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은과 예솔이 사랑한 남자는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이들이 이서를 원망하는 이유는 같았다. 그것은 바로 이서가 너무 훌륭하다는 것!가은은 심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좋은 학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특기가 없었다. 그리고 예솔은 디자인 방면의 고수였지만, 디자인에만 국한된 것으로 다른 방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서는 설계, 감독에 그치지 않고 그녀가 여태껏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문학 분야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어떻게 질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하하!”크리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또 한 번 모든 사람의 주의력을 무대로 끌었다.“이제 진정한 우승자, 대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우리의 1등입니다!” 크리스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했다.“단편 소설 대회가 열린 지도 어언 20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올해처럼 이렇게 큰 규모의 대회가 열린 것도, 이렇게 많은 보물이 쏟아져 나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죠.” “아...”“물론 시상자로서 개인적인 감정이 너무 많이 담기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우승자의 작품을 보고 3일간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너무도 훌륭한 작품이어서, 거장인 모슨 선생님의 작품을 보는 것 같더군요.” “만약 이 참가자가 모슨 선생님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면, 저는 이 참가자가 모슨 선생님의 뛰어난 제자 중의 한명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모슨을 알 것이었는데, 그는 현대 단편 문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었다.우승자의 작품에서 그런 모슨의 문필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아주 높은 수준의 찬사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순간, 대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무대 아래의 참가자에게 떨어졌다. “그렇게 대단한 참가자가 있다고요? 대체 누굴까요?” “모슨 선생님의 문필이 엿보이는 작품이라니... 아마 나이가 꽤 많은 참가자이지 않을까요?” “궁금해 죽겠습니다,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자신이 1등이
“저는 심가은이라고 합니다. 글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녀는 이렇게 간단한 소개만으로 또 한 번 무대 아래의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크리스가 물었다.“심가은 씨를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어떤 계기로 문학이라는 길을 걷게 되신 겁니까?” “사실 저는 이전에 문학을 전혀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가은은 시종일관 거짓된 웃음을 유지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면모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찾고, 어머니의 인도하에 문학이라는 길을 걷게 되었죠.”크리스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어머니가 누구시죠? 오늘 대회장에 오셨나요?”“저희 어머니는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입니다.”이 말이 나오자 모든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크리스조차도 표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심, 심가은 씨가 십여 년 동안 실종되었다던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따님이란 말입니까?!”“네, 맞습니다.”가은이 말을 이어 나갔다.“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제가 이 대회에 참가한 줄 모르고 계셨어요.” 즉, 이것은 그녀가 실력만으로 우승을 거며 쥐었다는 뜻이었다. 장내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크리스가 감격에 겨워 횡설수설했다.“그, 그럼... 심가은 씨의 문필이 모슨 선생님을 닮은 건... 모슨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인가요?” “어... 죄송합니다. 저는 이전에 문학을 접해 본 적도 없고, 최근에서야 저희 어머니께서 이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신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해드릴 생각으로 이 대회에 참석한 겁니다. 그래서... 사회자님이 말씀하시는 모슨 선생님이라는 분이 누군지 모릅니다.” 대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환호성은 천장을 뒤집을 지경이었다!“천재예요! 절대적인 천재라고요! 모슨 선생님의 작품을 보지도 않았는데 모슨 선생님의 문필을 쓸 수 있다니... 저분이 천재가 아니면 누가 천재란 말입니까?” “어쨌든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보다 자신이 더 대단하다고 으스대는 그 사람은 아닐 거예요! 하하!” “하하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이서 씨는 자신
회의장의 떠들썩함이 마침내 서서히 잦아들자, 크리스가 곧 입을 열었다.“네, 이렇게 1, 2, 3위를 모두 발표하였습니다. 다음 순서는...”“잠시만요!”갑자기 울려 퍼진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는데, 모두 잇달아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이번 대회는 불공정했다고요!”크리스가 마이크를 든 채 소리가 나는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불공정하다니요? 대체 뭐가 불공정했다는 겁니까? 대회에 제출된 모든 원고는 심사위원분들이 직접 고르신 겁니다!” “그리고 심사위원분들은 어떤 참가자의 원고를 받은 건지 전혀 모르셨고요.”크리스가 말했다. “제 말은 누군가가 대필했다는 겁니다!” 무대 아래가 술렁이기 시작했다.이서는 단번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배미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안정되는 듯했다.“대체 누구시죠? 얼굴도 드러내지 못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참가자가 대필했다고 비난하는 거냐고요!”가은은 이 말을 마치고서야 자신의 감정이 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얼른 또 한마디 덧붙였다.