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한순간, 지환은 이서를 엄호하며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왜인지 사라지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예솔의 마음은 텅 비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이서에게 한 모든 것을 지환이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하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정은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 거야.’‘두 세대를 거치면서 20여년 간 이어온 감정이 한 여자 때문에 끊어지는 거라고!’ 예솔은 팔걸이를 죽도록 붙잡았지만, 힘이 풀려버린 다리를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주저앉아 버렸다....이서의 쿵쾅쿵쾅 뛰는 심장은 무대 뒤에 도착하고서야 많이 가라앉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지환의 팔에 난 총상이 보였다.“H선생님, 팔에 상처가... 구급상자가 있는지 찾아볼게요.”이 말을 마친 이서는 몸을 돌려 구급상자를 찾으려 했다. “가지 마.”지환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짙은 피로감을 띠고 있어서 이서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선생님 손의 상처는...”“괜찮아.”지환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옆에 있는 소파를 두드렸다.“앉아봐. 네가 다친 곳은 없는지 한 번 봐야겠어.”잠시 머뭇거리던 이서는 이내 지환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지환의 다정한 시선을 느낀 그녀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도저히 부끄러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이서가 입을 열었다.“저는 다치지 않았어요...”하지만 지환의 뜨거운 시선은 줄곧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린 이서가 총애와 사랑을 뿜어내는 지환의 뜨거운 눈빛을 마주했다. 순간, 그녀가 온몸을 흠칫 흔들었는데, 외면할 수 없는 익숙한 느낌이 또 한 번 마음속에 퍼지는 듯했다. ‘이런 눈빛... 이미 천번이고 백번이고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그녀는 미혹된 듯 자기도 모르게 지환을 향해 다가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부드러운 느낌을 받은 이서는 자신도 모르게 쫀득한 식감의 젤리를 떠올렸
“귀국시킬 거야.”앤서니는 멍해졌다.“그럼 보스는요?”“나도 같이 돌아갈 생각이야.” “왜요?”앤서니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이번 사건으로 하지호와 보스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게 된 셈이야. 하지호는 예전에부터 YS그룹에 손을 뻗어 좌지우지하려 했지만, 앞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할 수는 없을 거란 말이지.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같은 상황에 H국으로 돌아가시겠다는 거지?’지환이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하지호는 내가 떠나자마자 경거망동한 행동을 취하지는 않을 거야. 그럼 나도 곧 H국의 비즈니스와 이쪽의 비즈니스를 통합할 수 있게 되겠지.”“이번에 보니까 내가 H국에서 비즈니스의 판도를 개척하는 동안 하지호도 아주 바삐 움직였더라고. 의외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방면에서 더욱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거야.”“즉, 내가 줄곧 비즈니스의 길을 걷는 동안, 그는 각양각색의 방면에서 손을 써 놓았던 거지...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그의 권세가 YS그룹보다 강해지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그렇게 되면 h국의 자회사가 본사 쪽에 수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될 거고...”“내가 H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한 건, 이서뿐만이 아니라 YS그룹의 미래를 위한 거야.”“그리고 나는 M국에서 자라긴 했지만, 부모님은 모두 H국 사람이시잖아.”“가능하다면 나도 H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지환이 말했다.그가 부하들과 이렇게 많은 대화를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지환을 바라보던 앤서니가 백스테이지를 한 번 쳐다본 후 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보스, 저는 비즈니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단지 보스가 M국에 머무르든, H국에 머무르든, 보스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죠.”지환이 고개를 숙이고 그를 흘겨보았다.“그건 다 이후의 일이잖아.”앤서니가 몸을 일으켰다.“그건 그렇죠.”이때 두 부하가 예솔을 끌고 지환과 앤서니 앞에 다다랐다.“보스! 2층에 있던 방에서 예솔 아가씨를 찾았는데, 저격수는 이
“H선생님, 방금 나누신 대화 다 들었어요. 밖이 그렇게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나가시겠다면 말리지는 않을게요. 대신 한 가지 부탁은 꼭 들어주세요.”“물론이지.”지환이 말했다.그의 말투는 예솔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이렇게 뚜렷한 차이라면 바보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동정이 서린 눈빛으로 예솔을 한 번 보았다. 그들은 모두 지환의 주변 사람들이어서 지환을 향한 예솔을 사랑을 익히 알고 있던 참이었다. “우선 그 상처부터 치료하고 나가셨으면 좋겠어요.”이서가 지환을 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팔에 흐르던 선혈은 이미 응고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서는 제때 처치하지 않으면 감염될 위험이 있다고 우려한 것이었다.지환이 팔의 총상을 한 번 흘겨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래.”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앤서니에게 말했다.“하지호한테 내가 상처부터 처치해야 한다고 전해줘. 처치가 끝나는 대로 내가 직접 박예솔을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갈 거라고도 덧붙여 주고.”“네.”앤서니가 대답했다. 지환은 그가 떠난 후에야 이서가 있는 백스테이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치하려던 의사 역시 그를 따라 들어가려 했으나, 지환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밖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정신이 멍해진 의사는 감히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대 뒤에 있던 이서가 이 문제에 주목하며 물었다.“왜 의사 선생님을 못 들어오게 하는 거예요?” “난 네가 상처를 처치해 줬으면 해.”지환이 이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지호를 만나러 가려던 지환의 마음은 대단히 복잡했다. 그래서 앞으로의 생사의 여부를 알 수 없었던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잘 보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는... 이서와 사랑했던 날들을 되새기고 싶었다. 이 순간만큼은... 이기적이고 싶었다. 다시 그의 뜨거운 눈빛을 마주한 이서는 어쩔 줄 몰랐다. 그녀가 중얼거리며 말했다.“방금, 방금 보니까... 여기 안에 구급상자가 있긴 하더라고요. 안에 알코올 솜도 있고
