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요... 그냥...”최서우는 고개를 젓는 임유환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그냥 뭐요?”“그냥...”임유환은 수술 때문에 머리가 다 밀려버려 원래의 미모를 잃어버린 최서우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또 눈시울을 붉혔다.“그냥... 내가 서우 씨를 지키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해서 그래요.”“남자가 뭐 이렇게 감성적이에요. 나도 같이 슬퍼지잖아요.”자책하는 임유환을 보고 있자니 최서우의 가슴도 같이 저릿해 났다.“그래요 유환 씨, 서우 힘들게 깨어났는데 기뻐해야죠!”그때 덩달아 슬퍼진 조명주가 일부러 임유환을 나무라며 말했다.“하하, 미안해요.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눈에 뻔히 보이는 억지웃음이었지만 다들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최서우의 일을 겪으면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가 한층 더 돈독해진 것 같았다.혼자 연경에 있을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는데 서인아는 이런 낯설지마는 따뜻한 느낌이 마음에 든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때 보고를 위해 병원에 온 흑제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임 선생님께서 알아보라고 한 일 거의 다 알아내긴 했는데...”“근데 뭐요?”말을 멈추는 흑제에 임유환은 눈을 치켜뜨며 그를 바라보았고 서인아와 조명주 역시 긴장한 듯 흑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그 경찰이 잡혀가는 도중에 혼자 독을 먹고 자결했답니다.”“독을 먹고 자결해요?”흑제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아까의 일을 떠올리는 임유환이었다.임유환을 공격하던 검은 옷의 킬러들과 같은 방법으로 자결한 걸 보니 아마 한패인 듯싶었다.“그 사람 자료는 찾았어요?”“그건 못 찾았습니다.”“사람을 시켜서 시스템을 뒤져봤는데 그런 사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답니다.”“역시 계획 살인이었네요.”고개를 젓는 흑제에 임유환의 눈빛이 다시금 차가워졌다.“그럼 그 가짜 기자는요? 똑같이 독을 먹고 자결했겠네요?”“네...”“하하, 정말 철저히 계획된 움직임이네요.”냉소를 흘리던 임유환은 이내 드는 의문에 다시 흑제를 바라
“있긴 한데 왜 그러세요?”“제가 잠시 머물 수 있을까요?”“당연하죠!”일부러 조심스레 묻는 임유환에 흑제는 심장이 철렁했다.주인님이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물을 때마다 수명이 깎여나가는 듯 불편했다.하지만 아직 임유환의 신분을 노출할 수는 없었기에 흑제는 억지로 임유환에게 맞추며 연기를 이어나갔다.“감사합니다, 흑제님.”임유환의 미소에 흑제도 얼른 두 손을 모으며 인사를 했다.“별말씀을요, 집은 제가 얼른 비워놓겠습니다.”“감사합니다.”그에 임유환도 호탕하게 웃어 보였고 제 주인의 의도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흑제는 그냥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 위해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갔다.흑제가 나가자 임유환이 환경과 프라이버시를 강조할 때부터 의아하게 생각하던 서인아와 조명주의 시선이 임유환에게로 향했다.공교롭게 두 여자 모두 혹시 집에 여자를 두려는 건 아닌지 의심을 한 탓에 심문하듯 임유환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그 따가운 시선을 느낀 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눈꼬리를 떨며 물었다.“왜 그렇게 봐요?”“별장은 왜 빌리는 거야?”먼저 질문을 한 서인아는 죄인을 추궁하는 듯 날카롭게 물었다.“왜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건데?”“하하.”역시 여자는 감성의 동물이라더니 프라이버시에만 집중하고 환경을 강조한 건 까맣게 잊어버린 서인아에 임유환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왜,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하지만 임유환의 웃음에 서인아는 아까보다 더 집요하게 임유환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의심이 더 짙어진 것 같았다.“그럴 리가.”임유환은 멋쩍게 웃으며 해명을 했다.“환경 좋고 프라이버시 확실한 데로 알아봐달라고 한 건 서우 씨의 회복을 위해서야.”“서우 씨 회복?”잠시 당황하던 서인아는 이내 임유환의 뜻을 알아차렸다는 듯 물었다.“너 설마 서우 씨를 별장으로 옮기려는 거야?”“응.”고개를 끄덕인 임유환은 제 계획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앞으로 서우를 별장에 들이고 제가 매일 옆에서 침 치료를 해줄 생각이었다.그러면 기억력을 자극하는 데
