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놀라 잠에서 벌떡 깼다. 그녀는 눈을 감는 것도 두려웠다.눈만 감으면 할아버지가 선혈이 낭자한 채 피바다에 쓰러져 끊임없이 그녀에게 소리 지르는 게 보였다.“이서야, 내가 너 때문에 죽었는데, 넌 어쩌면 양심도 없니?”다음날 잠에서 깬 이서는 더욱 운이 없었다.그녀는 일어나자마자 1층으로 내려와 커피를 한잔 내려 마셨다.마침 하은철이 2층에서 내려왔다.이서의 눈 밑에 생긴 다크서클을 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너 괜찮아?”어제 밤에 이서의 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듣고 가보고 싶었지만 전날 밤 이서의 반응을 생각하자 뒷걸음 치고 말았다.이서는 그를 경계하는 듯했다.마침내 깨달은 하은철은 초조해 마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서 쪽의 동정을 살피면서 밤새 엎치락뒤치락 잠을 설쳤다.이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였다.“마침 잘 왔네. 할 말 있어.”하은철은 이서가 할 말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바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뭔데?”“어제 아저씨가 나더러 네 아내 신분으로 하관식에 나서라고 하던데, 알고 있었어?”하은철은 왠지 모르게 심장이 움찔했다.“아빠가 그러시던데, 너도 동의한 일이라고.”“내가?!”이서는 숨을 들이쉬었다. “아저씨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하도훈은 그녀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미안하지만 네 와이프 신분으로 행사에 참석할 수 없어. 말도 안 돼는 일이야.”이서는 하은철을 보며 가능한 말투를 늦추었다.“내가 하관식 일을 돕는 건 할아버지 때문이야. 그러나 네 아내의 신분으로 참석하는 건 미안하지만 안되겠어. 나, 이미 결혼했어. 남편 있어. 유부녀라고. 난 그 사람에게 어떠한 오해의 소지를 만들고 싶지 않아. 입장 바꾸어 생각해 봐, 만약 너라면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겠어?”하은철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가능하다면 정말 입장을 바꾸고 싶네.’“알았어. 아버지에게 전할게. 다른 뜻은 없었을 거야. 다만 할아버지 마지막 소원을 풀어드리
“그런데 봤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앞 전에 몇 번 만난 적 있긴 한데 모두 가면을 쓰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지 못했어요.”이서는 주경모를 바라보며 말했다.“할아버지 하관식에서는 가면 쓰지는 않겠죠?”하은철과 주경모의 안색이 또 변했다.특히 하은철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너…… 정말 우리 삼촌의 얼굴을 본 적 없어?”“응.”이서는 하은철과 주경모가 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지 알 수 없었다.“매번 신비주의 컨셉으로 등장했거든. 설마 못 생겨서 가면을 쓴 건 아니겠지?”하은철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그…… 그런데 어떻게 삼촌 핸드폰 번호가 있어?”‘이서가 삼촌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건 삼촌이 이서를 믿지 않는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믿지도 않는 사람에게 왜 핸드폰 번호가 알려줬을까?’하은철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하지만 주경모는 오히려 모든 게 선명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그는 하은철을 보며 입술을 움찔움찔했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왜냐하면 그 결과가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이다.“내가 네 삼촌의 핸드폰 번호를 가지고 있다고?”이서는 오리무중이었다.‘저번에 하은철 삼촌에게 전화했을 때도 지환의 전화로 했던 거 같은데?’“그저께…… 그저께 분명히 봤는데…… 삼촌 전화 받는 거?”“엥? 뭐라는 거야?” 이서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뭐 잘못 안 거 아니야?”“하지환, 우리 삼촌 아니었어?”이서가 웃었다.“?”“우리 남편이야, 삼촌은 무슨…….”하은철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설마 우리 삼촌이 네 남편이야?”이서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네 삼촌이 어떻게 내 남편이야? 하지환은 내 남편이름이라고…….”그녀는 잠시 멈추었다.“잠깐만, 방금 뭐라고…… 그러니까 네 삼촌이랑 내 남편과 이름이 같다는 거야?”하은철도 완전히 헷갈려서 어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삼촌 이름이 하지환이야.”이서는 물끄러미 땅을 바라보았다.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중인 게 분명
