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수는 친절하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여기는 환이 어릴 때부터 놀던 소꿉친구들이네. 오늘 환이가 돌아온 걸 알고 특별히 달려왔네. 예솔아, 예담아, 자, 여기는 지환이 안사람이다.”젊은 남자가 반갑게 인사했다.“형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박예담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저희 누나 박예솔입니다.”이서는 손을 내밀어 박예담과 가볍게 악수하고, 박예솔을 바라보았다.박예솔은 1초간 망설이다가 곧 활짝 웃으며 이서의 손을 잡았다.“지환이 정말 결혼했네. 난 또…….”그녀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얼굴이 예쁘장하고, 정숙하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졌다. 그녀는 이서를 찬찬히 쳐다보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예쁘네요. 어쩐지 지환이 빨리 결혼하려고 안달 나하더니…….”분명 듣기 좋은 말인데, 이서는 왠지 귀에 거슬렸다.그녀가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은 가볍게 두 사람과 고개를 끄덕인 걸로 인사를 대신한 셈이다.“너희들 배고프지?” 하경수의 모든 관심은 이서한테 있었다.“이서야, 자, 우리 밥 먹으러 가자.”이서는 하경수에게 이끌려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식탁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 한 상 차려 있었다.“이서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지환이가 준비하라고 했어. 어여 먹어봐, 네 입맛에 맞는지 모르겠다…….”이서는 코끝이 좀 시큰시큰했다. 지환을 한 번 보고는 곧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네.”상황을 지켜본 하경수는 희색이 만면했다.“기분 좋으면 된 거야. 자, 어여들 앉아서 먹자. 우리 집…….”지환은 갑자기 크게 헛기침했다.하경수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내가…… 요리…… 했지? 허허허.”“아…… 아버님이 직접 요리하셨어요?”이서는 감동했다.“이렇게 많은 요리를…… 많이 힘드셨죠?”“한 식구인데 인사치레 이런 거 다 빼고 편하게 하거라. 어여 먹어 봐, 입맛에 맞으면 앞으로 매일 해 줄게.”하경수의 지나친 열정에 이서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지환은 하경수와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를 나누었다. 이서는 그제야 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예솔이 말을 끊었다.“예담아, 가서 과일 좀 갖고 와.”뭔가 눈치챈 예담도 입을 다물고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이서는 박예담의 뒷모습을 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예담 씨 방금 뭐라고 얘기한 거 같은데…….”“아무것도 아니에요.”박예솔은 쿠션 밑에 숨겨진 주먹을 꽉 쥐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쟤, 신경 쓰지 말아요.”그녀는 이서의 손을 잡고,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반지 정말 예쁘네요.”‘원래는 내 손에 있어야 하는 건데…….’“네.” 이서도 반지를 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같은 시간 위층.하경수의 말을 다 듣고 지환은 눈썹을 찌푸렸다.“왜 굳이 박예솔한테까지 얘기하신 거예요? 우리 집에 별장이 없는 것도 아니고…….”하경수는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허허 웃었다.“우리 집 별장들 다 수백억, 수천 억짜리인데, 괜찮겠어? 게다가, 예솔이도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야?”미간을 짚고 있던 지환은 하경수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다.“아버지는 내가 이서와 위장 결혼이라도 한 줄 알죠? 그래서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떠보려고 한 거고…….”자기의 속마음을 들켜버린 하경수는 멋쩍게 헤헤 웃으며 말했다.“무슨 소리야? 내가 어찌 너를 의심하겠어? 게다가 이서, 그 아이도 참하게 생긴 게, 딱 봐도 좋은 아가씨더라. 이서한테 잘해라.”지환은 하경수의 이런 수법에 넘어가지 않았다.“아버지, 좀 그만 해요! 그러다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 되지 마시고, 그러면 손주는 영영 물 건너가는 겁니다.”손주 얘기를 들은 하경수는 기뻐서 눈썹을 치켜세웠다.“너희들 아이를 가지기로 했냐?”지환은 하경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서재의 문을 열고 아래층 거실에 있는 이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이서야, 올라와.”이서는 고개를 들고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네.”그러고는 또 박예솔과 예담에게 말했다.“아무쪼록 감사해요. 저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이야기