이서가 숨을 쉴 수 없을 때쯤, 지환이 마침내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이서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마치 잘 익은 감이 가지에 매달린 것처럼 유혹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환이 엄지손가락으로 이서의 입술을 닦았다. 그의 눈빛은 꽁꽁 감긴 실처럼 그녀를 단단히 묶는 듯했다. ‘내가 이런 나날을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여기서 조용히 기다려줘.”몸을 일으킨 지환이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그는 이서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면 떠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이서가 지환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H선생님, 여기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대신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아셨죠?” 그녀는 ‘무사히’라는 세 글자를 유독 강조했다. 지환은 끝내 이서를 돌아볼 수 없었다. 문을 나선 지환의 눈빛이 금세 차가워졌다. “두 사람만 여기 남아서 이서의 안전을 지켜보도록 해. 나머지는 나랑 같이 나가자.”지환이 매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곧 매서운 비바람이 몰아치려는 듯하자, 조직원들의 마음이 무거워졌다.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숙연한 표정을 지었고, 예솔을 언급하는 지환의 눈에서도 지난날의 부드러운 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대회장의 입구에 도착하자, 계단 아래에 수많은 차가 주차된 것이 보였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릴 수 없었지만, 이미 그곳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지환이 모습을 드러내자, 차 안에 있던 지호가 걸음을 내디뎠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한 사람과 낮은 곳에서 올라오는 또 다른 한 사람... 두 사람은 여전히 2, 3미터 떨어진 곳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발걸음을 멈추었다.지호가 고개를 살짝 들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우리... 오늘 정말 바삐 움직이는 것 같네?”그가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그것은 방금 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상처였다. 지호는 지환의 팔을 감싸고 있는 거즈를 보고는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 듯했다. 지환이 옆
“그래.”지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윤이서랑 다른 사람들을 먼저 보내도록 해. 하지만... 지환아, 이건 분명히 하자. 이번이 꼭 마지막 조건이어야 해. 네가 나중에 또 다른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나를 탓하지 말아야 할 거야!”마지막 문장을 말하던 그의 말투는 갑자기 음산하고 공포스러워졌다. 지환은 시종일관 그를 상대하지 않았는데,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직 단 한 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서부터 상언이네 집으로 돌려보내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씨 가문만이 가장 안전한 곳일 테니까.’ “앤서니!”“네!”“여기는 너한테 맡길게. 만약 누구라도 경거망동한 행동을 보인다면, 곧바로 때려죽여도 좋아.”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대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곧, 그는 무대 뒤에 도착했다.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은 이서는 소파 뒤로 몸을 숨겼는데, 그 발소리의 주인공이 지환이라는 것을 똑똑히 확인하고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온 힘을 다한 포옹을 받은 지환은 가슴이 철렁했다.그가 손을 들어 이서의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하지만 이런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잠시 후,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H선생님, 배미희 여사님과 스웨이 작가님을 이미 아래층으로 모셨습니다.”바깥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지환이 천천히 이서를 놓아주었다. “이서야, 내 말 잘 들어.”“이제 우리는 안전해. 하지만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좀 있어서 두 분과 먼저 돌아가 있으면...” 이서가 지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 안전한 거예요?”“응.”지환이 아련한 표정으로 이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정말이야.” “그럼 저도 선생님이랑 같이 남을래요!”‘H선생님을 홀로 여기에 남겨둘 순 없어!’ “바보야.”지환이 이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렇게 간단한 일도 아닐뿐더러, 네가 남아봤자 나한테는 도움이 안 돼. 두 분이랑 먼저 돌아가 있
