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는 지시를 받고 가장 위층으로 돌아갔다.하지만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것은 회사의 주주와 고위층이 그녀를 비난하지 않고 이해해 줬다는 것이었다. “심 비서, 그 이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M국에서 가장 유명한 천재 의사라는 겁니까?”“와, 임하나 씨와 이 선생님이 연인 사이라고요? 사실이라면 정말 잘된 일이네요.”그들이 말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YS그룹의 대표님이 이 선생님과 친한 친구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선생님을 통해서 YS그룹의 대표님과 인연을 이어 나갈 수 있다면 걱정이 없을 것 같습니다.”“맞습니다, 맞아요. 그렇게 된다면 하씨 가문의 사람이 열 명이 있어도 두려울 게 없을 거예요!”“...”소희가 흥분한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렇게 번거로울 필요 없어요.’‘여러분의 사장님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바로 YS그룹의 대표님이니까요.’ ...하나와 상언은 차를 타고 귀가했는데, 그곳은 당연히 하나의 자택이었다.두 사람은 귀가하는 길에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고, 상언은 이미 해야 할 말을 다 했기 때문이었다. “곧 하나 씨의 어머님을 만나게 되겠네요.”차가 곧 멈추려고 할 때, 상언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하나에게 말했다. “정식적으로 어머님을 만나는 자리는 아니지만요...” 하나는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신 게 분명해.’ 그녀가 최명희를 떠올렸다. ‘어제 아빠의 간통 현장을 잡으러 가자는 엄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오늘 돌아가면 어떤 소란을 피우실지 몰라.’ 하나는 갑자기 상언을 집으로 데려가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방향을 바꾸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다 왔어요.”상언이 하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을 차리고 상언을 바라본 하나는 발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자격지심을 느꼈다. ‘M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 선생님의 다른 가족분들은 만나 뵙지 못했지만, 배미희 여사님이랑 이서가 같이 지내는 모습만 봐도 이씨 가
상언의 진지한 말투를 들은 최명희는 정신이 멍해지는 듯했다. “하나 씨가 결혼을 매우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아니요, 우리 하나는...” 최명희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하나 씨에게 왜 아직도 남자 친구가 없는 건지 생각해 본 적은 있으십니까?” 최명희가 말했다.“아무래도 하나는 노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남자 친구도 여러 번 있었는데, 자주 바뀌기도 했고요...”상언의 시선을 느낀 최명희가 믿기지 않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설마... 하나가 남자 친구를 자주 바꾸는 이유가 결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예요?”“어머님,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하나 씨는 어머님과 아버님의 관계를 보면서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된 겁니다. 그래서 여태까지의 연애도 하루, 혹은 이틀을 넘기지 못했던 거고요. 아마 3일이 넘는 연애는 긴 연애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최명희가 입술을 움찔거렸다.“전혀... 전혀 몰랐어요. 하나 아버지의 바람이 하나에게 그런 상처가 되었을 줄은...”“네... 어머님도 부모가 처음이었을 테니까요.”상언이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하지만 정말 하나 씨가 이렇게 된 게 아버님의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상언의 두 눈에서 적의를 느낀 최명희가 경계하며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아버님의 바람이 옳은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남자가 끓어오르는 욕구조차 통제할 수 없다면 물리적 거세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어머니로서 딸을 데리고 남편의 간통 현장을 잡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본 남편이 깨달음을 얻기를 바랐든,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든 간에 그런 방식은 바람직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순간, 최명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했다.그녀가 잠시 후에야 괴로워하며 입을 열었다.“우리의 집안일이에요. 그쪽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요.” “하나 씨가 제
수화기 너머에서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상언 오빠, H국에 도착하신 거예요? 하나는 만나셨어요?]“이서야, 나야.”하나의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만 리 밖의 M국으로 전해지자, 이서는 감격에 겨워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었다.[오빠랑 같이 있는 거야? 하나야, 내 말을 좀 들어봐. H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상언 오빠는...] 하나가 가볍게 웃으면서 이서의 말을 끊었다.“이서야, 나도 다 알아.” [그럼 오빠랑 화해한 거야?]이서가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으로 눈앞의 지환을 바라보았다. 하나가 옆에 앉은 상언을 바라보았다.‘이게... 화해인가?’ 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이전처럼 화해라는 말을 배척하지 않았다.[너무 잘됐다.] 이서는 하나가 아직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녀의 대답을 들은 듯했다. [하나야...] 이서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우리가 했던 내기, 아직 잊지 않았지?]하나가 웃으며 말했다.“그럼, 당연하지.” 이서가 또 코를 훌쩍였다.[그래, 이제 방해하지 않을게, 상언 오빠랑 좋은 시간 보내. 대회가 끝나는 대로 너한테 어떤 게 좋을지 생각해 볼게.] 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꽤 감개무량한 듯했다.