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 씨, 다음에는 목숨을 걸 때 나를 먼저 생각해 줘요.”“지환 씨가 없으면 난 어떡하라고요.” 지환의 심장은 보이지 않는 큰 손에 의해 가볍게 잡히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엎드려 우는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눈가에는 옅은 웃음기가 돌았다. ‘정말, 정말 행복해.’‘꿈을 꾸는 것만 같아.’ 병실로 돌아온 소희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잠든 지환과 그의 가슴팍에 엎드려 잠든 이서를 보았다. 한폭의 유화가 따로 없었다.그녀는 음식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병실을 나섰다.병원 밖으로 나온 소희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바로 이때, 차 한 대가 그녀의 곁에 멈춰 섰다.차장이 내려가고 현태가 모습을 드러냈다.소희의 짙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기쁨으로 변했다. “왜 여기 있어요?”“회사에 갔는데 없길래,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차에서 내린 현태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어서 타.”“안 들어가려고요?”소희가 뒤에 있는 병원을 바라보며 물었다.“들어가서 뭐 하게?”현태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이랑 사모님은 아주 피곤하실 거야. 아마 쉬고 계시겠지. 아, 맞다...”그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갑자기 생각났는데, 사모님의 발...” “이서 언니의 발이 왜요?”소희는 긴장했다. “산에서 신발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험한 바위 위를 돌아다니시느라 발바닥을 심하게 다치셨어. 하지만 지금은 온 정신을 대표님께 집중하느라 발에 난 상처는 처치하지도 못하셨을 거야. 아무래도 우리가 들어가서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 소희와 현태는 급히 병원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걷던 소희가 갑자기 현태를 붙잡았다.“잠시만요, 두 사람은 지금 쉬고 있어요. 우리가 들어가서 알려주면, 두 사람을 방해하는 꼴이 될 거예요. 나중에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두 사람은 다시 차로 돌아왔다. 현태는 차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시동을 걸지 않았다.소희가 물었다.“왜 그래요? 차에 무슨 문제라도 생
현태의 받아들일 수 없다는 눈빛을 마주한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그럼... 지금 심씨 가문의 고택으로 돌아갈 생각인 거야?”소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고, 현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웃으며 말했다.“대체 무슨 표정이에요? 내가 가족을 찾은 게 기쁘지 않은 거예요?”현태의 지금 심정은 아주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소희가 진짜 가족을 찾은 것이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서 오늘 작별 인사하러 온 거야?”소희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오빠, 설마 내가 이서 언니와 끝내려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역시 아니지?”현태가 멍하니 머리를 긁적였다. 소희가 그를 보며 말했다.“예전에는 내가 아주 멍청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오빠가 나보다 더 멍청한 것 같아요.” “내가 그깟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서 언니를 버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소희의 원래 가정은 정말 형편없었다. 아니, 그 누구라도 자신이 H국의 4대 가문 중 하나인 심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걸 알게 된다면, 주저하지 않고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었다. 적어도... 그 기이한 가정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 테니.“그럼 뭔데요?”현태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알 수 없는 표정을 본 소희가 일부러 그를 놀렸다.“아, 내가 돈 떄문에 친구를 버리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현태도 소희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못 말린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소희 씨, 놀리지 마. 심씨 가문으로 가려는 이유가 대체 뭐야?” 그녀가 정색하며 말했다.“그래요, 놀리지 않을게요. 사실 심씨 가문으로 가려는 건, 심씨 가문 사람들이 윤씨 그룹과 맞서는 걸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예요. 오빠는 이서 언니가 혼수상태에 빠지고, 형부가 실종되었던 동안 윤씨 그룹의 화물이 얼마나 쌓였는지 모를 거예요.” “이러다가는 윤씨 그룹도 버틸 수 없을 거예요
지환이 이서의 손을 덥석 잡았다.“왜 그래요?”이서가 웃으며 물었다. 아래로 향한 지환의 시선이 신발을 신지 않은 이서의 발에 떨어졌다.그녀의 발등은 살짝 구부러져 있었다. “발 다쳤어?”이서가 고개를 저었으나, 지환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벨을 눌러 의사를 불렀다.의사는 지환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지만, 결국 이서를 진찰해야 했다.그녀의 발을 들어 올린 의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맨발로 걸어 다니면서 발바닥이 상처투성이인 것도 몰랐던 겁니까?” 이서가 고통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몰랐어요. 크게 아프지 않았거든요.”‘분명 이전에는 안 아팠는데...’‘자고 일어나니까 아파서 죽을 지경이야.’ 지환이 바로 앞에 있지 않았다면, 정말 울고 싶었을 것이었다.‘뭐야!’‘피곤함은 사라졌는데, 통증은 더 심해졌잖아!’ 의사가 간호사에게 약을 바르라고 지시하자, 이서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아파, 너무 아파!!’ 하지만 지환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지환이 걱정하는 것은 원치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괜찮아요.” 이서는 이를 악물고 관심의 눈길을 보내는 지환에게 말했다.바로 이때, 간호사는 소독액이 묻은 면봉으로 이서의 상처를 닦았고, 방심한 그녀는 ‘으악!’ 소리를 내며 표정을 찌푸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중얼거렸다.“저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옆에 있던 간호사들은 그녀의 뛰어난 연기력에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지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앞으로 향하며 팔을 내밀었다.“너무 아프면 내 팔을 물어.” 이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안 아파요, 정말이에요.”지환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민망했던 이서는 어쩔 수 없이 지환의 팔을 가볍게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환을 세차게 물 것을 대비하여 모든 주의력을 발에 집중해야 했다. 약을 다 바른 그녀의 등은 이미 끈적끈적해졌고, 전투를 치른 것보다 더 피곤해졌다.
