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은 이서를 꽉 껴안았다.밀착되어 있는 두 사람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나댔다.이서는 남자 특유의 좋은 냄새를 맡으며 자신도 모르게 볼이 뜨거워졌다.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지환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며 확인했다.“당신 괜찮아요? 다치지는 않았어요? 민예지의 경호원들이 당신을 어떻게 하지 않았죠?”이서의 손놀림에 몸에 불이 켜진 지환은 이서의 손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거기서는 괜찮았는데…… 계속 함부로 이렇게 만져대면 안 괜찮을 거 같은데? 뭔 사고가 나도 몰라…….”그 말을 들은 이서는 놀라서 갑자기 얼음이 되었다.정수리 쪽에서 들려오는 지환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고서야 자신을 놀린 거라는 걸 깨닫고 수줍어하며 주먹으로 지환의 가슴을 쳤다.작고 야리야리한 주먹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지환은 그녀의 주먹을 잡고 입술에 키스했다.“이서야, 후회하기 없기다.”“네?”“나랑 함께하겠다는 거…….”이서의 얼굴이 또 타올랐다.“누가 당신이랑 함께하겠데요?”기분이 좋은 지환은 이서의 붉은 입술에 뽀뽀했다.“칫…… 좋으면서!”이서는 수줍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지환 씨, 나빴어!”“그래, 그래…….” 지환은 그녀를 껴안고 달랬다.“전부 내 불찰입니다. 됐지?”이서는 부끄러워 지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어 지환에게 물었다.“우리…… 그럼 계약 위반 아닌가요? 동거 계약서에 따르면, 조항 위반 시 이혼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은 다른 입술에게 짓눌렸다.……민예지가 실종된 이틀째 되는 날까지, 민호일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민예지가 연락이 되지 않자,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그래서 모든 인력을 총출동시켜 민예지를 찾기 시작했다. 민예지의 실종 소식도 온 북성시에 퍼졌다.윤수정조차도 알 정도로.“납치됐나?” 윤수정은 입술을 깨물며 하은철에게 물었다.그녀는 아침부터 머리 아프다는 핑곗거리를 만들어 하은철을 불러냈
4대 가문은 겉으로나 속으로나 서로 맞지 않지만, 그래도 뭔 일이 있으면 서로 왕래하고 때론 힘을 합치기도 했다.윤수정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게 뭔 일이야? 어떻게 된 거래?”‘이서가 들려와야 하는데?’“아직 잘 모르겠어. 나 먼저 가 볼게.”하은철은 말을 던지고 급히 떠났다. 병실에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윤수정만 남겨졌다.민예지 집에 도착해서야 하은철은 민예지의 상황이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에게 처참하게 당한 것 같았다. 온몸이 성한 곳 하나 없이 멍으로 가득했다. 특히 나름 예쁘장했던 얼굴은 맞아서인지 돼지머리처럼 부었다.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그녀는 입에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작아 무슨 말인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설치고 다니던 딸이 이 지경이 된 걸 보니, 민호일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어떤 놈 소행인지 알아보셨어요?” 하은철이 물었다.민호일은 고통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아무것도 못 찾았어.”“예지는요? 예지도 본인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요?”고개를 떨구고 있던 민호일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의사 말로는 예지가 실종된 날부터 꼬박 이틀 밤낮을 유린당한 거 같다고…… 지금 애 정신 상태가…… 누구인지 알아도 제대로 말할 수 없네……. 흑흑!”하은철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서 있었다.“민 회장님, 안심하세요. 저희도 범인을 찾아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바로 이때 침대에 누워있던 민예지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이서! 이서 남편은…….”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또 기절했다.상황을 지켜보던 의사가 허둥지둥 침대로 다가가 예지의 인중혈을 꾹 눌렀다. 잠시 뒤 민예지가 눈을 떴다.“민 회장님, 지금 아가씨 경과가 좋지 않습니다…….”주치의