“쉽지 않네요.” 이서의 시선이 옆에 있던 지환에게 향했다. 잠시 후, 시선을 거둔 이서가 일부러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단편 소설 대회 심사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들었어요. 스웨이 작가님이 그러시던데, 다음 주면 결과가 나올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혹시 그날 저랑 같이 가실래요?” 지환이 물었다.“무슨 요일이야?” “수요일이에요.”지환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날 바쁘세요?”이서가 물었다.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참석할게.” “괜찮아요, 시간 없으면 안 오셔도 돼요.” 이서가 진심을 숨긴 채 말했다.“꼭 상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는데요, 뭐.”지환이 이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내 번역 실력을 못 믿는 거야, 아니면 네 글쓰기 실력을 못 믿는 거야?” 고개를 살짝
하이먼 스웨이의 별채, 서재 안.DNA 검사 결과지를 손에 든 하이먼 스웨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결과는 이미 나온 상황이었다. ‘가은이가 정말 내 딸이 아니라고?’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던 하이먼 스웨이였으나, 부정할 수 없는 DNA 검사 결과 앞에 그녀의 심리적 방어선은 철저히 무너지는 듯했다. ‘가은이가 내 딸이 아니라니... 그럼 내 딸은 어디 있다는 거야?’ 그녀는 왜 애초에 DNA 검사 결과가 틀렸던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이먼 스웨이가 혼란에 빠져 있던 찰나, 문이 갑자기 열렸다. “엄마.”가은이 득의양양하게 들어왔다.“아주머니 말씀으로는 요 며칠 동안 외출도 하지 않으시고 방에만 계신다고 하시던데, 단편 소설 대회 원고를 심사하느라 바쁘신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흥분된 감정에 젖어 하이먼 스웨이의 이상한 낌새는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엄마, 우승자가 누군지 저한테만 살짝 알려주시면 안 돼요?” ‘그 미스터리한 여자의 말에 따르면, 우승자는 틀림없이 내가 될 거라고 했어.’ 그러나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던 가은은 하이먼 스웨이를 찾아가 결과를 확인하려 한 것이었다. 하이먼 스웨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는데, 눈앞 소녀의 웃음은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투표만 담당하고, 개표는 다른 스태프들이 담당하는 거라서 우승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구나.”하이먼 스웨이가 약간은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네.”가은은 약간 실망한 듯했다.“그럼 이만 나가볼게요.” “잠깐...”하이먼 스웨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가은을 불렀다.“가은아, 요즘도 심씨 가문이랑 연락하니?”안색이 약간 변한 가은이 곧 보육원 일을 떠올렸다. “아니요, 안 해요.” “정말?”하이먼 스웨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섰다.“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도 심씨 가문 사람들이 너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예전에는 가은이가 내 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가은이를 좋게 보려 했지만...’‘이제
지환이 하이먼 스웨이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은에게 DNA 검사 결과지를 보여줄 겨를이 없었던 하이먼 스웨이가 우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수화기 너머의 지환이 한 말을 들은 하이먼 스웨이의 마음은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가 무릎을 꿇은 가은을 한 번 보았다.“확실해?” [네, 확실한 증거도 있습니다. 복구된 카페 CCTV 영상을 통해서 심가은이 이서를 다치게 한 변태남과 접촉했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사진을 그 변태남에게 보여주었더니, 자신에게 이서를 해치라고 사주한 사람이 심가은이 맞다고 인정하더군요.]하이먼 스웨이는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며 깊은숨을 들이마셨다.“그럼 이제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 잠시 침묵하던 지환이 입을 열었다.[장모님의 따님이니... 우선 장모님께 맡기겠습니다.] ‘하 서방이 이서의 체면을 생각해서 나한테 기회를 주려는 거야.’ ‘그리고...’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직접 움직이겠다는 뜻이지.’ “엄마...”가은의 울음소리가 하이먼 스웨이를 현실로 이끌어 오는 듯했다. 하이먼 스웨이는 눈앞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는 가은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듯했다. 그녀의 마음은 그야말로 차갑게 식어버린 것이었다. ‘가은이가 카페에서 그 변태남을 만났다고?’ ‘그날... 가은이는 그 카페에서 나랑 커피를 마시기도 했었잖아.’‘어쩐지... 그날 이후로 가은이가 변한 것 같더라니...’ 그렇다. 심가은은 확실히 변했다. 다만 이전보다 더욱 악랄해졌을 뿐.깊은 한숨을 내쉬며 모든 감정을 배출한 하이먼 스웨이가 고개를 숙인 채 가은을 향해 또박또박 물었다.“그 변태남한테 이서를 해치라고 사주한 사람이 너였니?” 안색이 순식간에 변한 가은이 하이먼 스웨이의 공격적인 눈빛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야?”하이먼
“안 돼요, 엄마, 곧 대회의 결과가 나올 거라고요. 제가 1등이라는 결과만 발표되면 저는 작가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작가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제발... 제발 제 밝은 미래를 망치지 말아주세요!”이 말을 뱉은 심가은은 멍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들은 하이먼 스웨이 역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회 결과는 아직 발표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네가 1등이라는 걸 확신하는 거야?”‘심사위원인 나조차도 결과를 모르는데, 얘가 어떻게 결과를 알 수 있었던 걸까?’가은은 그제야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목을 움츠린 채 하이먼 스웨이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당장 말하지 못해?! 내가 주최측에 말해서 대회를 중단시키고 조사에 착수해야 네 속이 시원하겠니?” “안 돼요, 그건 안 돼요!”