“인수 계약은 다 했어?”지환이 물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 사람들은 가족이 구출되어 돌아오는 순간, 협의서에 서명했습니다.” 아마도 하은철이 또다시 자기 가족과 아이들을 위협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가지고 있던 모든 지분을 팔아넘기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어차피 받은 돈은 그들이 다음다음, 그다음 생까지도 마음껏 쓰기에 충분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지만, YS 그룹 쪽에는 대량 현금 손실로 인한 자금 운용에 어려움이 생겼고, 또...” 이천이 지환을 한 번 보고 나서야 계속해서 말했다.“하지호 쪽은 이 일을 알고 다른 기업과 연합하여 YS그룹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을 겁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지환이 한참이 지나서야 눈을 떴고, 아주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YS그룹... 매각하자.”이천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대표님, 농담하시는 거죠?” “내가 언제 너한테 농담하는 거 본 적 있어?” 지환이 천장을 쳐다보며 침울하게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큰 일은...” “오랫동안 생각해 온 일이야.”그의 말투는 아주 담담했다.“앞으로는 확실히 H국에 초점을 둬야겠어.” “M국의 근간을 포기하는 건 정말 아쉬운 일이지만, 내가 포기한다면 하지호도 한 걸음 물러날 거야. 그러면 우리는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과거의 일에 관한 책임도 묻지 않게 되겠지.” 지환이 말했다.“대표님, 하은철 쪽을 상대하는 동안, 하지호 쪽이 뒤에서 검은손을 뻗쳐 윤 대표님을 상대할까 봐 걱정하시는 겁니까?” “응.”지환은 짧게 대답했으나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다. “하은철이 이서를 다치게 한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래서 이 결정적인 순간에 하지호가 약간의 이득을 볼지언정 하은철을 놓아주고 싶지는 않은 거지.” 이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사실, 지환의 생각도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지금은 하은철과 하지환을 동시에 적으로 두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행여 두 사람이 손을
지환 눈가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나는 괜찮아.” 말이 끝나자마자 뜨거운 입맞춤이 이서의 붉은 입술을 뒤덮었다.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 가슴속을 파고들자, 이서의 두 손은 점점 힘이 빠졌고, 그저 지환에게 나른하게 기대어 넘쳐나는 열정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병실 안이 점점 다른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같은 시각. 심씨 가문의 고택 입구에 도착한 소희는 용기가 없어서 눈앞의 우뚝 솟은 건축물을 바라만 보았다.“소희 씨.”현태가 그녀의 망설임을 알아차리고 말했다.“들어가고 싶지 않은 거라면,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가자. 윤 대표님도 소희 씨를 탓하지는 않을 거야.” 한숨을 내쉰 소희가 다시 한번 심씨 가문의 고택 입구를 바라보았다. “이서 언니는 분명 나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나도 이서 언니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어요.”“다녀올게요.” 소희가 초인종을 눌렀다.고택 내부에 있던 고용인들은 그녀를 보고는 바삐 심근영 부부에게 알렸다. 심근영 부부는 소희가 왔다는 것을 알고 직접 입구로 달려와 맞이했다.“소희야, 여긴 어쩐 일이니?”이지숙이 소희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며칠이 아니라, 몇 년은 만나지 못한 사람 같았다. 소희는 그런 이지숙을 그냥 내버려두었고, 잠시 후에야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심근영에게 시선을 옮겼다.“심 대표님, 저랑... 이야기 좀 하시겠어요?” 낯선 호칭을 들은 심근영은 아내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지. 서재에 가서 이야기 나누자꾸나.” 소희가 뒤를 바라보았다.“이분은 제 친구예요.” 현태를 본 이지숙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말했다.“걱정하지 말거라. 친구분은 우리가 잘 대접할 테니... 이야기부터 잘 나누고 와.” 소희는 그제야 안심하고 심근영과 함께 2층 서재로 올라갔다. 서재에 들어서자, 심근영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소희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니?” 소희는 그의 자상한 표정을 보며 마음속
‘그것도 무려 20%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야!”심근영은 악마처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소, 소희야, 너를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란다.” “내가 알기로 YS그룹의 대표는 하은철의 둘째아버지야. 둘째아버지가 어떻게 하씨 그룹을 인수할 수 있겠니!” “그리고 하씨 가문의 사람들이 자기 명의의 주식을 팔았을 리 없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일을 했을 리 없다고!’ 하씨 그룹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평생 쓸 돈을 가진 것과 같았다. “대표님께서는 모르시는 두 가지 일이 있어요.” “두 가지 일?”“첫 번째는 YS그룹의 대표님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라는 거예요!” “쨍그랑!”심근영이 들고 있던 컵이 산산조각 났다.소희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려 1분여가 지나서야 심근영은 자기 목소리를 되찾았다.“뭐라고? YS그룹의 대표가... 