“고마워, 인아야.”서인아의 동의까지 받은 임유환은 갑자기 없던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별장엔 언제 들어갈 건데?”“상황 좀 지켜보다가 서우 씨 좀 괜찮아지면 그때 퇴원할 거야.”“그래.”서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있는 임유환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서우 씨도 이제 깨어났으니까 너도 좀 쉬어. 여긴 나랑 명주 씨가 지킬 테니까 걱정 말고.”“응.”이번에는 임유환도 거절하지 않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푹신한 소파에 누우니 온몸의 긴장이 순식간에 풀리면 임유환은 빠르게 잠에 들었다.“인아 씨도 가서 쉬어요. 내가 서우랑 같이 있을게요.”임유환이 눕는 걸 확인한 조명주는 웃으며 서인아를 향해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난 저기 잠깐 앉아있을게요. 오늘은 우리 둘이 번갈아 가면서 서우 씨 돌봐요.”“좋아요.”조명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인아도 소파에 가 앉았고 침대 곁에는 최서우와 조명주 두 명만이 남아있었다.“서우야, 너도 좀 쉴래?”조명주는 최서우도 금방 깨어나서 피곤할 것 같아 걱정스레 물었다. “난 괜찮아.”하지만 최서우는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소파에 누워있는 임유환에게로 돌렸다.임유환을 보고 있으니 아까 제 앞에서 배를 까보이던 게 생각나 최서우는 얼굴을 붉히며 조명주를 향해 물었다.“명주야, 내가 진짜 저 사람이랑 친했었어?”“응.”최서우의 질문에 조명주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우린 도대체 어떻게 친해진 거야? 그리고... 어느 정도로 친해진 건지 알려줄 수 있어?”호기심에 가득 차 묻는 최서우를 보며 조명주가 입을 열었다.“당연하지.”“너랑 유환 씨는 한 달 전에 알게 된 거야. 그때 유환 씨가 서인아 씨를 지키다가 크게 다치고 S 시 제일병원에 실려 왔었어.”“그때 수술 집도의가 너였는데 임유환 씨 회복속도가 유독 빨라서 의학에 열정이 넘치던 네가 흥미를 느끼게 된 거지.”“그래서 너는 임유환 씨한테 연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유환 씨가 거절했었어. 그때
“됐어 서우야, 그만 생각해. 너 진짜 유환 씨 좋아했었어.”“유환 씨 없으면 안 될 정도로 많이 좋아했었지.”조명주는 의아해하는 최서우를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남자 혐오증이 생긴 뒤로 모든 남자를 싫어했던 최서우였지만 유독 임유환에게만은 물러지곤 했었다.그게 바로 그 마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명이었다.“알겠어...”조명주의 말에 최서우도 그러려니 하며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이어지는 이틀 동안 임유환과 조명주, 서인아는 다 같이 최서우 곁을 지켰다.이틀 동안에도 의사는 여러 번이나 뇌 검사를 진행했지만 여전히 아무 이상이 없었기에 다들 안심할 수 있었다.임유환이 퇴원절차를 다 마치고 최서우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 진작부터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그들을 데리고 자운별장으로 향했다.자운 별장은 연경에서 제일 화려한 별장으로서 자운산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공기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신화 속에 나오는 신선놀음을 하는 낙원이 있다면 바로 자운산 같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그리고 보안 역시 아주 철저했는데 별장을 보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드나들려면 무조건 등기를 해야만 했다.별장은 모두 독립적인 주택으로 되어있었는데 등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들어가려면 경보가 울리는 프라이버시 보안이 완벽한 곳이었다.이곳에서는 제일 싼 별장도 만 억이었고 산 중턱의 별장은 이만 억이었으며 산 정상의 별장은 40만 억이라는 소문도 돌았다.이곳은 그야말로 억대 자산가만이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경호원들의 공손한 시선을 받으며 흑제의 맥라렌이 자운별장으로 들어섰다.산장 내부는 아주 깔끔했는데 도로의 곳곳마다 나무들이 심겨 있었고 산 정상에서부터 시냇물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맥라렌은 산길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올라갈수록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선경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여기가... 자운 별장이에요?”창문 너머로 선경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최서우는 넋이 나간 채로 물었다.말로만 듣던 그 호화로운 자운별장을 직접 보니
