“나한테 그렇게까지 인사 꼬박꼬박 안 해도 돼요.”임유환은 최서우를 향해 웃어주고는 흑제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서우야, 너 잠깐만 여기 있어. 나 유환 씨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좀만 나갔다 올게.”조명주는 최서우에게 짧게 당부를 하고는 임유환의 방으로 향했다.마침 흑제와의 통화를 마친 임유환은 갑자기 제 방에 나타난 조명주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명주 씨가 왜 여기 있어요?”“별로 반갑진 않나 봐요?”“그럴 리가요.”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조명주에 임유환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조금 놀라던 임유환은 조명주가 따로 저와 할 얘기가 있어 이렇게 방까지 찾아왔다는 걸 금세 눈치채고는 물었다.“있죠, 그것도 아주 많이요.”“말해요.”단도직입적으로 나오는 조명주에 임유환도 웃으며 대꾸했다.그에 조명주는 눈을 치켜뜨며 임유환을 주시한 채 입을 열었다.“일단은, 유환 씨 진짜 신분부터 알려줘요. 이젠 얘기해줄 수 있잖아요.”“진짜 신분이라뇨?”“유환 씨랑 흑제님 사이 그리고 유환 씨 신분 말이에요.”“내가 처음으로 임유환 씨 신분에 대해 물었을 때 유환 씨가 본인은 세계 1위 재벌이면서 또 군정계의 최고 령수라고 했었죠. 그거 다 사실이에요?”“그걸 기억하고 있었어요?”조명주의 말을 듣던 임유환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조명주가 그때 흘리듯 했던 말들을 여태껏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서였다.“당연하죠, 중령씩이나 되는데 기억력은 좋아야죠.”조명주는 자신만만
임유환은 의심 가득한 조명주의 눈을 보며 정말 억울하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고는 말했다.“진짜예요, 내가 명주 씨한테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때는 정말 아무렇게나 말한 거였어요.”“그때 제가 세계 1위 재벌이라고 했는데 세계 1위 재벌은 명주 씨도 봤다시피 흑제님이시잖아요.”“이건 사실이잖아요.”예전 같았으면 굳이 조명주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신분을 숨기진 않았을 텐데 지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하니 사실대로 말해줄 수가 없었다.최서우도 저를 지키다가 총까지 맞았는데 조명주까지 이런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제 신분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들이 위험해질까 봐 임유환은 말 한마디도 조심해서 하려 했다.서강인의 말처럼 정씨 집안 뒤에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숨어있었다.그 옛날 8대 가문의 수장이었던 임씨 가문을 제거해버릴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8대 가문 전체가 두려워하는 존재.임유환은 그들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하지만 그들의 목표가 임씨 가문 하나 제거하는 것 정도로 단순하진 않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임씨 가문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그 고생을 해가며 어머니를 죽일 필요도 없을 테니까, 어머니를 죽였다는 건 어머니가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어서 입을 막으려고 죽였거나 아니면 그밖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임유환은 그들 조직은 필시 연경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깊은 곳에 숨어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여러 가문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다.그러니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임유환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그래서 조명주에게조차도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는 것이다.조명주가 알게 된다면 당연히 수사를 돕겠다고 나설 것이고 그렇게 오랫동안 연경에서 임유환과 함께하다 보면 그 비밀조직의 눈에 띄는 건 시간문제였다.한편 그런 임유환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조명주는 임유환의 해명을 듣고는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세
“그럼 진짜 무제의 실력이라는 거에요?”“네.”실력에 대해서까지 숨긴다면 너무 진정성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또 이건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기에 임유환은 깔끔하게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에 조명주는 순간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이미 눈으로 본 게 있으니까 예상을 하긴 했지만 무제의 실력이라는 말을 임유환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또 새삼 놀라웠다.스물일곱의 나이에 그런 실력을 갖췄다는 사실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은 조명주는 참지 못하고 그 비결을 물었다.