처음으로 장거리 비행을 한 이서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목욕을 마치고 나온 지환은 이서가 귀여운 붉은 입술을 내밀고, 달콤하게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남자의 본능적 충동 인자가 단번에 깨어났다.그는 차마 이서를 깨울 수 없어 이서를 안는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은혜도 모르는 녀석.” 그는 이서의 붉은 입술에 다정하게 키스하며 몸의 열기를 식히려 했다.밤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서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 아침이었다.그녀는 지환의 품에 안겨 움직거렸다.지환은 곧 잠에서 깨어났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뜨거운 손바닥으로 이서의 아랫배를 슬슬 문질렀다.이서의 볼은 뜨거웠다.“지환 씨…….”방금 깨어난 목소리는 나른하고 섹시했다.지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뜨고 이서의 콧날개를 문지르며 그녀를 놀렸다.“응, 이제 ‘여보’라고 불러봐.”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얼굴이 빨개진 이서는 주먹으로 지환의 튼튼한 가슴을 밀어내며, 속 따로 겉 따로 말을 뱉었다.“싫어요.”지환은 상반신을 기댄 채 눈썹을 들어 이서를 쳐다보았다.눈꼬리의 점이 반은 밝고, 반은 어두운 빛 속에서 매우 매혹적으로 느껴졌다.“왜, 싫어?” 그는 이서의 허리를 잡으며 말했다. “그럼 누구한테 여보라고 부르려고?”허리가 예민한 이서는 지환이 손에 닿자마자 간지러워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그만, 그만이요.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세요.”지환은 또 한 번 허리를 간지럽히고 나서야 말했다.“우리 아버지한테는 입에 착착 붙게 잘 부르면서, 왜 나한테는 안 된다는 거야?”이서는 떼쓰는 지환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다가 틈을 타서 지환의 품에서 도망쳤다.“빨리 가서 씻어요.”지환은 누워서 꼼짝하지 않았다.“뽀뽀해 주면 바로 씻을게.”손으로 이마를 받친 이서는, 애처럼 장난스럽게 떼쓰는 지환의 모습을 어이없어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다가갔다.그녀는 눈을 감고 지환의 입술에 키스했다.“이제…….”말
박예솔에게 파티에 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나니, 걱정이 생겼다.수영복이 없다.사자고 하니, 낯설고 물선 곳에서 어디에 가야 살 수 있는지도 몰라 난감했다.한창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환이 양복 차림에 구두를 신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외출할 거예요?”“응, 시내에 다녀와야 해.” 지환이 말했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회사 일 때문에 한국과 미국을 왕복하며 업무를 봤었다. 이 방대한 회사의 회장 자리를 너무 오랜 기간 비워 두는 건 회사의 전반적인 업무를 장악하는 데 불리했다.하경수가 방금 그를 부른 것도 이 일 때문이었다.“그럼 같이 가도 될까요?”지환이가 갸우뚱했다.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발가락을 웅크렸다.“나…… 나 수영복이 필요해요.”눈썹을 높이 치켜 뜬 지환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 \했다.“그럼, 같이 가.”“시내에 일 보러 가는 거 아니에요?”“오후에 처리해도 괜찮아.” 지환은 이서의 허리를 감싸고 외출했다.이서가 수영복을 입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조수석에 앉은 이서는 마음이 불안했다.“정말 저 때문에 일 그르치는 거 아니죠?”“아니야.” 지환은 시동을 걸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수영복이야?”‘설마 내 어린 아내가 자극적인 컨셉을 좋아하나?’“예솔 씨가 수영장 파티에 가자고 해서요…….”지환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러니까 파티에 가려고 수영복 산다는 거야?”이서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네.”지환은 기가 찬 듯 입을 한 번 크게 벌려 ‘허’하고 소리를 내고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서도 차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지환이 왜 화가 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얌전히 조수석에 움츠리고 앉아 자기 존재감을 최소화하려고 했다.시내에 도착한 뒤, 지환은 여러 길을 돌아서 마침내 하씨 집안에서 투자한 백화점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이서에게 휘파람을 불며 희롱하는 남자
지환은 침대에 누워 욕실 문이 열리기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이서가 들어간 지 30분이나 지났다.그는 입을 열었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자기야, 이제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간다.”이미 수영복을 갈아입은 이서는 지환의 말에 다리가 나른해졌다.그녀는 문짝을 붙잡고 얘기했다. “아니요, 금방 나갈게요.”말을 마친 이서는 눈을 감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밖으로 나갔다.문을 열고 그녀는 상체의 얇은 옷감을 두 손으로 감싸고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지환의 눈동자에 빨간색이 점차 들었다.이서는 빨간색 비키니를 골랐다.본래부터 하얀 피부에 빨간색을 더하니, 피부가 백옥같이 빛났다.