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의 홍조가 사라지자, 이서는 고개를 돌려 지환에게 물었다.“혹시 민예지 얘기 들었어요?”이서는 민예지가 반송장이 된 건 지환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다.그가 그런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응.” 지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누가 그랬을까요?”“글쎄…….”지환은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아, 그런데 그날 어떻게 호텔을 빠져나온 거예요?”민예지 곁에 경호원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지환이 다친 데 없이 무사하게 빠져 나오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을 터.“내가 들어갔을 때 경호원들은 이미 다 쓰러져 있던데?”지환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이서는 턱을 매만지며 뭔가 생각난 듯 얘기했다.“그렇다면 그때 우리 말고, 다른 무리들이 있었던 거네요. 민예지가 저 지경이 된 건 그 사람들과 분명 연관이 있을 거예요.”지환은 이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남 신경 그만 쓰시고…….”“나는 당신이……”이서가 물안개가 자욱한 눈을 들어 지환을 쳐다보았다.마음이 나긋나긋해진 지환은 이서를 품에 안고 낮은 소리로 달랬다.“민씨 집안에서 범인을 못 찾으면, 괜히 나한테 화풀이할까 봐?”이서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지환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그런 걱정하지 마. 그 사람들 날 어쩌지 못해.”이서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번졌다.“하긴, 민예지가 그렇게 된 거랑 당신이랑 아무 상관이 없는데, 민호일이 미치지 않고서야 애먼 당신한테 분풀이하겠어요?”지환은 웃으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이틀 뒤, 이서가 퇴원하는 날, 지환은 병원에서 이서를 픽업하여 바로 공항으로 직행했다.임하나도 반차를 내서 공항에 이서를 배웅하러 갔다.“자기, 보고 싶을 거야.”이서도 하나와 떨어지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운을 내서 씩씩하게 하나를 위로했다.“보름이면 돌아오는데 뭐, 그리고 우리 틈 날 때마다 영상통화 하면 되지…….”“응. 알았어.” 임하나는 코를 훌쩍이며 이서를 안았다.이상언과 지환은 두 여인을 지켜보며, 굳이 방
마침 귀가한 하은철은 분노해서 나가는 민호일을 보고는 하경철에서 물었다.“할아버지, 무슨 일이에요?”하경철은 한숨을 내쉬었다.“민예지 일은 단서가 좀 있느냐?”“아니요, 메리아트 호텔의 모든 CCTV는 모두 파손되었습니다.”“대체 누구 짓이야? 겁도 없이 민씨 집안 외동딸을 이렇게 만들다니…….”하은철은 눈썹을 찌푸리고 서성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할아버지, 저도 이서 남편이 한 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메리아트 호텔 사건이요, 제가 지난번 이서 남편 조사했을 때 상황이랑 비슷하거든요. CCTV가 모두 파손되었고, 목격자는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고…… 만약 정말 그 사람 소행이라면, 그 사람 신분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하경철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민씨 집안 사람을 건드렸다는 건 그쪽 실력이 민씨네 보다는 위에 있다는 건데……. 그러나 대한민국 내에서…….”하경철이 갑자기 멈칫했다.하경철을 살피던 하은철은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할아버지?”하경철의 탁한 눈빛이 점점 맑아졌다.“왜 걔를 생각 못 했지?”“할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하은철은 영문도 모른 채 얼떨떨했다.하경철은 손자 하은철을 보고 엄숙하게 물었다.“네 삼촌은?”하은철은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 벌써 잊으셨어요? 삼촌이, 아니 작은 아빠가 숙모 데리고 큰할아버지 뵈러 간다고 며칠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벌써 잊으셨어요?”“그럼, 이서는?”하은철은 표정이 부자연스러웠다.“모르겠어요.”병원에서 돌아온 후, 하은철은 이서의 일에 대해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하경철의 눈동자가 약간 어두워졌다. 불안한 생각이 엄습해 왔다.“가서 이서 데려와라.”……기내.이서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이천은 이코노미석을 예약했다.지환은 처음 타본다.이코노미석은 좌석이 좁아, 팔다리는 긴 그가 앉자 순식간에 묶인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빳빳한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어 있으려니 더욱 괴로웠다.이서는 지