윤 대표의 남편이라고?!” “네.”소희는 침착하게 심근영을 바라보았으나, 그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지환이 YS그룹의 대표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도 이렇게 놀랐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심근영이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날 속이려는 건 아니겠지?” “제가 대표님을 속여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소희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못 믿으시겠다면 하씨 그룹의 주식 변경 상황을 조사해 보세요.” 심근영은 여전히 손을 떨고 있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내가 두 가지를 모른다고 했지? 그럼... 남은 한 가지는 뭐지?” “하은철은 하씨 가문 사람들이 가진 주식을 팔지 못하게 하려고 그들의 가족을 납치했어요. 하지만 YS그룹의 대표님이 그 사람들을 구해왔고, 하은철이 또다시 가족들을 납치할까 봐 두려웠던 하씨 가문 사람들은 기꺼이 주식을 팔았죠.” “정... 정말이냐?” 심근영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직접 알아보시면 되겠네요.”소희
“여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긴장한 이지숙이 불안하다는 듯 물었다. 심근영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는데, 희끗희끗한 눈동자에는 아무런 빛도 없었다.“우리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어. 이번 위기에서 심씨 가문이 굳건히 서 있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명확하지 않아. 아주, 아주 큰 문제야.” 이지숙은 당최 영문을 알 수 없었다.같은 시각. 차에 타고 있던 현태는 소희가 계속 말하지 않고, 표정에도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주동적으로 말했다.“방금 이지숙 여사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소희 씨가 돌아오길 바라시는 것 같았어. 그것만큼은 확실해.” “엄마라는 존재는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소희가 멍한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심씨 가문은 그분의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소희가 돌아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가문의 이익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관심 없어.’‘내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이서 언니를 도울 수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거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현태가 앞을 보며 말했다.“우리도 아무 생각하지 말고 밥부터 먹으러 가자. 밥 먹고 회사로 데려다줄게, 어때?” 소희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았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좋은 계획이네요.” “그럼 출발!”현태가 시동을 걸었고, 차는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마치 모든 번뇌를 떨쳐버리려는 것처럼....병원.지환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는 밖에서 놀다가 놀라서 즉시 달려왔다. 하지만 돌아온 후, 그가 괜찮다는 소식과 이서가 기억의 일부를 되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뻐했다. 하지만 하이먼 스웨이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이서가 심가은의 DNA를 가지러 갔던 일을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점원이 그 그릇을 저한테 줬던 것 같아요.”이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이미 대부분의 기억을 회복
“스웨이 작가님!”이서가 웃으며 하이먼 스웨이를 껴안았다.“그건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보세요, 저는 지금도 멀쩡하잖아요.” 하이먼 스웨이는 환하게 웃는 이서를 바라보며 코를 훌쩍였고 눈물을 흘리려 했다. “얘야...”“괜찮아요, 스웨이 작가님.”이서가 하이먼 스웨이의 눈물을 살며시 닦아주었다.“이번에 작가님의 딸을 찾아드릴 때는 더 신중하게 행동할게요.”“저를 믿으세요, 작가님은 꼭 따님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하이먼 스웨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제는 조급해하지 않을 거야. 찾을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바치겠지만, 찾을 수 없다면 우리 모녀의 운명을 탓해야겠지. 이번 생에는 인연이 아닌 거니까.” “스웨이 작가님,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이서가 하이먼 스웨이의 손을 꼭 잡았다.“저는 강하게 느낄 수 있어요. 작가님이 따님을 찾을 수 있다는걸요!” “그래요.”배미희도 거들었다.“스웨이 여사, 그렇게 비관적일 필요는 없잖아요?” “한 번에 찾을 수 없으면 계속 시도하면 돼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사람 하나 못 찾을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하이먼 스웨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고, 이서를 안고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서를 놓아주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왜 여태 보이지도 않는 거니?” “아, 아래층에 산책하러 갔어요. 이 비서님이 같이 있을 거예요.”몸을 일으킨 이서가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의 화단을 바라보았으나, 지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곧 올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과일 깎아드릴게요.” 하이먼 스웨이와 배미희는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나, 이서는 이내 병실을 나섰다. 이서가 떠나자 하이먼 스웨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난 왜 이렇게 복이 없을까요?” “무슨 복이요?”배미희가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나도 이전에 이서를 수양딸 삼았는데, 그깟 심가은 때문에 저렇게 좋은 딸을 잃게 된