특히 하얀 피부 곳곳에 생긴 얼룩덜룩한 붉은 반점은 마치 먹음직스러운 딸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지환의 폭발할 것 같은 욕망을 더는 억누를 수 없었다.그는 손을 뻗어 이서를 품에 안고는 어깨끈을 스르륵 풀었다.이서는 얼굴을 붉히고 위태로운 수영복을 붙잡았다.“지환 씨…….”석양의 잔광이 창문 앞에 떨어지고서야 이서는 맥없이 일어났다.“이제 어떡해요?”이서는 허리를 짚고 말을 계속했다.“오늘 저녁 파티에 가야 하는데, 어떡해요?”지환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안 가면 되겠네.” 이서는 그를 째려보면서 화난 척 물었다.“설마 일부러 그런 거 아녀요?”지환이가 입술꼬리를 치켜 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인인 셈이다.그는 이서의 머리에 가볍게 키스했다.“집에 데려다 줄까?”“아니요!” 이서는 지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수영복을 파티장으로 보내주면 거기 가서 갈아입을 게요.”그녀는 몸에 생긴 키스 마크를 가려야 방법도 생각해야 했다.지환은 기분이 좋았다.“그래, 그럼 수영복을 보내라고 할 테니, 여기서 기다려. 나 일 처리하고 올게.”“지환 씨는 오늘 밤 파티에 안 가요?”“가지.” 지환은 옷을 입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하지만 좀 늦게 갈 거야. 혼자 가는 게 싫으면 기다렸다가 나랑 같이 가도
수영복을 갈아입은 이서는 불안한 표정으로 수영장으로 향했다.비교적 보수적인 비키니를 입었지만 매끈하고 은은한 광택을 풍기긴 긴 다리는 남성 호르몬이 물씬 넘치는 수영장에서 곧 뭇사람의 초점이 되었다.여러 남자들이 다가와 이서에게 술을 건넸다.이런 지나치게 친밀한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 이서는,애써 피하고 있었다.그러나 다가오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점차 포위 공격의 기세가 되었다.당황한 이서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익숙한 그림자를 찾았다.그러나 여러 번 둘러보았지만 도움을 청할 사람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지금 박예솔은 별장 2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많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한 걸음 한 걸음 수영장 쪽으로 밀려오는 이서의 얼굴에 더 이상 상냥한 미소는 찾아볼 수 없고, 대신 긴장된 차가운 표정이 더해졌다.아래층.한 걸음 한 걸음 좁혀 오는 남자들을 마주한 이서는 숨을 여러 번 들이마시고는 유창한 스페인어로 말했다.“나 이미 결혼했어요. 유부녀예요.”술잔을 든 한 남자가 히죽거리며 웃었다.“놀러 나와서 이런 얘기는 재미없지…… 나랑 한 잔 마셔요.”말을 마친 그 남자는 노골적으로 이서의 몸을 위아래도 훑었다.그의 노골적인 시선이 불편한 이서는 눈살을 찌푸렸다.왠지 이 수영장 파티의 분위기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았다.“나 마시고 싶지 않아요.”이서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거절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한 번 보았다.뒤에는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수영장이었다.수영장에 있던 미남 미녀들이 이쪽의 동정을 살피고, 모두 고개를 들어 쳐다보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다시 한번 수영장을 뒤돌아보고 고개를 돌린 이서는 이미 무수히 많은 튼튼한 가슴벽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듣기 거북한 욕설과 함께.이서는 이를 악물고 아예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바로 건너편으로 헤엄쳐 올라가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그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지환의 친구라는 생각에, 교양이 있는 사람들일 거로 생각했
수영복을 입은 이서는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하지만 현재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은 전혀 신경 쓸거리가 아니었다. 눈에는 우뚝 솟은 궁전 같은 별장만 보였다.‘안에 있는 지환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억지로 들어가긴 힘들 거야.’이럴 때 하경수랑 연락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핸드폰과 옷도 모두 별장 안에 있다는 게 떠올랐다.이서는 개미 한 마리 없는 한적한 도로를 보며 간담이 서늘해졌다.땅이 넓고 인적이 드문 미국에서 핸드폰을 빌려 쓰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그녀는 갑자기 그녀를 픽업해 준 그 호텔이 생각났다.아마도 호텔 쪽 사람들이 그녀를 도울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게다가 그 호텔은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차로 약 십여 분 거리…….걸으면 아마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이서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마음을 정하고 기억을 더듬어 호텔 쪽으로 걸어갔다.별장이 조금 한적한 곳에 있다 보니 한참을 걸어서야 가로등 하나가 보였다.어둠이 짙게 내린 저녁 시간, 집집마다 문을 닫고 불 끄고,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녀는 마치 황량한 사막 속에서 쓸쓸히 홀로 걷는 방랑자 같았다.