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물며 이 사람들은 이서가 들고 있는 총이 모형일지도 모른다는 요행의 심리를 가지고 있었다. ‘윤이서가 우리는 위협하려는 목적이라면?’ 설령 진짜 총이라 하더라도 총알은 몇 발밖에 없을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 중 누구를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담력이 커진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미친 듯이 구급차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간이 큰 사람들은 구급차 쪽으로 돌진하기도 했다. 하씨 그룹 지분의 5%라는 제안은 정말 유혹적이었다. 이서는 상대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대담하게 돌진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 사람들을 향해 총을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전에 총을 써 본 적이 없지만, 지환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런지 단 한발로 사람을 맞혔다. 그 사람이 쓰러진 후, 미친 사람들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잠시일 뿐이었고, 다시 맹렬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서는 첫 발을 쏜 뒤에도 당황하지 않고 계속 사격했다. 어둠의 세력 조직원들은 총기를 휴대하지 않았지만, 아주 강력한 음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을 던지든 상대 중 한 사람이 나가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은철은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우세를 차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특히 그가 노출된 이후에는 이런 방식의 전투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서가 손에 쥐고 있는 그 총을 제외하더라도. 어둠의 세력이 백발백중으로 공격하는 바람에, 그 사람들은 구급차 앞으로 돌격하기도 전에 큰 타격을 받았다. 간신히 구급차에 다다른 사람들조차 구급차를 뒤집을 힘이 없었고, 주워 온 돌 같은 것을 던질 뿐이었다. 이런 행동은 구급차에 흠집을 내는 것 외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은철이 절망할 즈음에 눈동자를 번뜩였다. 혼란 손에서 흰색 옷을 입은 남자가 커다란 돌을 들고 슬며시 차 뒤로 향했다. 그들은 모두 한 방향에서 공격했기 때문에 차 뒤를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하은철은 다른 사람들도
어둠의 세력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들은 총알이 빗발치더라도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돌을 들고 구급차 유리를 깨뜨리는 데 성공한 그 남자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하하, 하하하, 내가 해냈어, 나는 하씨 그룹 주식의 5%를 받을 수 있다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속되던 찰나, 굳게 닫혀 있던 차 문이 갑자기 열렸다. 이 광경을 본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차 옆으로 돌진했다. 하나가 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는데, 이서가 갑자기 쓰러질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상언을 이서를 한 번 본 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은철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동자에는 그를 찢으려는 듯한 사나운 빛이 서려 있었다. 이 눈빛을 마주한 하은철은 1초 만에 두려워졌고, 지환에게 정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상언의 표정이 저렇게 무서울 리 없지 않겠는가.‘진짜 죽은 건가?!’ ‘진짜 죽었어!’ 하은철은 정말 환하게 웃고 싶었지만,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어둠의 세력 조직원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득의양양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서의 발걸음은 이미 아주 허무해졌다. 그녀는 상언의 옷자락을 잡은 채 붉은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지환 씨... 아직 살아있죠? 그렇죠? 네?” 상언은 시종일관 하은철을 보았고, 이서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 표정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지환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소식을 접한 어둠의 세력 조직원들은 곧바로 하은철 쪽으로 향했다. “당장 돌아오세요!”상언의 목소리는 조용한 우림 속의 천둥소리와 같았다. “지환이는 이미 떠났는데, 시신이라도 훼손하고 싶다는 겁니까? 반드시 지환이의 원한을 갚아 줄 겁니다. 하지만 지환이의 장례부터 치르는 게 우선이라고요!” “이서야...”이서는 하나의 품에서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상언은 그제야 이서를 힐끗 보았으나, 이내 하은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어둠의 세력 조직원들에게
“출혈이 심한 상황이라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 당장 병원에 가서 수혈부터 받아야 해요.”현태는 놀라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바로 달려가 차를 몰았다. 하나는 지환의 수술이 성공적이라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깜짝 놀랐잖아요!” “어쩔 수 없었어요. 비상시에는 비상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만약 하은철이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도 자리를 뜰 수 없잖아요. 여기서 더 많은 시간을 지체하는 건 지환이한테 아주 불리해요!” “그럼 이서는 어쩌죠?”“이서는 괜찮을 거예요. 단지 자극을 받았을 뿐이니까요. 조금 있다가 병원에 도착할 때쯤이면 깨어날 수 있을 거예요. 그때 이 좋은 소식을 이서한테 전해주자고요. 이서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하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점차 깊어지는 눈빛으로 상언을 보았다. 하지만 상언은 이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이서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지환은 이미 긴급 병실로 옮겨진 상황이었다. 하은철은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닫고는 아주 비통해했으나, 이미 방법이 없었다! 