지환은 받은 명함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아니.”“거짓말.” 이서가 말하면서 입꼬리를 치켜세웠다.지환은 곁눈질로 그녀를 힐끗 보았다.이서는 얼른 얼굴의 웃음을 거두었다.“왜요?”“질투하는 거야?” 지환은 장난 섞인 표정으로 입꼬리를 치켜세웠다.이서은 애써 아닌 척하며 반박했다.“아니거든요.” 바로 이때 검은색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지환을 향해 몸을 굽히며 유창한 스페인어를 구사했다.8살 되던 해부터, 해외를 자주 다닌 이서는 스페인어를 나름 유창하게 했다. 그러나 억양이 다소 강한 이 아저씨의 말은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참 뒤에서 집에서 픽업하러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차는 바로 공항 맞은편에 세워져 있었다.이서는 아저씨의 시선을 따라 차를 보고는 살짝 놀랐다.‘롤스로이스?’지환의 안색도 살짝 바뀌었다.두 사람은 아저씨를 따라 차 옆으로 갔고, 이서는 그제야 확인차 물었다.“설마, 지환 씨네 차인가요?”지환은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둘러댔다.“아니, 렌트한 거야. 우리 집 영감이 며느리 온다고 가오 좀 잡았나 보네. 오늘 첫 만남이니 며느리한테 점수를 따고 싶었나 봐.”이서는 그제야 안심하고 차에 올랐다.시동을 걸었다.창밖의 풍경이 끊임없이 변화함에 따라 지환은 갑자기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미국에 오기 전에 임대해 놓은 아파트로 가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아버지 하경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아파트 가는 거 아니에요?]하경수가 곧 답장을 보냈다.[넌 상관하지 마라, 나한테 계획이 다 있단다.]지환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뭔 일이에요?” 이서는 어두워진 지환의 안색을 이상한 듯 살펴보았다.‘아까는 분명 멀쩡했는데?’“아냐, 별일 아니야.”지환은 답답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말을 이었다.“눈 좀 더 붙여.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아.”이서는 익살을 부리며 놀려댔다.“에이, 자기 집에 가면서 얼마나 걸리는지
하경수는 친절하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여기는 환이 어릴 때부터 놀던 소꿉친구들이네. 오늘 환이가 돌아온 걸 알고 특별히 달려왔네. 예솔아, 예담아, 자, 여기는 지환이 안사람이다.”젊은 남자가 반갑게 인사했다.“형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박예담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저희 누나 박예솔입니다.”이서는 손을 내밀어 박예담과 가볍게 악수하고, 박예솔을 바라보았다.박예솔은 1초간 망설이다가 곧 활짝 웃으며 이서의 손을 잡았다.“지환이 정말 결혼했네. 난 또…….”그녀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얼굴이 예쁘장하고, 정숙하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졌다. 그녀는 이서를 찬찬히 쳐다보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예쁘네요. 어쩐지 지환이 빨리 결혼하려고 안달 나하더니…….”분명 듣기 좋은 말인데, 이서는 왠지 귀에 거슬렸다.그녀가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은 가볍게 두 사람과 고개를 끄덕인 걸로 인사를 대신한 셈이다.“너희들 배고프지?” 하경수의 모든 관심은 이서한테 있었다.“이서야, 자, 우리 밥 먹으러 가자.”이서는 하경수에게 이끌려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식탁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 한 상 차려 있었다.“이서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지환이가 준비하라고 했어. 어여 먹어봐, 네 입맛에 맞는지 모르겠다…….”이서는 코끝이 좀 시큰시큰했다. 지환을 한 번 보고는 곧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네.”상황을 지켜본 하경수는 희색이 만면했다.“기분 좋으면 된 거야. 자, 어여들 앉아서 먹자. 우리 집…….”지환은 갑자기 크게 헛기침했다.하경수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내가…… 요리…… 했지? 허허허.”“아…… 아버님이 직접 요리하셨어요?”이서는 감동했다.“이렇게 많은 요리를…… 많이 힘드셨죠?”“한 식구인데 인사치레 이런 거 다 빼고 편하게 하거라. 어여 먹어 봐, 입맛에 맞으면 앞으로 매일 해 줄게.”하경수의 지나친 열정에 이서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지환은 하경수와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를 나누었다. 