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임하나에게 함께 선물 사러 가자고 전화했다.전화기 너머에서 임하나는 우물쭈물했다.[자기, 오늘 내가 갑자기 야근하게 되어서 함께 못 갈 거 같은데…… 어떡하지?]“그래, 그럼 먼저 일 봐.”전화를 끊고 이서는 네비게이션을 켜고 근처에 선물을 살 수 있는 마땅한 곳이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선물을 사서 예쁘게 포장을 마치고, 배달할 집 주소까지 적고 나니, 이미 저녁 시간이었다.시간을 확인하고 지환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전화를 꺼냈는데 마침 전화가 울렸다.발신자 이름을 보고 이서의 눈동자가 약간 차가워졌다.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그녀가 받았다.“이서야…….”성지연이 비위를 맞추며 물었다.“시간 있니?”이서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없어요.”성지연은 딸에게 구차하게 굴었다.“공모전 일은 수정이가 잘못했어. 걔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어. 사죄의 의미로 너에게 밥을 사주고 싶다는데……. 이서야, 한 번만 너그럽게 봐줘라. 엄마의 체면을 봐서라도…….”이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아니요, 정말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잠자코 있으라고 해요. 괜히 내 앞에서 나서서 내 속 끓이지 말고…….”“윤이서!” 성지연은 목소리를 높였다.“원철도 같이 나온대. 이게 너의 마지막 기회야. 너 정신 똑바로 차려!”이서가 손가락을 꽉 쥐었다. 성지연이 전화한 건 역시 하씨 집안 며느리 자리를 위해서였다.이서는 전화를 탁 끊고, 부모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이 모든 걸 끝낸 이서는 여전히 화가 삭지 않아 덜덜 떨렸다.이제부터 정말 윤씨 집안과 인연을 끊을 것이다.이때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이서 곁에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면서 덩치 좋은 근육맨 두 명이 내려왔다.“윤이서 씨?”이서는 경계하듯 후퇴했다.“당신들 누구야?”두 사람은 서로 마주치고는 두말없이 이서의 팔을 잡고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두 사람의 동작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출퇴근 시간이랑 맞물리다 보니 두 사람의 행색이 사람들의 눈에 띄게 크게
“그만해!” 남자들의 손이 몸에 닿자, 이서는 굴욕적인 눈물을 흘렸다.“전화할게, 내가 전화할게!”두 경호원은 아쉬운 듯 마주 쳐다보고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이서가 마침내 전화하겠다는 소식을 들은 민예지는 득의양양하게 들어와서 옷이 이미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이서를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진작 고분고분 말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괜히 몸 고생만 했잖아. 휴대전화 줘.”이서는 두 팔로 몸을 꽉 감싸고 휴대전화를 받지 않았다.“왜, 또 마음 바뀐 거야? 번복하려고?”이서는 코를 훌쩍거리며 목을 곧추세웠다.“먼저 옷이나 갖다줘.”“설마 시간을 끌려고 하는 수작은 아니겠지?” 민예지는 가볍게 피식했다.“여기 민씨 집안 바닥이야. 하은철도 들어오려는 한바탕 고생해야 할걸? 네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때까지 시간을 끌어봐라, 소용이 있나?”차갑게 웃는 이서는 눈동자에는 아직도 눈물자국이 남아있었다.“그냥 옷만 하나 걸치겠다는 건데, 넌 뭐가 그리 두렵니?”“그래.” 민예지는 더 이상 헛소리하기 싫어 옷을 가져오라고 했다.루즈한 롱스커트였다.이서는 옷 위에 껴입었다.이목구비가 예쁘고 몸매까지 베이글녀인 이서는, 헐렁한 옷을 입고 있어도 예쁨을 감출 수 없었다. 심지어 여리여리한 느낌은 남자의 보호본능을 더욱 자극했다.민예지는 재촉했다.“얼른 전화해!”“잠깐만.”“너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민예지는 슬슬 짜증이 났다.“윤이서, 내 인내심은 한계를 테스트하지 마. 전화 안 할 거면 내가…….”“너는 왜 사람들이 너와 날 놓고 비교하는지 아니?” 맑은 눈빛을 한 이서는 갑자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민예지는 정곡을 찔린 듯 움찔하며 물었다.“왜?”“알고 싶어? 그럼, 가까이 와봐!”민예지는 1초 동안 망설였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이서의 방향으로 걸어갔다.“빨리 말해.”이서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민예지의 목을 누르고 온몸의 힘을 다해 그녀를 창가로 끌고 갔다.“윤…… 이서…… 너