‘근데 너무 신기할 정도로 딱 맞는 부분이 없지 않다.’‘집에 가면 지환에게 확실히 물어봐야겠다.’가는 길에 아무말 없던 이서는 어느덧 하관식장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임하나가 보였다.그녀는 걸어갔다. “하나야.”이서의 초췌한 모습을 본 하나는 마음이 아팠다.“하은철 그 자식이 너 잠도 못 자게 모든 일 다 너에게 떠넘겼지?”이서는 웃었다.“아니야, 요 며칠 지켜보니 오히려 이전과 많이 달라졌던데.”“어, 어떻게?”하나는 말하면서 불현듯 하은철에게 시선이 떨어졌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이서의 주위를 맴도는 걸 발견한 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이제 후회되는가 봐. 진작에 그럴 것이지.”이서는 어리둥절하여 말했다.“뭘 후회한다는 거야?”“꽃처럼 아름답고 사리에 밝으며 부드럽고 현명한 좋은 아내를 놓친 것을 후회하는 거지.”임하나는 말하면서 일부러 이서의 허리를 끌어안고 으쓱거리며 하은철 앞을 지나갔다.이서는 하나가 이끄는 대로 하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하은철은 아직 밖이었다.상황을 지켜본 주경모는 얼른 한마디 보탰다.“도련님, 들어가세요.”하은철은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아저씨 혹시 진작부터 알고 있었죠?”주경모는 순간 당황했다. 얼렁뚱땅 넘기려고 했는데 바로 하은철의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할아버지도 알고 계셨어요?”이 정도로 말을 꺼냈을 때는 아닌 척하는 것도 별의미가 없어 보였다.주경모는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단지 추측했을 뿐입니다. 방금 아가씨 표정을 살피니 아직도 남편이 큰집 도련님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은데…….”주경모는 눈살을 찌푸렸다.“물론 두 번째 가능성이 있긴 합니다. 두 사람이 동명이인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래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H국에도 동명이인은 사람이 많으니까요.”“할아버지는 언제부터 의심하셨어요?”“그건…….”주경모는 약간 읊조렸다.“이서정 씨와 큰집 도련님이 위장 결혼이라는 걸 알았을 때일 겁니다.”“
“이서야, 너 왜 그래?” 임하나는 이서의 팔을 밀었다.이서는 정신이 흐리멍덩한 채 고개를 숙이고 관 속의 하경철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는 편안하게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제서야 방금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서야?” 임하나는 다시 작은 소리로 물었다.“너 괜찮아? 왜 이렇게 얼굴이 창백해?”이서는 고개를 저었다.‘요 며칠 잠을 설쳐서 그런가 봐.’“우리 가자.”다음 헌화하는 손님이 이미 단상에 올라왔다.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임하나를 따라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헌화를 마치고 바로 하도훈의 조사와 추모사가 이어졌다.임하나는 이 기회를 틈타 낮은 소리로 이서에게 물었다.“왜 하은철 둘째 삼촌은 보이지 않는 거지? 안 왔나?”이서도 좌우를 살폈다.“오늘 행사에 참석한다고 연락 왔다고 집사 아저씨가 얘기하더라.”“그런데 아직 안 보이는데?”오늘 하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권세가들이나 재벌가들이라 임하나도 대부분 다 알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낯선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딱 봐도 하은철 삼촌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그는 북미 경제의 패권을 쥐고 있는 어마어마한 인물이었으니.이서도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찾지 못했다.“해외에서 오니까 시간이 더 걸리나 봐.”두 사람이 말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임하나가 팔꿈치로 이서를 툭 쳤다.“저기 저 여자, 심동 여자친구 아니야? 자꾸 너를 힐끔힐끔 보고 있던데, 혹시 그녀랑 무슨 껄끄러운 일이라도 있니?”임하나의 시선을 따라 가보니 정말로 장희령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경멸과 적개심이 가득했고 좋은 구경거리 두고 보자는 눈빛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지난번 자기 말에 토 달았다고 내게 원한 품은 거 같아.”“어? 그럼 설마 심동에게 자기 대신 복수해달라고 하지 않을까? 나도 들었는데, 심동이 장희령을 꽤나 좋아하나 봐. 그녀의 부탁이라면 별 따는 흉내라도 낸다던데. 까놓고 얘기하면 따리꾼이지.”“설마? 그냥 몇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하도훈은 비로소 뭇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소개했다.“이분이 바로 제 큰아버지 아들…….”어떤 사람이 앞다투어 물었다.“설마 큰댁 도련님이요? 둘째 삼촌이 이렇게 젊고 멋있을 줄이야!”“훈남이 따로 없네. 지적이고 분위기도 있어, 그나저나 결혼은 했는지 몰라?”