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아래의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하이먼 스웨이와 2층에 있던 배미희 역시 덩달아 놀라서 재빨리 이서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리고 그 순간, 2층에 있던 자격수도 예솔의 명령을 받았다. “사격하세요!”모든 것은 짧은 몇 초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펑!”소란스러웠던 대회장을 삽시간에 조용하게 만든 총성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것만 같았다.사람들이 총알이 어디에서 발사된 것인지 의아해하던 찰나, 또 한 번 펑 하는 총성이 울렸다. 하지만 이번에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총성뿐만이 아니었는데, 이서의 앞에 서 있던 가은이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핏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놀란 심가은은 눈을 크게 떴는데, 온통 원한이 가득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즉,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이서를 미워한 것이었다. 쓰러지는 그녀를 바라보던 이서는 달려온 하이먼 스웨이에게 손이 잡혔다.“이서야, 어서 가자!”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네, 스웨이 작가님, 어서 가요.” 같은 시각, 무대 아래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질렀고, 허겁지겁 사방으로 몸을 숨기기 바빴다. 대회장에서는 도망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공포에 질린 욕설만이 난무했다.그리고 그 순간, 저격수는 다시 한번 이서를 주시했다. 예솔은 첫 번째 총알이 이서를 관통하지 않자 다소 화가 나서 말했다.“이러고도 당신이 저격수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어쩜 이렇게 짧은 거리도 못 맞출 수가 있냐고요!” 하지만 그 남자는 입꼬리를 치켜세우고 피에 젖은 미소를 지었다.“조급해하지 마세요, 이제 고작 한 발이었는걸요. 이번에는 반드시 저 여자를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방금 그 총알이 저 여자를 관통하지 않은 건 내가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야.’‘진정한 사냥은 이제부터란 말이지.’“펑!”두 번째로 발사된 총알은 이서를 향해 정확하고 빠르게 날아갔다. 예솔은 이제야 만족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러나 한순간, 지환은 이서를 엄호하며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왜인지 사라지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예솔의 마음은 텅 비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이서에게 한 모든 것을 지환이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하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정은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 거야.’‘두 세대를 거치면서 20여년 간 이어온 감정이 한 여자 때문에 끊어지는 거라고!’ 예솔은 팔걸이를 죽도록 붙잡았지만, 힘이 풀려버린 다리를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주저앉아 버렸다....이서의 쿵쾅쿵쾅 뛰는 심장은 무대 뒤에 도착하고서야 많이 가라앉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지환의 팔에 난 총상이 보였다.“H선생님, 팔에 상처가... 구급상자가 있는지 찾아볼게요.”이 말을 마친 이서는 몸을 돌려 구급상자를 찾으려 했다. “가지 마.”지환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짙은 피로감을 띠고 있어서 이서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선생님 손의 상처는...”“괜찮아.”지환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옆에 있는 소파를 두드렸다.“앉아봐. 네가 다친 곳은 없는지 한 번 봐야겠어.”잠시 머뭇거리던 이서는 이내 지환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지환의 다정한 시선을 느낀 그녀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도저히 부끄러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이서가 입을 열었다.“저는 다치지 않았어요...”하지만 지환의 뜨거운 시선은 줄곧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린 이서가 총애와 사랑을 뿜어내는 지환의 뜨거운 눈빛을 마주했다. 순간, 그녀가 온몸을 흠칫 흔들었는데, 외면할 수 없는 익숙한 느낌이 또 한 번 마음속에 퍼지는 듯했다. ‘이런 눈빛... 이미 천번이고 백번이고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그녀는 미혹된 듯 자기도 모르게 지환을 향해 다가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부드러운 느낌을 받은 이서는 자신도 모르게 쫀득한 식감의 젤리를 떠올렸
“귀국시킬 거야.”앤서니는 멍해졌다.“그럼 보스는요?”“나도 같이 돌아갈 생각이야.” “왜요?”앤서니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이번 사건으로 하지호와 보스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게 된 셈이야. 하지호는 예전에부터 YS그룹에 손을 뻗어 좌지우지하려 했지만, 앞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할 수는 없을 거란 말이지.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같은 상황에 H국으로 돌아가시겠다는 거지?’지환이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하지호는 내가 떠나자마자 경거망동한 행동을 취하지는 않을 거야. 그럼 나도 곧 H국의 비즈니스와 이쪽의 비즈니스를 통합할 수 있게 되겠지.”“이번에 보니까 내가 H국에서 비즈니스의 판도를 개척하는 동안 하지호도 아주 바삐 움직였더라고. 의외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방면에서 더욱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거야.”