이서는 곧바로 수술실로 실려 갔다.지환은 따라 들어가려다가 이상언에게 제지당했다.“친구…….” 이상언이 침착하게 말했다.“이서 씨 괜찮을 거야.”고개를 돌린 지환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아직 가시지 않아 무서워 보였다.오랜 친구로서 이상언도 지금의 지환이 좀 무서웠다.그는 지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지환은 침착하고 자제력이 강하며 절대로 실수하거나 허점을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마지노선을 건드리지 않는 한.지환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서는 지환의 마지노선이 되었다.다만 본인조차도 모르고 있다.“이서 어떻게 됐어요?”소식을 받고 달려온 임하나는 이상언을 보자마자 얼른 다가가 물었다.이상언은 지환을 한번 보고는 고개를 돌려 임하나에게 대답했다.“방금 수술실에 들어갔어.”“어느 개자식이 그랬어요?” 임하나는 분노했다.“민예지.”“젠장!” 임하나는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이상언은 그녀를 가로막았다.“어디 가요?”“민예지 그년한테 복수하러 가야죠. 미친년 완전히 돌았어. 틈만 나면 이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가지 마요.” 이상언은 이 만만찮은 두 사람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이 일은 지환이 처리할 거예요.”“어떻게 처리한대요?”그녀가 지환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민예지는 4대 가문 중 하나인 민씨 집안 사람이다. 게다가 민씨 집안의 권력자인 민호일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 바로 그의 딸 민예지였다. 따라서 하경철 노인이 나서도 좀 난처한 상황이다.‘평범한 직장인인 지환이 민예지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걱정 마요.”이상언도 임하나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눈짓했다.“일단 기다려 봅시다.”애가 탄 임하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지환이 마치 얼음조각마냥 수술실 입구에 꼼짝달싹하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곧 입술을 앙다물고 이상언 옆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한 세기 같은 시간이 지나고 의사가 마침내 수술실에서 나왔다.“환자에게 큰 이상은 없습니다. 다만 머리를 여러 군데 부딪
지환은 이서를 꽉 껴안았다.밀착되어 있는 두 사람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나댔다.이서는 남자 특유의 좋은 냄새를 맡으며 자신도 모르게 볼이 뜨거워졌다.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지환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며 확인했다.“당신 괜찮아요? 다치지는 않았어요? 민예지의 경호원들이 당신을 어떻게 하지 않았죠?”이서의 손놀림에 몸에 불이 켜진 지환은 이서의 손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거기서는 괜찮았는데…… 계속 함부로 이렇게 만져대면 안 괜찮을 거 같은데? 뭔 사고가 나도 몰라…….”그 말을 들은 이서는 놀라서 갑자기 얼음이 되었다.정수리 쪽에서 들려오는 지환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고서야 자신을 놀린 거라는 걸 깨닫고 수줍어하며 주먹으로 지환의 가슴을 쳤다.작고 야리야리한 주먹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지환은 그녀의 주먹을 잡고 입술에 키스했다.“이서야, 후회하기 없기다.”“네?”“나랑 함께하겠다는 거…….”이서의 얼굴이 또 타올랐다.“누가 당신이랑 함께하겠데요?”기분이 좋은 지환은 이서의 붉은 입술에 뽀뽀했다.“칫…… 좋으면서!”이서는 수줍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지환 씨, 나빴어!”“그래, 그래…….” 지환은 그녀를 껴안고 달랬다.“전부 내 불찰입니다. 됐지?”이서는 부끄러워 지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어 지환에게 물었다.“우리…… 그럼 계약 위반 아닌가요? 동거 계약서에 따르면, 조항 위반 시 이혼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은 다른 입술에게 짓눌렸다.……민예지가 실종된 이틀째 되는 날까지, 민호일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민예지가 연락이 되지 않자,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그래서 모든 인력을 총출동시켜 민예지를 찾기 시작했다. 민예지의 실종 소식도 온 북성시에 퍼졌다.윤수정조차도 알 정도로.“납치됐나?” 윤수정은 입술을 깨물며 하은철에게 물었다.그녀는 아침부터 머리 아프다는 핑곗거리를 만들어 하은철을 불러냈
