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한밤중에 이서가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지르자, 옆방의 배미희가 급히 옷을 입고 그녀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이서야, 왜 그래?”이서가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을 본 배미희가 그녀의 곁에 앉았고,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악몽이라도 꾼 거야?” 이서가 얼어붙은 손으로 배미희를 붙잡았다. 그녀는 배미희의 체온을 느끼고서야 숨을 내쉬며 그녀의 품에 뛰어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니.”배미희가 이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얼른 다시 자려무나.” 이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네.”그녀는 다시 다소곳하게 누웠다. 배미희는 눈을 감은 이서가 안정된 호흡을 되찾는 것을 보고서야 몸을 일으켜 떠나려고 했다.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이서가 말했다.“엄마, 내일 대회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 스웨이 작가님도 오실까요?” 배미희가 말했다.“물론이지, 이번 대회가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건 너랑 스웨이 여사의 호소력 덕분이었잖니. 내일은 대회의 마지막 날이자 가장 중요한 날이니까 스웨이 여사는 반드시 올 거야.” 이서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됐어요. 엄마, 전 괜찮으니까 이만 나가 보셔도 돼요.” “아니야, 네가 잠드는 거 보고 갈게.”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배미희는 침대에 누운 이서가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서야 살금살금 그녀의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는 것을 들은 이서는 다시 눈을 떴는데, 그녀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하이먼 스웨이가 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욕조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귀를 기울이자니,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살려줘... 나 좀 살려줘...”이서는 자신이 왜 이런 악몽을 꾼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정말... 스웨이 작가님께 무슨 사고가 생긴 건 아닐까?’다음 날, 이서는 정신없이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를 마주한 배미희가 물었다.“대회 결과
“하지만... 그 악몽이 너무 생생했어요...”이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엄마, 저를 대신해서 스웨이 작가님께 가봐 주실 수 있으세요?” 이서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본 배미희가 본래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이서야, 조금만 있으면 대회장에서 스웨이 여사를 볼 수 있을 거야.’ “...그래, 내가 한 번 가보마.” 이서는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 듯했다.대회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갈라서려고 했다. 떠나기 전, 배미희가 특별히 당부했다.“이서야, 반드시 기억해. 대회장에서는 반드시 조심해야 해, 알았지? 그리고 너희들도...”그녀가 이서의 뒤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이서를 꼭 지켜야 해! 알아들어?!”“예,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이 한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배미희는 그제야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 그녀가 떠나는 것을 본 이서와 경호원들은 그제야 대회장으로 들어섰다. 비록 이서의 경호원들은 평범한 사람처럼 치장한 상태였으나, 그들이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너무도 강력해서 많은 사람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예리한 시선은 이내 이서에게 옮겨갔다. “저 여자... 본인이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보다 더 대단하다고 으스댔던 여자잖아요!” “어머, 정말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나온 사진이랑 똑같아요!” “쯧쯧쯧, 예쁘게 생기긴 했네요. 하지만 여기는 단편 소설 대회장이지, 미모에 대한 우열을 가리는 대회장이 아니잖아요? 대체 저렇게 많은 경호원은 왜 데려온 건지...” “게다가 저 여자는 H국 사람이잖아요. 외국 사람이 쓴 글은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감히 자신이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보다 더 대단하다고 잘난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사람들의 목소리가 마치 파리 소리처럼 이서의 귓가에 윙윙거리는 듯했으나,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윤이서,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잖아.’ 같은 시각, 대회장 2층에 있던 박예솔은 이서를 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줄곧 이서에게 무시당하던 가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더욱이 하이먼 스웨이가 죽은 것을 확인한 그녀는 무서울 것이 없었기에 거칠고 무례하게 팔꿈치로 이서를 건드렸다. 이서는 하마터면 바닥에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허, 윤이서 씨, 또 만났네? 윤이서 씨도 내가 이 대회에 참석한 걸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경멸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환의 답장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야!”가은이 갑자기 이서의 옷을 잡아당겼다.