이서는 어리둥절해졌다.임하나의 얘기에 깃든 정보량이 너무 많다. 이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 반나절이 지나서야 어눌하게 말했다.“프러포즈…… 이벤트 준비했다고?”“응.”임하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지금쯤 아마 모두 사라졌을걸? 자기 레스토랑도 아닌데 어떻게 계속 두겠어?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그랬다. 너무 아쉽다.”제일 아쉬운 건 프러포즈 주인공인 이서이다.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계속 물었다.“그날 지환 씨가 도착한 뒤 난 기절했어.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니?”“나는 따라가지 않았으니, 무슨 일이 일었는지는 모르겠어.”이서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그럼, 밖에 무슨 소문이라도 들은 거 없어?”지환이 그녀를 데리고 빠져나왔으니, 민예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아니야…….” 이서의 손을 잡은 임하나가 말을 이었다.“이서야, 걱정하지 마. 민예지가 다시 문제 일으킨다면 그땐 그냥 어르신께 찔러버리자.”“제발 그러지 마. 할아버지 연세가 많으시고, 건강도 안 좋으시잖아.” 이서는 계속 말했다.“괜히 나 때문에 할아버지 신경 쓰시게 하기 싫어.”임하나는 가슴이 아팠다.“넌 어찌 맨날 다른 사람 생각만 하니?”말하면서 또 유유히 한숨을 쉬었다.“친구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능한 내 자신이 참 싫다.”임씨 집안은 일반 가정이었다.임하나 엄마가 하씨 그룹 산하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서의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이서는 웃으며 말했다.“나 괜찮아. 똥이 무서워서 피하니 더러워서 피하지. 내가 자리 잡기 전까지 민예지를 피해 다니면 돼. 언젠가는 나도 윤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테니까 그때 꼭 되갚아 주면 돼.”임하나도 따라 웃었다.“그래, 너만 믿는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지환이 안 보이는 걸 보고 임하나가 물었다.“지환 씨는?”“티켓팅 하러 갔어……. 며칠 뒤 퇴원하면 미국에 다녀오려고.”“이렇게 빨리? 머리 다친 거 아직
하은철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임하나!”임하나는 하은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왜? 이서를 메리아트 호텔로 납치할 때는 이런 꼴 당할 줄 몰랐나 보지?”“무슨 소리야?” 하은철은 얼떨떨해졌다.이서는 전후 사정도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와 따지고 드는 하은철을 보며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저기, 도련님, 다음번에는 범인이 누군지 제대로 알고나 와서 따지든지 하세요. 민예지가 다 죽게 생겼다는데,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내가 했다는 증거라도 있으면 경찰에 신고해.”“들었지?” 하은철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본 임하나는 속이 고소했다.“그리고 이서…… 이미 결혼했거든…….”임하나는 이서의 손에 있는 큰 다이아몬드반지를 흔들어 보여줬다.“부탁인데, 앞으로 이렇게 불쑥불쑥 이서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괜한 오해 살 수도 있잖아. 그리고 난 다른 사람들이 이서를, 쓰레기 분리 수거함으로 오해하는 것도 싫어.”하은철의 안색이 극도로 보기 흉해졌다.“이서, 너 정말 야박해졌구나. 민예지 저렇게 된 거, 너와 상관없다고 해도 네 남편이 연관되지 않았다는 거를 어찌 장담해?”이서는 속눈썹을 살짝 떨며 미소를 지었다.“관련 있건 없건, 그건 우리 부부 두 사람의 문제야. 너랑 뭔 상관이야? 다른 볼일 없으면 그만 가봐. 난 쉬어야겠어.”하은철은 화가 뭉클뭉클 치밀어 올라오는 걸 꾹 참았다.‘내가 힘이 남아 돌아 쓸데없는 짓 했구나.’‘이서가 입원한 걸 알고, 밥도 먹지 않고 달려왔는데…….’‘고맙다는 말은 고사하고, 문전박대를 당하다니…….’‘앞으로 다시 네 일에 관여하면, 내가 성을 간다.’하은철은 화가 나서 인사말도 없이 획 하니 나가버렸다이때, 병원 1층.지환은 빠른 걸음을 내디디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핸드폰을 귓가에 댄 그의 얼굴은 숙연했다. 요 며칠 이서 앞에서의 자상하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대표님, 항공권은 이미 예약 마쳤습니다.]이천은 태블릿을 켜고 계속 말했다.[며칠 전에 데려온 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은철은 이서에 대한 불만을 한껏 늘어놓았다.“호의를 개떡으로 받아들인다니……. 