“도대체 어떻게 수련한 거예요?”“별거 없어요, 그냥 운 좋게 대단한 스승님을 만나게 된 것뿐이에요.”저를 가르쳐주시던 스승님을 떠올린 임유환은 차오르는 감사함에 입가에 미소를 띈 채 말했다.스승님이 안 계셨다면 임유환은 진작에 그 눈밭에서 얼어 죽었을 것이다.“그럼 스승님은 어떤 분이세요?”모든 덕을 스승에게로 돌리는 임유환에 조명주는 호기심 가득한 채로 스승의 성함을 물었다.“미안해요, 스승님이 성함 함부로 밝히는 거 싫어하셔서...”임유환의 스승님이 그에게 재차 당부하신 일이 한가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제 이름과 신분을 노출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당연히 그걸 기억하고 있던 임유환은 정중하게 조명주에게 말했다.“알겠어요.”조명주는 조금 실망했지만 남들 앞에 나타나는 걸 싫어해 이름을 숨기시는 스승님들도 많이 보아왔던 탓에 계속해서 묻지는 않았다.그래도 제자가 이렇게 훌륭한 걸 보면 그 스승님이라는 분도 한 실력 하실 것 같았다.“유환 씨, 그럼 15년 전 유환 씨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줄 수 있어요?”조명주는 15년 전 임유환이 무슨 이유로 임씨 집안에서 쫓겨났는지 또 그 뒤로 무슨 일들을 겪어왔는지 알고 싶었다.“사실 뭐 큰일도 아니에요, 그냥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거죠.”임유환은 15년 전 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진 않았다.자신이 가족들 때문에 독까지 먹고 쫓겨나 차가운 눈 바닥에서 죽을뻔했다는 말을
딩동, 딩동!그때 1층에서 갑작스레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가 둘의 대화를 끊어냈다.“흑제님인가 봐요, 내가 내려가 볼게요.”좀 전까지만 해도 슬픔에 잠겨있던 임유환은 순식간에 감정을 추스르고는 자상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조명주는 계단을 내려가는 임유환의 서글픈 뒷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이 찝찝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다시 제대로 물어보기로 했다.그때 별장 정원 입구까지 나온 임유환은 눈앞에 보이는 뜻밖의 인물에 두 눈을 의심했다.흑제가 온 건 줄 알았는데 문 앞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하얀 셔츠차림에 카네이션 꽃다발을 들고 있는 최서우의 전 남자친구, 조효동이었다.“네가 여길 왜 와.”조효동을 본 임유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하하, 서우가 전에 입원했었다는 얘기를 들어서 병문안이나 하려고 왔지.”임유환 때문에 여러 번 망신을 당하긴 했지만 이번에 정우빈한테서 최서우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다시 이 기회를 빌려 최서우를 제 여자로 만들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그리고 그런 조효동의 얕은수를 단번에 보아낸 임유환은 냉기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서우 씨는 너 안 보고 싶어해. 그리고 지금 집주인 허락도 없이 자운별장에 무단침입한 너 때문에 내 프라이버시 보장이 잘 안 되고 있거든. 그러니까 경호원 부르기 전에 빨리 꺼져.”임유환은 금방 퇴원한 최서우가 조효동을 만나 안 좋은 자극을 받기라도 할까 봐 조효동을 서둘러 돌려보내려고 했다.“미안한데 나도 여기 별장 샀거든, 그러니까 나도 집주인이야.”물론 조효동이 산 건 산기슭의 별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저의 재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래?”하지만 임유환은 그런 조효동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자운 별장은 집주인들끼리도 함부로 프라이버시 침입하지 못하게 돼 있는 거 몰라?”“알지 당연히, 나 그래서 침입 안 했잖아. 초인종까지 누르고 찾아온 건데?”“여긴 너 안 반기니까 다시 가.”정말 주인이라도 된 양
“서우야, 잠깐만!”신나서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는 최서우에 불길한 예감이 든 조명주는 최서우를 말려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최서우는 한달음에 정원 입구에까지 도착했다.마침 최서우가 보기 전에 조효동을 돌려보내려고 손을 대려 했던 임유환은 갑자기 나타난 최서우에 몸이 굳어진 채 깜짝 놀라며 물었다.“서우 씨가 왜 여기 있어요?”“효동 선배 만나려고 왔죠!”기뻐하는 얼굴로 내뱉는 다정한 호칭에 순간 벙쪄버렸던 임유환은 이내 최서우의 기억이 대학교 3학년에 머물러있음을 기억해내고는 아차 싶은 심정에 이마를 짚었다.그때는 최서우와 조효동이 연애를 시작하기 전이었으니 최서우도 당연히 조효동이 저 몰래 부자 아줌마를 만나고 다니는 걸 모르고 있었다.그러니 한창 저 좋다고 따라다니는 “신사 선배”인 조효동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서우야, 안녕!”임유환이 당황한 틈을 타 조효동은 재빨리 최서우를 향해 손을 저었다.기억을 잃은 최서우는 처음으로 저를 서우라고 부르는 조효동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그리고 그 모습을 본 조효동은 최서우가 기억을 잃은 게 확실하고 또한 저에게 호감이 남아있는 상태임을 확신했다.“효동 선배”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걸 보니 최서우의 기억은 조효동의 바람을 발견하기 전에 머물러있는 것 같았다.하늘도 자신을 돕는 것만 같은 천운에 조효동은 속으로 환호를 질러대며 이 기회에 최서우를 제대로 꼬셔보려 했는데 그때 뒤늦게 따라 나온 조명주가 최서우를 제 쪽으로 데려가며 조효동을 향해 소리 질렀다.“조효동,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조명주에 조효동의 인상은 자연스레 구겨졌다.조명주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조효동은 기회만 생긴다면 반드시 그녀를 제 아래 무릎 꿇게 만들리라 다짐하며 음흉한 눈으로 조명주의 하얀 다리를 훑어보았다.하지만 이런 속내를 드러낼 리 없는 능구렁이 같은 조효동은 다시 신사다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서우 퇴원했다는 얘기 듣고 병문
