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문을 밀고 들어온 하나가 이서의 몸에 엎드린 하은철을 보았다. 그녀는 화가 나서 병실 입구에 놓여있던 빗자루를 들고 그를 내려쳤다.“하은철, 이 변태 새X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하은철은 방금 이서에게 주먹을 맞아서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에게 등을 얻어맞자,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하나가 들고 있는 빗자루를 빼앗아 그녀를 내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분노가 극에 달한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은철, 뭐 하는 짓이야?!” 이서가 허약한 몸을 이끌고 하나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그녀의 냉랭한 눈빛은 하은철을 응시하고 있었다.“왜, 전에는 내 신장을 가져가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내 친구를 괴롭히려는 거야?” 하은철은 멍해졌다. 하나는 모든 주의력을 이서가 깨어났다는 것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이서야, 깨어났구나! 정말 잘 됐어. 넌 모르겠지만...” 하은철의 차가운 목소리에 기쁨의 기색이 흘렀다.“벌써 전부 생각난 거야?”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차가운 기운 외에도 약간의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동안 그가 벌인 수많은 짓은 이서와 지환을 갈라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서가 모든 걸 기억하다니!’ ‘내가 했던 모든 일이 웃음거리가 된 셈이잖아?’ “내가 기억하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이서는 하은철이 자신의 볼에 남긴 입맞춤을 생각하자, 피부를 갈기갈기 벗겨 버리고 싶었다.“분명히 경고하는데,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당장 여기서 나가!!” 이 말을 들은 하은철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가 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너... 다 생각났어? 전부 다 생각난 거야?” 그의 눈동자에 스친 끈질긴 집착을 본 이서가 하나를 감싸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고, 인상을 찌푸렸다.“하은철, 제발 적당히 좀 해. 여기는 병원이야! 네가 아무리 하씨 가문의 도련님이라 하더라도, 백주대낮에 사람을 죽인다
[이서 씨한테는 우선 치료부터 잘 받으라고 전해주세요. 지환이는 찾는 대로 병원으로 데리고 갈게요.] 하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선생님도 아시잖아요, 두 사람은 고집불통이라고요.” “이서가 내 말을 들을 것 같아요?” 상언이 난감하다는 듯 탄식했다.[그래요, 그럼. 이서 씨를 데리고 오는 수밖에 없겠네요.] 잠시 망설이던 하나는 차마 자신도 가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다.사실, 그녀도 이서와 마찬가지로 상언을 걱정하고 있었다.하지만 마음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 ‘이 말만 꺼내면 우리의 관계가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사실...’‘에잇!’하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어떻게 됐어?”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이서가 물었다. 하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아, 이 선생님이 널 데리러 올 사람을 보내주시겠대. 그런데 이서야, 그분들이 오시기 전에 의사 선생님부터 만나 뵙고 검사를 받아보는 건 어떨까?” 조금 전, 의사가 하나를 불러 이서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녀는 그 의사가 하은철과 연관된 사람일 것이라 예상치도 못했다. 그저 하은철이 재주가 뛰어나서 병원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이서도 지환이 걱정되었지만, 당장은 하나의 말을 순순히 듣고 검사받을 수밖에 없었다. 검사를 마친 후,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하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곧 상언이 보낸 차량이 도착했고, 그녀는 이서와 함께 차에 올랐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임현태였다. 하나도 차에 오르는 것을 본 그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하나 씨도 가시게요?”“네.”하나가 이서를 보며 말했다.“이서가 너무 걱정돼서 같이 가고 싶은데... 안될까요, 현태 씨?” 현태가 약간의 피로감이 서린 미소를 지었다.“제게 그럴 자격이나 있나요.” 차량은 곧 지환이 실종된 강으로 향했다.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차 안의 분위기는 초반보다 긴장되고 불안
“윤이서 씨, 이곳의 지대는 아주 복잡합니다. 게다가 저희는 이곳에 처음 온 거라서 이곳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요. 우선 여기서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귀찮게 하지 않을게요.”이서가 그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수색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힘도 더 생길 거예요. 이 선생님, 제발 부탁드릴게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한 상언은 익숙한 감정이 솟구치는 듯하여 온몸을 떨었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이서를 계속 말리려던 찰나,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선생님, 이서를 보내주세요.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되잖아요.” “하지만...”하나는 상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형부가 실종된 상황에서는 이 선생님한테 이서를 돌볼 의무가 있는 거잖아요. 이서를 오로지 기다리게 하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에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내서 지켜보게 하면 되잖아요. 그래도 걱정된다면 제가 같이 갈게요!” “...”상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서가 현태를 불렀다.“현태 씨, 저랑 같이 가요.” 현태는 고개를 끄덕였다.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아직 가지 않은 구역을 수색하기로 했다.하나도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이서의 제지를 받았다. “이 선생님께서 네 의견을 존중해 주시는 이상, 너를 데려갈 수는 없어. 너를 데려가면... 이 선생님의 영혼도 데려가는 셈이니까.” 이 말을 마친 이서는 현태와 함께 모퉁이로 사라졌다,상언이 앞으로 나아가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이건 너무 위험하다고요!” 하나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이 선생님은 남편을 찾으려는 여자의 마음을 전혀 모를 거예요!” 상언이 마치 괴물을 보는 것처럼 하나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녀의 안색이 약간 붉어졌다.“왜 그렇게 쳐다봐요?” 갑자기 다가온 상언이 하나의 볼에 입을 맞췄다.“하나 씨는 그 마음을 잘 이해한다는 거예요?” 하나의 볼은 곧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저도 이만 형부를 찾으
