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해!” 남자들의 손이 몸에 닿자, 이서는 굴욕적인 눈물을 흘렸다.“전화할게, 내가 전화할게!”두 경호원은 아쉬운 듯 마주 쳐다보고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이서가 마침내 전화하겠다는 소식을 들은 민예지는 득의양양하게 들어와서 옷이 이미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이서를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진작 고분고분 말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괜히 몸 고생만 했잖아. 휴대전화 줘.”이서는 두 팔로 몸을 꽉 감싸고 휴대전화를 받지 않았다.“왜, 또 마음 바뀐 거야? 번복하려고?”이서는 코를 훌쩍거리며 목을 곧추세웠다.“먼저 옷이나 갖다줘.”“설마 시간을 끌려고 하는 수작은 아니겠지?” 민예지는 가볍게 피식했다.“여기 민씨 집안 바닥이야. 하은철도 들어오려는 한바탕 고생해야 할걸? 네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때까지 시간을 끌어봐라, 소용이 있나?”차갑게 웃는 이서는 눈동자에는 아직도 눈물자국이 남아있었다.“그냥 옷만 하나 걸치겠다는 건데, 넌 뭐가 그리 두렵니?”“그래.” 민예지는 더 이상 헛소리하기 싫어 옷을 가져오라고 했다.루즈한 롱스커트였다.이서는 옷 위에 껴입었다.이목구비가 예쁘고 몸매까지 베이글녀인 이서는, 헐렁한 옷을 입고 있어도 예쁨을 감출 수 없었다. 심지어 여리여리한 느낌은 남자의 보호본능을 더욱 자극했다.민예지는 재촉했다.“얼른 전화해!”“잠깐만.”“너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민예지는 슬슬 짜증이 났다.“윤이서, 내 인내심은 한계를 테스트하지 마. 전화 안 할 거면 내가…….”“너는 왜 사람들이 너와 날 놓고 비교하는지 아니?” 맑은 눈빛을 한 이서는 갑자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민예지는 정곡을 찔린 듯 움찔하며 물었다.“왜?”“알고 싶어? 그럼, 가까이 와봐!”민예지는 1초 동안 망설였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이서의 방향으로 걸어갔다.“빨리 말해.”이서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민예지의 목을 누르고 온몸의 힘을 다해 그녀를 창가로 끌고 갔다.“윤…… 이서…… 너
이서는 곧바로 수술실로 실려 갔다.지환은 따라 들어가려다가 이상언에게 제지당했다.“친구…….” 이상언이 침착하게 말했다.“이서 씨 괜찮을 거야.”고개를 돌린 지환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아직 가시지 않아 무서워 보였다.오랜 친구로서 이상언도 지금의 지환이 좀 무서웠다.그는 지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지환은 침착하고 자제력이 강하며 절대로 실수하거나 허점을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마지노선을 건드리지 않는 한.지환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서는 지환의 마지노선이 되었다.다만 본인조차도 모르고 있다.“이서 어떻게 됐어요?”소식을 받고 달려온 임하나는 이상언을 보자마자 얼른 다가가 물었다.이상언은 지환을 한번 보고는 고개를 돌려 임하나에게 대답했다.“방금 수술실에 들어갔어.”“어느 개자식이 그랬어요?” 임하나는 분노했다.“민예지.”“젠장!” 임하나는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이상언은 그녀를 가로막았다.“어디 가요?”“민예지 그년한테 복수하러 가야죠. 미친년 완전히 돌았어. 틈만 나면 이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가지 마요.” 이상언은 이 만만찮은 두 사람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이 일은 지환이 처리할 거예요.”“어떻게 처리한대요?”그녀가 지환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민예지는 4대 가문 중 하나인 민씨 집안 사람이다. 게다가 민씨 집안의 권력자인 민호일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 바로 그의 딸 민예지였다. 따라서 하경철 노인이 나서도 좀 난처한 상황이다.‘평범한 직장인인 지환이 민예지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걱정 마요.”이상언도 임하나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눈짓했다.“일단 기다려 봅시다.”애가 탄 임하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지환이 마치 얼음조각마냥 수술실 입구에 꼼짝달싹하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곧 입술을 앙다물고 이상언 옆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한 세기 같은 시간이 지나고 의사가 마침내 수술실에서 나왔다.“환자에게 큰 이상은 없습니다. 다만 머리를 여러 군데 부딪