“즉, 내가 줄곧 비즈니스의 길을 걷는 동안, 그는 각양각색의 방면에서 손을 써 놓았던 거지...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그의 권세가 YS그룹보다 강해지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그렇게 되면 h국의 자회사가 본사 쪽에 수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될 거고...”“내가 H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한 건, 이서뿐만이 아니라 YS그룹의 미래를 위한 거야.”“그리고 나는 M국에서 자라긴 했지만, 부모님은 모두 H국 사람이시잖아.”“가능하다면 나도 H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지환이 말했다.그가 부하들과 이렇게 많은 대화를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지환을 바라보던 앤서니가 백스테이지를 한 번 쳐다본 후 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보스, 저는 비즈니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단지 보스가 M국에 머무르든, H국에 머무르든, 보스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죠.”지환이 고개를 숙이고 그를 흘겨보았다.“그건 다 이후의 일이잖아.”앤서니가 몸을 일으켰다.“그건 그렇죠.”이때 두 부하가 예솔을 끌고 지환과 앤서니 앞에 다다랐다.“보스! 2층에 있던 방에서 예솔 아가씨를 찾았는데, 저격수는 이
“H선생님, 방금 나누신 대화 다 들었어요. 밖이 그렇게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나가시겠다면 말리지는 않을게요. 대신 한 가지 부탁은 꼭 들어주세요.”“물론이지.”지환이 말했다.그의 말투는 예솔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이렇게 뚜렷한 차이라면 바보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동정이 서린 눈빛으로 예솔을 한 번 보았다. 그들은 모두 지환의 주변 사람들이어서 지환을 향한 예솔을 사랑을 익히 알고 있던 참이었다. “우선 그 상처부터 치료하고 나가셨으면 좋겠어요.”이서가 지환을 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팔에 흐르던 선혈은 이미 응고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서는 제때 처치하지 않으면 감염될 위험이 있다고 우려한 것이었다.지환이 팔의 총상을 한 번 흘겨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래.”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앤서니에게 말했다.“하지호한테 내가 상처부터 처치해야 한다고 전해줘. 처치가 끝나는 대로 내가 직접 박예솔을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갈 거라고도 덧붙여 주고.”“네.”앤서니가 대답했다. 지환은 그가 떠난 후에야 이서가 있는 백스테이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치하려던 의사 역시 그를 따라 들어가려 했으나, 지환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밖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정신이 멍해진 의사는 감히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대 뒤에 있던 이서가 이 문제에 주목하며 물었다.“왜 의사 선생님을 못 들어오게 하는 거예요?” “난 네가 상처를 처치해 줬으면 해.”지환이 이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지호를 만나러 가려던 지환의 마음은 대단히 복잡했다. 그래서 앞으로의 생사의 여부를 알 수 없었던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잘 보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는... 이서와 사랑했던 날들을 되새기고 싶었다. 이 순간만큼은... 이기적이고 싶었다. 다시 그의 뜨거운 눈빛을 마주한 이서는 어쩔 줄 몰랐다. 그녀가 중얼거리며 말했다.“방금, 방금 보니까... 여기 안에 구급상자가 있긴 하더라고요. 안에 알코올 솜도 있고
이서가 숨을 쉴 수 없을 때쯤, 지환이 마침내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이서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마치 잘 익은 감이 가지에 매달린 것처럼 유혹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환이 엄지손가락으로 이서의 입술을 닦았다. 그의 눈빛은 꽁꽁 감긴 실처럼 그녀를 단단히 묶는 듯했다. ‘내가 이런 나날을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여기서 조용히 기다려줘.”몸을 일으킨 지환이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그는 이서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면 떠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이서가 지환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H선생님, 여기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대신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아셨죠?” 그녀는 ‘무사히’라는 세 글자를 유독 강조했다. 지환은 끝내 이서를 돌아볼 수 없었다. 문을 나선 지환의 눈빛이 금세 차가워졌다. “두 사람만 여기 남아서 이서의 안전을 지켜보도록 해. 나머지는 나랑 같이 나가자.”지환이 매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곧 매서운 비바람이 몰아치려는 듯하자, 조직원들의 마음이 무거워졌다.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숙연한 표정을 지었고, 예솔을 언급하는 지환의 눈에서도 지난날의 부드러운 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대회장의 입구에 도착하자, 계단 아래에 수많은 차가 주차된 것이 보였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릴 수 없었지만, 이미 그곳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지환이 모습을 드러내자, 차 안에 있던 지호가 걸음을 내디뎠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한 사람과 낮은 곳에서 올라오는 또 다른 한 사람... 두 사람은 여전히 2, 3미터 떨어진 곳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발걸음을 멈추었다.지호가 고개를 살짝 들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우리... 오늘 정말 바삐 움직이는 것 같네?”그가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그것은 방금 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상처였다. 지호는 지환의 팔을 감싸고 있는 거즈를 보고는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 듯했다. 지환이 옆