“흑흑흑,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도 있다니?”“…….”주위에 의논이 분분했다.이서는 이를 앙다물고 있는 임하나를 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나야, 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라니, 내가 뭘 질투해?”임하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자신의 감정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임하나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내가 화난 이유는 하은철 둘째 삼촌이 아닌 그 사람이 등장했기 때문이야.”“나도 몰라.”이때 다른 사람들도 하은철의 입에서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YS 그룹 회장이 아닌 그의친구라는 걸 알게 되었다.“여러분, 오해하게 해서 죄송합니다.”이상언은 웃으며 말했다. 시선은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지나 임하나에게 떨어졌다.“오늘 저는 제 친구를 대신하여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제가 잠깐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큰 행사에 하 회장님 참석하지 안 한 건 아니, 못한 건 지금 네팔 쪽에 발이 묶여 출국 못하고 있습니다. 저더러 미안함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말하면서 이상언은 하도훈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했다.하도훈은 이상언이 한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의상 상황은 받아넘겨야 했다.“아이고, 천만에요, 하 회장도 하관식에 오고 싶은 마음 잘 압니다. 하지만 천재지변 앞에서 어쩔 수 없으니까요.”“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이상언은 또 하도훈과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고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지환에게 지정된 자리에 이렀다.하관식은 이상언의 도착과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사람들이 하관식장에서 나와 호텔로 향했다.길에서 임하나는 이상언을 가로막았다.“어떻게 당신이……?”
그러나 심동은 다가와 이서에게 악담을 퍼붓기는커녕 오히려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이서 씨, 오랜만이야, 요즘 어떻게 지냈어? 윤씨 CEO가 됐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축하해.”이서는 망설이며 임하나를 바라보았다. 임하나도 심동의 태도에 다소 놀랐다.그러나 두 사람은 방심하지 않았다. 뒤에는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장희령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임하나는 비록 장희령과 정면으로 충돌한적이 없지만, 그녀는 이미 상류층에서의 이름이 자자한 인물이었다.그녀에게 밉보였다간 뼈도 못 추스렸다.그러나……장희령은 이서 앞에서 이전의 오만방자한 자세를 접고 미소를 지으며 이서에게 말을 건넸다.“이서 씨.”심동은 일부러 두 사람을 이리저리 번갈아 보며 둘러보았다.“둘이 아는 사이였어?”장희령은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그런 셈이지. 이전에 약간의 오해가 있었는데……. 우린 싸움 끝에 정이 붙은 셈이지.”심동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둘 사이에 오해가 있었다고? 뭔데?”이서와 하나도 눈치 빠른 거 빼면 시체였다. 두 사람이 맞장구 치며 놀고 있다는 걸 벌써부터 눈치챘다.두 사람은 연기를 끊을 생각 않고 조용히 그들의 연극을 보았다.장희령은 역시 여우주연상 수상자 답게 그날 발생한 일을 감정을 넣어 실감나게 심동에게 전했다.그러나 그녀는 모든 잘못을 비서에게 떠넘겼고, 자신은 무고하게 연루된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한쪽에서 듣고 있던 임하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흘겼다.이서는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장희령이 뭐라고 떠들어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장희령이 말을 마치자 심동은 잠시 뒤 중얼거렸다.“그러고 보니 자기 그 수행 비서가 정말 안 되겠네.”“응, 나중에 나도 오해한 걸 알고 그녀를 잘랐어. 여러 해 동안 나랑 함께한 아이라 정도 많이 들었지만,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심동은 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서 씨, 이러한 처리 결과에 만족해? 만족스럽지 않다면 이서 씨 뜻에 따라 처리할게.”이서는 웃으며 답했다.“이미 오래 전 일이에요