조명주가 정신을 판 사이에 차는 정원만 해도 70평은 넘어 보이며 가짜 산과 작은 강까지 구비되어 있는 1호 별장 앞에 멈춰 섰다.“명주야, 도착했어. 내려야지 얼른!”“어? 아, 내려야지.”그때 잔뜩 들뜬듯한 최서우의 목소리에 조명주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차에서 내렸다.그렇게 그들은 함께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별장은 총 5층으로 되어있었는데 매 층마다 층고가 5미터쯤 돼 보였다.별장의 전체적인 인테리어는 유럽풍으로 되어있었는데 모던하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아 집이 한층 더 넓어 보이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게 했다.있을 건 다 있는 별장을 전체적으로 소개해준 흑제는 이제 그만 갈 때가 된 것 같아 작별인사를 했다.“임 선생님, 저는 그만 방해하고 가보겠습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네, 감사합니다 흑제님.”“아닙니다, 그럼 가볼게요.”웃으며 말하는 임유환에 흑제도 짤막하게 대꾸를 하며 다른 세 명에게도 인사를 하고 별장을 떠났다.흑제가 떠난 뒤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가 방부터 나누기 시작했다.“서우 씨랑 조 중령님이 먼저 골라요.”임유환이 신사답게 말하자 최서우는 대뜸 복도와 제일 가까운 방을 고르고는 조명주를 보며 불쌍한 척했다.“그럼 전 이방이요.”“명주야, 나랑 같이 방 쓰면 안 돼? 나 혼자 자기 무서운데...”“그래.”대학 때처럼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하는 최서우를 보며 조명주는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잘됐다! 사랑해, 명주야!”조명주를 끌어안으며 좋아하는 최서우에 조명주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 아름다운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임유환은 맞은 편에 있는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럼 난 이쪽 방 쓸게요. 바로 맞은 편이니까 무슨 일 생기면 나 불러요.”“네.”“그럼 나랑 명주는 먼저 방에 가서 인터넷으로 갈아입을 옷 좀 고르고 있을게요.”“네.”고개를 끄덕이며 조명주와 최서우가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임유환은 서인아를 보며 물었다.“인아야, 너도
서인아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그녀의 은은한 체향이 임유환의 코끝으로 전해졌다.그에 가슴이 두근거린 임유환은 말랑한 서인아의 몸을 느끼며 같이 팔을 벌려 안아주려는데 그 순간 서인아가 임유환에게서 몸을 떼어냈다.그래서 임유환은 허공에 두 머무른 두 팔을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기사 왔어, 나 갈게.”서인아는 그런 임유환을 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서인아의 웃음을 보니 아까 그건 고의가 분명한 건 같았지만 그렇다고 뭐라 할 수도 없었기에 임유환은 씁쓸히 팔을 거두었다.그때 점점 가까워지는 검은색 세단이 임유환의 생각을 멈추었다.이제 정말 서인아와 떨어질 때가 된 듯싶었다.“유환아, 나 갈게 이제. 며칠 뒤에 봐.”서인아는 부드럽게 말하며 임유환을 향해 웃어 보였다.“응, 도착하면 꼭 문자 해.”“그래.”서인아도 아쉬운 듯 입술을 말아 물며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그렇게 차 문이 닫히고 세단은 별장을 떠나갔다.“후...”임유환은 멀어져가는 차의 방향등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임유환은 아직도 아까 있었던 포옹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셔츠에 남아있는 서인아의 체향탓인지 좀처럼 미련이 가시지 않았다.“아!”그때 별장 2층에서 들리는 최서우의 외마디 비명에 깜짝 놀란 임유환은 한달음에 최서우와 조명주가 쓰는 방으로 달려갔다.“무슨 일이에요?”“내... 머리 왜 이래요?”잔뜩 긴장한 채 묻는 임유환에 최서우는 화장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정확히 말하면 거울에 비친 관자놀이 부근만 밀린 제 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다행히 무슨 큰일이 난 건 아니었기에 임유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하지만 저 때문에 최서우의 머리가 밀린 것 같아 임유환은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서우 씨, 그게... 수술할 때 의사 선생님이 밀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임유환의 말을 듣자 그제야 자신이 수술을 마친 사람이라는 사실이 생각난 듯 최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최서우도