“그래.”지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윤이서랑 다른 사람들을 먼저 보내도록 해. 하지만... 지환아, 이건 분명히 하자. 이번이 꼭 마지막 조건이어야 해. 네가 나중에 또 다른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나를 탓하지 말아야 할 거야!”마지막 문장을 말하던 그의 말투는 갑자기 음산하고 공포스러워졌다. 지환은 시종일관 그를 상대하지 않았는데,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직 단 한 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서부터 상언이네 집으로 돌려보내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씨 가문만이 가장 안전한 곳일 테니까.’ “앤서니!”“네!”“여기는 너한테 맡길게. 만약 누구라도 경거망동한 행동을 보인다면, 곧바로 때려죽여도 좋아.”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대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곧, 그는 무대 뒤에 도착했다.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은 이서는 소파 뒤로 몸을 숨겼는데, 그 발소리의 주인공이 지환이라는 것을 똑똑히 확인하고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온 힘을 다한 포옹을 받은 지환은 가슴이 철렁했다.그가 손을 들어 이서의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하지만 이런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잠시 후,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H선생님, 배미희 여사님과 스웨이 작가님을 이미 아래층으로 모셨습니다.”바깥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지환이 천천히 이서를 놓아주었다. “이서야, 내 말 잘 들어.”“이제 우리는 안전해. 하지만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좀 있어서 두 분과 먼저 돌아가 있으면...” 이서가 지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 안전한 거예요?”“응.”지환이 아련한 표정으로 이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정말이야.” “그럼 저도 선생님이랑 같이 남을래요!”‘H선생님을 홀로 여기에 남겨둘 순 없어!’ “바보야.”지환이 이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렇게 간단한 일도 아닐뿐더러, 네가 남아봤자 나한테는 도움이 안 돼. 두 분이랑 먼저 돌아가 있
예솔 역시 이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서는 이 두 사람이 모두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기에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의 곁을 빠르게 지나치고 싶었다.그러나, 이서가 지호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쯤 지호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윤이서 씨?”이서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지호를 바라보았다. 지호는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꼼꼼히 훑어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아름답네요. 그래서 내 동생이...” “하지호!”“지환아,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아니야? 말 한 번 걸었을 뿐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지환이 지호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서를 향해 말했다.“어서 가!” 이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세 사람은 지환이 마련한 차에 몸을 실었고, 차는 이내 훌쩍 떠나버렸다. 이 장면을 보던 지환이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하, 부부는 원래 숲속에 사는 새와 같다잖아. 큰 어려움이 닥치면 각자 살길을 찾아서 날아간다지? 지금 윤이서 꼴이 딱 그러네. 지환아, 여태 저런 여자를 사랑했던 거야? 쯧쯧쯧, 정말 가치가 없는 짓을 했었구나?” 지환은 지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아랑곳하지 않으려 했으나, 유독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냉소를 터뜨렸다.“너도 사람의 감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었어?”순간, 지호의 안색이 약간 변하였으나, 그는 하고 싶은 많은 말을 끝내 삼키려는 듯했다. 잠시 침묵하던 지호가 말했다.“이제 예솔이를 풀어줘.”“아직은 안돼.”지환이 말했다. 지호는 화가 날 법도 했으나, 오히려 웃으며 입을 열었다.“봐, 내가 그랬잖아. 너는 조건 하나를 들어주면 둘을 원할 거라고. 네 조건을 승낙하고 윤이서를 놓아주는 게 아니었는데...” “윤이서가 없으면 너는 미친개나 다름없잖아. 상대가 누구든 거칠게 물어 뜯어버리는 개말이야.”“아, 내가 윤이서한테 숨 쉴 틈을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앤서니가 머뭇거리며 지호를 보았다.“네.”그는 두 명의 부하와 함께 예솔을 데리고 지호에게 향했고, 지환이 신호를 보내는 순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거치게 그녀를 넘겨주었다. 손을 뻗은 지호가 예솔을 부축하면서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아, 너희 부하들도 너처럼 가녀린 여자를 불쌍히 여길 줄 모르나 보구나.”지환의 싸늘한 눈빛이 지호의 온몸을 감쌌다. “이제 됐지?”