순간, 이서의 경호원이 즉시 일어서서 가은을 노려보았고,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이 광경은 앞줄에 앉은 참가자 몇 명에게도 목격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은이 이서의 옷을 잡아당기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편견을 가지고 이서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참가자로서 경쟁자에게 막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 세계로 퍼진 이서의 가십 뉴스를 보았기 때문에 이서가 오만하고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이러한 고정관념이 더해지자, 그들은 이서가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긴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분분히 분노하며 일어나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그쪽이 그 유명한 윤이서 씨에요? 실물로 뵙는 건 처음이네요. 저도 기사를 봤는데 윤이서 씨의 칭찬이 정말 자자하더군요. 하지만 재능이 있다고 해서 남을 괴롭혀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쪽이 가졌다는 재능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니까요.”“맞아요, 재능이 있든 없든 타인을 괴롭히면 안 되는 거죠! 당장 사과하세요! 옆에 있는 참가자한테 사과하시라고요!” “사과해요, 얼른!”다른 참가자들도 분통을 터뜨렸다. 한동안 대회장에는 이서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경호원의 직무는 사람을 베거나 죽이는 것이었으나,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던 그는 어찌할 바를
옆에 있던 가은은 운서의 곁에 앉지 못했다.그녀는 이서와 한 자리라는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서의 평온한 얼굴을 본 가은은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참자! 참아야 해!’ ‘결과만 발표되면 윤이서를 호되게 혼내줄 수 있을 거야!’ 시간이 흐른 후, 시상식의 막이 서서히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H선생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이서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무대 사회자가 역대 대회를 소개하는 것을 건성으로 듣던 이서는 그가 심사위원을 소개하는 것을 듣고서야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사회자에게 이름이 호명된 심사위원들이 하나하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사회자가 모든 이름을 호명할 때까지 하이먼 스웨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서뿐만이 아니라 무대 아래의 다른 사람들도 이상함을 감지했고, 너도나도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은요? 이번 대회에 참석하실 거라면서요?” “그러게요,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시상식에 온 건데 말이에요.” “정말 이상하네요, 주인공이라서 마지막에 나오시려는 걸까요?” “아니에요, 모든 심사위원과 지도자가 무대 위에 오른 상태잖아요.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도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됐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으며, 꿈에서 보았던 욕조에 쓰러진 하이먼 스웨이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지는 듯했다.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어 배미희에 전화하려고 했다. 바로 이때, 무대 위의 사회자가 외쳤다.“자, 이번 대회의 수상자를 발표하기에 앞서 대회의 주최자인 크리스 씨를 모시겠습니다!” 크리스라는 남자는 느릿느릿 무대에 올라 수상자를 발표했는데, 이를 본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는 대회 절차에 따라 우수상을 받은 참가자 5명을 먼저 발표했다.이름이 호명된 참가자들은 곧바로 기쁨에 겨워 무대에 올라 상을 받았다. 다음 순서는 1, 2, 3위에 오른 수상자를 발
가은과 예솔이 사랑한 남자는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이들이 이서를 원망하는 이유는 같았다. 그것은 바로 이서가 너무 훌륭하다는 것!가은은 심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좋은 학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특기가 없었다. 그리고 예솔은 디자인 방면의 고수였지만, 디자인에만 국한된 것으로 다른 방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서는 설계, 감독에 그치지 않고 그녀가 여태껏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문학 분야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어떻게 질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하하!”크리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또 한 번 모든 사람의 주의력을 무대로 끌었다.“이제 진정한 우승자, 대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우리의 1등입니다!” 크리스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했다.“단편 소설 대회가 열린 지도 어언 20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올해처럼 이렇게 큰 규모의 대회가 열린 것도, 이렇게 많은 보물이 쏟아져 나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죠.” “아...”“물론 시상자로서 개인적인 감정이 너무 많이 담기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우승자의 작품을 보고 3일간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너무도 훌륭한 작품이어서, 거장인 모슨 선생님의 작품을 보는 것 같더군요.” “만약 이 참가자가 모슨 선생님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면, 저는 이 참가자가 모슨 선생님의 뛰어난 제자 중의 한명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모슨을 알 것이었는데, 그는 현대 단편 문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었다.우승자의 작품에서 그런 모슨의 문필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아주 높은 수준의 찬사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순간, 대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무대 아래의 참가자에게 떨어졌다. “그렇게 대단한 참가자가 있다고요? 대체 누굴까요?” “모슨 선생님의 문필이 엿보이는 작품이라니... 아마 나이가 꽤 많은 참가자이지 않을까요?” “궁금해 죽겠습니다,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자신이 1등이