“지환 씨 없으니까 내가 감히 거리낌 없이 행동하지. 몰랐어? 지환 씨 있을 때 내가 너를 가까이하면 그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와. 어우 무셔라.”이서는 웃으며 화제를 돌려놓았다.“방금 질투 난다고? 뭐가 질투나?”임하나는 정색하고 일어섰다.“뭐긴 뭐야, 이서 네가 하이먼 스웨이 님의 수양딸이라는 게 질투나지. 흑흑흑, 만약 내가 그분의 수양딸이라면 나는 벌써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거야.”이서는 웃었다.“질투할 것도 많다. 친 딸도 아닌데.”임하나는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슬퍼하기 시작했다.“그래, 친자식은 아니지. 지난번에 하이먼 스웨이 님이 말씀했잖아. 딸 소식 있다고. 딸 찾으시면 곧다시 Y 국으로 돌아가겠지?”‘그렇게 되면 이서는 또 혼자가 된다.’‘그래도 지금 지환 씨가 옆에 있어서 천만다행이다.’임하나의 얼굴에 근심이 곧 말끔하게 사라졌다.하지만 아쉬운 것 어쩔 수 없었다.“하이먼 스웨이 님이 정말 네 엄마였으면 얼마나 좋을까?”“그분은 정말 좋은 엄마셔. 하지만 부모자식은 천륜이니 어떻게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자나.”“그러니까.”임하나는 턱을 괴고 있었다.“오늘 저녁에 집에 가지?”“음.”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빨리 돌아가고 싶은 거 보니 보고 싶은 사람이 있구나?”이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또 나 놀리는 거지?”“하하,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친구야, 말해봐. 이틀동안 남편과 떨어져 있었는데 어떤 느낌이야?”“속이 텅 비어 있는 게 빈 껍데기가 된 거 같아.”“정말? 그 정도야?” 임하나는 장난기 가득하게 이서의 코를 가볍게 스쳤다.“끝났군, 끝났어.”이서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찬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나 이제 정말 그 사람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하나야, 이러다 나 정말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되지 않을까?”임하나는 확고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럴리가.”“왜? 내 의지가 확고해서?”“아니.” 임하나는 정색했다.“지환 씨가 너 많이 사랑하잖아. 절대 바람 피울 위인은
다음 순간, 차 문이 열리고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이서는 힘겹게 머리를 들었다. 윤수정의 일그러진 얼굴이 어렴풋이 보았다.“쌍년, 얼른 나와!”날카로운 목소리를 듣자, 이서는 상대방은 윤수정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두피가 찢어질 듯한 통증에 이서의 의식은 더 뚜렷해졌다. 고통스러운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윤수정을 바라보았다.이서의 강렬한 눈빛에 윤수정은 제 발 저린 듯 심장이 움찔했다. 하지만 곧 험악하게 웃었다.“뭘 봐, 여긴 평소에 지나다니는 차량도 없어. 즉 너를 구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기대 같은 건 하지 마. 이 쌍년아, 감히 할아버지의 죽음을 이용해서 은철 오빠에게 접근해? 정말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구나.”이서는 윤수정에 의해 강제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서늘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윤수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윤수정, 너 정말 못났다.”“뭐라고?” 윤수정은 화가 날 대로 났다.“내 말이 틀렸어? 넌 계속 하은철과 결혼 못 한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잖아. 나 유부녀야. 그 하은철 “유부녀인 나를 원해도 너는 싫다는 거야. 너 자신의 문제인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 반성 좀 해.” 네가 나를 죽여도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나겠지. 너는 영원히 하은철의 사랑을 받지 못할 거거든.”이 말은 단번에 윤수정의 가슴속을 찔렀다. 그녀는 손을 들어 이서를 뺨을 갈겼다.이서는 그녀가 손을 놓는 틈을 타서 온 힘을 다해 윤수정을 매섭게 들이받았다.너무 갑작스러운 액션에 윤수정도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하지만 곧 손을 들어 이서의 머리를 내리눌렀다.옴짝달싹할 수 없는 이서는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머리가 터질 듯 어지럽더니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바로 이때 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누군가 오는 것을 본 윤수정은 아쉽지만 이서를 버리고 서둘러 도망갔다.이서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곧 바닥에 쓰러지겠거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쓰러져가는 그녀를 잡아주었