이서 남편이 민씨 집안을 건드려 엄청난 큰 사고를 쳤길래 내가 조심하라고 알려주려고 부리나케 달려왔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절친까지 합세해서 저한테 난리 치더라고요. 이서 남편이 준 반지를 들고 자랑질하면서…….”반지 얘기를 꺼내자, 다시 흥분한 하은철은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잘난 반지 하나 가지고 난리야. 그런 반지, 난 한 트럭도 산다.”‘이서 남편이 뭐라고, 그딴 반지 뭐가 좋다고 자랑질하고 난리야?’지환은 미간을 치켜세우고 아무 내색하지 않았다.하은철도 지환이 맞장구를 쳐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계속 혼자서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았다.“뭐, 사랑받고 있다는 걸 자랑질하고 싶어서 그런 거겠죠? 근데 정말 웃긴 건 내가 병실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남편이란 놈,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사랑한다면 병실을 지켜야지 아픈 마누라 두고 어디 싸돌아 다니는 건지……?”하은철은 왠지 모르게 속이 쓰라렸고, 살짝 짜증도 났다.“기다려 봐요. 조만간 저희 할아버지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빌고 애원할 텐데…… 그때도 내 앞에서 콧대 빳빳이 들고 있는지 봐야겠어요…….”지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왜?”“생각해 보세요.”하은철은 눈썹이 휘날리며 장황하게 얘기를 해갔다.“민예지는 민호일이 가장 아끼는 딸이잖아요. 그래서 딸에 대한 기대가 엄청 크거든요. 그런데 그런 딸이 지금 거의 폐인이 되었으니…… 이 일을 정년 이서남편이 한 게 아니라고 해도, 민 회장이 진짜 범인을 찾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희생양을 찾을 텐데…… 그럼 그 1위 후보는 이서 남편이 될 테니까요.”지환은 입꼬리를 더욱 치켜올렸다.“넌 이서가 네 할아버지한테 가서 애원하길 바라고 있는 것 같다.”하은철은 웃으며 말했다.“삼촌, 솔직히 얘기하자면, 이서가 고개 숙이는 모습 보고 싶어요.”그는 이서가 그의 앞에서 굽실거리는 모습을 못 본 지 오래되었다.지환은 옅
얼굴의 홍조가 사라지자, 이서는 고개를 돌려 지환에게 물었다.“혹시 민예지 얘기 들었어요?”이서는 민예지가 반송장이 된 건 지환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다.그가 그런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응.” 지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누가 그랬을까요?”“글쎄…….”지환은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아, 그런데 그날 어떻게 호텔을 빠져나온 거예요?”민예지 곁에 경호원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지환이 다친 데 없이 무사하게 빠져 나오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을 터.“내가 들어갔을 때 경호원들은 이미 다 쓰러져 있던데?”지환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이서는 턱을 매만지며 뭔가 생각난 듯 얘기했다.“그렇다면 그때 우리 말고, 다른 무리들이 있었던 거네요. 민예지가 저 지경이 된 건 그 사람들과 분명 연관이 있을 거예요.”지환은 이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남 신경 그만 쓰시고…….”“나는 당신이……”이서가 물안개가 자욱한 눈을 들어 지환을 쳐다보았다.마음이 나긋나긋해진 지환은 이서를 품에 안고 낮은 소리로 달랬다.“민씨 집안에서 범인을 못 찾으면, 괜히 나한테 화풀이할까 봐?”이서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지환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그런 걱정하지 마. 그 사람들 날 어쩌지 못해.”이서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번졌다.“하긴, 민예지가 그렇게 된 거랑 당신이랑 아무 상관이 없는데, 민호일이 미치지 않고서야 애먼 당신한테 분풀이하겠어요?”지환은 웃으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이틀 뒤, 이서가 퇴원하는 날, 지환은 병원에서 이서를 픽업하여 바로 공항으로 직행했다.임하나도 반차를 내서 공항에 이서를 배웅하러 갔다.“자기, 보고 싶을 거야.”이서도 하나와 떨어지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운을 내서 씩씩하게 하나를 위로했다.“보름이면 돌아오는데 뭐, 그리고 우리 틈 날 때마다 영상통화 하면 되지…….”“응. 알았어.” 임하나는 코를 훌쩍이며 이서를 안았다.이상언과 지환은 두 여인을 지켜보며, 굳이 방