“조효동, 지금 서우 씨가 가지고 있는 호감 이용해서 또 사기 치면 나 진짜 너 죽일 수도 있어.”조효동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치가 떨렸던 임유환은 이를 악물며 조효동을 향해 경고했지만 조효동은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서우 퇴원했다는 말 듣고 병문안 온 건데 내가 무슨 사기를 쳐.”조효동은 오히려 임유환이 저에게 주먹을 휘두르길 바라고 있었다.그럼 최서우는 저를 안쓰러워하며 동정할 것이고 저를 때린 임유환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나는 것이니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그런 조효동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임유환의 눈에는 한기가 가득했다.“조효동, 이 개새끼!”그 위선적인 모습에 조명주까지 이를 악물며 말하자 최서우는 서로 적의가 가득한 듯한 그들을 보며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었다.“명주야, 너도 그렇고 유환 씨랑 효동 선배 사이에 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아.”“오해라니!”최서우의 질문에 조명주는 차갑게 대답했다.“너 저놈이 어떤 놈인 줄 알아? 허구한 날 거짓말만 하고 네 감정 이용해서 사기까지 친 놈이라고!”“내 감정 이용해서 사기를 쳤다고?”조명주의 말에 최서우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치자 조급해 난 조효동이 다급하게 나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같잖은 해명을 해대기 시작했다.“그런 적 없어 서우야, 그건 전부 다 오해였어!”“뭐가 오해라는 거에요?”“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최서우에 조명주가 선수를 치며 대답했다.절대 조효동 같은 인간에게 최서우가 넘어가게 놓아둘 순 없었기에 조명주는 사실대로 얘기했다.“저 인간이 너 놔두고 바람피웠어!”“바람?!”최서우는 겸손하고 자상한 것 같던 선배가 바람을 피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 그러니까 저놈한테 절대 속으면 안 돼! 지금도 수작질하는 거라니까.”“효동 선배가 무슨 수작질을 해?”지금 최서우가 기억하고 있는 조효동은 그들의 진술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기에 최서우는 한 사람에 대한 전혀 다른 두 가지 묘사 때문에 머리가 울리는 것
“서우야,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내 말 좀 들어봐.”조효동은 최서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그날 일은 다 오해야. 너도 날 오해했고 네 친구인 조 중령님도 날 오해한 거야.”“내가 사실대로 다 말할게.”“너도 알잖아, 우리 집 사정이 어떤지.”“나 어릴 때 집에 돈이 없어서 우리 아버지 제대로 치료도 못 받으시고 나랑 엄마 두고 먼저 떠나신 거.”“그래서 외국에 나가서 의학 좀 제대로 배워서 우리 집 같은 집안의 환자들도 치료해주는 게 내 꿈이었잖아.”“그것 때문에 대학 내내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돈 벌었잖아.”“그건 나도 다 아는 거잖아요. 그게 선배 바람이랑 무슨 상관이에요?”조효동의 꿈과 포부는 최서우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끈질긴 모습에 최서우도 조효동을 롤모델로 삼고 지지해왔었다.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바람을 피웠다는 건 엄연한 배신이었기에 최서우는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물었다.“서우야, 난 바람을 핀 적이 없어.”그리고 이런 최서우의 반응을 예상했던 조효동은 계속해서 연기를 했다.“그날 나는 그냥 귀빈을 대접했던 것뿐이야. 해외 유학이랑 유학 다녀와서 차릴 병원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만난 거야.”“너도 알잖아, 병원이라는 게 내 실력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니란 거. 투자자도 많이 필요하고 동업자도 있어야 하는 거잖아.”“그리고 그 귀빈님이 바로 투자자 중 한 분이셨어.”“해외 유명 기술회사의 이사장님이신데 자산이 2만 억이래, 그날은 나랑 투자 얘기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직접 오신 거야.”“그 말 다 진짜예요?”“당연하지 서우야, 하늘이 보고 땅이 봤는데 내가 널 왜 속이겠어.”아직 의심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최서우를 향해 조효동이 제 가슴을 쳐 보이며 장담했다.“그리고 그 여자 50도 넘었는데 내가 왜 그런 여자를 만나겠어, 그것도 서우 너 몰래.”“내 인성은 의심할 수 있지만 내 눈은 의심하지마.”“내가 사랑하는 여잔 너뿐이야 서우야.”“난 그때도 얼른 성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