“아직 많이 많이...”현태는 감격에 겨워 횡설수설했다.“대... 아니, 하 선생님이 이 소식을 들으면 아주 기뻐할 거예요!”‘하 대표님께서 가장 원하시던 거잖아!’ ‘윤 대표님은 하 대표님께서 본인을 위해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았다는 건 전혀 기억하지 못하셔. 심지어 대표님의 정체까지도...’ ‘모든 게 두 분이 연애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아.’‘유일하게 아쉬운 게 있다면, 지금은...’ “아가씨, 어서 하 선생님부터 찾읍시다!” ‘대표님이 이 소식을 알게 된다면, 좋아서 미쳐버리실지도 몰라!’ 이서는 현태를 한 번 보았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좋아요, 얼른 지환 씨를 찾아서 제 앞에서 인내하고 참을 필요가 없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요!”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신이 났다. 하지만 작은 수풀을 모두 뒤졌지만 지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서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구역을 계속해서 수색했다.날씨가 이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집합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는데, 밥을 먹으라는 신호였다. 현태가 말했다.“이서 아가씨, 식사부터 하고 계속 찾아보시죠.”“저는 밥을 먹고 싶지 않아요.이서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현태 씨는 가서 드세요.”“아가씨, 아가씨가 안 드시면, 저도 먹지 않을 겁니다.” “그건 안 돼요.”이서는 땅바닥을 주시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제가 현태 씨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소희 씨가 알면, 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어서 식사하러 가세요. 저는 눈을 부릅뜨고 이 근처를 찾아볼게요. 뭔가 느낌이...” “이 근처에 지환 씨가 있을 것만 같아요. 제가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요.” 곰곰이 생각하던 현태가 말했다.“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이 근처만 찾아보시고 멀리 가지는 마세요. 강가에는 절대 내려가지 마시고요.”강가는 전문 인력이 수색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이서는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거센 물살에 휩
같은 시각.멀리서 이 장면을 본 하은철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지환이 강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주경모에게 지환의 부하들을 추적하라고 지시했다. 하루 종일 사람을 찾지 못한 그는 이서에게 당하고 나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그녀를 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이서가 강으로 빠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날 시험하는 건가?’ ‘하지환이 강에 빠진 걸 축하하자마자, 이서도 강에 빠지려 하다니...’ 그가 모든 것을 개의치 않고 돌진하려던 찰나, 눈앞의 상황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이서가 잡은 것은 단단한 나뭇가지가 아니라... 한 사람의 팔뚝이었다!그 사람이 지환이라는 것을 발견한 이서는 깜짝 놀랐다.그 순간, 풀숲에 숨어 있던 하은철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해졌다. 이서는 급히 강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하반신은 이미 강에 잠겨 있었으며, 강물은 너무도 차가웠다.게다가 얼어붙은 것 같은 두 다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현태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밥을 먹으러 간 그는 적어도 십여 분이 걸려야 돌아올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서 그렇게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게다가 지환 씨도 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구조하려 하잖아!’ ‘내가 강물에 휩쓸린다면, 발견될 때까지 시간이 지체되고 말 거야.‘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올라가야 해!’ 이서는 한 손으로 강가의 풀을 꽉 잡았다. 하지만 물가의 흙이 너무도 부드러웠기 때문에 풀을 잡자마자 뿌리째 뽑히고 말았다. 몸이 하마터면 또 기울어질 뻔했다.그녀는 두 손으로 지환을 팔을 꽉 잡고 혼신을 다해 외칠 수밖에 없었다.“현태 씨! 현태 씨...” 같은 시각. 현태는 도시락을 들고 이서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이서가 혼자 뜻밖의 사고를 당할까 봐 걱정이되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그 걱정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현태는 이서가 보이지 않