마침 귀가한 하은철은 분노해서 나가는 민호일을 보고는 하경철에서 물었다.“할아버지, 무슨 일이에요?”하경철은 한숨을 내쉬었다.“민예지 일은 단서가 좀 있느냐?”“아니요, 메리아트 호텔의 모든 CCTV는 모두 파손되었습니다.”“대체 누구 짓이야? 겁도 없이 민씨 집안 외동딸을 이렇게 만들다니…….”하은철은 눈썹을 찌푸리고 서성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할아버지, 저도 이서 남편이 한 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메리아트 호텔 사건이요, 제가 지난번 이서 남편 조사했을 때 상황이랑 비슷하거든요. CCTV가 모두 파손되었고, 목격자는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고…… 만약 정말 그 사람 소행이라면, 그 사람 신분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하경철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민씨 집안 사람을 건드렸다는 건 그쪽 실력이 민씨네 보다는 위에 있다는 건데……. 그러나 대한민국 내에서…….”하경철이 갑자기 멈칫했다.하경철을 살피던 하은철은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할아버지?”하경철의 탁한 눈빛이 점점 맑아졌다.“왜 걔를 생각 못 했지?”“할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하은철은 영문도 모른 채 얼떨떨했다.하경철은 손자 하은철을 보고 엄숙하게 물었다.“네 삼촌은?”하은철은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 벌써 잊으셨어요? 삼촌이, 아니 작은 아빠가 숙모 데리고 큰할아버지 뵈러 간다고 며칠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벌써 잊으셨어요?”“그럼, 이서는?”하은철은 표정이 부자연스러웠다.“모르겠어요.”병원에서 돌아온 후, 하은철은 이서의 일에 대해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하경철의 눈동자가 약간 어두워졌다. 불안한 생각이 엄습해 왔다.“가서 이서 데려와라.”……기내.이서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이천은 이코노미석을 예약했다.지환은 처음 타본다.이코노미석은 좌석이 좁아, 팔다리는 긴 그가 앉자 순식간에 묶인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빳빳한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어 있으려니 더욱 괴로웠다.이서는 지
지환은 받은 명함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아니.”“거짓말.” 이서가 말하면서 입꼬리를 치켜세웠다.지환은 곁눈질로 그녀를 힐끗 보았다.이서는 얼른 얼굴의 웃음을 거두었다.“왜요?”“질투하는 거야?” 지환은 장난 섞인 표정으로 입꼬리를 치켜세웠다.이서은 애써 아닌 척하며 반박했다.“아니거든요.” 바로 이때 검은색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지환을 향해 몸을 굽히며 유창한 스페인어를 구사했다.8살 되던 해부터, 해외를 자주 다닌 이서는 스페인어를 나름 유창하게 했다. 그러나 억양이 다소 강한 이 아저씨의 말은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참 뒤에서 집에서 픽업하러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차는 바로 공항 맞은편에 세워져 있었다.이서는 아저씨의 시선을 따라 차를 보고는 살짝 놀랐다.‘롤스로이스?’지환의 안색도 살짝 바뀌었다.두 사람은 아저씨를 따라 차 옆으로 갔고, 이서는 그제야 확인차 물었다.“설마, 지환 씨네 차인가요?”지환은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둘러댔다.“아니, 렌트한 거야. 우리 집 영감이 며느리 온다고 가오 좀 잡았나 보네. 오늘 첫 만남이니 며느리한테 점수를 따고 싶었나 봐.”이서는 그제야 안심하고 차에 올랐다.시동을 걸었다.창밖의 풍경이 끊임없이 변화함에 따라 지환은 갑자기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미국에 오기 전에 임대해 놓은 아파트로 가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아버지 하경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아파트 가는 거 아니에요?]하경수가 곧 답장을 보냈다.[넌 상관하지 마라, 나한테 계획이 다 있단다.]지환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뭔 일이에요?” 이서는 어두워진 지환의 안색을 이상한 듯 살펴보았다.‘아까는 분명 멀쩡했는데?’“아냐, 별일 아니야.”지환은 답답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말을 이었다.“눈 좀 더 붙여.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아.”이서는 익살을 부리며 놀려댔다.“에이, 자기 집에 가면서 얼마나 걸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