“정식적인 대회의 명성을 그런 허접한 말 한마디로 더럽힐 생각이세요?”크리스도 가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대회에 불공정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직접 얼굴을 드러내고 말씀해 주시겠습니까?”“그러죠.”배미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순간, 조용하던 대회장에 바퀴 마찰음이 메아리쳤다. 사람들은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분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퀴의 마찰음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마침내 휠체어에 앉은 사람을 보고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놀란 사람들은 모두 냉기를 들이마셨다.휠체어에 탄 사람은 하이먼 스웨이였는데, 머리에 붕대를 감은 것으로 보아 크게 다친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가은은 하이먼 스웨이를 보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두 다리를 덜덜 떨던 그녀는 하마터면 땅에 주저앉을
‘그리고 나는 네가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걸 뻔히 알면서도 눈 감아 왔어!’‘개도 키워준 사람에 대한 은혜를 아는 법이거늘...’‘그런데 넌!’하이먼 스웨이가 팔걸이를 꽉 잡았다.이서가 천천히 다가오는 하이먼 스웨이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아.’ 하지만 하이먼 스웨이는 그녀의 곁에 오래 머물지 않고 눈빛만 줄 뿐이었다. “스웨이 작가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놀란 크리스는 여기가 무대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하이먼 스웨이가 크리스의 마이크를 뺏어 들었다.“어제부터 연락받지 않은 걸로도 모자라, 대회까지 늦게 참석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스탠드로 제 머리를 두 번이나 내리쳤고, 기절한 저를 욕조에 방치한 바람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거든요.”비록 그녀의 말투는 나른하고 평온했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끔찍한 장면이 그려지는 듯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도대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길래 겁도 없이 작가님을 다치게 했다는 겁니까? 그 사람은 살인미수범입니다! 혹시... 그 사람의 얼굴은 보셨습니까?”크리스가 모든 사람이 궁금해하는 것을 묻자,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하이먼 스웨이가 심가은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 사람들은 온통 수군거리기 시작했으며, 믿을 수 없다는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궤멸에 이르른 가은은 죽기 살기로 아랫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무대에 털썩 주저앉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서도 믿기지 않다는 듯 가은을 바라보았다. ‘심가은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던 사실이야. 이 여자는 항상 트집 잡는 걸 좋아했으니까.’‘하지만 딱 그 정도의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기 친어머니의 목숨까지 노리는 사람이었을 줄이야!’“스웨이 작가님,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크리스가 다시 한번 모두가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심
무대 아래의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하이먼 스웨이와 2층에 있던 배미희 역시 덩달아 놀라서 재빨리 이서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리고 그 순간, 2층에 있던 자격수도 예솔의 명령을 받았다. “사격하세요!”모든 것은 짧은 몇 초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펑!”소란스러웠던 대회장을 삽시간에 조용하게 만든 총성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것만 같았다.사람들이 총알이 어디에서 발사된 것인지 의아해하던 찰나, 또 한 번 펑 하는 총성이 울렸다. 하지만 이번에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총성뿐만이 아니었는데, 이서의 앞에 서 있던 가은이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핏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놀란 심가은은 눈을 크게 떴는데, 온통 원한이 가득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즉,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이서를 미워한 것이었다. 쓰러지는 그녀를 바라보던 이서는 달려온 하이먼 스웨이에게 손이 잡혔다.“이서야, 어서 가자!”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네, 스웨이 작가님, 어서 가요.” 같은 시각, 무대 아래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질렀고, 허겁지겁 사방으로 몸을 숨기기 바빴다. 대회장에서는 도망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공포에 질린 욕설만이 난무했다.그리고 그 순간, 저격수는 다시 한번 이서를 주시했다. 예솔은 첫 번째 총알이 이서를 관통하지 않자 다소 화가 나서 말했다.“이러고도 당신이 저격수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어쩜 이렇게 짧은 거리도 못 맞출 수가 있냐고요!” 하지만 그 남자는 입꼬리를 치켜세우고 피에 젖은 미소를 지었다.“조급해하지 마세요, 이제 고작 한 발이었는걸요. 이번에는 반드시 저 여자를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방금 그 총알이 저 여자를 관통하지 않은 건 내가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야.’‘진정한 사냥은 이제부터란 말이지.’“펑!”두 번째로 발사된 총알은 이서를 향해 정확하고 빠르게 날아갔다. 예솔은 이제야 만족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러나 한순간, 지환은 이서를 엄호하며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왜인지 사라지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예솔의 마음은 텅 비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이서에게 한 모든 것을 지환이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하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정은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 거야.’‘두 세대를 거치면서 20여년 간 이어온 감정이 한 여자 때문에 끊어지는 거라고!’ 