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수는 친절하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여기는 환이 어릴 때부터 놀던 소꿉친구들이네. 오늘 환이가 돌아온 걸 알고 특별히 달려왔네. 예솔아, 예담아, 자, 여기는 지환이 안사람이다.”젊은 남자가 반갑게 인사했다.“형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박예담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저희 누나 박예솔입니다.”이서는 손을 내밀어 박예담과 가볍게 악수하고, 박예솔을 바라보았다.박예솔은 1초간 망설이다가 곧 활짝 웃으며 이서의 손을 잡았다.“지환이 정말 결혼했네. 난 또…….”그녀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얼굴이 예쁘장하고, 정숙하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졌다. 그녀는 이서를 찬찬히 쳐다보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예쁘네요. 어쩐지 지환이 빨리 결혼하려고 안달 나하더니…….”분명 듣기 좋은 말인데, 이서는 왠지 귀에 거슬렸다.그녀가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은 가볍게 두 사람과 고개를 끄덕인 걸로 인사를 대신한 셈이다.“너희들 배고프지?” 하경수의 모든 관심은 이서한테 있었다.“이서야, 자, 우리 밥 먹으러 가자.”이서는 하경수에게 이끌려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식탁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 한 상 차려 있었다.“이서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지환이가 준비하라고 했어. 어여 먹어봐, 네 입맛에 맞는지 모르겠다…….”이서는 코끝이 좀 시큰시큰했다. 지환을 한 번 보고는 곧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네.”상황을 지켜본 하경수는 희색이 만면했다.“기분 좋으면 된 거야. 자, 어여들 앉아서 먹자. 우리 집…….”지환은 갑자기 크게 헛기침했다.하경수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내가…… 요리…… 했지? 허허허.”“아…… 아버님이 직접 요리하셨어요?”이서는 감동했다.“이렇게 많은 요리를…… 많이 힘드셨죠?”“한 식구인데 인사치레 이런 거 다 빼고 편하게 하거라. 어여 먹어 봐, 입맛에 맞으면 앞으로 매일 해 줄게.”하경수의 지나친 열정에 이서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지환은 하경수와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를 나누었다. 이서는 그제야 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예솔이 말을 끊었다.“예담아, 가서 과일 좀 갖고 와.”뭔가 눈치챈 예담도 입을 다물고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이서는 박예담의 뒷모습을 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예담 씨 방금 뭐라고 얘기한 거 같은데…….”“아무것도 아니에요.”박예솔은 쿠션 밑에 숨겨진 주먹을 꽉 쥐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쟤, 신경 쓰지 말아요.”그녀는 이서의 손을 잡고,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반지 정말 예쁘네요.”‘원래는 내 손에 있어야 하는 건데…….’“네.” 이서도 반지를 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같은 시간 위층.하경수의 말을 다 듣고 지환은 눈썹을 찌푸렸다.“왜 굳이 박예솔한테까지 얘기하신 거예요? 우리 집에 별장이 없는 것도 아니고…….”하경수는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허허 웃었다.“우리 집 별장들 다 수백억, 수천 억짜리인데, 괜찮겠어? 게다가, 예솔이도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야?”미간을 짚고 있던 지환은 하경수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다.“아버지는 내가 이서와 위장 결혼이라도 한 줄 알죠? 그래서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떠보려고 한 거고…….”자기의 속마음을 들켜버린 하경수는 멋쩍게 헤헤 웃으며 말했다.“무슨 소리야? 내가 어찌 너를 의심하겠어? 게다가 이서, 그 아이도 참하게 생긴 게, 딱 봐도 좋은 아가씨더라. 이서한테 잘해라.”지환은 하경수의 이런 수법에 넘어가지 않았다.“아버지, 좀 그만 해요! 그러다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 되지 마시고, 그러면 손주는 영영 물 건너가는 겁니다.”손주 얘기를 들은 하경수는 기뻐서 눈썹을 치켜세웠다.“너희들 아이를 가지기로 했냐?”지환은 하경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서재의 문을 열고 아래층 거실에 있는 이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이서야, 올라와.”이서는 고개를 들고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네.”그러고는 또 박예솔과 예담에게 말했다.“아무쪼록 감사해요. 저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이야기