“그럼 일단 앉아서 쉬고 있어요. 흑제님한테 모발제 좀 가져다 달라고 할게요.”“아, 그리고 내 방 옷장에 카키색 모자가 있던데 괜찮으면 그거라도 먼저 가져다 써요. 흑제님한테 올 때 여자 모자도 몇 개 더 가져다 달라고 할게요.”“괜찮죠 당연히, 고마워요 유환 씨.”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입을 여는 임유환에 최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임유환의 자상한 모습을 보니 그에 대한 호감이 조금 더 깊어진 것 같았다.“나한테 그렇게까지 인사 꼬박꼬박 안 해도 돼요.”임유환은 최서우를 향해 웃어주고는 흑제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서우야, 너 잠깐만 여기 있어. 나 유환 씨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좀만 나갔다 올게.”조명주는 최서우에게 짧게 당부를 하고는 임유환의 방으로 향했다.마침 흑제와의 통화를 마친 임유환은 갑자기 제 방에 나타난 조명주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명주 씨가 왜 여기 있어요?”“별로 반갑진 않나 봐요?”“그럴 리가요.”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조명주에 임유환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조금 놀라던 임유환은 조명주가 따로 저와 할 얘기가 있어 이렇게 방까지 찾아왔다는 걸 금세 눈치채고는 물었다.“있죠, 그것도 아주 많이요.”“말해요.”단도직입적으로 나오는 조명주에 임유환도 웃으며 대꾸했다.그에 조명주는 눈을 치켜뜨며 임유환을 주시한 채 입을 열었다.“일단은, 유환 씨 진짜 신분부터 알려줘요. 이젠 얘기해줄 수 있잖아요.”“진짜 신분이라뇨?”“유환 씨랑 흑제님 사이 그리고 유환 씨 신분 말이에요.”“내가 처음으로 임유환 씨 신분에 대해 물었을 때 유환 씨가 본인은 세계 1위 재벌이면서 또 군정계의 최고 령수라고 했었죠. 그거 다 사실이에요?”“그걸 기억하고 있었어요?”조명주의 말을 듣던 임유환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조명주가 그때 흘리듯 했던 말들을 여태껏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서였다.“당연하죠, 중령씩이나 되는데 기억력은 좋아야죠.”조명주는 자신만만
임유환은 의심 가득한 조명주의 눈을 보며 정말 억울하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고는 말했다.“진짜예요, 내가 명주 씨한테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때는 정말 아무렇게나 말한 거였어요.”“그때 제가 세계 1위 재벌이라고 했는데 세계 1위 재벌은 명주 씨도 봤다시피 흑제님이시잖아요.”“이건 사실이잖아요.”예전 같았으면 굳이 조명주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신분을 숨기진 않았을 텐데 지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하니 사실대로 말해줄 수가 없었다.최서우도 저를 지키다가 총까지 맞았는데 조명주까지 이런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제 신분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들이 위험해질까 봐 임유환은 말 한마디도 조심해서 하려 했다.서강인의 말처럼 정씨 집안 뒤에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숨어있었다.그 옛날 8대 가문의 수장이었던 임씨 가문을 제거해버릴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8대 가문 전체가 두려워하는 존재.임유환은 그들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하지만 그들의 목표가 임씨 가문 하나 제거하는 것 정도로 단순하진 않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임씨 가문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그 고생을 해가며 어머니를 죽일 필요도 없을 테니까, 어머니를 죽였다는 건 어머니가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어서 입을 막으려고 죽였거나 아니면 그밖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임유환은 그들 조직은 필시 연경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깊은 곳에 숨어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여러 가문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다.그러니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임유환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그래서 조명주에게조차도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는 것이다.조명주가 알게 된다면 당연히 수사를 돕겠다고 나설 것이고 그렇게 오랫동안 연경에서 임유환과 함께하다 보면 그 비밀조직의 눈에 띄는 건 시간문제였다.한편 그런 임유환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조명주는 임유환의 해명을 듣고는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세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