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은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이서는 두 걸음 정도 걷다가 고개를 돌렸다.“왜요, 계속 여기에 있고 싶어요?”“이서야.”지환이 걱정스럽게 입을 열자,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지환 씨의 의견에 따를 테니까요.” “나는 지환 씨의 신분이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 그런 게 아니었다면, 방금 그 직원을 붙잡고 물어봤겠죠, 도대체 어디서 지환 씨를 만난 거냐고요.” 지환의 팽팽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어졌다.“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지환 씨는 지금이 좋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지환 씨의 신분을 모르기만 하면, 우리가 영원히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내가 지환 씨의 신분을 알게 된다면, 이런 행복은 깨질지도 모르죠.”“그래서 이 순간을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비록, 속이 상하긴 하지만요.” 지환은 이서의 말을 듣고서야 완전히 안심했다. “이서야...”“자, 어서 가요.”이서가 여전히 회사 직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저 노련한 여우들은 소희 씨한테 흥미를 잃으면, 다시 나를 찾아올 거예요.” “빨리 이 틈을 타서 도망가야 해요.”지환이 이서의 손을 잡았다.“그래, 어서 가자.” 두 사람은 붐비는 사람들 속을 비집고 들어갔고, 이내 파티장을 빠져나와 도롯가로 내려왔다. 마침내 접대에서 벗어난 이서가 기쁘게 웃었다. 바로 이때, 하나와 상언은 호텔 입구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소희는?”이서의 뒤에 소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하나가 궁금해하며 물었다.“소희 씨는 아직도 회사 사람들한테 잡혀 있어.”하나는 더욱 궁금해졌다.“왜 회사 사람들한테 잡혀 있는데?” “심씨 가문이 더 이상 윤씨 그룹을 겨냥하지 않는 데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소희 씨거든. 그 노련한 여우들은 소희 씨가 어떤 방법으로 심씨 가문 사람들을 설득했는지 궁금해했어.” “소희 씨는 그 사람들을 당해낼 수 없어서 자신이 심동의 여동생이고, 심
“아무것도 아니야.”지환이 빙그레 웃었다.‘내가 움직일 때가 왔구나.’ 이서가 잠시 지환을 바라보다가 상언과 하나에게 말했다.“그럼 우린 가볼게요, 내일 봐요.” “내일 만나요.”네 사람은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다음날.어제 마지막으로 귀가한 소희는 회사에 도착했을 때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서 언니, 어제는 너무 했어요, 저를 버리고 갔잖아요.” 이른 아침, 소희는 이서의 사무실에서 물을 마시면서 그들의 ‘잘못’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소희 씨가 심 대표님의 딸이라는 걸 안 이상, 어떻게 그냥 보내줄 수 있겠어?” 심씨 가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소희의 얼굴색이 약간 어두워졌다.“왜 그래? 심 대표님이 찾아오기라도 하신 거야?”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애초에 제가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건, 심씨 가문이 윤씨 그룹을 겨냥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어제 심 대표님 내외께서 저를 찾아오셨어요. 약속을 지키라고 말씀하러 오신 거였죠.” 사실, 심씨 가문이 윤씨 그룹을 상대하기를 포기한 이유는 지환 때문이었다.하지만 심근영 부부는 소희가 여전히 돌아오기를 바랐는데, 심씨 가문이 윤씨 그룹을 향한 압박을 멈추고, 대립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그 이유였다. 소희는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설명할 수 없었으나, 심씨 가문이 자신이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진심 어린 태도에는 계산적인 면모도 숨겨져 있었다. 어쩌면 이런 것이 명문가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서가 소희의 어깨에 손을 살짝 얹었다.“소희 씨는 어떻게 생각해?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어? 혹시라도 소희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소희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이서 언니,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아요. 심씨 가문과의 협상을 마친 이상, 저는 약속한 대로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야 해요.”“앞으로는 언니와 함께 일할 수 없을지라도요.” 이서가 소희를 아련하게 바라보
“...”“할 일 그렇게 없어요?”갑자기 나타난 이서가 하릴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나무랐다.사람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일하기 시작했다. 이서의 시선이 아주 잠시 소희의 사무실로 향했지만, 그녀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사무실로 돌아왔다.같은 시각. 사무실 안의 심근영은 유리잔을 쓰다듬고 있었다. 누구를 상대해도 청산유수인 그는 늘 소희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20여 년 동안 실종된 딸에게는 진 빚이 많지 않겠는가. “소희야, 어제... 내가 한 말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니?”소희가 침착하게 심근영을 바라보았다. 운명을 받아들인 후, 그녀는 마음을 많이 내려 놓았다.“네, 충분히 생각해 봤어요. 약속대로 심씨 가문에서 지낼 생각이에요.” ‘약속대로’라는 말을 들은 심근영의 얼굴에 웃음이 굳어졌다.‘하긴, 어릴 때부터 집을 떠난 아이니까 정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자신을 위로한 심근영이 웃으며 말했다.“네가 돌아오겠다니 파티를 열어야겠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리 심씨 가문의 딸이 돌아왔다는 걸 알려야 할 테니까.” 소희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파티는 하지 않았으면 해요.”“뭐?”심근영이 납득하지 못하고 물었다. “너무 떠벌리고 싶지는 않아요. 게다가 저는... 아직 호칭도 바꾸지 못했는걸요.” 그녀는 차마 심근영 부부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다. 심근영이 속눈썹을 늘어뜨렸다.“소희야, 쉽게 네 신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얼마든지 이해한다. 너한테는 심히 당황스러운 일이겠지. 하지만 심씨 가문에 돌아오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파티는 열어야 해.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너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어떡하니.” 심근영을 바라보던 소희는 어젯밤 파티에서 만난 고위층들을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거절할 뻔했다. “물 한 잔 드시겠어요? 준비해 드릴게요.” 심근영이 고개를 끄덕였고, 소희는 그제야 일어나 떠났다. 그가 떠나자, 심근영은 소희의