“형, 안녕.”소민찬은 소지엽의 질문을 피하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소지엽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소민찬을 바라보았다.“민찬아,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잖아. 네가 왜 여기 있냐니까?” 소민찬은 이제 마냥 대답을 회피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분명히 실마리가 드러날 것이니 말이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나만 보고 있어...’소희는 소민찬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며 의문을 제기했다.“모르셨어요? 소민찬 씨는 유인 언니의 남자 친구예요. 오늘 여기 온 이유도 사실상 저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 거죠.” “심유인 씨랑 사귄다고?”지엽이 눈살을 찌푸렸다.“며칠 전에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은 여자는 심유인 씨가 아니었잖아?” 소민찬과 심유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형, 아무래도 잘못 기억하는 것 같아. 그날 같이 밥을 먹은 사람도 유인이었어.” 소지엽은 지난번에 집에서 함께 식사한 여자가 심유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여자의 성이 뭔지는 기억 안 나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어렴풋이 기억나.’‘그 여자는 절대 심유인 씨가 아니었어.’ “아니, 그 여자는 심유인 씨가 아니었어!” 소지엽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리고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은 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잖아. 지금은 왜 또 심유인 씨와 사귄다는 거지?” 소민찬은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며 말하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다소 역정을 내며 말했다.“형, 이건 내 사적인 일이라, 형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부모님도 내가 여자 친구를 몇 명을 사귀는지 신경 쓰지 않으시는데, 형이 무슨 자격으로 이러는 거야?”“그래, 나는 네 사적인 일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어. 하지만 계속 본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본사에 들어가고 싶다면 절대 스캔들을 만들면 안 돼! 그런 일은 큰 파장을 일으킬 거라고!” 소민찬은 당황하기 시작했다.‘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
소민찬이 비웃으며 말했다.“허, 천재다운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심근영이 말했다.“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군요.” “천재답게 생긴 게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런 규칙은 누가 정한 거죠?” “어차피 임현태 씨는 허풍을 떠는 거지 않습니까? 시험에 합격에서 하버드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두 사람, 문맹이거나 눈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에요?”소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현태 오빠의 소개란에 당시 오빠의 성적을 적어둔 게 있잖아요. 클릭해서 좀 보세요. 현태 오빠는 수석으로 하버드에 들어갔다고요.”“그리고 오빠에게 추천서를 써준 사람은 하버드에서 공정하기로 유명한 물리학 교수라고요.”“설마 그 교수님보다 두 사람이 더 대단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소민찬과 심유인은 그제야 상세 내용을 확인하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또 빨갛게 달아올랐다.두 사람은 확인도 하지 않고 성급하게 큰소리를 친 것을 후회했다.‘처음부터 제대로 확인했다면, 임현태를 다른 방식으로 비웃을 수 있었을 텐데.’“그게 뭐 어떻다고 그래?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보통 어리석고, 융통성이 없잖아. 하지만 우리 민찬 씨는 달라. 단순히 해외 유학파일 뿐만 아니라, 자동차 경주, 승마, 골프도 할 줄 안다니까?”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그렇게 고상한 취미는 즐길 줄 모르지?” 현태가 말했다.“하 대표님의 곁에 있는 경호원에겐 기본인 것들입니다. 만약 그것도 할 줄 모른다면, 하 대표님은 저를 곁에 두지 않으시겠죠.”‘기본’이라는 말은 소민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완전히 짓밟는 것이었다. 자동차 경주, 승마, 골프...이런 것들은 흔히 ‘재산을 낭비하며 점차 타락하는 부잣집 도련님들의 기본 패키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훌륭한 실력을 갖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현태에게는 그저 기본일 뿐이었다.‘감히 날 모욕해?’소민찬이 일어서서 자리를 떠나겠다고 말하려던 참에 고용인이 뛰어와 말했다.“윤 대표님