신발도 신지 않은 이서의 연약한 하얀 발자국이 도로에 한 줄 또 한 줄 외로운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호텔까지 가는데 약 한 시간 넘게 걸렸다.오늘 야근을 서는 사람은 낮에 이서에게 수영복을 전달했던 호텔 매니저 이동호였다.이서를 본 이동호는 깜짝 놀랐다.수영복을 입고 있는 이서의 볼은 빨갛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은 땀인지 수영장 물인지 알 수 없었다.그는 몇 걸음 다가가서 물었다.“사…… 아가씨, 이게…… 어떻게…….”말을 마치고는, 호텔직원에게 담요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이서는 눈앞의 사람을 알아보고 숨을 헐떡였다.“저기…… 전화 좀 해 주실 수 있어요?”“물론입니다. 어디로 전화하시겠습니까?”“음…….”이서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이동호는 관심 어린 눈길로 이서를 쳐다보았다.“왜 그래요
예솔은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한참이 지나서야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 여자는 네가 기절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도망쳤어.”지환은 입술 꼬리를 씨익 올리며 일어나 입구로 걸어갔다.“이서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박예솔은 화가 나서 이성을 완전히 잃고, 뒤에서 지환을 껴안았다.“지환아, 너는 왜 내가 한 말을 믿지 않아? 너와 그 여자, 알고 지낸 지 고작 며칠이니? 너와 난 27년이야, 넌 나나 못 믿니? 조금이라도?”지환은 차가운 얼굴로 박예솔의 껴안은 손을 떼면서 말했다.“예솔아, 나 이미 결혼했어. 너, 선 넘지 말아.”“그래, 나 선 넘을 거야!”박예솔은 다시 지환을 안으며 말했다.“나 진작에 이렇게 해야 했어. 사랑해, 지환아, 나는 여자가 고백하는 게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줄곧 네가 고백해 주기를 기다렸지. 근데 지금은 기다리고 싶지 않아. 자존심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너를 잃는 것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지환은 박예솔의 손을 풀며 다시 한번 경고했다.“나 결혼했다고!”“이혼하면 되지. 난 개의치 않아. 어차피 둘은 위장 결혼이잖아.”지환은 차가운 눈빛으로 박예솔을 바라보며 소외감을 드러냈다.“마지막으로 얘기할게. 나, 이서랑 진짜로 결혼했어. 나, 이서랑 평생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박예솔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것처럼 비틀거리며 입으로 계속 중얼거렸다.“아냐, 아냐, 너, 날 속이고 있어…… 날 속이고 있다고…….”눈썹을 한껏 찌푸린 지환은 박예솔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고는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궁전 같은 별장 앞에 도착한 이서는, 마침 걸어 나오는 지환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익숙한 냄새를 맡으면서, 걱정하던 마음을 내려놓았다.“지환 씨.”지환은 이서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괜찮아?”이서는 코가 시큰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왜 갑자기 기절한 거예요?”지환은 이서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 이서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지환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서의 귓가에 들려오자,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 빛나는 지환의 완벽한 이목구비는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잘생기지 않았다’는 말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지환이었다. 지환은 이 세상에 내려온 최고의 선물과 같았는데, 한때 그를 가졌던 이서에게도 그것은 분명 큰 행운이었다.“‘그날 내가 하지환 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복수 계획에 동의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서의 조용한 목소리에 지환이 잠시 이서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글쎄,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 이서는 왠지 지환의 다음 말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뭔데요?” 지환은 이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널 사랑하게 됐을 거라는 건 변함이 없다는 거지.” 그 한마디에 이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서는 미칠 듯한 두근거림을 감추려 애써 지환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 오늘 하루 종일 여기에 있는 거예요?” 지환이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나한테 주어진 시간은 24시간뿐이잖아. 물론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아. 이제 두 번째 장소로 가자.”“어디로 갈 건데요?” 이서는 호기심을 가득 담아 물었지만, 지환은 대답 대신 조수석 문을 열어줄 뿐이었다.