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린아,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임유환의 목소리에는 관심이 묻어나 있었다.“아니에요...”수화기 너머의 윤서린은 이내 눈을 반짝이며 말을 돌렸다.“그냥 몸조심하라고요. 다른 할 말은 없어요.”“그래.”임유환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내가 약속할게. 꼭 무사하게 돌아갈게.”“네.”임유환의 약속에 윤서린도 부드럽게 대꾸했다.“나 이젠 진짜 방해 안 할게요. 잘 자요.”“잘자.”전화를 끊은 임유환은 눈앞에 윤서린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어머니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신경 쓰는 여자가 바로 윤서린이었기에 임유환도 하루빨리 S 시로 돌아가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상황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해져 있어 아마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임유환은 옥 팔찌를 거두고 이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한편 윤서린도 임유환 생각에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사실 일주일 뒤에 엄마 따라 연경에 간다고, 연경 윤씨 집안에 가서 처리할 일이 있으니 일을 마치면 얼굴이라도 보자고 얘기하려 했지만 윤서린은 임유환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결국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임유환이 지금 어머니와 아버지 일 때문에 생각도 많아지고 심경이 복잡할 거란 걸 알기에 윤서린도 그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다.그리고 윤서린 본인의 사정도 그리 여의치 않았다.연경에 가면 또 윤씨 집안 사람들이 윤서린의 엄마를 박대하고 아니꼽게 볼 걸 알지만 그래도 어쨌든 감당해내야 하는 일이었다.그래서 윤서린은 그저 이번에는 제 어머니를 좀 따뜻하게 맞아주었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만 할 뿐이었다.그렇게 한숨을 쉰 윤서린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이튿날 점심, 임유환은 약속대로 서씨 집안 저택에 도착했다.눈앞의 으리으리한 저택 입구에는 7년 전처럼 사자 조각상이 놓여있었는데 7년 전보다 세월의 흔적이 좀 더 느껴지는 모습이었다.그걸 보고 있으니 다시는 서씨 집안에 발을 붙이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7년 전의 그 새벽이 떠올랐다.“임유환 씨 되시
조용한 로비에서 팔 장로는 못마땅한 듯 임유환을 쳐다보고 있었다.지난번 S 시에서의 일로 화가 단단히 났던 팔 장로는 오늘 임유환이 서씨 집안에 인사 온 김에 서씨 집안 장로라는 직위를 들먹여 그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듯싶었다.하지만 그런 일들을 모르는 서강인은 제가 데려온 손님에게 팔 장로가 이렇게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팔 장로님, 말씀을 삼가세요, 임유환 씨는 제가 데려온 손님입니다.”“손님?”팔 장로는 서강인의 말에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가주님, 저놈은 손님이 아니라 액받이가 더 어울리죠.”“어제 결혼식장에서 정씨 집안과 싸우다가 하마터면 우리 서씨 집안에도 불똥이 튈뻔하지 않았습니까?”“제가 오늘 이런 말을 하는 건 다 우리 서씨 집안의 미래를 생각해서예요.”순간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서강인의 눈빛이 흔들렸다.“가문을 위해 하는 말이라고요?”그때 서인아가 냉소를 흘리고는 똑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팔 장로를 쏘아보았다.“팔 장로님, 제가 장로님과 유환이 사이의 개인적인 원한을 모를 거라 생각하세요?”“제 생각에는 가문 생각보다 이 기회를 빌려 복수하려는 걸로 보이는데요.”서인아가 제 속내를 한순간에 꿰뚫어 보자 적잖이 놀랐던 장로였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듣기 좋은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아가씨, 저는 항상 가문에 충성하며 살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욕심 따위는 없습니다.”“임유환이 정씨 집안을 망신당하게 했으니 정씨 집안에서 누구 하나 죽지 않는 한 절대 물러나려 하지 않을 겁니다.”“이런 긴박한 상황에 아가씨와 가주님이 임유환을 손님으로 맞이하시면 그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임유환 씨는 서씨 집안의 귀빈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상할 것도 없죠.”“임유환에게 그런 실력이 있다고요?”서인아가 차갑게 대꾸했지만 팔 장로가 그걸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었다.“아가씨, S 시 같은 작은 도시에서 온 놈이 실력이 있으면 얼마