처음으로 장거리 비행을 한 이서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목욕을 마치고 나온 지환은 이서가 귀여운 붉은 입술을 내밀고, 달콤하게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남자의 본능적 충동 인자가 단번에 깨어났다.그는 차마 이서를 깨울 수 없어 이서를 안는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은혜도 모르는 녀석.” 그는 이서의 붉은 입술에 다정하게 키스하며 몸의 열기를 식히려 했다.밤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서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 아침이었다.그녀는 지환의 품에 안겨 움직거렸다.지환은 곧 잠에서 깨어났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뜨거운 손바닥으로 이서의 아랫배를 슬슬 문질렀다.이서의 볼은 뜨거웠다.“지환 씨…….”방금 깨어난 목소리는 나른하고 섹시했다.지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뜨고 이서의 콧날개를 문지르며 그녀를 놀렸다.“응, 이제 ‘여보’라고 불러봐.”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얼굴이 빨개진 이서는 주먹으로 지환의 튼튼한 가슴을 밀어내며, 속 따로 겉 따로 말을 뱉었다.“싫어요.”지환은 상반신을 기댄 채 눈썹을 들어 이서를 쳐다보았다.눈꼬리의 점이 반은 밝고, 반은 어두운 빛 속에서 매우 매혹적으로 느껴졌다.“왜, 싫어?” 그는 이서의 허리를 잡으며 말했다. “그럼 누구한테 여보라고 부르려고?”허리가 예민한 이서는 지환이 손에 닿자마자 간지러워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그만, 그만이요.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세요.”지환은 또 한 번 허리를 간지럽히고 나서야 말했다.“우리 아버지한테는 입에 착착 붙게 잘 부르면서, 왜 나한테는 안 된다는 거야?”이서는 떼쓰는 지환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다가 틈을 타서 지환의 품에서 도망쳤다.“빨리 가서 씻어요.”지환은 누워서 꼼짝하지 않았다.“뽀뽀해 주면 바로 씻을게.”손으로 이마를 받친 이서는, 애처럼 장난스럽게 떼쓰는 지환의 모습을 어이없어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다가갔다.그녀는 눈을 감고 지환의 입술에 키스했다.“이제…….”말
박예솔에게 파티에 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나니, 걱정이 생겼다.수영복이 없다.사자고 하니, 낯설고 물선 곳에서 어디에 가야 살 수 있는지도 몰라 난감했다.한창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환이 양복 차림에 구두를 신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외출할 거예요?”“응, 시내에 다녀와야 해.” 지환이 말했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회사 일 때문에 한국과 미국을 왕복하며 업무를 봤었다. 이 방대한 회사의 회장 자리를 너무 오랜 기간 비워 두는 건 회사의 전반적인 업무를 장악하는 데 불리했다.하경수가 방금 그를 부른 것도 이 일 때문이었다.“그럼 같이 가도 될까요?”지환이가 갸우뚱했다.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발가락을 웅크렸다.“나…… 나 수영복이 필요해요.”눈썹을 높이 치켜 뜬 지환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 \했다.“그럼, 같이 가.”“시내에 일 보러 가는 거 아니에요?”“오후에 처리해도 괜찮아.” 지환은 이서의 허리를 감싸고 외출했다.이서가 수영복을 입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조수석에 앉은 이서는 마음이 불안했다.“정말 저 때문에 일 그르치는 거 아니죠?”“아니야.” 지환은 시동을 걸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수영복이야?”‘설마 내 어린 아내가 자극적인 컨셉을 좋아하나?’“예솔 씨가 수영장 파티에 가자고 해서요…….”지환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러니까 파티에 가려고 수영복 산다는 거야?”이서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네.”지환은 기가 찬 듯 입을 한 번 크게 벌려 ‘허’하고 소리를 내고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서도 차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지환이 왜 화가 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얌전히 조수석에 움츠리고 앉아 자기 존재감을 최소화하려고 했다.시내에 도착한 뒤, 지환은 여러 길을 돌아서 마침내 하씨 집안에서 투자한 백화점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이서에게 휘파람을 불며 희롱하는 남자