지환은 이서를 꽉 껴안았다.밀착되어 있는 두 사람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나댔다.이서는 남자 특유의 좋은 냄새를 맡으며 자신도 모르게 볼이 뜨거워졌다.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지환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며 확인했다.“당신 괜찮아요? 다치지는 않았어요? 민예지의 경호원들이 당신을 어떻게 하지 않았죠?”이서의 손놀림에 몸에 불이 켜진 지환은 이서의 손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거기서는 괜찮았는데…… 계속 함부로 이렇게 만져대면 안 괜찮을 거 같은데? 뭔 사고가 나도 몰라…….”그 말을 들은 이서는 놀라서 갑자기 얼음이 되었다.정수리 쪽에서 들려오는 지환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고서야 자신을 놀린 거라는 걸 깨닫고 수줍어하며 주먹으로 지환의 가슴을 쳤다.작고 야리야리한 주먹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지환은 그녀의 주먹을 잡고 입술에 키스했다.“이서야, 후회하기 없기다.”“네?”“나랑 함께하겠다는 거…….”이서의 얼굴이 또 타올랐다.“누가 당신이랑 함께하겠데요?”기분이 좋은 지환은 이서의 붉은 입술에 뽀뽀했다.“칫…… 좋으면서!”이서는 수줍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지환 씨, 나빴어!”“그래, 그래…….” 지환은 그녀를 껴안고 달랬다.“전부 내 불찰입니다. 됐지?”이서는 부끄러워 지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어 지환에게 물었다.“우리…… 그럼 계약 위반 아닌가요? 동거 계약서에 따르면, 조항 위반 시 이혼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은 다른 입술에게 짓눌렸다.……민예지가 실종된 이틀째 되는 날까지, 민호일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민예지가 연락이 되지 않자,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그래서 모든 인력을 총출동시켜 민예지를 찾기 시작했다. 민예지의 실종 소식도 온 북성시에 퍼졌다.윤수정조차도 알 정도로.“납치됐나?” 윤수정은 입술을 깨물며 하은철에게 물었다.그녀는 아침부터 머리 아프다는 핑곗거리를 만들어 하은철을 불러냈
4대 가문은 겉으로나 속으로나 서로 맞지 않지만, 그래도 뭔 일이 있으면 서로 왕래하고 때론 힘을 합치기도 했다.윤수정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게 뭔 일이야? 어떻게 된 거래?”‘이서가 들려와야 하는데?’“아직 잘 모르겠어. 나 먼저 가 볼게.”하은철은 말을 던지고 급히 떠났다. 병실에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윤수정만 남겨졌다.민예지 집에 도착해서야 하은철은 민예지의 상황이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에게 처참하게 당한 것 같았다. 온몸이 성한 곳 하나 없이 멍으로 가득했다. 특히 나름 예쁘장했던 얼굴은 맞아서인지 돼지머리처럼 부었다.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그녀는 입에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작아 무슨 말인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설치고 다니던 딸이 이 지경이 된 걸 보니, 민호일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어떤 놈 소행인지 알아보셨어요?” 하은철이 물었다.민호일은 고통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아무것도 못 찾았어.”“예지는요? 예지도 본인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요?”고개를 떨구고 있던 민호일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의사 말로는 예지가 실종된 날부터 꼬박 이틀 밤낮을 유린당한 거 같다고…… 지금 애 정신 상태가…… 누구인지 알아도 제대로 말할 수 없네……. 흑흑!”하은철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서 있었다.“민 회장님, 안심하세요. 저희도 범인을 찾아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바로 이때 침대에 누워있던 민예지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이서! 이서 남편은…….”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또 기절했다.상황을 지켜보던 의사가 허둥지둥 침대로 다가가 예지의 인중혈을 꾹 눌렀다. 잠시 뒤 민예지가 눈을 떴다.“민 회장님, 지금 아가씨 경과가 좋지 않습니다…….”주치의
