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은 금테 안경을 밀었다.“이씨입니다만?”이하영은 머릿속으로 상류층 가문 중 이씨인 집안이 있는 지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게다가 4대 가문 중 4위인 민씨 집안이지만, 그들은 3대 가문을 제외하고는 별로 눈여겨보거나 신경 쓰는 집안도 가문도 없었다.이하영은 더 이상 생각하기 귀찮은 듯 비웃으며 말했다.“허허, 점잖게 생긴 걸 보니 글공부는 좀 한 거 같은데……, 공부 많이 하면 뭐하나? 결국은 우리 대가문들의 회사에서 월급쟁이로 살아갈 텐데…….”이상언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도 명문세가의 자제였다.대대로 의사 집안이라 교양과 품위가 넘쳤다.그도 이하영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상언 씨!”임하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민씨 집안처럼 근본 없는 졸부들과 무슨 얘길해요? 저 사람들 눈에는 돈밖에 안 보이는데.”“그렇구나, 어쩐지 입만 열면 다 돈이더라니.”맞장구를 치는 두 사람을 보고 이서는 입을 오므렸다.비록 이상언이 뭘 하려는 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호흡이 아주 척척 잘 맞았다. 그가 3개월 뒤 당당하게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건 따놓은 당상 같았다.반면, 이하영은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너희들…….”옆에 있던 이서정은 상황을 보고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사모님, 이런 거지들과 뭐 하러 화를 내요? 싸워 봤자 입만 아프지, 저 사람들 때문에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잖아요. 점장님……!”이서정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저 사람들 내보내 주세요.”“잠깐!” 이상언은 눈썹을 비꼬았다.“고객을 이런 식으로 내쫓는 건 처음이네요?”“사러 왔어야 고객이지, 무슨…….” 이하영은 이상언의 말을 듣고 비웃었다.“살 돈은 있고?”그녀의 말에 이상언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그에게 돈이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이하영이 처음이었다.그는 더 이상 이하영과 이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 이서에게 말했다.“이서 씨, 쿡이 준 목록 꺼내 봐요.”이서가 리스트를
“진짜인지 가짜인지 이따가 결제해 보면 알 수 있겠죠.” 이상언은 이서를 돌아보며 말했다.“이서 씨, 골라봐요.”‘어차피 결국은 지환이 계산할 테니까.’이서도 천재 의사인 이상언의 몸값이 비싼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둘은 어디까지나 일반 친구일 뿐인데, 고액의 드레스를 사는 건 이서도 마음속으로 편하지 않을 거다.돈으로 돌려주고 싶어도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밖의 금액이었다.“상언 씨, 우리 그냥 가요. 나 출근시간 다 됐어요.”이서가 몸을 돌려 나가고자 하자, 이하영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봐봐, 내가 뭐랬어? 가짜라고 했잖아. 허허, 부부가 아주 호흡이 척척 잘 맞는구다.”이서가 화를 내기도 전에 임하나가 참지 못하고 이서의 옷자락을 잡고는 이를 악물며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서야, 걱정 말고 사. 내가 너에게 선물한 셈 치자. 내가 나중에 상언 씨에게 갚을 게.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 여자 정말 너무 개매너야.”이서은 가볍게 웃었다.“뭐 하러 다른 사람의 말 몇 마디에 함부로 돈을 써? 게다가 웨딩드레스는 굳이 살 필요 없잖아. 대여해서 입어도 되고…….”이서의 말을 들은 이상언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의 남편의 재력이면 평상복으로 매일 드레스를 입고 다녀도 된다고…….’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이서를 보면서 이상언은 다소 미안한 감이 들었다. 하지만 친구의 행복을 위해 진짜 신분을 알려주고자 하는 충동을 억누르고 이서 곁으로 가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 돈은 나한테 껌 값이에요.”잠시 멈추었다가 그는 다시 말했다.“나 이렇게라도 분풀이 해야겠어요. 이서 씨가 안 사면, 나 울화병이 날 거 같아요. 아, 열 받아.”임하나도 옆에서 부추겼다:“그래, 이서야, 걱정 말고 마음껏 골라 봐. 이 정도 금액대는 상언 씨한테 아무것도 아니야.”두 사람은 이서를 가게 안쪽으로 밀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점원에게 말했다.“먼저 드레
지환은 국내외에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신비로운 존재였지만, 천재 의사인 이상언은 아니었다.늘 다양한 의학 세미나와 학술회의에 참가해야 하는데다, 본인도 또한 지환과 친구라는 관계를 숨기지 않아 자연스레 더욱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이하영과 이서정은 모두 이 이름을 알고 있었다.민씨 집안이 4대 가문의 대열에 오른 후 이하영은 자연스레 자신들보다 높은 가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그리고 이서정은…… 지환 관련 자료를 찾다가, 이상언이 그의 친구라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그래서 그녀는 이 이름에 대해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저요.” 이상언은 몸을 돌려 달려온 남자에게 말했다.그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이상언 앞에 가서 몸을 굽혀 말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 샵의 총괄 매니저입니다. 제 수하의 불찰로 불쾌감을 드려 죄송합니다. 조금이라도 보상하고 싶은데…… 말씀만 해주세요!”그 남자는 진정성을 표시하기 위해 말투를 가중시켰다.이상언은 손가락을 들어 이하영과 이서정을 가리켰다.