이서는 그제야 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예솔이 말을 끊었다.“예담아, 가서 과일 좀 갖고 와.”뭔가 눈치챈 예담도 입을 다물고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이서는 박예담의 뒷모습을 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예담 씨 방금 뭐라고 얘기한 거 같은데…….”“아무것도 아니에요.”박예솔은 쿠션 밑에 숨겨진 주먹을 꽉 쥐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쟤, 신경 쓰지 말아요.”그녀는 이서의 손을 잡고,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반지 정말 예쁘네요.”‘원래는 내 손에 있어야 하는 건데…….’“네.” 이서도 반지를 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같은 시간 위층.하경수의 말을 다 듣고 지환은 눈썹을 찌푸렸다.“왜 굳이 박예솔한테까지 얘기하신 거예요? 우리 집에 별장이 없는 것도 아니고…….”하경수는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허허 웃었다.“우리 집 별장들 다 수백억, 수천 억짜리인데, 괜찮겠어? 게다가, 예솔이도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야?”미간을 짚고 있던 지환은 하경수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다.“아버지는 내가 이서와 위장 결혼이라도 한 줄 알죠? 그래서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떠보려고 한 거고…….”자기의 속마음을 들켜버린 하경수는 멋쩍게 헤헤 웃으며 말했다.“무슨 소리야? 내가 어찌 너를 의심하겠어? 게다가 이서, 그 아이도 참하게 생긴 게, 딱 봐도 좋은 아가씨더라. 이서한테 잘해라.”지환은 하경수의 이런 수법에 넘어가지 않았다.“아버지, 좀 그만 해요! 그러다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 되지 마시고, 그러면 손주는 영영 물 건너가는 겁니다.”손주 얘기를 들은 하경수는 기뻐서 눈썹을 치켜세웠다.“너희들 아이를 가지기로 했냐?”지환은 하경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서재의 문을 열고 아래층 거실에 있는 이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이서야, 올라와.”이서는 고개를 들고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네.”그러고는 또 박예솔과 예담에게 말했다.“아무쪼록 감사해요. 저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이야기
처음으로 장거리 비행을 한 이서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목욕을 마치고 나온 지환은 이서가 귀여운 붉은 입술을 내밀고, 달콤하게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남자의 본능적 충동 인자가 단번에 깨어났다.그는 차마 이서를 깨울 수 없어 이서를 안는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은혜도 모르는 녀석.” 그는 이서의 붉은 입술에 다정하게 키스하며 몸의 열기를 식히려 했다.밤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서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 아침이었다.그녀는 지환의 품에 안겨 움직거렸다.지환은 곧 잠에서 깨어났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뜨거운 손바닥으로 이서의 아랫배를 슬슬 문질렀다.이서의 볼은 뜨거웠다.“지환 씨…….”방금 깨어난 목소리는 나른하고 섹시했다.지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뜨고 이서의 콧날개를 문지르며 그녀를 놀렸다.“응, 이제 ‘여보’라고 불러봐.”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얼굴이 빨개진 이서는 주먹으로 지환의 튼튼한 가슴을 밀어내며, 속 따로 겉 따로 말을 뱉었다.“싫어요.”지환은 상반신을 기댄 채 눈썹을 들어 이서를 쳐다보았다.눈꼬리의 점이 반은 밝고, 반은 어두운 빛 속에서 매우 매혹적으로 느껴졌다.“왜, 싫어?” 그는 이서의 허리를 잡으며 말했다. “그럼 누구한테 여보라고 부르려고?”허리가 예민한 이서는 지환이 손에 닿자마자 간지러워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그만, 그만이요.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세요.”지환은 또 한 번 허리를 간지럽히고 나서야 말했다.“우리 아버지한테는 입에 착착 붙게 잘 부르면서, 왜 나한테는 안 된다는 거야?”이서는 떼쓰는 지환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다가 틈을 타서 지환의 품에서 도망쳤다.“빨리 가서 씻어요.”지환은 누워서 꼼짝하지 않았다.“뽀뽀해 주면 바로 씻을게.”손으로 이마를 받친 이서는, 애처럼 장난스럽게 떼쓰는 지환의 모습을 어이없어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다가갔다.그녀는 눈을 감고 지환의 입술에 키스했다.“이제…….”말