이서는 어리둥절해졌다.임하나의 얘기에 깃든 정보량이 너무 많다. 이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 반나절이 지나서야 어눌하게 말했다.“프러포즈…… 이벤트 준비했다고?”“응.”임하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지금쯤 아마 모두 사라졌을걸? 자기 레스토랑도 아닌데 어떻게 계속 두겠어?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그랬다. 너무 아쉽다.”제일 아쉬운 건 프러포즈 주인공인 이서이다.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계속 물었다.“그날 지환 씨가 도착한 뒤 난 기절했어.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니?”“나는 따라가지 않았으니, 무슨 일이 일었는지는 모르겠어.”이서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그럼, 밖에 무슨 소문이라도 들은 거 없어?”지환이 그녀를 데리고 빠져나왔으니, 민예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아니야…….” 이서의 손을 잡은 임하나가 말을 이었다.“이서야, 걱정하지 마. 민예지가 다시 문제 일으킨다면 그땐 그냥 어르신께 찔러버리자.”“제발 그러지 마. 할아버지 연세가 많으시고, 건강도 안 좋으시잖아.” 이서는 계속 말했다.“괜히 나 때문에 할아버지 신경 쓰시게 하기 싫어.”임하나는 가슴이 아팠다.“넌 어찌 맨날 다른 사람 생각만 하니?”말하면서 또 유유히 한숨을 쉬었다.“친구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능한 내 자신이 참 싫다.”임씨 집안은 일반 가정이었다.임하나 엄마가 하씨 그룹 산하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서의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이서는 웃으며 말했다.“나 괜찮아. 똥이 무서워서 피하니 더러워서 피하지. 내가 자리 잡기 전까지 민예지를 피해 다니면 돼. 언젠가는 나도 윤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테니까 그때 꼭 되갚아 주면 돼.”임하나도 따라 웃었다.“그래, 너만 믿는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지환이 안 보이는 걸 보고 임하나가 물었다.“지환 씨는?”“티켓팅 하러 갔어……. 며칠 뒤 퇴원하면 미국에 다녀오려고.”“이렇게 빨리? 머리 다친 거 아직
하은철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임하나!”임하나는 하은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왜? 이서를 메리아트 호텔로 납치할 때는 이런 꼴 당할 줄 몰랐나 보지?”“무슨 소리야?” 하은철은 얼떨떨해졌다.이서는 전후 사정도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와 따지고 드는 하은철을 보며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저기, 도련님, 다음번에는 범인이 누군지 제대로 알고나 와서 따지든지 하세요. 민예지가 다 죽게 생겼다는데,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내가 했다는 증거라도 있으면 경찰에 신고해.”“들었지?” 하은철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본 임하나는 속이 고소했다.“그리고 이서…… 이미 결혼했거든…….”임하나는 이서의 손에 있는 큰 다이아몬드반지를 흔들어 보여줬다.“부탁인데, 앞으로 이렇게 불쑥불쑥 이서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괜한 오해 살 수도 있잖아. 그리고 난 다른 사람들이 이서를, 쓰레기 분리 수거함으로 오해하는 것도 싫어.”하은철의 안색이 극도로 보기 흉해졌다.“이서, 너 정말 야박해졌구나. 민예지 저렇게 된 거, 너와 상관없다고 해도 네 남편이 연관되지 않았다는 거를 어찌 장담해?”이서는 속눈썹을 살짝 떨며 미소를 지었다.“관련 있건 없건, 그건 우리 부부 두 사람의 문제야. 너랑 뭔 상관이야? 다른 볼일 없으면 그만 가봐. 난 쉬어야겠어.”하은철은 화가 뭉클뭉클 치밀어 올라오는 걸 꾹 참았다.‘내가 힘이 남아 돌아 쓸데없는 짓 했구나.’‘이서가 입원한 걸 알고, 밥도 먹지 않고 달려왔는데…….’‘고맙다는 말은 고사하고, 문전박대를 당하다니…….’‘앞으로 다시 네 일에 관여하면, 내가 성을 간다.’하은철은 화가 나서 인사말도 없이 획 하니 나가버렸다이때, 병원 1층.지환은 빠른 걸음을 내디디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핸드폰을 귓가에 댄 그의 얼굴은 숙연했다. 요 며칠 이서 앞에서의 자상하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대표님, 항공권은 이미 예약 마쳤습니다.]이천은 태블릿을 켜고 계속 말했다.[며칠 전에 데려온 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은철은 이서에 대한 불만을 한껏 늘어놓았다.“호의를 개떡으로 받아들인다니……. 