수화기 너머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희는 멍해졌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전화를 잘못 든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그렇지 않다면, 왜 수화기 너머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오겠는가![소희 씨, 듣고 있어요?]다시금 지환의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희는 그제야 전화를 잘못 든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형부가 현태 씨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신 거구나!’ “하... 아니, 형부, 웬일로 저한테 전화를 다 하셨어요?” [심 대표님이 소희 씨를 찾아갔다던데, 정말 심씨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지환이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네, 형부가 저한테 전화를 다 주시다니, 제가 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소희가 단번에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리자, 지환은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심씨 가문이 소희 씨를 위한 파티를 열겠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거까지 예측하다니!’소희는 지환의 예리함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저를 위한 파티를 열어주시겠대요. 하지만 저는 파티를 열고 싶지 않아요.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윤씨 그룹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의 미움을 사고 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대대적인 파티까지 연다면, 심씨 가문 내에서도 저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길 거예요.” “그래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까 파티를 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소희가 말했다. [아니요, 파티는 꼭 열어야 해요.]지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왜요?”소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파티를 열든 안 열든, 형부랑 무슨 상관이지?’ ‘형부와 심씨 가문의 원한은 심씨 가문이 이서 언니를 향한 압박을 풀면서 끝났던 거 아닌가?’ [분명한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그거까지 알 필요는 없어요. 소희 씨, 하나만 물을게요. 이서를 믿어요?]소희가 무의식중에 이서를 한번 보았다. “그럼요, 당연히 이서 언니를 믿죠.” [그 말인 즉슨, 이서의 결정이라면 뭐든 따르겠다는 거네요, 그렇죠?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그거 말고 다른 말은 없었어?”이서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는데, 불길한 예감이 마음속에 맴도는 듯했다.“없었어요.” 소희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이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 제가 형부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나요?” 마음이 심란한 이서가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소희 씨한테 그런 부탁을 한 건, 분명한 의도가 있기 때문일 거야. 그리고... 내가 물어본다고 해도 대답해 주지 않을 사람이야.” “그럼...”“우선 지환 씨가 시키는 대로 해. 대신, 지환 씨에게 또 연락이 온다면, 꼭 나한테 알려줘야 해.” “네, 이서 언니.”“그럼 저는 심 대표님께 가볼게요.” “어서 가봐.” 소희가 떠나자, 이서는 핸드폰을 꺼내 한참이나 주시하며 지환에게 전화를 걸어 묻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한편, 소희는 집안 파티에 관한 일을 확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심근영은 그녀에게 사직하라는 말을 꺼냈다. “소희야, 네가 윤 대표와 사이가 좋다는 건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너는 어디까지나 심씨 가문의 사람이야. 그런 네가 윤씨 그룹에 몸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다. 회사에서 일하기를 원한다면, 심씨 가문에 와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그녀가 반감을 갖게 될까 봐, 심근영은 성질을 참아가며 장단점을 분석했다. “잘 생각해 보렴. 네가 윤씨 그룹에 남아 있는 한, 윤씨 그룹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니? 심씨 가문 사람들의 의심은 제외하더라도...” “그만 좀 하세요,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려던 순간부터 예상한 일이었어요.”“어차피 제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것도 곧 공개될 거잖아요?”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제 신분을 알게 될 거예요. 그러면 저는 계속 윤씨 그룹에 남을 수 없게 되겠죠. 곧... 사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에요.” 소희가 말했다.그녀가 이렇게 철이 든 모습을 본 심근영은 꽤 뿌듯했다. 그러나 이런 성숙함은 분명히 많은 고난과 억울함을 겪으