이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 올랐고, 차는 천천히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서는 지환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가정법원 앞에 서 있는 신혼부부와 이혼하러 온 듯한 부부들을 보며 이서가 말했다. “덕분에 생각났네요.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잖아요.”지환은 안전벨트를 풀던 손을 멈추고 이서를 바라보았다.“혹시 지금 내려서 이혼하자는 건 아니지?”이서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왜 이미 고이서의 정보를 손에 넣고도 나한테 바로 알리지 않은 거예요?” 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지환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자료를 받았을 때는 어떤 카페의 근처였어. 그런데 마침 네가 소지엽을 만나러 가는 걸 보게 된 거지.”“하지환 씨가 밖에 있었다고요?” 이서가 놀라며 되물었다. ‘그럴 수가 있다고?’그 말은 곧 두 사람이 비슷한 시간대에 고이서의 자료를 입수했다는 얘기였다. ‘뭔가 이상한데...’ 이서는 지환을 보면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지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이서가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야 뭔가 눈치챈 듯 미소를 지었다.“내가 이겼다는 거야?” 이서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시간을 계산해 봤는데, 하지환 씨는 구태우 씨보다 하루 늦게 고이서를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시간을 계산해 보면 하지환 씨가 이긴 게 확실한 셈이죠.”이서는 괜히 혼자서 이리저리 고민했던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럼...”지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앞으로 24시간 동안 네 시간은 내 거라는 거야?” 이서는 그 말이 묘하게 들렸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든 해도 돼?” 이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뭘 하려고요?” 지환은 이서를 힐끗 보며 미소를 지었다.“내가 뭘 할 것 같은데?” 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순한 생각들을 애써 지우려고 했다. 지환은 이서의 표정을 다시 한번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왜 말이 없어?” 지환은 이내 무슨 생각이 났는지 환한 웃음을 지었다.“이서야, 혹시...” “그런 거 아니에요!”이서는 빠르게 부인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수상쩍었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맞춰줄 수 있어.”지환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리자, 이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것은 지환이 이서에게 보낸 고이서에 관한 자료였다.‘이게 왜 열린 거지?’이서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왜 그래?]이서의 목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자, 지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서의 시선은 시종일관 고이서의 자료에 머물러 있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고이서의 자료를 보는 중인데, 다 보고 나서 다시 전화할게요.”이서는 전화를 끊고 자료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 자료의 내용은 고이서가 제공한 이력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이서는 5살 때 화재 사고를 겪은 후 해외로 보내졌다.하지만 지환이 보내온 자료에는 더욱 상세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당시 겨우 5살이던 고이서는 하룻밤 사이에 해외로 보내졌고, 병원에 도착한 후에는 병원에 있던 환자들이 차례로 퇴원하게 되었다. 딸의 치료 기간 동안, 성지영과 윤재하는 각기 다른 시점에 귀국했는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귀국한 후 처음으로 향한 목적지가 모두 보육원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매번.보육원 쪽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두 사람이 고이서를 대신할 아이를 구하러 간 것임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이서였다. ‘그때 윤수정이 내가 윤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게 전부 사실이었구나.’ 모든 퍼즐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처음에 하은철이 이서와 결혼한 이유는 그녀의 신장을 위한 것이었는데, 윤재하와 성지영은 하은철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서와 하은철이 결혼하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도우려 했다. ‘하긴, 나는 윤씨 가문에 있어서 시집을 통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게 할 도구일 뿐이었어. 