지환은 침대에 누워 욕실 문이 열리기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이서가 들어간 지 30분이나 지났다.그는 입을 열었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자기야, 이제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간다.”이미 수영복을 갈아입은 이서는 지환의 말에 다리가 나른해졌다.그녀는 문짝을 붙잡고 얘기했다. “아니요, 금방 나갈게요.”말을 마친 이서는 눈을 감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밖으로 나갔다.문을 열고 그녀는 상체의 얇은 옷감을 두 손으로 감싸고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지환의 눈동자에 빨간색이 점차 들었다.이서는 빨간색 비키니를 골랐다.본래부터 하얀 피부에 빨간색을 더하니, 피부가 백옥같이 빛났다.특히 하얀 피부 곳곳에 생긴 얼룩덜룩한 붉은 반점은 마치 먹음직스러운 딸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지환의 폭발할 것 같은 욕망을 더는 억누를 수 없었다.그는 손을 뻗어 이서를 품에 안고는 어깨끈을 스르륵 풀었다.이서는 얼굴을 붉히고 위태로운 수영복을 붙잡았다.“지환 씨…….”석양의 잔광이 창문 앞에 떨어지고서야 이서는 맥없이 일어났다.“이제 어떡해요?”이서는 허리를 짚고 말을 계속했다.“오늘 저녁 파티에 가야 하는데, 어떡해요?”지환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안 가면 되겠네.” 이서는 그를 째려보면서 화난 척 물었다.“설마 일부러 그런 거 아녀요?”지환이가 입술꼬리를 치켜 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인인 셈이다.그는 이서의 머리에 가볍게 키스했다.“집에 데려다 줄까?”“아니요!” 이서는 지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수영복을 파티장으로 보내주면 거기 가서 갈아입을 게요.”그녀는 몸에 생긴 키스 마크를 가려야 방법도 생각해야 했다.지환은 기분이 좋았다.“그래, 그럼 수영복을 보내라고 할 테니, 여기서 기다려. 나 일 처리하고 올게.”“지환 씨는 오늘 밤 파티에 안 가요?”“가지.” 지환은 옷을 입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하지만 좀 늦게 갈 거야. 혼자 가는 게 싫으면 기다렸다가 나랑 같이 가도
수영복을 갈아입은 이서는 불안한 표정으로 수영장으로 향했다.비교적 보수적인 비키니를 입었지만 매끈하고 은은한 광택을 풍기긴 긴 다리는 남성 호르몬이 물씬 넘치는 수영장에서 곧 뭇사람의 초점이 되었다.여러 남자들이 다가와 이서에게 술을 건넸다.이런 지나치게 친밀한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 이서는,애써 피하고 있었다.그러나 다가오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점차 포위 공격의 기세가 되었다.당황한 이서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익숙한 그림자를 찾았다.그러나 여러 번 둘러보았지만 도움을 청할 사람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지금 박예솔은 별장 2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많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한 걸음 한 걸음 수영장 쪽으로 밀려오는 이서의 얼굴에 더 이상 상냥한 미소는 찾아볼 수 없고, 대신 긴장된 차가운 표정이 더해졌다.아래층.한 걸음 한 걸음 좁혀 오는 남자들을 마주한 이서는 숨을 여러 번 들이마시고는 유창한 스페인어로 말했다.“나 이미 결혼했어요. 유부녀예요.”술잔을 든 한 남자가 히죽거리며 웃었다.“놀러 나와서 이런 얘기는 재미없지…… 나랑 한 잔 마셔요.”말을 마친 그 남자는 노골적으로 이서의 몸을 위아래도 훑었다.그의 노골적인 시선이 불편한 이서는 눈살을 찌푸렸다.왠지 이 수영장 파티의 분위기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았다.“나 마시고 싶지 않아요.”이서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거절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한 번 보았다.뒤에는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수영장이었다.수영장에 있던 미남 미녀들이 이쪽의 동정을 살피고, 모두 고개를 들어 쳐다보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다시 한번 수영장을 뒤돌아보고 고개를 돌린 이서는 이미 무수히 많은 튼튼한 가슴벽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듣기 거북한 욕설과 함께.이서는 이를 악물고 아예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바로 건너편으로 헤엄쳐 올라가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그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지환의 친구라는 생각에, 교양이 있는 사람들일 거로 생각했