“저 사람들,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평생 이 샵에 발 못 들여놓게 하세요.”남자는 상대 쪽이 이하영과 이서정이라는 것을 보고 난처했다.“이건…….”“왜요, 뭐라도 된다며?” 이상언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부드럽게…… 웃었다. 부드러움 속 깊은 곳에 쉽게 알아채지 못할 한기가 숨어 있다.“그런데…….”남자는 이상언의 곁으로 다가가 이서정을 한 번 슬쩍 보았다.“이서정 씨는 대표님의 숙모이니……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이서정을 블랙리스트에 올리다니, 죽고 싶은 거지…….’‘하은철 대표도 삼촌인 하 회장을 어려워하는데…….’‘월급쟁이인 내가 어찌 감히…….’웨딩드레스 샵 안이 갑자기 조용했다. 이서정도 그 말을 들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뒤 백이 되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폈다.“당신이 상언 씨군요. 남편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서정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상언 씨
경비원 네 명이 들어와서 이하영과 이서정을 밖으로 내보냈다.이서정이 데려온 경호원은 전혀 힘을 못 쓰고 의기소침하게 이서정과 이하영의 뒤를 따라 드레스 샵을 나갔다.이상언의 요구대로 일처리를 끝낸 총괄 매니저는 또 이상언 앞으로 달려가 허리를 굽혔다.“상언 도련님, 이건 하 대표님께서 드리라고 했습니다.”이상언은 슬쩍 봤다. 카드였다.“안에 20억이 있다고 합니다. 하씨 그룹 산하의 어떤 샵에서든 마음대로 사용 가능하답니다. 대표님이 사과의 뜻으로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임하나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차며 팔로 이서를 툭 쳤다.하은철 곁에서 8년간 있었던 이서지만. 한 번도 그가 이렇게 통 크게 누군가한테 돈을 쓴 걸 본적이 없었다.‘절대적인 권세 앞에서 하은철도 고개를 숙이는구나.’ 20억 원은 이상언에게 구우일모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환을 생각하며 웃으며 받았다.“그래, 하은철이 그래도 눈치가 있네. 오늘 일은 여기서 그만 두겠지만,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지금처럼 쉽게 안 끝날 거예요.”책임자는 바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네, 반드시 선생님 뜻을 대표님께 꼭 잘 전달하겠습니다.”“그래, 가봐요.”“네.”총괄 매니저는 사면을 받은 사람처럼 황급히 자리를 떴다.한 바탕 야단법석을 떨고 난 뒤, 점원들도 이상언 등 일행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다는 걸 줄 알고 다들 하나같이 열정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사장님, 사모님,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우리 샵의 신상 웨딩드레스입니다. 너무 예뻐죠?”“사모님, 여기 전통 한복도 있습니다. 원하시면…….”“…….”재잘거리는 점원을 앞에 두고, 이서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오자.”임하나도 핸드폰을 보았다.“그러네, 점심시간 끝났다.”이상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와 임하나를 데리고 샵을 나섰다.차에 오르자, 이상언은 카드를 이서에게 건네주었다.“이서 씨, 이 카드 받아요.”하은철이 준 카드였다.이서는 손을 저
이상언은 먼저 이서를 서우로 데려다주고, 임하나의 회사로 갔다.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임하나가 안전벨트를 풀려고 할 때, 이상언의 길쭉한 손가락이 그녀의 하얀 손을 잡았다.임하나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일부러 침착한 척했다.“왜요?”“할 말없어요?” 이상언은 미소를 머금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임하나를 바라보았다.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임하나는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괜히 딴소리를 했다.“무슨 말이요?”이상언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다가갔다.“내가 오늘 자기 친구를 도와준 셈인데…….”보상을 원하는 눈빛이었다.두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임하나는 이상언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볼에 뿌려진 따뜻한 숨결이 그녀를 간질였다. 임하나는 손을 들어 볼을 만지려 했다.그런데 이상언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하나 씨, 난 당신이 우리 관계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걸 두려워하는 걸 알고 있어요. 나도 서두르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가끔은 달콤한 보상을 주어야, 나도 이 기약 없는 시간 속에서 희망을 안고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요?”그는 독실한 신차처럼 그녀를 쳐다보았다.임하나는 살짝 떨렸다.“뭘 원하세요?”“아무거나 괜찮아, 그냥…… 내 머리라도 살짝 만져줘도 돼요.”임하나의 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럼 손 먼저 놔줘요.”이상언은 손을 풀어줬다.임하나는 흰 손으로 이상언의 뺨을 가볍게 들어올려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이러면 될까요?”그녀는 애써 쿨한 척, 용감한 척했지만 눈동자는 수줍음과 부끄러움을 여실히 보여주었다.이상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응, 아주 달콤해요. 아마 한동안은 잘 버틸 수 있을 거 같네요.”“…….”그녀의 얼굴은 반 박자 늦게 붉게 물들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안전벨트를 풀었다. “저 먼저 회사 들어갑니다.”이상언은 그녀가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입을 열었다.“하나 씨, 혹시 내가 자기 친구 도와주면 늘 이런 대우받