누가 그런 도구한테 큰 관심을 쏟으려 했겠어?’‘윤재하가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횡령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하씨 가문은 윤씨 가문에 그토록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윤씨 가문은 줄곧 재기하지 못했다. ‘이상하긴 했지만, 내가 윤씨 가문 사람들한테 배신당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어제, 이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환과 지엽이 보낸 자료를 동시에 받았다. 이서는 어떤 자료를 먼저 열어야 할지 심란해졌고, 아예 두 자료 모두 열어보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하지환 씨를 골라야 할까, 아니면 지엽이를 골라야 할까?’이서는 서류봉투에 있는 전화번호를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다.이서는 갑자기 동전 던지기를 떠올렸다.‘그래,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를 때는 동전을 던지라고 했어!’사실, 동전을 던지는 최종 목적은 선택하기 위함이 아니라, 동전을 던지는 순간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에 있었다.하지만 이서는 동전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잔돈을 바꿨고, 끝내 500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게 되었다.이서는 차로 돌아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동전 던지기를 시작했다.짤랑.이서의 머리가 하얘지던 찰나, 동전은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됐어, 한 번 더 해보자.’생각을 정리한 이서는 곧장 동전을 던지지 않고,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머릿속이 맑아지기를 기다린 후에야 동전을 위로 던졌다.동전은 다시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이서의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이서는 어이가 없어서 동전을 다시 주워 들었다.‘이 방법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 같아.’ ‘그래, 차라리 숫자나 그림으로 고르는 게 좋겠어.’ 이서는 다시 동전을 집어 들었다.‘숫자는 하지환 씨를, 그림은 지엽이를 가리키는 걸로 하자.’마음을 확실히 정한 이서는 다시 동전을 던졌다. 이번에는 동전이 그녀에게 확실한 답을 주었다.‘그림이구나.’하지만 이서는 명확한 답을 얻고도 기쁘지 않았다. 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지엽이 건넨 서류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얇은 서류 더미가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이서는 손을 들어 어렵사리 서류봉투를 열었는데, 서류를 꺼내려는 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환에게서
“그럼 이번 일은 구태우 씨에게 조사를 맡기를 걸로 하겠습니다.”이서가 몸을 일으키며 소지엽을 바라보았다.“세부적인 내용은 심 대표님과 직접 이야기하면 돼. 나는 돌아가서 회사 일부터 처리해야겠어.”소지엽은 이서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바래다줄게.”“괜찮아.”이서는 짧은 대답을 끝으로 몸을 돌려 떠났다. 그 단호한 뒷모습과 깔끔한 마무리, 소지엽은 이서의 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달갑지 않은 게 분명해.’“소지엽 씨?”지엽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심근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자세히 이야기해 보자면...”한편, 아래층에 도착한 이서는 주동적으로 소희 모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서가 돌아가겠다고 하자, 이지숙은 꽤 의아해했다.“이렇게 빨리?” “네, 구체적인 사항은 지엽이가 대표님과 상의할 거예요. 저는 여기 있어도 도울 수 있는 게 없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소희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언니, 제가 데려다줄게요.”이지숙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마음속으로는 소희와 이서의 관계가 더 좋아져서 지환이라는 큰 나무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랐다. “언니, 오늘 소지엽 씨와 같이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렇지 않았다면, 유인이 언니의 만행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이서가 말했다.“그러게, 타이밍을 잘 맞춘 것 같아.”“참, 소희 씨의 양부모가 아직도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지?” “조금 이상하긴 해요. 꽤 오랫동안 저를 귀찮게 하지 않았거든요.”이서가 말했다. “심태윤도?”“네.”이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소희 씨에게 게임 회사의 기밀문서를 훔쳤다는 누명을 씌운 사람이 심태윤일 가능성은 없을까?”소희는 고개를 저었다.“걔가 벌인 짓이었다면 심씨 가문 사람들이 벌써 잡아냈을 거예요.”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못 찾아내는 걸 보면, 심태윤이 벌인 짓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심태윤이 심씨 가문 사람들과 협력해서 벌인 일인 건 아닐