수영복을 입은 이서는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하지만 현재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은 전혀 신경 쓸거리가 아니었다. 눈에는 우뚝 솟은 궁전 같은 별장만 보였다.‘안에 있는 지환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억지로 들어가긴 힘들 거야.’이럴 때 하경수랑 연락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핸드폰과 옷도 모두 별장 안에 있다는 게 떠올랐다.이서는 개미 한 마리 없는 한적한 도로를 보며 간담이 서늘해졌다.땅이 넓고 인적이 드문 미국에서 핸드폰을 빌려 쓰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그녀는 갑자기 그녀를 픽업해 준 그 호텔이 생각났다.아마도 호텔 쪽 사람들이 그녀를 도울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게다가 그 호텔은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차로 약 십여 분 거리…….걸으면 아마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이서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마음을 정하고 기억을 더듬어 호텔 쪽으로 걸어갔다.별장이 조금 한적한 곳에 있다 보니 한참을 걸어서야 가로등 하나가 보였다.어둠이 짙게 내린 저녁 시간, 집집마다 문을 닫고 불 끄고,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녀는 마치 황량한 사막 속에서 쓸쓸히 홀로 걷는 방랑자 같았다.신발도 신지 않은 이서의 연약한 하얀 발자국이 도로에 한 줄 또 한 줄 외로운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호텔까지 가는데 약 한 시간 넘게 걸렸다.오늘 야근을 서는 사람은 낮에 이서에게 수영복을 전달했던 호텔 매니저 이동호였다.이서를 본 이동호는 깜짝 놀랐다.수영복을 입고 있는 이서의 볼은 빨갛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은 땀인지 수영장 물인지 알 수 없었다.그는 몇 걸음 다가가서 물었다.“사…… 아가씨, 이게…… 어떻게…….”말을 마치고는, 호텔직원에게 담요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이서는 눈앞의 사람을 알아보고 숨을 헐떡였다.“저기…… 전화 좀 해 주실 수 있어요?”“물론입니다. 어디로 전화하시겠습니까?”“음…….”이서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이동호는 관심 어린 눈길로 이서를 쳐다보았다.“왜 그래요
예솔은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한참이 지나서야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 여자는 네가 기절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도망쳤어.”지환은 입술 꼬리를 씨익 올리며 일어나 입구로 걸어갔다.“이서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박예솔은 화가 나서 이성을 완전히 잃고, 뒤에서 지환을 껴안았다.“지환아, 너는 왜 내가 한 말을 믿지 않아? 너와 그 여자, 알고 지낸 지 고작 며칠이니? 너와 난 27년이야, 넌 나나 못 믿니? 조금이라도?”지환은 차가운 얼굴로 박예솔의 껴안은 손을 떼면서 말했다.“예솔아, 나 이미 결혼했어. 너, 선 넘지 말아.”“그래, 나 선 넘을 거야!”박예솔은 다시 지환을 안으며 말했다.“나 진작에 이렇게 해야 했어. 사랑해, 지환아, 나는 여자가 고백하는 게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줄곧 네가 고백해 주기를 기다렸지. 근데 지금은 기다리고 싶지 않아. 자존심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너를 잃는 것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지환은 박예솔의 손을 풀며 다시 한번 경고했다.“나 결혼했다고!”“이혼하면 되지. 난 개의치 않아. 어차피 둘은 위장 결혼이잖아.”지환은 차가운 눈빛으로 박예솔을 바라보며 소외감을 드러냈다.“마지막으로 얘기할게. 나, 이서랑 진짜로 결혼했어. 나, 이서랑 평생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박예솔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것처럼 비틀거리며 입으로 계속 중얼거렸다.“아냐, 아냐, 너, 날 속이고 있어…… 날 속이고 있다고…….”눈썹을 한껏 찌푸린 지환은 박예솔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고는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궁전 같은 별장 앞에 도착한 이서는, 마침 걸어 나오는 지환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익숙한 냄새를 맡으면서, 걱정하던 마음을 내려놓았다.“지환 씨.”지환은 이서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괜찮아?”이서는 코가 시큰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왜 갑자기 기절한 거예요?”지환은 이서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 이서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