‘대... 대표님?!’흥분한 현태는 제자리에서 몇 번 발을 구르더니 재빨리 사람을 찾으러 달려갔다.풀밭에 누운 채 핏기가 없는 지환을 마주한 이서는 섣불리 응급처치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초조하게 구조대의 도착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상언이 의사를 데리고 달려왔다.의사는 즉시 응급처치를 실시했다.곁에 있던 이서는 불안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하나는 보자마자 달려와 그녀의 떨리는 몸을 껴안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복이 있는 사람은 하늘이 돕는 법이야. 형부는 괜찮으실 거야!” 하나의 손을 가볍게 잡은 이서는 그제야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돌린 의사가 상언에게 말했다.“이 선생님, 폐에 많은 물이 고여서 폐수종이 의심되는 상황입니다. 당장 병원으로 이송해서 수술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상언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당장 병원을 알아보겠습니다!” 이 일대는 매우 외져서 가장 가까운 병원까지 30분이 걸렸다. 이서가 걱정스럽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상언은 급히 병원을 알아보았다.이곳에서는 지환의 상태를 안정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상언은 건장한 네 명의 어둠의 세력 조직원을 시켜서 들것에 태운 그를 산 아래로 옮기게 했다. 이서는 곧바로 그 사람들을 따라 하산하기 시작했다.다만, 그들은 모두 훈련받은 사람이었으며, 지환의 안전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여자인 이서는 그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 몇 번이고 크게 넘어질 뻔했다.다행히도, 그녀의 뒤에 있던 현태가 부축해 주었다. “아가씨, 조급해 하지 마세요. 저 사람들은 하 선생님을 잘 돌볼 거예요.”“알아요.” 이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하지만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요.”지환을 한순간도 볼 수 없다면, 이서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어느새 신발까지 잃어버린 이서를 본 현태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아가씨, 저한테 업히
의사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이 물어보려던 찰나, 구급차 문에 나타난 현태가 말했다.“네 바퀴가 고의로 파손돼서 차에 시동을 걸 수가 없어요.”이서의 안색이 아주 어두워졌다.“다른 차량은 없는 거예요?”“다른 차량도 마찬가지예요. 이미 이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다른 차를 부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빨라도 30분은 걸릴 거예요!” “그건 안 됩니다.”의사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환자는 반드시 30분 이내에 수술받아야 해요. 30분 이내에 수술받지 못한다면 생명과 안전에 큰 문제가 생길 겁니다.” 이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하지만...” 들것에 누운 지환을 바라보던 그녀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현태에게 물었다.“현태 씨, 이 선생님은 지금 어디에 계세요?” “저희 뒤를 따라오고 계셨어요. 곧 내려오실 겁니다.” “이 선생님이... M국의 유명한 천재 의사라고 하셨죠? 하은철이 제 신장을 원했을 때도 이 선생님께 수술을 부탁했었거든요. 이 선생님께 이런 수술은 아무것도 아닐 거예요!”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아가씨, 이 선생님이 오셨어요!” 이서는 발 부상에도 불구하고 구급차에서 뛰어내렸고, 상언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이 선생님, 수술... 할 수 있으시죠?” 멍하니 있던 상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네,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건 없어요. 구급차가 훼손됐단 말이에요! 이건 분명 누군가가 고의로 한 짓이라고요. 다른 구급차를 부른다고 해도, 족히 30분은 걸릴 거예요. 그 차가 30분 안에 온다고 장담할 수 있으세요?” “게다가 적은 숨어 있고 우리는 드러난 상황이잖아요. 적이 무슨 행동을 벌일지 모른단 말이에요. 이제 저희가 믿을 곳은 이 선생님뿐이에요!” 상언이 이서를 보며 말했다.“제가 수술하는 건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여긴 환경이 너무 열악해요. 수술 후에 감염이 생길까 봐서 걱정이에요.”이서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아직도 그런 걱정할 겨를이 있다고 생
‘하지만...’‘이제 하지환은 혼자 싸우는 거나 다름없어.’ ‘허.’그의 오늘 목적은 어둠의 세력 조직원의 일원을 물리치는 것이 아닌, 지환의 수술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방해하기로 한 이상, 걱정할 건 없어.’ “가자.”하은철이 뒤에서 움츠러들고 싶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둠의 세력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죽으러 가고 싶지 않아 할 뿐이었다. 하은철이 그 사람들을 흘겨보며 측은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들의 손에 죽고 싶지 않다면, 내 손에 죽어야 할 거야.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하은철을 따라 산기슭의 그 구급차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들은 아직 접근하지 않았는데, 어둠의 세력 우두머리가 이서의 곁에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윤 대표님, 누가 있습니다!” 이서가 냉엄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떤 방향에서 오는지 아시겠어요?” “산에서요.”우두머리가 그들이 오는 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서가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말했다.“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도 알 수 있나요?” “대략 몇백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하찮은 졸개들이라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깊은숨을 들이쉬며 구급차를 쳐다본 뒤 말했다.“대부분의 인원을 구급차에 집중시키고, 그 누구도 가까이 오게 해서는 안 돼요. 나머지 분들은 각 구석을 지키고 움직이지 마세요.”“명심하세요! 여러분의 임무는 그들을 물리치는 게 아니에요! 구급차 안의 수술이 안전하게 진행되도록 하는 거라고요!” “예!”우두머리는 즉시 이서가 정한 대로 행동했다. 모든 것을 마친 그는 다시 이서의 곁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상황이라도 생긴 건가요?” “네, 소리가 작아진 걸로 봐서는 우리한테서 멀어진 것 같습니다.”우두머리가 다소 쑥스러워하며 말했다.“제가 너무 긴장한 모양입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겨냥한 게 아닐지도 모르죠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