“팔 장로님도 여전 같지 않으시네요. 더 이상 장로 직위를 맡아주시기엔 너무 힘들어 보이세요.”서인아는 파래진 팔 장로의 얼굴을 무시한 채 윗사람 특유의 강압적인 투로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서인아의 포스에 로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팔 장로는 몸을 떨어댔다.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장로 직위까지 박탈당할 위기에 놓인 팔 장로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그래서 팔 장로는 자신의 헌신을 어필하며 다급하게 서인아를 향해 사정했다.“아가씨, 제가 지금까지 서씨 집안에 얼마나 헌신을 해왔는데요, 그건 알아주셔야죠...”“오늘 이런 외부인 하나 때문에 제 장로직을 박탈한다니요, 이럴 수는 없습니다.”그 말에 애초부터 임유환을 못마땅해했던 다른 장로들도 동요하며 팔 장로를 위해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아가씨, 저도 이 일은 아가씨께서 너무하셨다고 생각합니다.”대 장로가 무게감 있게 말하자 다른 장로들도 그를 믿고 잇따라 입을 열었다.“아가씨,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팔 장로님이 말은 좀 안 좋게 했어도 다 서씨 집안 미래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잖습니까?”“임유환 씨가 이번에 정씨 집안에 원한을 샀으니 서씨 집안이 그런 자와 가깝게 지내서 좋을 게 없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닙니까?”“이 장로의 말씀이 맞습니다. 정씨 집안이 연경에서 어떤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가씨도 아시잖아요, 이번에 파혼한 일로 서씨 집안과의 사이가 이미 틀어졌는데 이 와중에 임유환까지 불러들이면 정씨 집안에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우리 서씨 집안이 저런 놈 손에 망할 순 없잖습니까!”“다시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아가씨.”서인아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장로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다른 장로들의 지지를 받은 팔 장로는 이때다 싶어 허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아가씨, 다른 장로님들도 다 저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저는 다 서씨 집안의 미래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틀린 말은 하지 않았어요!”“그러니 아가씨께서도 서씨 집안의 미
하지만 팔 장로는 서인아의 결심과 그녀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너무 얕잡아보았다.“팔 장로님, 이 정도로 절 협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서인아는 이내 차가운 표정으로 팔 장로를 노려보며 말했다.“협박이라뇨 아가씨, 제가 어떻게 감히...”“협박이 아니면 이런 말들은 왜 하는 거죠?”팔 장로의 말을 끊어내는 서인아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저는 그냥 임유환 저놈은 아가씨와 어울리지도 않고 서씨 가문의 문턱을 넘을 자격도 없다 판단해서 말한 것뿐입니다.”“그 입 다물어!”“나한테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를 언제부터 당신 같은 사람이 판단했죠?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다른 장로들이 나서준다 해서 내가 당신 직위 하나 못 뺏을 것 같아요?”“아가씨, 저는...”임유환 하나 때문에 서인아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 몰랐던 팔 장로가 수염까지 떨어가며 말했다.“됐어, 다들 그만해.”긴장감이 고조된 상황에 갑자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서강인과 함께 상석에 앉은 노인이었다.그 노인이 입을 열자 다들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태 장로님.”“태 장로님.”서인아와 서강인 역시 태 장로를 공손히 바라보고 있었다.물론 신분은 가주인 서강인 제일 높겠지만 그래도 이미 백 이십 세는 넘어 보이는 노인이니 집안 어르신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인아야, 나는 팔 장로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모두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태 장로가 입을 열었다.“그러니 너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렴.”“태 장로님까지 왜 그러세요...”태 장로까지 이렇게 나오니 더 이상 밀어붙이기도 힘들어진 서인아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서강인 역시 태 장로까지 나설 줄 몰랐어서 안색이 좋진 않았다.그리고 팔 장로는 다시 우쭐거리며 서인아를 향해 말했다.“아가씨, 보세요. 태 장로님께서도 제 의견을 지지해주시잖아요.”“저도 아가씨가 저놈한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건 압니다, 제가 그걸 반대하는
