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뺨을 내리치는 소리는 적막만이 가득 차있던 현장에 크게 울렸다. 모든 사람들은 그 소리에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죽였고 정말 임유환이 정우빈의 뺨을 때릴 줄은 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임유환의 힘은 어찌나 센지 뺨을 맞은 정우빈은 멀리 날아가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초라한 자세로 쓰러지고 말았다.정우빈이 쓰러지는 소리를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고 소백우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는 이내 코끝이 찡해나며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저 바보! 정말 나 때문에 정씨 가문의 원수도 남기도 한 거야?] “저 인간이 정말 정우빈의 뺨을 쳤어.” 조명주의 눈빛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만약 내가 저런 일을 당했다면 저 사람은 지금이랑 똑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이런 저런 잡생각이 들었다. 현장은 고요했고 임유환은 쓰러진 정우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정우빈 또한 아주 힘들게 몸을 서서히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빨개진 얼굴을 어루만지며 입에서 피 섞인 가래를 연신 뱉어댔다. “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임유환을 노려보더니 외쳤다. “이 개미 같은 놈, 감히 나를 때려?” 정우빈은 분노가 치솟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임유환은 아주 덤덤해 보였다. “때리면 또 어떻습니까?” “너...” 정우빈은 표정이 확 변하더니 눈빛마저 살벌해지며 임유환에게 또 다시 소리를 질러댔다. “그저 비열한 수법으로 실력을 향상하는 쓰레기 같은 놈! 네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냐?” “이 몸은 절대로 진 적이 없다! 이것 하나만 알려주마.” “이 상황에서도 입은 참 잘 놀리시네요.” 정우빈은 동공이 흔들렸고 임유환은 말을 마친 뒤, 바로 그의 뺨을 또 내리쳤다. 이번엔 처음 때렸을 때보다 더 강력한 힘이었고 정우빈은 저항 할 새도 없이 멀리 떨어져 나갔다. 그의 허리는 강한 힘으로 인해 무대 쪽에 있던 계단에 세게 부
임유환의 대답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입을 더욱 꾹 닫게 만들었다. 마치 멈추기 버튼을 누른 것 마냥 사람들은 작은 움직임조차 편히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의 숨소리가 고요한 현장에 울려 펴졌다. 모든 사람들은 들리는 소리를 따라 놀란 토끼 눈으로 정우빈을 쳐다보았다. 감히 정씨 가문의 주인 앞에서 저런 말을 당당히 내뱉다니! 정서진의 눈빛은 임유환이 한 무례한 말 때문에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좋아. 정말 대단하군!” “정말이지 미친놈이구나.” 정서진은 화가 너무 나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의 말은 고요한 현장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기에 사람들에게 거대한 압박감이 느껴지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심장이 빠르게 뛰어댔고 조명주 또한 마음이 급해졌다. 전에 임유환이 놀랄 만큼 강한 실력을 보여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도마 위에 놓인 생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필경 그가 마주할 사람은 전체 정씨 가문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연경에서 절대적인 통치력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기에 임유환은 상대가 안 될 것 같았다. 정서진이 정씨 가문의 장악력을 손에 쥐게 된 데에는 그의 실력이 뒷받침 해주고 있었고 무존 중기 급인 그의 실력은 정우빈과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었다. “허허, 정 씨 주인님? 그 기세와는 달리 방금 정우빈 씨는 반칙까지 해가면서 싸우시던데, 제가 좀 미친 짓을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임유환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만 보여졌다. [감히 정서진을 화나게 하다니! 저런 대담한 사람을 보았나!] “하하, 정말 입만 살아서 움직이는 아이구나.” 정서진은 크게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여전히 살의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나 정서진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는데 네가 처음이구나.” “오늘 내가 만약 네 스스로 여기서 걸어 나가게 한다면 우리 정 씨 가문이 뭐가 되겠냐?” “자존심이요?” “제가 만약 정말 간다고 하면 정 씨 가문 고작 하나만 믿고