“저는 심가은이라고 합니다. 글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녀는 이렇게 간단한 소개만으로 또 한 번 무대 아래의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크리스가 물었다.“심가은 씨를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어떤 계기로 문학이라는 길을 걷게 되신 겁니까?” “사실 저는 이전에 문학을 전혀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가은은 시종일관 거짓된 웃음을 유지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면모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찾고, 어머니의 인도하에 문학이라는 길을 걷게 되었죠.”크리스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어머니가 누구시죠? 오늘 대회장에 오셨나요?”“저희 어머니는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입니다.”이 말이 나오자 모든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크리스조차도 표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심, 심가은 씨가 십여 년 동안 실종되었다던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따님이란 말입니까?!”“네, 맞습니다.”가은이 말을 이어 나갔다.“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제가 이 대회에 참가한 줄 모르고 계셨어요.” 즉, 이것은 그녀가 실력만으로 우승을 거며 쥐었다는 뜻이었다. 장내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크리스가 감격에 겨워 횡설수설했다.“그, 그럼... 심가은 씨의 문필이 모슨 선생님을 닮은 건... 모슨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인가요?” “어... 죄송합니다. 저는 이전에 문학을 접해 본 적도 없고, 최근에서야 저희 어머니께서 이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신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해드릴 생각으로 이 대회에 참석한 겁니다. 그래서... 사회자님이 말씀하시는 모슨 선생님이라는 분이 누군지 모릅니다.” 대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환호성은 천장을 뒤집을 지경이었다!“천재예요! 절대적인 천재라고요! 모슨 선생님의 작품을 보지도 않았는데 모슨 선생님의 문필을 쓸 수 있다니... 저분이 천재가 아니면 누가 천재란 말입니까?” “어쨌든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보다 자신이 더 대단하다고 으스대는 그 사람은 아닐 거예요! 하하!” “하하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이서 씨는 자신
회의장의 떠들썩함이 마침내 서서히 잦아들자, 크리스가 곧 입을 열었다.“네, 이렇게 1, 2, 3위를 모두 발표하였습니다. 다음 순서는...”“잠시만요!”갑자기 울려 퍼진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는데, 모두 잇달아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이번 대회는 불공정했다고요!”크리스가 마이크를 든 채 소리가 나는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불공정하다니요? 대체 뭐가 불공정했다는 겁니까? 대회에 제출된 모든 원고는 심사위원분들이 직접 고르신 겁니다!” “그리고 심사위원분들은 어떤 참가자의 원고를 받은 건지 전혀 모르셨고요.”크리스가 말했다. “제 말은 누군가가 대필했다는 겁니다!” 무대 아래가 술렁이기 시작했다.이서는 단번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배미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안정되는 듯했다.“대체 누구시죠? 얼굴도 드러내지 못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참가자가 대필했다고 비난하는 거냐고요!”가은은 이 말을 마치고서야 자신의 감정이 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얼른 또 한마디 덧붙였다.“정식적인 대회의 명성을 그런 허접한 말 한마디로 더럽힐 생각이세요?”크리스도 가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대회에 불공정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직접 얼굴을 드러내고 말씀해 주시겠습니까?”“그러죠.”배미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순간, 조용하던 대회장에 바퀴 마찰음이 메아리쳤다. 사람들은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분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퀴의 마찰음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마침내 휠체어에 앉은 사람을 보고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놀란 사람들은 모두 냉기를 들이마셨다.휠체어에 탄 사람은 하이먼 스웨이였는데, 머리에 붕대를 감은 것으로 보아 크게 다친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가은은 하이먼 스웨이를 보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두 다리를 덜덜 떨던 그녀는 하마터면 땅에 주저앉을