깨어난 이서는 지환이 무사히 수혈받고 병실로 옮겨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불안한 마음이 제자리를 찾았다. “수술 후, 적어도 12시간 정도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거예요. 이서 씨, 그동안 간병인이 지환이를 돌볼 테니까 푹 쉬셔도 돼요.” 이서가 고개를 내저었다.“감사해요, 하지만 지환 씨는 제가 직접 돌볼 거예요. 그리고... 오늘 일은 정말 감사해요. 이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이서야.”상언이 이서의 말을 가볍게 끊었다.“기억의 일부를 되찾은 것 같은데... 네가 우리 엄마의 수양딸이라는 것도 기억하는 거지?” 이서가 눈을 깜박거리며 상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네가 우리 엄마의 수양딸이라는 건, 내 동생이란 뜻이잖아. 지환이는 내 친구고... 한마디로 나는 내 여동생과 친구를 돕고 있는 거야. 어떤 식으로든 나한테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돼.” 이서가
하나는 상언을 부축하여 차에 도착했는데, 막 허리를 펴려던 찰나 손목이 잡혔다. 하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낮추어 말했다.“착하죠? 이거 좀 놓아주세요. 제가 차로 모셔다 드릴게요.” “싫어요.”상언은 눈을 감고 있었다. 단순히 눈을 감은 것인지, 잠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잠꼬대하는 듯했다.“거짓말쟁이,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요!” 하나의 마음은 이 순간처럼 부드러워진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남자라면 넥타이를 매고 단정하게 입어야 잘생긴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상언은 아직 얼굴에 닦지 못한 핏자국이 있었고, 하루 종일 산에서 지환을 찾고 수술한 탓에 옷에서 악취가 났다. 하지만, 이 순간 상언은 그 어느 때보다 멋있었다.심지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제가 그렇게 좋아요?”하나가 상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그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소희는 지환의 병실에 다다랐는데, 쉬고 있는 이서를 보고는 살금살금 걸어 나갔다.그녀는 문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깨어난 이서의 인기척을 듣고서야 병실 안으로 향했다. 소희를 본 이서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소희 씨, 왔어?” 그 열정적인 모습은 평소와 같지만, 무언가 더해진 것만 같았다.“이서 언니...” 이서는 소희를 끌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만족해하며 말했다.“내가 기억을 잃은 동안, 회사를 지켜줘서 고마워. 다 소희 씨 덕분이야.” 소희가 눈을 크게 떴다.그녀는 그제야 무엇이 더해진 것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이 없어진 거구나!’ 이서는 돌아온 이후에도 시종일관 소희에게 잘해주었다. 하지만 소희는 그녀가 왠지 자신과 거리를 둔다고 느꼈다. ‘이제야 그 거리감이 사라진 거야!’‘그렇다면...!’“이서 언니, 다 생각난 거예요?!”소희가 감격에 겨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기대에 찬 소희의 눈동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고개를 저었다.“아직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야. 왜
소희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이서는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소희 씨...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소희는 있었던 일을 이서에게 일일이 알려주었다,모든 이야기를 들은 이서가 입을 열었다.“소희 씨가 정말 심씨 가문이 잃어버린 딸이었다니!” “맞아요.”소희가 쓴웃음을 지었다.“이서 언니, 정말 웃긴 일이죠?”이 순간, 소희의 심정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던 이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간 아무리 힘든 생활을 보냈더라도, 신분의 변화로 인해 모든 것이 깨지는 느낌, 이것은 아주 괴로운 것이었다. “소희 씨, 사실 나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어. 그래서 최미영 팀장님께 조사를 지시했던 거지.”“하지만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희 씨에게 말할 수는 없었어. 후에 이렇게 많은 일을 겪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소희가 말했다. “이서 언니, 저 때문에 심씨 가문과의 사이가 곤란해질까 봐 걱정하시는 거 다 알아요.”“하지만 전혀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심씨 가문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제 마음은 항상 언니를 향하니까요.”“저는 언니 덕분에 저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갖게 됐어요.”“그래서... 저는 제 무대를 지킬 거예요!” “언니도 제 무대를 지켜주세요!” 이서가 몸을 일으켰다.“소희 씨,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녀는 소희가 어리석은 일을 벌일까 봐 두려웠다. “이서 언니, 저는 심 대표님 부부, 즉 제 친부모님이 제가 심씨 가문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심리를 이용해서 심씨 가문과 하씨 가문의 협력을 막을 거예요.“그동안 심씨 가문과 하씨 가문이 합작하는 바람에 윤씨 그룹이 막대한 피해를 봤잖아요. 이대로 가다가는...”이서가 소희의 어깨를 꾹 눌렀다.“소희 씨, 하나만 물을게. 정말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소희는 고개를 숙였고, 이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사실대로 말해줘. 소희 씨 마음속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소희는 고개를 들었고, 이서를 바라보며 말하려다가 멈추었다. 이