지호가 예솔을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환아, 우리 사이는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거야.”“이번에는 내가 너한테 속았으니, 다음에는 네가 나한테 속는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지호는 이 말을 끝으로 예솔을 데리고 떠났다. 차에 도착하자, 앞 좌석에 앉은 부하들이 지환이 있는 곳을 주시하며 말했다.“보스, 설마 이대로 하지환을 놓아줄 생각이세요?” 지호는 한창 예솔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자마자 앞 좌석에 앉은 부하와 예솔을 번갈아 흘겨보며 말했다. “아니면 어쩔 건데?”“보스, 하지환은 분명히 이씨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갈 겁니다. 반드시 이씨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을 노려야 한다고요!” 부하들은 말할수록 흥분하는 듯했다. “어둠의 세력 대부분의 조직원은 그 여자를 돌보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자연히 여기에 남은 조직원은 많지 않겠죠. 그러니까 반드시 이 기회를 틈타 그를 없애버려야 합니다! 운이 좋으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을 거라고요!”“오.”지환이 예솔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예솔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예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호를 바라보았다. “아주... 좋다고 생각해.”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하, 예솔아, 네가 웬일이야?”예솔이 말했다.“내 마음은 이미 식을 대로 식어버렸어. 내가 여태 그런 짓을 벌였던 건 지환이가 본인과 윤이서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고!”“하지만 그는... 내 호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
하지만 그 누구도 사다리를 건네주지 않아서, 이서는 계속 지붕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이 순간 누군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이서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서가 발을 닦고 나서 계단으로 나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지환은 거실에서 서류를 펼쳐놓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하지환 씨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하지환 씨를 용서하게 될까?’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서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일하는 중이에요?” 이서가 묻자 지환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응.” 이서는 지환과 한 발짝 떨어진 소파에 앉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어색함도 없었고, 굳이 대화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평온한 순간은 회사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서는 문득 표정을 풀고,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이서는 성지영의 딸이야. 이번에 돌아온 것도 분명 윤씨 그룹을 노리고 돌아온 거겠지.” 지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윤씨 그룹에 입사해서 나한테 약을 먹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고작 그런 방식으로 날 바보로 만들려고 하다니, 어이가 없어요.” 고이서 했던 짓을 떠올리자 이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서의 예상이 맞다면, 고이서가 처음부터 자신이 윤재하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씨 그룹은 과거의 윤씨 그룹이 아니었다. 윤씨 그룹이 MH 그룹과 통합한 후, 이서는 쓸모없는 윤씨 일가들을 모두 몰아내고 필요한 사람들만 남겼다. 설령 윤재하가 자신이 윤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며 이서의 자격을 문제
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 뒤에 있던 이불을 집어 들고 이서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방금 하지환 씨는 나한테 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이불을 덮어주려던 거였어?’ 이서는 닫힌 방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생각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이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지환은 이미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도 지환은 자주 이렇게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요리 실력이 썩 좋지 않았고, 아주 서툴렀다. 하지만 그때의 이서는 눈치가 없어서 지환이 원래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지환이 이서를 위해 요리를 배우고 준비했다는 사실은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지환은 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밥 짓고, 반찬을 만들고, 살림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밤새 이서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또다시 떠올랐지만, 이번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이 다 됐어.” 이서는 자연스럽게 지환의 옆으로 다가가 아침 식사를 식탁으로 옮겼고, 자리에 앉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꼭 오래된 부부 같은 모습이네.’ “왜 그래?”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고, 이서는 하트 모양으로 구운 계란을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