한눈에 자기 속셈이 들통났음에도 이상언은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하하 웃었다.“우리 사이에 니 것 내 것 어딨어? 안 그래, 친구야?”그는 운전대를 돌리면서 진지하게 몇 마디 더 했다.“정말이지, 이서 씨가 널 생각해서 돈을 절약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좀 그렇더라…….”지환은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말했다. [알았어.]안다는 것은 곧 해결하겠다는 걸 의미한다.이상언도 더는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전화를 끊고, 지환은 다시 회의실로 돌아와 그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민호일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를 보였다.“오늘은 먼저 돌아가세요.”민호일의 얼굴에 미소가 굳어졌다.“하지만 회장님, 오늘 보고드릴 게 있어서…….”지환은 그를 흘겨보았다.민호일은 말을 하지 못하고 순순히 사무실을 나갔다.민호일이 떠난 후 지환은 이천을 불렀다.“이서정에게 배역 몇 개 더 넣어줘.”이천은 다소 난처했지만 대답했다.“예!”“잠깐!”지환의 눈빛이 차가웠다.“주인공이 아니라 조연급으로……. 수중 신이나 격투 신이 있는 역할로……. 고된 배역일수록 좋아.”이천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네?”몇 초를 기다렸는데도 반응이 없자, 이천은 바로 일처리 하러 나갔다.민호일은 지환의 사무실에서 나온 뒤 곧바로 집으로 갔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가정부가 내온 물컵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오만방자한 것! 시건방져! 돈만 아니면, 애송이 같은 널 상대하지도 않았어?”이하영도 뒤따라 집에 들어왔다.남편에게 오늘 당한 일을 하소연하려던 그녀는 민호일의 화난 목소리를 듣고 즉시 물었다.“여보, 대체 어떤 놈이 감히 우리 심기를 건드렸어요?!”“누구겠어?!” 민호일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하 회장이란 그 놈 말이야, 자기가 돈 좀 잘 번다고 완전 잘난 척하더라고…….프로젝트 기획안 다 짜 놓고 이제 사인만 하면 되는데, 글쎄 전화를 받고 나오더니 갑자기 나보고 가라네? 이런 경우가 어딨어?”이하영은 민호일 입에서 또 하씨 집안 사람이 언급되자, 방금 사
“그리고 앞으로 하 회장이 국내에서 투자를 확장해 나갈 테고……, 그렇게 되면 하씨 가문의 판도가 뒤바뀔 수도 있어. 하은철에서 하지환으로…….”민호일의 말을 듣고, 이하영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만약 하 회장의 파워가 점차 강해진다면……, 완전 초대박인데요. 내가 알기론 북미와 H국 시장 점유율을 1위한 기업은 지금까지는 없었는데…….”“맞아.” 민호일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이서정과 가까이 지내야 해. 오늘 같은 일은…….”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그런데…….”이서정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윤이서가 우리 예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그냥 두고만 볼 거예요?”“당신도 방금 얘기했잖아, 그년 남편이 이상언이라며?”민호일의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이상언과 하 회장은 절친이야. 두 사람의 관계가 가깝다고. 그니까 좀 참자고, 괜한 노여움 사지 말자고. 나중에 하 회장의 북미와 국내의 시장을 다 점유하면, 그 때 우리가 당한 일들을 부풀려서 하 회장한테 얘기해보자고.”“만약 그때까지도 하회장이 이서정을 아낀다면, 우린 운이 좋은 거지. 이서정의 손을 빌어 복수할 수도 있을 테니. 만약…….”한참 동안 말을 아끼던 민호일은 노쇠하고 혼탁한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싫증이 났다면, 그때 가서 다른 방법 생각해 보는 거야.”이하영은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알랑거리며 남의 비위를 맞추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응, 알았어요. 이서정 씨는 걱정 말아요. 내가 잘 챙길 테니까.”……이서정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매니저의 전화를 받았다.매니저의 말투가 초조했다.[언니, 언니 혹시 하 회장님 기분 상하게 한 일 있어요?]매니저가 말을 꺼내자, 이서정은 괜히 밖에서 참았던 화를 매니저에게 퍼부었다.“내가 미쳤어? 뜨신 밥 먹고 할 일 없어서 남의 심기 건드리게?”매니저는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언니, 화내지 말아요. 근데 일이 좀 이상해요
지환은 결혼 후 유머가 많이 는 것 같았다.반면 전화 반대편에 있는 이서정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매니저가 보낸 배역들을 보니 걱정이 태산이었다.매니저가 위로를 안겼다.[언니, 마음을 넓게 가져라. 적어도 연기를 향상시키라고 준 배역이잖아요. 누군가가 언니를 골탕먹이는 게 아니라…….]그러나 이서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만약 내가 정말 하회장 부인이라면, 이런 수모를 받았을까?’이까지 생각하니 그녀의 머릿속에 지환의 모습이 떠올랐다.지난 만남이 한 달 전이었지만 이서정은 지환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멋있고 카리스마가 넘쳤다.그녀의 걸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가슴 저 끝바닥에서부터 용솟음쳤다.‘난…… 남자를 잘 알아, 하지환 내가 널 꼭 내 남자로 만든다!’지환의 차가 별장에 도착했다. 별장 거실에 따뜻한 불빛이 환하게 비친 걸 보니, 이서가 집에 와있다.지환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서렸다.하지만 낮에 이서가 웨딩드레스 샵에서 당한 일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는 차에서 내려 넥타이를 풀어내렸다. 