“너 지금 뭐라고 했어!”임유환의 말에 발끈한 팔 장로가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감히 끼어들어!”그리고 다른 장로들도 같이 분노하며 임유환을 향해 호통쳤다.“하하, 그래요. 내가 끼어들 이유가 없긴 하죠. 오늘도 인아와 가주님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이딴 곳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당신들 같은 시시비비도 가리지 못하는 노인네들을 마주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임유환은 냉소를 흘리며 장로들의 체면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누가 시시비비도 못 가리는 노인네야!”“어디서 이딴 놈이 굴러들어왔어!”여러 장로들이 모두 화가 나 씩씩 대자 팔 장로는 이 기회를 빌려 태 장로에게 손을 내밀었다.“태 장로님, 저놈이 저렇게 예의가 없어요. 저런 놈을 어떻게 우리 서씨 집안에 들이겠습니까!”그 말을 듣던 태 장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얼굴에 분노가 피어올랐다.그 모습에 서강인의 낯빛도 변하고 서인아도 심장이 두근거렸다.서인아는 임유환이 저를 위해 하는 말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되면 서씨 집안 어른들에게 다 미움을 살 것 같아 얼른 임유환을 바라보며 그만하라고 눈치를 줬다.하지만 임유환은 나머지는 자신에게 다 맡기라는 듯 서인아를 보고 웃었다.그에 서인아가 어리둥절해 하던 것도 잠시 팔 장로의 분노어린 목소리가 다시금 로비에 울려 퍼졌다.“태 장로님, 얼른 명령을 내리셔서 저놈을 쫓아내셔야 합니다!”“하하, 팔 장로님 뭘 그리 급해 하세요? 얼른 대의를 더 읊으면서 다른 이들을 부추겨야죠!”저를 비웃으며 말을 끊어대는 임유환에 팔 장로가 발끈해서 화를 냈다.“누가 사람들을 부추겨!”“당연히 당신이죠.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노인네.”“너...”노인네라는 욕까지 들은 팔 장로는 화가 나 온몸을 벌벌 떨었다.하지만 임유환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말 한마디 할 때마다 집안, 명운, 입 놀리는 거 말고 당신이 진짜로 서씨 집안을 위해 한 일이 있기는 해요?”“서씨 집안 아가씨가 가문을 위해 혼자 얼마
차가운 목소리가 조용한 로비에 울려 퍼지자 다들 S 시에서 온 놈이 이 정도로 무모할 줄 몰랐는지 표정들이 가지각색이었다.“너 아주 무모한 놈이구나!”임유환이 처음으로 하는 도발도 아니었기에 팔 장로는 화가 나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최고 권세가 장로답게 으스대며 물었다.“너 따위가 감히 나랑 자격을 논해?”“그런 작은 도시에 온 놈이 흑제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상한 약을 먹지 않았더라면 정씨 집안과 싸우는 게 가당키나 했을 것 같아?”“그래놓고 지금 네가 진짜 그럴만한 능력이라도 있다고 착각하는 거야?”“다 늙어서 말은 왜 이렇게 많아, 그래서 싸우겠다는 거예요 말겠다는 거예요?”임유환은 전혀 화가 나지 않는 듯 담담히 팔 장로를 바라보았다.“입만 산 자식!”팔 장로는 코웃음을 치고는 대답했다.“유감이네, 다른 사람은 그렇게 속여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안 되지. 난 알거든, 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그럼 해보자니까요.”임유환이 담담히 대꾸하자 팔 장로가 팔을 걷어붙였다.“그래, 한번 해보자고!”강한 진기가 몸에서 뿜어져 나왔는데 순식간이었지만 그 기운은 무존 후기의 기운이었다.팔 장로가 보여준 실력에 곁에 있던 젊은이들은 다들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팔 장로님이 언제 무존 후기에 오른 거야?”“몰라, 보름 전만 해도 무존 중기였는데...”“우리 서씨 집안에 무존 강자가 하나 더 늘었어!”일취월장한 팔 장로의 실력에 다른 장로들도 웃음을 지었다.“하하, 정말 잘됐네. 팔 장로님의 실력이 또 오를 줄 몰랐는데.”“그러게 말이에요. 이렇게 서씨 집안에 무존 후기의 강자가 하나 더 늘었네요.”서강인과 태 장로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무존의 실력이었고 그중에서 팔 장로와 칠 장로의 실력이 제일 미약했는데 팔 장로가 또 이렇게 돌파를 하니 서씨 집안의 전체적인 전투력이 향상한 것이었다.다른 사람들의 감탄을 들은 팔 장로의 주름진 눈가에는 감출 수 없는 우쭐거림이 가득했다.전에 S 시에서 돌아온