‘소희 씨의 심씨 가문 생활, 꽤 재미있는 것 같은데?’ “우리... 2층에 가서 얘기 좀 할까?”심근영이 2층 방향을 가리켰다. 이서는 소지엽을 한 번 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대답했다.“네.”세 사람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고용인이 차와 음료를 내려놓고 떠나자, 심근영이 입을 열었다.“윤 대표는 어떤 생각을 했길래, 소지엽 씨한테 우리 소희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한 거지?” 이서가 대답했다.“말하자면 깁니다.”시간은 주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이서는 고이서와 성지영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회사로 돌아갔고, 지환은 이서에게 구태우와 자신 중에 누가 먼저 고이서의 자료를 찾는지 비교해 보라고 했다.이서는 일요일 하루 종일 지환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가 분명히 고이서를 조사하러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환 씨... 꽤 진지한 것 같아.’이서는 약간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서도 자신이 왜 긴장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지환이 구태우보다 더 빨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환이 지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지환이 이기기를 바라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복잡한 마음에 시달리던 이서는 오후 3시쯤 구태우의 메시지를 받았다.메시지를 보는 순간, 이서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는데, 그제야 자신이 지환이 이기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때, 이서는 구태우의 전화를 받았다.[회사로 가겠습니다.]“그냥 자료를 보내주시면 되잖아요.” 구태우의 말투는 평소와 같지 않았다.[자료를 원하신다면 가져가겠습니다. 만나서 이야기하시죠.]이서는 자신이 구태우를 화나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오직 고이서를 생각하면서 카페로 향했다.몇 분 후.카페에서 소지엽을 만난 이서의 구태우의 말투가 어두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서는 잠시 생각한 후, 소지엽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왜 네가 온 거야?” “내가 구태우한테 자료를 달라고 했어. 왜, 불편하기라도 한 거야?” 이서는 소지엽의
심유인이 말하지 않자, 심근영은 소민찬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민찬은 선물에 대해 전혀 몰랐던 터라, 값싼 선물들을 보고 당황하여 얼른 설명했다.“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선물들은 제가 산 게 아니라, 전부 유인이가 산 거예요.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애초에 유인이는 저한테 몸만 오면 된다고 했습니다.”“여러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소민찬이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답례 선물은 안 받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되겠죠?” 소민찬은 이 말을 끝으로 도망치듯 심씨 가문의 저택을 떠났다. 심유인은 그의 뒤를 쫓아가려다가 심근영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유인아, 우리가 알아듣게끔 설명을 해야 하지 않겠니?”심유인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삼촌, 숙모, 저... 저는...”“차마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네요.”소희가 심유인의 곁으로 다가가 냉소하며 말했다.“제가 대신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걸 알고, 일부러 소민찬 씨를 찾아가서 남자 친구 역할을 해달라고 한 거죠?” “소민찬 씨는 남자 친구인 척만 하면 되니까, 이 선물들도 소민찬 씨가 샀을 리 없어요.”“전부 다 언니 사비로 사신 거죠?” 심유인의 안색이 아주 어두워졌다.“그런 거 아니야...!”심유인은 아직도 변명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소민찬 씨가 선물을 준비한 게 아니라면,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난 거니?”이지숙이 물었다. ‘다른 세 가지 선물은 전혀 가짜가 아니었어. 확실히 수십억은 되는 것들이었다고.’‘회사에서 근무하지도 않는 유인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겠어?’심유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심근영은 심유인의 반응을 살피다가 집사를 불렀다.“당장 조사해, 당장!”심유인은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아 ‘털썩’ 소리를 내며 심근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삼촌, 제가 다 설명해 드릴게요. 그 선물들은... 전부