짧디짧은 거리였으나, 소희는 무려 5분 넘게 걸음을 옮겼다. 심지어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에는 거의 힘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소희 씨?”안에서 인기척을 느낀 이서가 고개를 들어 입구를 바라보았다.소희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몸을 곧게 폈다.“네.”바로 이때, 이서의 커피를 타 온 비서가 사무실 앞에 다다랐다. 그녀는 아직도 입구에 선 채 움직이지 않는 소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소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한 번 바라보았다.“저한테 주세요.” 놀란 비서가 소희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소희는 쟁반을 들고서 이서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이서 언니.”커피가 이서의 책상 위에 놓였다.“예전에는 제가 언니의 커피를 타 주곤 했었죠.” “윤씨 그룹에 온 이후로는 그럴 기회가 없었지만요.”소희가 말했다.“그러게, 하지만 소희 씨가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면, 나한테 커피를 타 줄 기회는 더 없어지겠지.” 이서가 눈앞의 어린 여동생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어때, 사직서는 다 썼어?”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후부터 서랍 안에 넣어뒀어요.” “왜 나한테 안 줬어?”“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평생 언니를 따르겠다고 약속했는데, 1년도 안 된 시점에서...”이 말을 뱉는 소희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언니랑 헤어져야 하니까요.” “만약...” 이서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내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아니었다면, 우리 두 사람이 앞으로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소희 씨의 신분이 조금만 낮았더라도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야.” “하필이면 윤씨 그룹의 대표와 심씨 가문의 아가씨라니...” “심씨 가문과 윤씨 가문이 잠시 휴전 중이긴 하지만, 이익을 둘러싼 다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거야.” “만약...”소희가 이서를 바라보았다.“더 강해진 윤씨 그룹이 하씨 가문에 맞설 수
소희는 이서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는데, 또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서 얼른 말했다. “그럼... 이서 언니, 일하셔야 할 텐데 이만 가볼게요.” “아래층까지 바래다줄게.”“아니에요.” 소희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평소처럼 떠나고 싶어요. 여태 퇴근했던 것처럼, 내일 다시 카드를 찍고 출근할 것처럼요.” 안색이 어두워진 이서가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그래, 이만 가 봐.” 사무실을 나선 소희는 평소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향했고, 얼굴 인식으로 출입 기록을 마친 후 사원증을 제출하고 떠났다. 윤씨 그룹 빌딩을 나서는 순간, 찬란한 노을빛이 그녀에게 떨어졌지만, 조금의 따스함도 느낄 수 없었다.이내 건물 앞에 주차된 차량이 보였다. 차 옆에 서 있는 사람은 현태였다.“피곤하지?”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현태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소희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오늘... 출근한 거 아니었어요?” 지환은 하은철이 이서에게 자신의 신분을 폭로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에게 한시도 떠나지 않고 이서를 주시하며, 악의적인 사람들로부터 지키라고 했다. 현태는 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 대표님께서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하루 쉬라고 했어.” 소희의 눈가에 구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형부가 언제부터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된 걸까요?” “그러게,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 사실은 나도 조금 어색해.” 현태가 소희를 차에 태워주었다. 뒷좌석에 앉은 소희가 앞줄의 현태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서 언니가 부탁했나 봐요. 우리를 이렇게 세세하게 챙겨주는 건 이서 언니뿐이잖아요.” 이서 이야기가 나오자, 두 사람 모두 말을 이을 수 없었다.“앞으로는 윤 대표님도 소희 씨를 자주 볼 수 없을 텐데, 나도 마찬가지겠지?” 현태가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미소를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숙였다.“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현태도 고개를 숙였다.“정말 그렇다면...
소희가 웃으며 말했다.“오빠, 왜 이렇게 유치해요?”그녀는 입으로 이렇게 말하면서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현태와 약속했다.두 사람의 엄지손가락이 맞닿는 순간, 소희는 자신의 앞길이 그렇게 암담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영원히 그녀의 곁을 지킬 테니....이서는 퇴근할 때까지 소희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또 다른 비서가 들어와 물었다.“윤 대표님, 심 비서님은 이미 사직하셨는데, 얼른 이 사무실을 치우고 후임자를 채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요, 이 방은 이대로 두고 새로운 방을 마련해주세요.”“이 방을 이대로 두는 건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한테 방 하나 처분할 자격도 없다는 말이에요?”비서의 안색이 변했다.“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얼른 청소 아주머니께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마친 비서는 급히 사무실을 떠났다.‘아무래도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아. 어서 도망가는 게 좋겠어.’ 이서는 그런 비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뒤돌아서서 미련 없이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가 곧장 차를 몰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지환은 방에 있었다.“오늘 소희 씨한테 전화했었죠?”지환을 마주한 이서가 참지 못하고 전화 이야기를 꺼냈다.“응.”지환이 손에 든 화판을 이서에게 건넸다.“내가 그린 그림인데, 어때?”궁금증을 느낀 이서가 화판을 건네받았다.“이게 뭔데요?”그림을 본 순간, 이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나를 그린 거예요?”그녀가 그림 스케치를 보며 물었다.“안 닮았어?”미소를 지으며 묻는 지환의 눈동자에 작은 기대가 스쳤다. “닮았네요. 지환 씨가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리는 줄 몰랐어요.”이서가 말했다.그녀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았다. 지환은 확실히 그림을 잘 그렸는데, 전공자와 배교해도 밀리지 않을 실력이었다. “이렇게 잘 그려줬는데, 작은 보상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이서가 그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