“깨어났네요!”깨어난 지환을 본 이서는 감격에 겨워 횡설수설했다.“의... 의사 선생님을 불러올게요.” “에이, 이서 언니, 그냥 벨을 누르면 되죠.”“가게 두세요.”지환은 허약한 몸으로도 총애 가득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아...”소희는 난감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지환과 단둘이 있는 경험이 전혀 없었다.“방금 한 말, 다 들었습니다.” 그가 천장을 쳐다보았다.소희는 그가 이미 깨어났다는 사실을 멀쩡한 두 사람이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에 놀랐다. “그럼... 형부도 이서 언니가 기억의 일부를 되찾은 걸 알고 계셨다는 거네요?”“네.”하연은 이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생각해 보니까 소희 씨가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면, 그 사람들한테 내 신분을 밝히고, 내가 하씨 그룹을 인수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소희는 놀라서 말하지 못했다. “하씨 그룹을 인수하셨어요?”“지분의 20%를 받았을 뿐이에요.”‘그뿐이라니!’소희가 탄복하며 말했다.“형부, 어떻게 주식의 20% 받으신 거예요?” 지환이 병실 문을 한 번 보았다.“현태 씨한테 물어보세요. 현태 씨가 자세히 알려줄 겁니다.” 이 말을 마친 그는 갑자기 고통스럽다는 듯 눈을 감았다. 소희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 똑똑히 알지 못했다. 잠시 후, 이서가 의사를 데리고 급히 돌아오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선생님, 환자가 깨어났어요. 어서 괜찮은지 좀 봐주세요.” 의사는 지환을 진찰한 후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큰 문제는 없지만, 하루 밤낮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아서 몸이 허약한 상태입니다.” “제가 지금 당장 먹을 것 좀 사 올게요.”이서는 몸을 돌리며 먹을 것을 사 오겠다고 말했다.소희는 천방지축인 그녀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 사람이 정말 회사에서 당당하게 지시하던 이서 언니라고?’“이서 언니, 제가 다녀올게요.”소희가 이서를 말렸다.“형부랑 오랫동안 제대로 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
“지환 씨, 다음에는 목숨을 걸 때 나를 먼저 생각해 줘요.”“지환 씨가 없으면 난 어떡하라고요.” 지환의 심장은 보이지 않는 큰 손에 의해 가볍게 잡히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엎드려 우는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눈가에는 옅은 웃음기가 돌았다. ‘정말, 정말 행복해.’‘꿈을 꾸는 것만 같아.’ 병실로 돌아온 소희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잠든 지환과 그의 가슴팍에 엎드려 잠든 이서를 보았다. 한폭의 유화가 따로 없었다.그녀는 음식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병실을 나섰다.병원 밖으로 나온 소희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바로 이때, 차 한 대가 그녀의 곁에 멈춰 섰다.차장이 내려가고 현태가 모습을 드러냈다.소희의 짙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기쁨으로 변했다. “왜 여기 있어요?”“회사에 갔는데 없길래,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차에서 내린 현태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어서 타.”“안 들어가려고요?”소희가 뒤에 있는 병원을 바라보며 물었다.“들어가서 뭐 하게?”현태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이랑 사모님은 아주 피곤하실 거야. 아마 쉬고 계시겠지. 아, 맞다...”그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갑자기 생각났는데, 사모님의 발...” “이서 언니의 발이 왜요?”소희는 긴장했다. “산에서 신발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험한 바위 위를 돌아다니시느라 발바닥을 심하게 다치셨어. 하지만 지금은 온 정신을 대표님께 집중하느라 발에 난 상처는 처치하지도 못하셨을 거야. 아무래도 우리가 들어가서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 소희와 현태는 급히 병원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걷던 소희가 갑자기 현태를 붙잡았다.“잠시만요, 두 사람은 지금 쉬고 있어요. 우리가 들어가서 알려주면, 두 사람을 방해하는 꼴이 될 거예요. 나중에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두 사람은 다시 차로 돌아왔다. 현태는 차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시동을 걸지 않았다.소희가 물었다.“왜 그래요? 차에 무슨 문제라도 생
현태의 받아들일 수 없다는 눈빛을 마주한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그럼... 지금 심씨 가문의 고택으로 돌아갈 생각인 거야?”소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고, 현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웃으며 말했다.“대체 무슨 표정이에요? 내가 가족을 찾은 게 기쁘지 않은 거예요?”현태의 지금 심정은 아주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소희가 진짜 가족을 찾은 것이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서 오늘 작별 인사하러 온 거야?”소희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오빠, 설마 내가 이서 언니와 끝내려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역시 아니지?”현태가 멍하니 머리를 긁적였다. 소희가 그를 보며 말했다.“예전에는 내가 아주 멍청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오빠가 나보다 더 멍청한 것 같아요.” “내가 그깟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서 언니를 버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소희의 원래 가정은 정말 형편없었다. 아니, 그 누구라도 자신이 H국의 4대 가문 중 하나인 심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걸 알게 된다면, 주저하지 않고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었다. 적어도... 그 기이한 가정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 테니.“그럼 뭔데요?”현태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알 수 없는 표정을 본 소희가 일부러 그를 놀렸다.“아, 내가 돈 떄문에 친구를 버리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현태도 소희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못 말린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소희 씨, 놀리지 마. 심씨 가문으로 가려는 이유가 대체 뭐야?” 그녀가 정색하며 말했다.“그래요, 놀리지 않을게요. 사실 심씨 가문으로 가려는 건, 심씨 가문 사람들이 윤씨 그룹과 맞서는 걸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예요. 오빠는 이서 언니가 혼수상태에 빠지고, 형부가 실종되었던 동안 윤씨 그룹의 화물이 얼마나 쌓였는지 모를 거예요.” “이러다가는 윤씨 그룹도 버틸 수 없을 거예요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