4대 가문은 겉으로나 속으로나 서로 맞지 않지만, 그래도 뭔 일이 있으면 서로 왕래하고 때론 힘을 합치기도 했다.윤수정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게 뭔 일이야? 어떻게 된 거래?”‘이서가 들려와야 하는데?’“아직 잘 모르겠어. 나 먼저 가 볼게.”하은철은 말을 던지고 급히 떠났다. 병실에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윤수정만 남겨졌다.민예지 집에 도착해서야 하은철은 민예지의 상황이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에게 처참하게 당한 것 같았다. 온몸이 성한 곳 하나 없이 멍으로 가득했다. 특히 나름 예쁘장했던 얼굴은 맞아서인지 돼지머리처럼 부었다.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그녀는 입에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작아 무슨 말인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설치고 다니던 딸이 이 지경이 된 걸 보니, 민호일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어떤 놈 소행인지 알아보셨어요?” 하은철이 물었다.민호일은 고통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아무것도 못 찾았어.”“예지는요? 예지도 본인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요?”고개를 떨구고 있던 민호일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의사 말로는 예지가 실종된 날부터 꼬박 이틀 밤낮을 유린당한 거 같다고…… 지금 애 정신 상태가…… 누구인지 알아도 제대로 말할 수 없네……. 흑흑!”하은철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서 있었다.“민 회장님, 안심하세요. 저희도 범인을 찾아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바로 이때 침대에 누워있던 민예지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이서! 이서 남편은…….”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또 기절했다.상황을 지켜보던 의사가 허둥지둥 침대로 다가가 예지의 인중혈을 꾹 눌렀다. 잠시 뒤 민예지가 눈을 떴다.“민 회장님, 지금 아가씨 경과가 좋지 않습니다…….”주치의
이서는 어리둥절해졌다.임하나의 얘기에 깃든 정보량이 너무 많다. 이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 반나절이 지나서야 어눌하게 말했다.“프러포즈…… 이벤트 준비했다고?”“응.”임하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지금쯤 아마 모두 사라졌을걸? 자기 레스토랑도 아닌데 어떻게 계속 두겠어?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그랬다. 너무 아쉽다.”제일 아쉬운 건 프러포즈 주인공인 이서이다.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계속 물었다.“그날 지환 씨가 도착한 뒤 난 기절했어.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니?”“나는 따라가지 않았으니, 무슨 일이 일었는지는 모르겠어.”이서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그럼, 밖에 무슨 소문이라도 들은 거 없어?”지환이 그녀를 데리고 빠져나왔으니, 민예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아니야…….” 이서의 손을 잡은 임하나가 말을 이었다.“이서야, 걱정하지 마. 민예지가 다시 문제 일으킨다면 그땐 그냥 어르신께 찔러버리자.”“제발 그러지 마. 할아버지 연세가 많으시고, 건강도 안 좋으시잖아.” 이서는 계속 말했다.“괜히 나 때문에 할아버지 신경 쓰시게 하기 싫어.”임하나는 가슴이 아팠다.“넌 어찌 맨날 다른 사람 생각만 하니?”말하면서 또 유유히 한숨을 쉬었다.“친구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능한 내 자신이 참 싫다.”임씨 집안은 일반 가정이었다.임하나 엄마가 하씨 그룹 산하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서의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이서는 웃으며 말했다.“나 괜찮아. 똥이 무서워서 피하니 더러워서 피하지. 내가 자리 잡기 전까지 민예지를 피해 다니면 돼. 언젠가는 나도 윤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테니까 그때 꼭 되갚아 주면 돼.”임하나도 따라 웃었다.“그래, 너만 믿는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지환이 안 보이는 걸 보고 임하나가 물었다.“지환 씨는?”“티켓팅 하러 갔어……. 며칠 뒤 퇴원하면 미국에 다녀오려고.”“이렇게 빨리? 머리 다친 거 아직