예솔은 팔걸이를 죽도록 붙잡았지만, 힘이 풀려버린 다리를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주저앉아 버렸다....이서의 쿵쾅쿵쾅 뛰는 심장은 무대 뒤에 도착하고서야 많이 가라앉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지환의 팔에 난 총상이 보였다.“H선생님, 팔에 상처가... 구급상자가 있는지 찾아볼게요.”이 말을 마친 이서는 몸을 돌려 구급상자를 찾으려 했다. “가지 마.”지환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짙은 피로감을 띠고 있어서 이서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선생님 손의 상처는...”“괜찮아.”지환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옆에 있는 소파를 두드렸다.“앉아봐. 네가 다친 곳은 없는지 한 번 봐야겠어.”잠시 머뭇거리던 이서는 이내 지환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지환의 다정한 시선을 느낀 그녀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도저히 부끄러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이서가 입을 열었다.“저는 다치지 않았어요...”하지만 지환의 뜨거운 시선은 줄곧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린 이서가 총애와 사랑을 뿜어내는 지환의 뜨거운 눈빛을 마주했다. 순간, 그녀가 온몸을 흠칫 흔들었는데, 외면할 수 없는 익숙한 느낌이 또 한 번 마음속에 퍼지는 듯했다. ‘이런 눈빛... 이미 천번이고 백번이고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그녀는 미혹된 듯 자기도 모르게 지환을 향해 다가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부드러운 느낌을 받은 이서는 자신도 모르게 쫀득한 식감의 젤리를 떠올렸
“귀국시킬 거야.”앤서니는 멍해졌다.“그럼 보스는요?”“나도 같이 돌아갈 생각이야.” “왜요?”앤서니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이번 사건으로 하지호와 보스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게 된 셈이야. 하지호는 예전에부터 YS그룹에 손을 뻗어 좌지우지하려 했지만, 앞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할 수는 없을 거란 말이지.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같은 상황에 H국으로 돌아가시겠다는 거지?’지환이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하지호는 내가 떠나자마자 경거망동한 행동을 취하지는 않을 거야. 그럼 나도 곧 H국의 비즈니스와 이쪽의 비즈니스를 통합할 수 있게 되겠지.”“이번에 보니까 내가 H국에서 비즈니스의 판도를 개척하는 동안 하지호도 아주 바삐 움직였더라고. 의외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방면에서 더욱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거야.”“즉, 내가 줄곧 비즈니스의 길을 걷는 동안, 그는 각양각색의 방면에서 손을 써 놓았던 거지...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그의 권세가 YS그룹보다 강해지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그렇게 되면 h국의 자회사가 본사 쪽에 수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될 거고...”“내가 H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한 건, 이서뿐만이 아니라 YS그룹의 미래를 위한 거야.”“그리고 나는 M국에서 자라긴 했지만, 부모님은 모두 H국 사람이시잖아.”“가능하다면 나도 H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지환이 말했다.그가 부하들과 이렇게 많은 대화를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지환을 바라보던 앤서니가 백스테이지를 한 번 쳐다본 후 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보스, 저는 비즈니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단지 보스가 M국에 머무르든, H국에 머무르든, 보스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죠.”지환이 고개를 숙이고 그를 흘겨보았다.“그건 다 이후의 일이잖아.”앤서니가 몸을 일으켰다.“그건 그렇죠.”이때 두 부하가 예솔을 끌고 지환과 앤서니 앞에 다다랐다.“보스! 2층에 있던 방에서 예솔 아가씨를 찾았는데, 저격수는 이
“H선생님, 방금 나누신 대화 다 들었어요. 밖이 그렇게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나가시겠다면 말리지는 않을게요. 대신 한 가지 부탁은 꼭 들어주세요.”“물론이지.”지환이 말했다.그의 말투는 예솔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이렇게 뚜렷한 차이라면 바보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동정이 서린 눈빛으로 예솔을 한 번 보았다. 그들은 모두 지환의 주변 사람들이어서 지환을 향한 예솔을 사랑을 익히 알고 있던 참이었다. “우선 그 상처부터 치료하고 나가셨으면 좋겠어요.”이서가 지환을 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팔에 흐르던 선혈은 이미 응고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서는 제때 처치하지 않으면 감염될 위험이 있다고 우려한 것이었다.지환이 팔의 총상을 한 번 흘겨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래.”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앤서니에게 말했다.“하지호한테 내가 상처부터 처치해야 한다고 전해줘. 처치가 끝나는 대로 내가 직접 박예솔을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갈 거라고도 덧붙여 주고.”“네.”앤서니가 대답했다. 지환은 그가 떠난 후에야 이서가 있는 백스테이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치하려던 의사 역시 그를 따라 들어가려 했으나, 지환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밖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정신이 멍해진 의사는 감히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대 뒤에 있던 이서가 이 문제에 주목하며 물었다.“왜 의사 선생님을 못 들어오게 하는 거예요?” “난 네가 상처를 처치해 줬으면 해.”지환이 이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지호를 만나러 가려던 지환의 마음은 대단히 복잡했다. 그래서 앞으로의 생사의 여부를 알 수 없었던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잘 보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는... 이서와 사랑했던 날들을 되새기고 싶었다. 이 순간만큼은... 이기적이고 싶었다. 다시 그의 뜨거운 눈빛을 마주한 이서는 어쩔 줄 몰랐다. 그녀가 중얼거리며 말했다.“방금, 방금 보니까... 여기 안에 구급상자가 있긴 하더라고요. 안에 알코올 솜도 있고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