심유인과 소민찬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가까스로 하버드에 합격했다고?’‘허풍 떠는 거 아니야?’ “정말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라고요? 하버드 학원 출신이 아니고요?” 현태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저는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 맞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조사해 보셔도 되고,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두 사람은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핸드폰을 꺼내 하버드 대학교 홈페이지를 검색했다.두 사람은 약간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으나, 홈페이지 링크를 누르자마자 우수한 동문의 행렬에 있는 현태의 얼굴을 발견했다.이를 믿을 수 없는 것은 이지숙도 마찬가지였다.‘정말... 사진 속의 사람이 현태 씨라고?!’ ‘말도 안 돼!’‘소민찬이 어느 대학교에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Y국에 있는 대학교 출신일 거야. 학문도, 능력도 없는 재벌 2세들이 어디서 신분 세탁을 하는지는 불 보듯 뻔한 거니까.’ Y국의 학위는 이수하기가 가장 수월해서 누구나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 사람은 분명히 알지 못해서 겁을 먹기 일쑤였다.심유인은 원래 소민찬의 학력을 빌미로 현태를 놀라게 하려 했다.하지만 놀래키기는커녕 본인이 놀라게 된 셈이었다. 심유인은 곧 문제점을 발견했다.“... 하버드 대학교에 체육생으로 입학한 게 아니네요? 전공은 물리학이랑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임현태 씨는 체육에 타고난 거 아니었나요? 왜 물리학을 전공한 거죠?”“아, 시험 봐서 들어간 게 아니라, 부정 입학이었나 보네요, 그렇죠?” 소민찬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혈색을 띠며 현태의 학력을 비웃었다.“하하, 유인아, 그런 건 부정 입학이나 비리가 아니라 기부라고 하는 거야.”“임현태 씨, 입학하는 데 얼마가 필요하던가요?”“하하, 하 대표님과 대체 무슨 사이길래 그렇게 아낌없이 돈을 쓰는 거죠?” “저는 학력을 산 적도, 학력을 위해서 돈을 쏟아부은 적도 없습니다. 정당하게 시험으로 합
심근영이 얼른 말했다.“그래, 내가 경솔했군. 하지만 현태는 내 말의 뜻을 알 거야.” “우리 소희는 어깨를 들지도, 손을 쓰지도 못해. 이 아이와 서로 보완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니, 아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모두 화기애애한 웃음을 짓는 반면, 옆에 있던 심유인과 소민찬만이 웃지 못했다. 더욱이 소민찬은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사실, 소민찬이 여기에 온 것은 심유인이 돈을 주면서 자신의 남자 친구 역할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즉, 소민찬은 여기에 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 하지만 지금의 소민찬은 웃음거리로 전락했으니, 그가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소민찬은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하지만 심유인은 곧장 가서 소민찬을 끌어당겼다.“어디 가요?” 소민찬은 이미 주방에 도착한 심근영 일가를 힐끗 보았는데, 그들은 소민찬과 심유인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소민찬이 목소리를 낮추었다.“당연히 가야지! 왜, 계속 남아서 네 사촌 동생의 남자 친구한테 굴욕이라도 당하라는 거야?!” “저는... 저 사람이 그저 운전기사인 줄 알았다고요.”“일단 진정해 봐요. 어쨌든 민찬 씨는 소씨 가문의 사람이잖아요.” “소씨 가문의 도련님이 한낱 경호원보다 못하겠어요?” 소민찬은 분명 소씨 가문의 사람이지만, 소태성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더군다나 소지엽이야말로 소태성 같은 사람인데, 소민찬이 어떻게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이것은 소민찬이 가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외국으로 내몰린 이유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소태성에게 즉시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심유인이 시선과 체면이 하늘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소민찬은 난감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나는 소씨 가문의 도련님일 뿐이야. 사람을 죽일 듯이 때리는 사람은 당해낼 수 없다고.” 심유인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가요, 저 사람들의 기세를 제대로 꺾어놓자고요.”