박예솔에게 파티에 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나니, 걱정이 생겼다.수영복이 없다.사자고 하니, 낯설고 물선 곳에서 어디에 가야 살 수 있는지도 몰라 난감했다.한창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환이 양복 차림에 구두를 신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외출할 거예요?”“응, 시내에 다녀와야 해.” 지환이 말했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회사 일 때문에 한국과 미국을 왕복하며 업무를 봤었다. 이 방대한 회사의 회장 자리를 너무 오랜 기간 비워 두는 건 회사의 전반적인 업무를 장악하는 데 불리했다.하경수가 방금 그를 부른 것도 이 일 때문이었다.“그럼 같이 가도 될까요?”지환이가 갸우뚱했다.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발가락을 웅크렸다.“나…… 나 수영복이 필요해요.”눈썹을 높이 치켜 뜬 지환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 \했다.“그럼, 같이 가.”“시내에 일 보러 가는 거 아니에요?”“오후에 처리해도 괜찮아.” 지환은 이서의 허리를 감싸고 외출했다.이서가 수영복을 입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조수석에 앉은 이서는 마음이 불안했다.“정말 저 때문에 일 그르치는 거 아니죠?”“아니야.” 지환은 시동을 걸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수영복이야?”‘설마 내 어린 아내가 자극적인 컨셉을 좋아하나?’“예솔 씨가 수영장 파티에 가자고 해서요…….”지환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러니까 파티에 가려고 수영복 산다는 거야?”이서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네.”지환은 기가 찬 듯 입을 한 번 크게 벌려 ‘허’하고 소리를 내고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서도 차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지환이 왜 화가 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얌전히 조수석에 움츠리고 앉아 자기 존재감을 최소화하려고 했다.시내에 도착한 뒤, 지환은 여러 길을 돌아서 마침내 하씨 집안에서 투자한 백화점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이서에게 휘파람을 불며 희롱하는 남자
지환은 침대에 누워 욕실 문이 열리기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이서가 들어간 지 30분이나 지났다.그는 입을 열었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자기야, 이제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간다.”이미 수영복을 갈아입은 이서는 지환의 말에 다리가 나른해졌다.그녀는 문짝을 붙잡고 얘기했다. “아니요, 금방 나갈게요.”말을 마친 이서는 눈을 감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밖으로 나갔다.문을 열고 그녀는 상체의 얇은 옷감을 두 손으로 감싸고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지환의 눈동자에 빨간색이 점차 들었다.이서는 빨간색 비키니를 골랐다.본래부터 하얀 피부에 빨간색을 더하니, 피부가 백옥같이 빛났다.특히 하얀 피부 곳곳에 생긴 얼룩덜룩한 붉은 반점은 마치 먹음직스러운 딸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지환의 폭발할 것 같은 욕망을 더는 억누를 수 없었다.그는 손을 뻗어 이서를 품에 안고는 어깨끈을 스르륵 풀었다.이서는 얼굴을 붉히고 위태로운 수영복을 붙잡았다.“지환 씨…….”석양의 잔광이 창문 앞에 떨어지고서야 이서는 맥없이 일어났다.“이제 어떡해요?”이서는 허리를 짚고 말을 계속했다.“오늘 저녁 파티에 가야 하는데, 어떡해요?”지환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안 가면 되겠네.” 이서는 그를 째려보면서 화난 척 물었다.“설마 일부러 그런 거 아녀요?”지환이가 입술꼬리를 치켜 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인인 셈이다.그는 이서의 머리에 가볍게 키스했다.“집에 데려다 줄까?”“아니요!” 이서는 지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수영복을 파티장으로 보내주면 거기 가서 갈아입을 게요.”그녀는 몸에 생긴 키스 마크를 가려야 방법도 생각해야 했다.지환은 기분이 좋았다.“그래, 그럼 수영복을 보내라고 할 테니, 여기서 기다려. 나 일 처리하고 올게.”“지환 씨는 오늘 밤 파티에 안 가요?”“가지.” 지환은 옷을 입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하지만 좀 늦게 갈 거야. 혼자 가는 게 싫으면 기다렸다가 나랑 같이 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