‘그리고 나는 네가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걸 뻔히 알면서도 눈 감아 왔어!’‘개도 키워준 사람에 대한 은혜를 아는 법이거늘...’‘그런데 넌!’하이먼 스웨이가 팔걸이를 꽉 잡았다.이서가 천천히 다가오는 하이먼 스웨이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아.’ 하지만 하이먼 스웨이는 그녀의 곁에 오래 머물지 않고 눈빛만 줄 뿐이었다. “스웨이 작가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놀란 크리스는 여기가 무대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하이먼 스웨이가 크리스의 마이크를 뺏어 들었다.“어제부터 연락받지 않은 걸로도 모자라, 대회까지 늦게 참석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스탠드로 제 머리를 두 번이나 내리쳤고, 기절한 저를 욕조에 방치한 바람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거든요.”비록 그녀의 말투는 나른하고 평온했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끔찍한 장면이 그려지는 듯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도대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길래 겁도 없이 작가님을 다치게 했다는 겁니까? 그 사람은 살인미수범입니다! 혹시... 그 사람의 얼굴은 보셨습니까?”크리스가 모든 사람이 궁금해하는 것을 묻자,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하이먼 스웨이가 심가은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 사람들은 온통 수군거리기 시작했으며, 믿을 수 없다는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궤멸에 이르른 가은은 죽기 살기로 아랫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무대에 털썩 주저앉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서도 믿기지 않다는 듯 가은을 바라보았다. ‘심가은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던 사실이야. 이 여자는 항상 트집 잡는 걸 좋아했으니까.’‘하지만 딱 그 정도의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기 친어머니의 목숨까지 노리는 사람이었을 줄이야!’“스웨이 작가님,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크리스가 다시 한번 모두가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심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
하지만 그 누구도 사다리를 건네주지 않아서, 이서는 계속 지붕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이 순간 누군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이서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서가 발을 닦고 나서 계단으로 나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지환은 거실에서 서류를 펼쳐놓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하지환 씨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하지환 씨를 용서하게 될까?’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서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일하는 중이에요?” 이서가 묻자 지환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응.” 이서는 지환과 한 발짝 떨어진 소파에 앉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어색함도 없었고, 굳이 대화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평온한 순간은 회사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서는 문득 표정을 풀고,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이서는 성지영의 딸이야. 이번에 돌아온 것도 분명 윤씨 그룹을 노리고 돌아온 거겠지.” 지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윤씨 그룹에 입사해서 나한테 약을 먹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고작 그런 방식으로 날 바보로 만들려고 하다니, 어이가 없어요.” 고이서 했던 짓을 떠올리자 이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서의 예상이 맞다면, 고이서가 처음부터 자신이 윤재하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씨 그룹은 과거의 윤씨 그룹이 아니었다. 윤씨 그룹이 MH 그룹과 통합한 후, 이서는 쓸모없는 윤씨 일가들을 모두 몰아내고 필요한 사람들만 남겼다. 설령 윤재하가 자신이 윤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며 이서의 자격을 문제
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 뒤에 있던 이불을 집어 들고 이서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방금 하지환 씨는 나한테 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이불을 덮어주려던 거였어?’ 이서는 닫힌 방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생각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이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지환은 이미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도 지환은 자주 이렇게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요리 실력이 썩 좋지 않았고, 아주 서툴렀다. 하지만 그때의 이서는 눈치가 없어서 지환이 원래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지환이 이서를 위해 요리를 배우고 준비했다는 사실은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지환은 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밥 짓고, 반찬을 만들고, 살림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밤새 이서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또다시 떠올랐지만, 이번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이 다 됐어.” 이서는 자연스럽게 지환의 옆으로 다가가 아침 식사를 식탁으로 옮겼고, 자리에 앉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꼭 오래된 부부 같은 모습이네.’ “왜 그래?”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고, 이서는 하트 모양으로 구운 계란을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