그러고는 음침한 표정을 거두고 집 문을 향해 큰 걸음으로 걸어갔다.문을 여는 순간, 구수한 밥 향기가 코 안 쪽을 너무 가슴속까지 푸근하게 미어 들어왔다. 지환의 눈가에 옅은 웃음이 어렸다.“여보, 나 왔어.”이서는 한창 상 차리는 중이었다. 지환의 목소리를 듣고는 뒤돌아보며 말했다.“왔어요?”“응, 웨딩드레스는 잘 골랐어?” 지환은 오늘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물었다.이서는 의자를 당겨 지환을 앉혔다.“아직이요.”자리에 앉은 지환이 두 팔을 벌렸다.아직도 앞치마도 벗지 않은 이서는 어리둥절했다.“왜요?”“안아줘.” 지환의 표정은 달콤한 사탕을 달라고 보채는 해맑은 아이 같았지만 눈 밑에 쌓인 피로는 감추지 못했다.이서의 심장이 찌릿하며 왠지 모르게 아리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지환을 안았다.지환은 머리를 그녀의 배에 비비적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
심유인이 그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숙모, 민찬 씨가 특별히 준비한 팔찌예요. 마음에 드세요?” 이지숙은 흘긋 보더니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띠었다.그 팔찌는 아주 훌륭한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유인이의 친엄마도 아니고, 소민찬 씨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건데도 아주 통 크게 행동하는구나.’하지만 이지숙은 잠시 후에 소희의 남자 친구가 올 것을 떠올리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사실, 며칠간 이어진 심근영의 설득에 이지숙은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래, 어차피 우리 심씨 가문은 많은 자원과 돈이 있잖아. 그 사람이 성실하기만 하면, 우리 가문의 사위라는 이름으로 상류층은 아니어도 소소한 부자는 될 수 있을 거야.’하지만 지금 소민찬의 씀씀이를 보자, 이지숙은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상류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었다. 가방이나 옷 같은 큰 것들뿐만 아니라, 가끔은 화장품조차도 비교해야 하니 말이다. 이지숙은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으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밀리면, 매번 모임 때마다 얘깃거리가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이지숙이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라는 것에 반감을 가지 이유였다.엄마로서, 자기 딸이 잘못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터. “숙모, 이건 삼촌께 드리는 거예요.” 심유인이 꺼내든 두 번째 선물은 시계였다. “롤렉스 시계예요. 최신 모델인데, 삼촌도 분명히 좋아하시겠죠?”이지숙은 심유인이 손에 든 시계를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저 시계는... 적어도 1억은 넘을 거야.’ ‘물론 유인이한테는 작은 성의일 뿐이겠지만...’ 이지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희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소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심유인의 선물 공세가 고의로 현태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인 것을 알아차렸다.‘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
“그럼 그렇게 할게.”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는 사무실에 들어가 고이서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몇 가지 시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안 맞아.’‘하지만 내가 대체품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즉, 지환이나 구태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힘겹지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소희는 초조함 속에서 깨어났다. 고용인들이 그런 소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곧 남자 친구분이 대표님 내외분을 만나실 텐데, 어째 긴장하는 모습이 아가씨가 그분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 같네요?” 놀림당한 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용히 고용인에게 다가가 물었다.“아주머니, 심씨 가문에 몇 년 동안 계셨어요?”고용인이 말했다.“4, 5년은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그럼 아주머니께서는 저희 부모님께서 제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심동, 그러니까 저희 오빠가 장희령을 데려왔을 때 많이 혼났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고용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가십 매체가 그런 것도 알고 있던가요?”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망했어.’‘그 매체에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잖아!’‘우리 부모님은 자녀의 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셔.’‘어쩌면 오늘 현태 오빠를 부른 것도, 혼내기 위한 걸 수도 있어.’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고용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내외분께서 도련님을 혼내신 이유는, 장희령 씨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게다가 그 아가씨는 인품마저 좋지 않았잖아요. 아가씨를 겨냥하지만 않았어도 심씨 가문에 시집올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죠.”고용인의 위로에도 소희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심지어 현태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