“저 분은 바로 흑제 어르신?” 대중들은 그의 등장에 다 놀란 듯 동공마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앞에 있는 존엄 있지만 익숙한 얼굴에 숨을 죽였고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사람들은 임유환이 도움을 청한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부자인 흑제일 줄은 예상도 못했다. [저러니까 정서진을 무서워하지도 않았구나.] [이렇게 큰 패를 숨기고 있었다니!] “흑제?” 조명주 또한 흑제의 등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에는 흑제가 임유환을 도와주는 것이 소백우 때문이나 임유환이 s시의 대표 인물이라서 그런 줄 알았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흑제가 임유환을 도와주는 데에는 소백우랑 아무런 관계가 없어보였다. [이건 완전 임유환을 위해서 나서는 거잖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을 숨기고 있는 거지?] [대체 무슨 신분인 거야?] 원래 임유환이 말한 국가 특수요원 신분은 오늘 두 눈으로 본 바에 의하면 근본 비길 수가 없는 모양이지 않은가? 어느 특수요원이 무제의 실력을 소유할 수 있는지, 어떤 특수요원을 위해 세계적인 부자가 직접 나서는지 조명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놀라고 있을 때, 정서진의 동공도 급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임유환이 흑제의 도움을 요청할 줄은 몰랐다. [저래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거구만.] 하지만 여기는 연경이었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은 군권이 장악하고 있었고 정씨 가문의 손아귀에 놓아져 있었다. 그저 부자일 뿐인 흑제가 돈이 많다고 해서 연경에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연경에 있는 권력과 군인, 그리고 정씨 가문을 절대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정서진은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한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임유환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게 바로 너의 마지막 패였던 것이냐?” “고작 세계적인 부자 한명 데리고 왔다고 우리 정 씨 가문에서 너를 못 건드릴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럼 어디 한번 건드려 보십시오.” 임유환은 정서진의 말에 담담한 말투
흑제 어르신의 단호한 목소리는 현장에 크게 울려 퍼졌다. 모든 사람들의 심장은 하나 같이 빠르게 뛰었다. 대중들은 흑제 어르신이 저 사람을 위해 정씨 가문을 건드리는 결정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서진의 안색은 아까보다 더 굳어져있었다. 그는 흑제 어르신을 노려보며 한 자 한자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흑제 어르신? 저 놈을 위해 저희 정 씨 가문을 정말 건드리려는 것입니까? 잘 생각하시고 결정을 하시는게 좋을 텐데요. 어떤 후과가 초래될지 모르니까.” “후과요? 정 씨 가문은 그저 내 눈에 우물 속의 개구리 일뿐입니다.” 흑제 어르신은 차가운 미소만 지으며 정서진에게 대답을 해줬다. 그의 대답에 정서진은 분노가 치솟아 입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후.” 정서진은 깊은 숨을 내뱉더니 눈빛이 철저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우물 속 개구리라니!” “보아하니 저희 가문에서 오랫동안 너무 조용히 지냈나 봅니다. 이렇게 개나 소나 저희를 얕잡아 보는걸 보니.” “하나는 임 씨 가문의 버려진 아들, 또 하나는 그저 부자 일 뿐인 사람이 무슨 실력으로 이러는 겁니까?” “우리 가문에서 연경을 손에 꽉 쥐고 있기까지 단지 실력 하나만 있었을 것 같습니까?” “그럼 지금부터 보여드리지요. 저희 정 씨 가문의 진짜 패를.” “이제 두 사람 다 후회할 기회도, 도망칠 시간도 없을 겁니다.” 정서진은 험악해진 얼굴로 말을 했고 손을 슥 움직이자 크고 웅장한 번개와도 같은 소리가 현장에 울렸다. “여봐라! 내 명령에 다들 따르거라.” “육군전사를 총 동원해 싸울 것이니 준비 시키도록!” “네! 주인님.” 정서진의 말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쉬던 숨을 꾹 참게 되었다. 정씨 가문의 주인이 연경 작전지역에서부터 육군전사를 동원해 두 사람을 짓밟으려 하다니! [이제는 정말 큰 일이 벌어지겠구나! 정서진이 군들까지 동원하니.] “육군전사!” 무대 위에 있던 소백우는 이 말을 듣고 표정이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큰 일