이서 남편이 민씨 집안을 건드려 엄청난 큰 사고를 쳤길래 내가 조심하라고 알려주려고 부리나케 달려왔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절친까지 합세해서 저한테 난리 치더라고요. 이서 남편이 준 반지를 들고 자랑질하면서…….”반지 얘기를 꺼내자, 다시 흥분한 하은철은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잘난 반지 하나 가지고 난리야. 그런 반지, 난 한 트럭도 산다.”‘이서 남편이 뭐라고, 그딴 반지 뭐가 좋다고 자랑질하고 난리야?’지환은 미간을 치켜세우고 아무 내색하지 않았다.하은철도 지환이 맞장구를 쳐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계속 혼자서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았다.“뭐, 사랑받고 있다는 걸 자랑질하고 싶어서 그런 거겠죠? 근데 정말 웃긴 건 내가 병실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남편이란 놈,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사랑한다면 병실을 지켜야지 아픈 마누라 두고 어디 싸돌아 다니는 건지……?”하은철은 왠지 모르게 속이 쓰라렸고, 살짝 짜증도 났다.“기다려 봐요. 조만간 저희 할아버지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빌고 애원할 텐데…… 그때도 내 앞에서 콧대 빳빳이 들고 있는지 봐야겠어요…….”지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왜?”“생각해 보세요.”하은철은 눈썹이 휘날리며 장황하게 얘기를 해갔다.“민예지는 민호일이 가장 아끼는 딸이잖아요. 그래서 딸에 대한 기대가 엄청 크거든요. 그런데 그런 딸이 지금 거의 폐인이 되었으니…… 이 일을 정년 이서남편이 한 게 아니라고 해도, 민 회장이 진짜 범인을 찾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희생양을 찾을 텐데…… 그럼 그 1위 후보는 이서 남편이 될 테니까요.”지환은 입꼬리를 더욱 치켜올렸다.“넌 이서가 네 할아버지한테 가서 애원하길 바라고 있는 것 같다.”하은철은 웃으며 말했다.“삼촌, 솔직히 얘기하자면, 이서가 고개 숙이는 모습 보고 싶어요.”그는 이서가 그의 앞에서 굽실거리는 모습을 못 본 지 오래되었다.지환은 옅
얼굴의 홍조가 사라지자, 이서는 고개를 돌려 지환에게 물었다.“혹시 민예지 얘기 들었어요?”이서는 민예지가 반송장이 된 건 지환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다.그가 그런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응.” 지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누가 그랬을까요?”“글쎄…….”지환은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아, 그런데 그날 어떻게 호텔을 빠져나온 거예요?”민예지 곁에 경호원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지환이 다친 데 없이 무사하게 빠져 나오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을 터.“내가 들어갔을 때 경호원들은 이미 다 쓰러져 있던데?”지환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이서는 턱을 매만지며 뭔가 생각난 듯 얘기했다.“그렇다면 그때 우리 말고, 다른 무리들이 있었던 거네요. 민예지가 저 지경이 된 건 그 사람들과 분명 연관이 있을 거예요.”지환은 이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남 신경 그만 쓰시고…….”“나는 당신이……”이서가 물안개가 자욱한 눈을 들어 지환을 쳐다보았다.마음이 나긋나긋해진 지환은 이서를 품에 안고 낮은 소리로 달랬다.“민씨 집안에서 범인을 못 찾으면, 괜히 나한테 화풀이할까 봐?”이서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지환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그런 걱정하지 마. 그 사람들 날 어쩌지 못해.”이서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번졌다.“하긴, 민예지가 그렇게 된 거랑 당신이랑 아무 상관이 없는데, 민호일이 미치지 않고서야 애먼 당신한테 분풀이하겠어요?”지환은 웃으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이틀 뒤, 이서가 퇴원하는 날, 지환은 병원에서 이서를 픽업하여 바로 공항으로 직행했다.임하나도 반차를 내서 공항에 이서를 배웅하러 갔다.“자기, 보고 싶을 거야.”이서도 하나와 떨어지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운을 내서 씩씩하게 하나를 위로했다.“보름이면 돌아오는데 뭐, 그리고 우리 틈 날 때마다 영상통화 하면 되지…….”“응. 알았어.” 임하나는 코를 훌쩍이며 이서를 안았다.이상언과 지환은 두 여인을 지켜보며, 굳이 방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