윤재하와 성지영, 고이서 세 사람은 여전히 이서가 치매에 걸려 윤씨 그룹을 손에 넣을 꿈에 들떠 있었지만, 정작 이서는 지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때도 있어서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니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서는 귀를 바짝 세우고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도, 문밖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금세 사라지길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어이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첫날 밤, 놀랍게도 이서는 오랜만에 불면증 없이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이서는 눈을 뜨자마자 하나의 문자 폭탄을 받았다. [너, 형부랑 다시 합친 거야?] [같이 살기 시작했다던데,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냐고!]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선생님이 말 안 해줬으면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나, 너한테 가장 친한 친구 아니었어?]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곧바로 소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제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거 보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화해한 거였어요?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도 숨긴 거예요?] 결국 이서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환 씨랑 다시 화해한 거 아니야. 괜히 오해하지 마.] 그 순간, 나나도 단톡방에 뛰어들었다. [뭐라고요? 이서 언니가 형부랑 다시 화해했다고요? 대박! 들러리 자리 하나 예약할게요!]이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왜 내가 한 말은 안 보고 다들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체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말했잖아, 화해한 거 아니라고.” 이서는‘화해한 적 없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그제야 세 사람은 조용해졌는데, 잠시 후에야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 선생님 말로는 두 사람이 같이 산다고 하던데? 다시 화해한 게 아니면 왜 같이 사는 거야?]
2층에서 소란을 듣고 있던 윤재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1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다르게 고이서 혼자만이 만족스럽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이서는 바로 뒤에 있던 짐가방을 든 직원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직원들이 들고 있는 쇼핑백들이 모두 명품 브랜드임을 본 성지영과 윤재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서야, 그 많은 걸 대체 무슨 돈으로 산 거야?” 성지영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직원들이 짐을 다 내려놓고 나가자, 고이서는 여유롭게 말했다. “엄마, 아빠, 두 분을 위해 산 선물인데, 한번 보세요. 마음에 드실진 모르겠네요.” 성지영은 가까이 있던 쇼핑백 하나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LV 로고가 새겨진 명품 의류가 들어 있었다. 성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서야, 어디서 이렇게 큰돈을 구한 거야?” 고이서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윤씨 그룹의 돈으로 샀어요.” “뭐?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고?” 윤재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걸 샀으니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윤이서가 내일 회사에 출근하면, 바로 알아챌 거라고! 당장 환불하렴. 윤이서한테 들키면 정말 큰 일이니까!” 고이서는 소파에 편하게 앉으며 미소 지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윤이서는 절대 모를 거예요. 이 돈, 다 합법적인 절차로 나온 거거든요.” 윤재하와 성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고이서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이서가 저한테 회사를 맡겼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윤재하와 성지영은 깜짝 놀라며 고이서를 바라보았다. “물론 임시로 맡긴 거긴 하지만... 윤이서가 왜 저한테 회사를 맡겼는지 아세요?” 두 사람이 고개를 젓자, 고이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늘 윤이서가...”고이서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성지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