“수빈아, 나는...” 임준호는 주먹을 꼭 쥐고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채수빈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 서있던 여성의 이름은 채수빈, 임준호의 현 아내되는 사람이다. “준호 오빠, 저도 오빠 마음 알아요.” 채수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임준호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흥분한 그를 말렸다. “알겠어.” 임준호는 채수빈의 만류에 하는 수 없이 이만 꽉 깨물 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임준호는 한 가문의 주인이나 돼서 가만히 구경만 하는 것이 못내 탐탁치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이 크나큰 위험에 처해있는데 아버지가 돼서 그저 바라만 보게 된 상황이지 않은가? 마치 15년 전 그날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때, 현장에는 조명주의 큰 외침 소리가 울렸다. “정 씨 아버님, 작전 지역에서 군인까지 동원하면서 임유환같은 백성을 상대하는 것이 조금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지요?” 그녀는 더는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목소리를 낸 조명주에게 향했고 한 번에 이분은 p시 작전 지역에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우빈과 마찬가지로 작전 지역에서 에이스라고 불리던 조명주는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p시의 총 사령관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몸이 허약해진 탓에 조명주의 결혼식에는 참여를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조명주가 임유환과 무슨 사이기에 이런 상황에서 그의 편을 들어주는지, 정씨 가문이 두렵지도 않은지가 궁금했다. “조명주?” 임유환의 동공이 조명주를 보고는 급격히 떨리고 있었다. 그는 조명주가 이럴 때 자신을 도와 말을 해주리 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다. “조 씨 가문의 딸 아니신가?” 정서진은 조명주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 놈이랑은 무슨 사이지?” “친구예요.” 조명주는 정서진의 말에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펑!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장에서는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 조명주가 저 놈이랑 친구 사이라니! 사람들은
정적에 휩싸인 장내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무대 위의 총사령관에게로 향해 있었다.하지만 총사령관은 하얗게 센 눈썹을 꿈틀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고 또 나서서 막지도 않았다.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은 정서진의 행동에 대한 무언의 긍정이라 받아들이고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정서진 역시 총사령관이 지금 연경 작전지역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는 정씨 집안을 도울 거라 생각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정서진은 득의양양해서 하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총사령관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러분도 보았겠죠.”“누가 또 감히 나서서 저놈을 두둔한다면 우리 정씨 집안, 그리고 이 정서진과 척을 질 각오는 하셔야 할 겁니다.높진 않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결혼식장 안에 울려 퍼졌다.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고 다들 임유환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그리고 총사령관이 정서진의 손을 들어줄 줄 몰랐던 조명주는 마음이 무거워졌다.여러 가문의 가장들은 다들 한숨을 내쉬며 오랜만에 나온 인재의 죽음에 안타까워했다.“이제 죽을 준비는 좀 됐나?”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다시금 정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죽어? 누가 죽을진 아직 모르지 않나?”“제 주제도 모르는 놈이!”담담히 저를 쳐다만 보는 임유환에 정서진은 분노 가득한 눈으로 소리쳤다.“그래도 죽기 전에 네가 어떤 놈인지는 좀 봐야겠다. 네 뼈도 입처럼 단단한지 확인하고 죽여도 늦진 않으니까.”말을 마친 정서진은 이마에 힘을 주더니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기운을 뿜어냈다.아주 잠깐이지만 그 힘은 무제 중기에는 족히 달하는 힘이었다.그 놀라운 기운에 사람들은 정서진이 친히 나서려는가 보다 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를 주시했다.“무제 중기?”마찬가지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임준호는 깜짝 놀라 낯빛이 파랗게 질리며 말했다.“다 늙어서 젊은이 상대로 힘을 쓰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그리고 다른 여섯 가문의 가장들도 명문가의 가주인 정서진이 직접