예솔 역시 이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서는 이 두 사람이 모두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기에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의 곁을 빠르게 지나치고 싶었다.그러나, 이서가 지호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쯤 지호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윤이서 씨?”이서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지호를 바라보았다. 지호는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꼼꼼히 훑어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아름답네요. 그래서 내 동생이...” “하지호!”“지환아,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아니야? 말 한 번 걸었을 뿐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지환이 지호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서를 향해 말했다.“어서 가!” 이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세 사람은 지환이 마련한 차에 몸을 실었고, 차는 이내 훌쩍 떠나버렸다. 이 장면을 보던 지환이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하, 부부는 원래 숲속에 사는 새와 같다잖아. 큰 어려움이 닥치면 각자 살길을 찾아서 날아간다지? 지금 윤이서 꼴이 딱 그러네. 지환아, 여태 저런 여자를 사랑했던 거야? 쯧쯧쯧, 정말 가치가 없는 짓을 했었구나?” 지환은 지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아랑곳하지 않으려 했으나, 유독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냉소를 터뜨렸다.“너도 사람의 감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었어?”순간, 지호의 안색이 약간 변하였으나, 그는 하고 싶은 많은 말을 끝내 삼키려는 듯했다. 잠시 침묵하던 지호가 말했다.“이제 예솔이를 풀어줘.”“아직은 안돼.”지환이 말했다. 지호는 화가 날 법도 했으나, 오히려 웃으며 입을 열었다.“봐, 내가 그랬잖아. 너는 조건 하나를 들어주면 둘을 원할 거라고. 네 조건을 승낙하고 윤이서를 놓아주는 게 아니었는데...” “윤이서가 없으면 너는 미친개나 다름없잖아. 상대가 누구든 거칠게 물어 뜯어버리는 개말이야.”“아, 내가 윤이서한테 숨 쉴 틈을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앤서니가 머뭇거리며 지호를 보았다.“네.”그는 두 명의 부하와 함께 예솔을 데리고 지호에게 향했고, 지환이 신호를 보내는 순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거치게 그녀를 넘겨주었다. 손을 뻗은 지호가 예솔을 부축하면서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아, 너희 부하들도 너처럼 가녀린 여자를 불쌍히 여길 줄 모르나 보구나.”지환의 싸늘한 눈빛이 지호의 온몸을 감쌌다. “이제 됐지?”지호가 예솔을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환아, 우리 사이는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거야.”“이번에는 내가 너한테 속았으니, 다음에는 네가 나한테 속는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지호는 이 말을 끝으로 예솔을 데리고 떠났다. 차에 도착하자, 앞 좌석에 앉은 부하들이 지환이 있는 곳을 주시하며 말했다.“보스, 설마 이대로 하지환을 놓아줄 생각이세요?” 지호는 한창 예솔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자마자 앞 좌석에 앉은 부하와 예솔을 번갈아 흘겨보며 말했다. “아니면 어쩔 건데?”“보스, 하지환은 분명히 이씨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갈 겁니다. 반드시 이씨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을 노려야 한다고요!” 부하들은 말할수록 흥분하는 듯했다. “어둠의 세력 대부분의 조직원은 그 여자를 돌보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자연히 여기에 남은 조직원은 많지 않겠죠. 그러니까 반드시 이 기회를 틈타 그를 없애버려야 합니다! 운이 좋으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을 거라고요!”“오.”지환이 예솔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예솔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예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호를 바라보았다. “아주... 좋다고 생각해.”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하, 예솔아, 네가 웬일이야?”예솔이 말했다.“내 마음은 이미 식을 대로 식어버렸어. 내가 여태 그런 짓을 벌였던 건 지환이가 본인과 윤이서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고!”“하지만 그는... 내 호
아쉽게도 지환이야말로 세력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앤서니는 부하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분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차량은 이씨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이서는 이씨 가문 저택의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방으로 들어온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서야, 너 오늘 대체 왜 그래? 요리는 요리사한테 맡기고, 우리랑 앉아서 푹 쉬는 게 어떻겠니?”고개를 젓는 이서는 마치 마수에 빠진 것 같았다.“아니에요, H선생님께서 오늘 저녁을 먹으러 오겠다고 하셨거든요. 제가 직접 풍성한 저녁상을 준비해 드리고 싶어요.”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는 서로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아무래도 이서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을 것 같지?’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주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이먼 스웨이는 거실에 도착해서야 작은 목소리로 배미희에게 말했다.“하 서방 쪽은 어떻게 됐을까요?” 배미희가 눈썹을 비틀었다. 대회장을 나서던 그녀는 예솔과 지호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줄곧 불길한 예감을 느끼던 참이었다. 그녀는 예솔이 어떻게 지호와 엮이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씨 가문을 풍비박산으로 만들 뻔한 지호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아무 일도 없이 돌아올 거예요. 지환이는 정말 착한 아이니까 하늘이 도울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배미희의 이 말은 하이먼 스웨이를 위로하는 동시에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하이먼 스웨이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입구를 바라보며 지환을 기다렸다.같은 시각.지호는 앤서니의 예상대로 부하들을 시켜 이씨 가문의 저택으로 가는 길에 매복을 설치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어둠의 세력 차량을 들이받기 시작했다.“보스!”앤서니는 여러 대의 차량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지환이 몸을 실은 차량의 운전석으로 뛰어올라 운전대를 빼앗았다.“이씨 가문의 저택으로 가는 길은 이미 막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