당황한 가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원했다.“엄마, 제발 모르는 척 넘어가 주시면 안 돼요? 대회가 끝나면 다 설명해 드릴게요, 네?” “절대 안 돼!”하이먼 스웨이가 핸드폰을 들고 주최측의 전화번호를 눌렀다.“무슨 일이 있어도 주최측에 이 일을 엄격히 조사하라고 해야겠어.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네가 1등이라는 걸 알고 있다니...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잖니?” 하이먼 스웨이가 정말 주최측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자, 당황한 심가은이 몸을 일으켜 그녀의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 하이먼 스웨이는 당연히 핸드폰을 사수하려 애썼다. “심가은!”“절대, 절대 안 된다고요!” ‘그 미스터리한 여자가 그랬잖아, 내가 대회에서 1등을 하기만 하면, 세계 최고의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되면... 나도 엄마와 같은 세계적인 극작가가 될 수 있을 거야!’‘모든 사람이 다 아는 극작가가 되면, 아무도 내가 엄마의 딸이 아니라는 말은 함부로 지껄이지 못할 거라고!’두 사람이 뒤엉켜 몸싸움하기 시작했다.핸드폰을 쉽게 빼앗을 수 없었던 가은의 눈시울이 점차 붉어졌는데, 그녀의 시선
‘이 일을 절대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돼.’ ‘내일이 결과 발표 날이잖아.’ ‘만약 내가 엄마를 죽였다는 게 밝혀진다면... 밝을 줄로만 알았던 내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거야.’ ‘그리고 나는 문학 천재에서... 살인자가 되어 버리겠지!’ ‘절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 이것은 결코 가은이 원하는 인생이 아니었다. ‘나는 기필코 빛나는 사람이 될 거야!’ ‘그래야지만 지엽 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살인자는... 지엽 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없어!’ 벌벌 떨던 심가은이 바닥에 쓰러진 하이먼 스웨이를 한 번 보았는데, 대담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스쳤다. 어쨌든 그녀는 한 가지 일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내일의 결과 발표가 예정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 ‘이제 어쩌지...?’몸을 일으킨 가은이 대담하게 하이먼 스웨이를 욕실로 끌고 들어가 욕조에 담갔고, 서재를 원래대로 정리하고서야 자리를 떠났다. 계단에 도착한 그녀가 평소처럼 아주머니를 불러 당부했다.“아주머니, 엄마가 며칠간 푹 쉬고 싶다고 하셨어요. 전혀 방해받고 싶지 않으시다니까 아주머니도 며칠간 푹 쉬시면 될 것 같아요.” 하이먼 스웨이는 휴식을 취할 때,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아주머니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네.”“하지만 제가 휴가를 보내는 동안 아가씨의 식사는 어쩌죠?” “아, 저는 며칠 동안 밖에 나가서 먹으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앞치마를 풀던 아주머니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들어 가은을 바라보았다. “잠깐...”“사모님께서 내일 어떤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휴식을 취하신다는 걸까요?” 순간, 가은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그녀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2층에서 내려왔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모님께서 일정을 잊어버리신 건 아닐까요? 아무래도 제가 올라가서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요.”아주머
“아!”한밤중에 이서가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지르자, 옆방의 배미희가 급히 옷을 입고 그녀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이서야, 왜 그래?”이서가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을 본 배미희가 그녀의 곁에 앉았고,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악몽이라도 꾼 거야?” 이서가 얼어붙은 손으로 배미희를 붙잡았다. 그녀는 배미희의 체온을 느끼고서야 숨을 내쉬며 그녀의 품에 뛰어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니.”배미희가 이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얼른 다시 자려무나.” 이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네.”그녀는 다시 다소곳하게 누웠다. 배미희는 눈을 감은 이서가 안정된 호흡을 되찾는 것을 보고서야 몸을 일으켜 떠나려고 했다.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이서가 말했다.“엄마, 내일 대회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 스웨이 작가님도 오실까요?” 배미희가 말했다.“물론이지, 이번 대회가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건 너랑 스웨이 여사의 호소력 덕분이었잖니. 내일은 대회의 마지막 날이자 가장 중요한 날이니까 스웨이 여사는 반드시 올 거야.” 이서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됐어요. 엄마, 전 괜찮으니까 이만 나가 보셔도 돼요.” “아니야, 네가 잠드는 거 보고 갈게.”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배미희는 침대에 누운 이서가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서야 살금살금 그녀의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는 것을 들은 이서는 다시 눈을 떴는데, 그녀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하이먼 스웨이가 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욕조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귀를 기울이자니,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살려줘... 나 좀 살려줘...”이서는 자신이 왜 이런 악몽을 꾼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정말... 스웨이 작가님께 무슨 사고가 생긴 건 아닐까?’다음 날, 이서는 정신없이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를 마주한 배미희가 물었다.“대회 결과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