“너 방금 뭐라고 했어!”이렇게 오래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 무시당하는 게 처음이었던 팔 장로는 열이 올라 빨개진 얼굴과 확 작아진 동공을 한 채 임유환을 향해 소리쳤다.“가주님이 널 지켜주신다고 내가 정말 너한테 손 못 댈 줄 알아?”임유환이 서인아와 서강인을 믿고 저를 도발한다고 생각한 팔 장로는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하하, 그럼 어디 해보시든지.”“마침 나도 나한테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궁금했거든요.”“젠장!”담담히 말하며 웃는 임유환에 팔 장로는 분노가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늙어버린 몸뚱이를 세차게 떨어댔다.그 순간 팔 장로 몸 안에 있던 진기가 뿜어져 나와 팔 장로를 에워싸고는 거세게 일렁거리며 보이지 않는 진기 파도를 만들어냈다.“그 당당함이 언제까지 가나 보자고 한번, 나중에 무릎 꿇고 빌지나 마!”분노가 극에 달한 팔 장로의 목소리는 바닥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낮게 깔려있었다.“팔 장로, 유환이는 우리 집안의 손님이에요,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서강인의 호통에 팔 장로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분노가 가득 담긴 눈으로 말했다.“가주님, 이건 저놈이 먼저 요구한 겁니다. 제가 여기서 물러나면 서씨 집안의 체면이 구겨지는 일 아니겠습니까?”“팔 장로!”“아버지, 저렇게 망신을 당하고 싶다는데 그냥 하라고 하세요.”그때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을 한 서인아가 서강인을 말리며 말했다.그에 결심한 건지 팔 장로는 수염까지 흩날리며 분노 가득한 음침한 눈으로 임유환을 노려보더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발을 굴렀다.그러자 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임유환 앞에 나타난 팔 장로는 진기를 모아 주먹을 쥔 채 임유환을 향해 휘둘렀다.주위의 공기마저 짓눌렸다 터지는 듯한 소리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너무 빨라!”“저렇게 무시무시한 주먹은 처음 봐!”무존 후기에 오른 강자의 대련을 본 적이 없는 젊은이들은 팔 장로의 빠른 속도에 감탄을 마지않으며 환호했다.“이제
담담한 목소리가 오래도록 로비에 울려 퍼졌다.단 한 번의 손짓으로 팔 장로를 날려버린 임유환에 다들 깜짝 놀란 탓에 임유환 말에 대꾸하려고 나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이 정도 실력이라면 무제 경지에 오른 사람임이 분명했다.태 장로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유환이라는 사람을 파악하려는 듯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팔 장로가... 한 방에 쓰러진 거야?”그들의 대결을 관전하고 있던 젊은이들도 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왔다.주변이 조용한 탓에 사람들이 침을 넘기는 소리도 크게 들려왔다. 하지만 잔뜩 놀란 그들과는 달리 서인아는 결과가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다.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을 하고 담담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으로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임유환을 보자 서강인도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켁켁...”그때 팔 장로가 기침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값비싼 옷에 먼지가 잔뜩 묻어있었고 왼쪽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까지 선명히 찍혀있어 지금 팔 장로의 처지가 한층 더 초라해 보였다.자리에 있던 젊은이들이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팔 장로도 지금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제 꼴을 의식했는지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한 얼굴을 일그러뜨려 분노를 표출해냈다.임유환은 여전히 팔 장로를 집어삼키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팔 장로님, 지금은 제게 자격이 생겼냐고 물었습니다.”제 분노는 무시한 채 담담히 웃는 임유환에 팔 장로는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떨어댔다.“너 이 자식, 또 어디서 값진 보물을 먹고 실력을 올린 거지!”서씨 집안의 장로인 제가 이렇게 처참하게 임유환 같은 애송이한테 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팔 장로는 임유환을 노려보며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인정을 못하시나 봐요?”“너 같은 하층 인간들은 그딴 수법을 써야지만 이기는 거야!”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는 임유환에 참패 뒤에 몰려오는 모욕감을 느낀 팔 장로는 빨개진 눈을 하고 소리쳤다.“하층 인간이요?”“팔 장로, 이제 그 입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