이서는 고이서의 신분을 알아내는 데 급급하여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백화점 입구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소희가 말했다.“그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해요?”현태가 웃으며 말했다.“머리 쓰는 일은 나한테 묻지 마. 사모님께서 곧 결과를 알려주시겠지.”“아무래도 내 머리는 월요일에 쓰는 게 좋겠어.” 현태의 눈빛이 다소 부끄러워졌다.“월요일에 소희 씨 부모님께 순조롭게 인정받아서 우리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고개를 숙인 소희의 뺨도 붉게 달아올랐다.“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은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가르쳐 주긴, 솔직한... 내 속마음이야.” “청산유수네요.”소희가 현태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이만 가요, 옷 사야죠!”“그래.”현태는 흐뭇하게 대답한 후, 소희가 자신을 끌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한편, 백화점 입구에 도착한 이서와 지환은 순조롭게 택시를 잡았다.두 사람이 차에 오른 후, 지환이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물었다.“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말해줄 수 있어?”이서가 입술을 오므리며 중얼거렸다.“하지환 씨한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잖아요.”“뭐가 적절하지 않아?” “우리는 곧 이혼할 거예요. 이런 시점에서 나한테 생긴 일을 하지환 씨한테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환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앞줄에 앉아 있던 운전기사는 열정적인 노인이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두 사람은 이혼한다고 하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결혼한 이상, 두 사람은 인연인 거예요.”“나중에는 이혼하고 각자의 갈 길을 간다고 해도, 아직은 이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혼하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인연이 끝나지 않은 거라면, 일이 있을 때 서로 상의하고 도울 수도 있는 거죠.” “나를 보세요, 마누라와의 관계가 다 끝나는 바람에 때로는
화장실을 나선 소희는 급히 매장으로 돌아왔고, 현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는 어디 있어요?”“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해 보여?” “어서요, 이서 언니부터 찾아야 해요.”소희는 현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현태는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모습에 급히 이서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매장 입구에 있는 지환을 보았으나, 이서를 찾지는 못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사모님은 어디 계세요?”굳은 표정의 지환은 여전히 이서가 떠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소희가 현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여기서 형부랑 있어 주세요. 나는 다른 곳에 가서 이서 언니를 찾아볼게요.” 하지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이서의 모습이 보였다.소희가 급히 다가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이서 언니...” 이서가 맥없이 짧게 대답했다.“응.” “언니, 왜 그래요?”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던 지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가와 긴장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성지영을 만났는데...” “언니도 성지영을 봤어요?”소희가 놀라며 물었다.“그럼 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봤겠네요?” 이서의 눈이 반짝거렸다.“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을 봤어?”“아니요, 보지는 못했는데 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그 여자, 성지영의 딸인 것 같았어요. 언니, 외동딸인 거 아니었어요? 성지영한테 언제 딸이 하나 더 생긴 걸까요?” “딸?”이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렇다니까요.”“아! 두 사람의 말투를 들어보니, 언니가 두 사람을 보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어요.”소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언니한테 또 다른 자매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거예요?”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주 낯익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잘 생각해 봐, 두 사람이 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소희는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