하은철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임하나!”임하나는 하은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왜? 이서를 메리아트 호텔로 납치할 때는 이런 꼴 당할 줄 몰랐나 보지?”“무슨 소리야?” 하은철은 얼떨떨해졌다.이서는 전후 사정도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와 따지고 드는 하은철을 보며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저기, 도련님, 다음번에는 범인이 누군지 제대로 알고나 와서 따지든지 하세요. 민예지가 다 죽게 생겼다는데,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내가 했다는 증거라도 있으면 경찰에 신고해.”“들었지?” 하은철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본 임하나는 속이 고소했다.“그리고 이서…… 이미 결혼했거든…….”임하나는 이서의 손에 있는 큰 다이아몬드반지를 흔들어 보여줬다.“부탁인데, 앞으로 이렇게 불쑥불쑥 이서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괜한 오해 살 수도 있잖아. 그리고 난 다른 사람들이 이서를, 쓰레기 분리 수거함으로 오해하는 것도 싫어.”하은철의 안색이 극도로 보기 흉해졌다.“이서, 너 정말 야박해졌구나. 민예지 저렇게 된 거, 너와 상관없다고 해도 네 남편이 연관되지 않았다는 거를 어찌 장담해?”이서는 속눈썹을 살짝 떨며 미소를 지었다.“관련 있건 없건, 그건 우리 부부 두 사람의 문제야. 너랑 뭔 상관이야? 다른 볼일 없으면 그만 가봐. 난 쉬어야겠어.”하은철은 화가 뭉클뭉클 치밀어 올라오는 걸 꾹 참았다.‘내가 힘이 남아 돌아 쓸데없는 짓 했구나.’‘이서가 입원한 걸 알고, 밥도 먹지 않고 달려왔는데…….’‘고맙다는 말은 고사하고, 문전박대를 당하다니…….’‘앞으로 다시 네 일에 관여하면, 내가 성을 간다.’하은철은 화가 나서 인사말도 없이 획 하니 나가버렸다이때, 병원 1층.지환은 빠른 걸음을 내디디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핸드폰을 귓가에 댄 그의 얼굴은 숙연했다. 요 며칠 이서 앞에서의 자상하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대표님, 항공권은 이미 예약 마쳤습니다.]이천은 태블릿을 켜고 계속 말했다.[며칠 전에 데려온 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은철은 이서에 대한 불만을 한껏 늘어놓았다.“호의를 개떡으로 받아들인다니……. 이서 남편이 민씨 집안을 건드려 엄청난 큰 사고를 쳤길래 내가 조심하라고 알려주려고 부리나케 달려왔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절친까지 합세해서 저한테 난리 치더라고요. 이서 남편이 준 반지를 들고 자랑질하면서…….”반지 얘기를 꺼내자, 다시 흥분한 하은철은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잘난 반지 하나 가지고 난리야. 그런 반지, 난 한 트럭도 산다.”‘이서 남편이 뭐라고, 그딴 반지 뭐가 좋다고 자랑질하고 난리야?’지환은 미간을 치켜세우고 아무 내색하지 않았다.하은철도 지환이 맞장구를 쳐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계속 혼자서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았다.“뭐, 사랑받고 있다는 걸 자랑질하고 싶어서 그런 거겠죠? 근데 정말 웃긴 건 내가 병실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남편이란 놈,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사랑한다면 병실을 지켜야지 아픈 마누라 두고 어디 싸돌아 다니는 건지……?”하은철은 왠지 모르게 속이 쓰라렸고, 살짝 짜증도 났다.“기다려 봐요. 조만간 저희 할아버지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빌고 애원할 텐데…… 그때도 내 앞에서 콧대 빳빳이 들고 있는지 봐야겠어요…….”지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왜?”“생각해 보세요.”하은철은 눈썹이 휘날리며 장황하게 얘기를 해갔다.“민예지는 민호일이 가장 아끼는 딸이잖아요. 그래서 딸에 대한 기대가 엄청 크거든요. 그런데 그런 딸이 지금 거의 폐인이 되었으니…… 이 일을 정년 이서남편이 한 게 아니라고 해도, 민 회장이 진짜 범인을 찾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희생양을 찾을 텐데…… 그럼 그 1위 후보는 이서 남편이 될 테니까요.”지환은 입꼬리를 더욱 치켜올렸다.“넌 이서가 네 할아버지한테 가서 애원하길 바라고 있는 것 같다.”하은철은 웃으며 말했다.“삼촌, 솔직히 얘기하자면, 이서가 고개 숙이는 모습 보고 싶어요.”그는 이서가 그의 앞에서 굽실거리는 모습을 못 본 지 오래되었다.지환은 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