조명주는 제가 정서진의 결심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는 생각에 낯빛이 어두워졌다.“그러니 명주 너는 얼른 비켜. 잘못해서 널 다치게 하면 안 되잖니.”다시 입을 연 정서진의 뜻은 명확했다. 얼핏 보면 조심하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지막 경고였다.서인아도 정서진의 살기를 느꼈기에 차가운 손을 꽉 말아쥐며 제 아버지를 향해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지금 이 상황에서 정서진 앞에 당당히 나설만한 사람은 오직 서인아의 아버지 서강인뿐이었다.하지만 서강인은 제 딸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정씨 집안이 제 뜻을 이토록 강력하게 피력했는데 이 상황에서 나선다면 정씨 집안과 적이 되겠다는 뜻이기에 아무리 서강인이라도 무모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지금은 그냥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었다.임유환은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천재도 갈고 닦을 시간이 필요한 건데 정서진은 그 시간을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서인아는 도와주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를 보며 점점 더 조급해나 주먹만 꼭 쥐고 있었다.그때 정서진이 한 걸음 한 걸음 임유환에게로 다가갔다.강력한 기운이 그 발걸음에서 새어 나와 다들 숨을 죽인 채 정서진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이게 바로 무제 중기인가 싶은 아우라는 아까의 정우빈과는 전혀 비교도 안 되는 기운이었다.그에 눈빛이 흔들리던 조명주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다급히 뒤돌아서서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유환 씨, 정서진이 움직이기 전에 빨리 흑제와 함께 여기서 나가요. 내가 어떻게든 시간 끌어볼게요.”“조 중령님...”임유환은 저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려 하는 조명주에 말을 잇지 못했다.“뭐해요 빨리 안 가고!”조명주는 눈까지 빨개진 채 다급하게 외쳤다.임유환이 여기 이대로 있다면 정서진 손에 죽을 게 뻔하지만 조명주는 달랐다.조명주 본인이 작전지역 중령이기도 하고 또 할아버지가 P 시 사령관이시니 정서진이 정말로 조명주를 다치게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조명주도 자신이 정서진을 오랫동안 잡아둘 순
“인아야, 지금 뭐 하는 짓이야?”“아저씨, 이 사람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굳어진 얼굴로 묻는 정서진을 향해 서인아는 사정했다.“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얼른 비켜!”정서진의 호통에 서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서인아는 그 분노를 느꼈지마는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인아야, 네가 우리 집안 며느리가 될뻔했던 걸 봐서 한번은 눈감아줄 테니 빨리 비켜. 계속 막고 있으면 너한테도 손을 댈 수밖에 없어.”정서진은 굳은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아저씨, 저는...”“비켜!”얼굴이 빨개지도록 화를 내는 정서진을 보면서도 서인아는 물러서질 않았다.“난 기회를 줬어. 안 비킨 건 너니까 나 원망하지마.”정서진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서인아를 보며 살기를 드러냈다.제 아들이 맞은 일로 이미 정씨 집안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예비 며느리까지 나서서 저런 근본 없는 놈을 두둔하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정서진은 기운을 모으며 장풍을 만들어 서인아부터 처리하려 했다.“인아야, 얼른 나와! 거기 있지 말고!”정서진의 살기를 느낀 서강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지만 서인아는 고집스러운 눈을 하고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7년 전, 집안 어르신들의 핍박에 못 이겨 임유환과 헤어지고 7년 후의 오늘도 집안의 미래를 위해 정우빈과 결혼하려 했었던 서인아는 이제는 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임유환이 서인아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듯 서인아도 그러했다.“아버지, 이번만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해주세요.”서인아는 낮게 혼잣말을 하며 임유환을 막아선 채 정서진을 바라보았다.서인아는 자신이 목숨을 내걸어야만 아버지가 움직일 걸 알고 있었기에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앞에서도 꼼짝하지 않았다.“당장 이리 안 와?!”다급한 서강인의 부름에도 움직이지 않는 서인아에 정서진은 이글거리는 눈을 한 채 말했다.“네가 그렇게 저놈을 지켜야겠다면 둘이 같이 죽는 것도 괜찮겠네.”말을 마친 정서진은 서인아의 얼굴을 향해 장풍을 쏘았다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