“엄마,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현태 씨가 왜 그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고 생각하세요? 현태 씨의 돈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소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심유인이었다.“소희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운전기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겠어?” 소희도 심유인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언니, 현태 오빠가 누구의 운전기사인 줄 알고나 말하는 거예요?” “뭐?”심유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서 언니예요.”“이제 이해가 좀 되세요?”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심유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현태 오빠가 운전기사인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또 다른 직업도 있어요. 그건 바로 이서 언니를 보호하는 거죠.” “운전기사일 뿐만 아니라, 경호원이란 말이에요.” 심유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시큰둥하게 말했다.“흥,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 기껏해야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하는 사람인 거잖아. 우리 집에도 경호원이 있어. 경호원이라 해봤자 한달에 몇백만원을 버는 게 전부일 텐데, 90억짜리 헤어샵을 사는 게 말이나 돼?” 소희는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현태의 진짜 과거를 털어놓기로 했다.“허, 몇 년 동안 UFC의 챔피언 자리를 지킨 사람한테, 몇십억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세요?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거예요?” “UFC?!”심유인은 격투기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UFC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소희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말했다.“모르면 인터넷에 찾아보시던가요.”“언니, 제가 언니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현태 오빠가 평범한 운전기사라고 생각해서 일부로 언니의 남자 친구도 부른 거잖아요.” “저희 부모님께는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언니의 남자 친구와 제 남자 친구를 비교하고 싶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니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언니의 남자 친구보다 돈이 더 많을
현태는 설명하기 시작했다,“제가 그 헤어샵을 인수하긴 했지만, 사모님께 드릴 거거든요.” “앞으로는 사모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이십니다. 미용은 하고 싶을 때 하시면 됩니다.”심씨 가문에는 전속 미용사가 있었지만,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게다가 이지숙이 미용 기계를 사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어떤 시술을 두세 달이나 반년 정도 지나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용 기계에 먼지만 앉지 않겠는가?결국 이지숙은 헤어샵에 가서 시술받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샵에 가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가끔 일이 생겨서 시간을 놓치면, 다시 예약을 잡아야만 했다.이지숙은 진작에 헤어샵을 인수하려고 했는데, 줄곧 자신에게 적합한 헤어샵을 찾지 못했다.이지숙은 현태가 선택한 헤어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그 샵의 사장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국에서도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던 터라 온 가족이 외국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이지숙은 이미 그 사람과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는 않았고, 모든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생각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심유인은 ‘말도 안 돼’ 라는 말만 연신 해댔다.“말도 안 돼요! 임현태 씨는 그냥 운전기사잖아요. 대통령을 위해 운전한다고 해도 헤어샵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요!”그 헤어샵은 심유인도 아는 곳이었다.‘거긴 적어도 100억은 있어야 인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이지숙도 마음속에 품었던 호기심을 드러냈다.“이 샵의 사장이 계속 외국에 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 사람하고 연락한 거죠?” “아, 그 부분은 하 대표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마침 하 대표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과 구면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하 대표님의 곁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장님께서 흔쾌히 샵을 양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지숙이 물었다.“하 대표가 이 일에 직접 나섰다고요?” “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조롭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