심유인과 소민찬은 그제야 제자리에 얌전히 섰다.“유인아, 네가 먼저 말해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심유인은 소민찬의 핸드폰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더 많은 비밀이 폭로되는 건 막아야 해!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겠어.’ “사, 사실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가 아니에요. 하지만 민찬 씨가 제 남자 친구가 되길 바랐고, 제가 먼저 그 말을 꺼내기는 부끄러워서 제 남자 친구인 척해달라고 한 거예요. 이번 일로 잘 지내면서 감정을 키우고 싶었거든요.” “절대 다른 뜻은 없었어요. 맹세할게요!” 심유인이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다면, 소희는 심유인을 믿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심유인의 마지막 말은 소희의 의심을 더욱 확고히 했다.‘심유인, 일부러 그런 거구나?’ ‘소민찬을 남자 친구인 척 데려온 건, 현태 오빠에게 망신을 주기 위한 거였어.’ “감정을 키우고 싶었다면서, 왜 저렇게 많은 선물을 사 오라고 한 거예요?”소희는 일부러 모르는척하며 물었고, 단번에 덜미를 잡힌 심유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주방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은 소민찬과 심유인을 향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소민찬은 특히 소지엽의 시선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 그건...”“민찬 씨는 저를 좋아하지 않지만, 소씨 가문은 아무래도 명문가 집안이잖아요. 그런 분들을 뵈러 오려면 선물 정도는 가져와야 하지 않겠어요?”심유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정 교육이 잘 되어 있어서 남의 집에 방문할 때 선물을 챙기는 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2억도 아닌 몇십억짜리 선물을 준비하는 건 너무 과하지 않을까요?”소희는 비웃으며 선물 더미 옆으로 향했고, 상자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안에도 아주 비싼 게 들었겠죠?” 심유인은 곧장 소희를 막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소희는 선물 상자를 뜯기 시작했고, 이내 안에 있던 선물이 바닥에 나뒹굴었다.그 선물을 확인한 소희는 놀라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형, 안녕.”소민찬은 소지엽의 질문을 피하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소지엽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소민찬을 바라보았다.“민찬아,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잖아. 네가 왜 여기 있냐니까?” 소민찬은 이제 마냥 대답을 회피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분명히 실마리가 드러날 것이니 말이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나만 보고 있어...’소희는 소민찬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며 의문을 제기했다.“모르셨어요? 소민찬 씨는 유인 언니의 남자 친구예요. 오늘 여기 온 이유도 사실상 저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 거죠.” “심유인 씨랑 사귄다고?”지엽이 눈살을 찌푸렸다.“며칠 전에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은 여자는 심유인 씨가 아니었잖아?” 소민찬과 심유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형, 아무래도 잘못 기억하는 것 같아. 그날 같이 밥을 먹은 사람도 유인이었어.” 소지엽은 지난번에 집에서 함께 식사한 여자가 심유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여자의 성이 뭔지는 기억 안 나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어렴풋이 기억나.’‘그 여자는 절대 심유인 씨가 아니었어.’ “아니, 그 여자는 심유인 씨가 아니었어!” 소지엽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리고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은 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잖아. 지금은 왜 또 심유인 씨와 사귄다는 거지?” 소민찬은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며 말하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다소 역정을 내며 말했다.“형, 이건 내 사적인 일이라, 형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부모님도 내가 여자 친구를 몇 명을 사귀는지 신경 쓰지 않으시는데, 형이 무슨 자격으로 이러는 거야?”“그래, 나는 네 사적인 일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어. 하지만 계속 본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본사에 들어가고 싶다면 절대 스캔들을 만들면 안 돼! 그런 일은 큰 파장을 일으킬 거라고!” 소민찬은 당황하기 시작했다.‘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