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지환의 품에서도 눈을 감고 있었다.“그럼 빨리 여기서 나갈까요?”“응.”지환이 다시 한번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천, 지금 어디야?”[H시에 도착했습니다.]“사람들을 시켜서 어서 남은 문제를 수습해.” 손씨 가문의 사람들이 이러한 말썽을 부릴 것이라 예상한 지환은 H시로 올 때 이천이 사람들과 함께 자신이 탄 다음 비행기로 H시에 올 것을 지시했다. ‘허, 손씨 가문 사람들이 말썽을 부리는 걸로도 모자라, 하은철과 결탁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지환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손민우의 부하들이 그의 목숨이 아니라 그의 가면을 얻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하은철뿐이야.’ ‘하은철, 정말 미친 X이구나?’‘지난번에 내 구역에서 송철환 대표를 납치했을 때, 어느 정도 수그러들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더 심해진 셈이잖아? 나도 더는 못 참아!” 지환은 이서의 허리를 껴안은 채 룸에서 나왔다. 어떤 경호원들은 발버둥 치며 일어나려 했지만, 지환의 눈빛에 놀라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이서를 옆방으로 데려간 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손을 애틋하게 잡고 말했다.“여기서 기다려, 저 사람들, 제대로 처리하고 올게.” 이서가 지환의 손을 잡고 말했다.“걱정돼요.” 지환은 이서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망가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괜찮아, 저 사람들이 너를 다치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입술을 오므린 이서는 지환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고, 다른 한 손으로 천천히 그의 얼굴을 더듬기 시작했다.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의도하지 않은 것일까. 이서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지환의 입술 사이로 미끄러졌다. 지환은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불길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이서의 손을 눌렀다. 움직일 수 없게 된 이서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제가 걱정되는 건
지환은 한 치 앞도 모르는 손문덕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고, 담배 한 대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연기가 자욱해지자, 지환의 얼굴 윤곽이 희미해졌다. 그는 그저 앉아서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훈련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심지어 손문덕조차도 그저 말로만 큰소리를 칠 뿐, 지환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여전히 지원 세력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지환이 사람을 부르는 것을 들은 손문덕은 지환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몰래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어 곧바로 오라고 지시했다. ‘내 부하들만 오면, 비참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손민우, 저 녀석의 부하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종이로 만들 놈들도 아닌데 말이야.’ ‘겨우 두세 대만에 바닥에 나뒹굴다니!’ ‘내 부하들은 저렇게 형편없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 손문덕은 그 날밤 지환에게 기습당한 이유가 자신이 집에 있었고, 사방팔방에 흩어져 있던 부하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 부하들이 오면, 하 선생 따위는 잘 처리할 수 있을 거야.’ 손문덕이 자신의 부하들이 자신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계획을 세울 때, 지환은 담배 한 대를 끝까지 다 피웠다. 연기와 가면이 사라지자, 준수하지만 무서운 기운을 풍기는 지환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람들은 다시 두려워서 벌벌 떨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 속에서 지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화로 왜 아직인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손문덕은 놀라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하, 하 선생...”‘내가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지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 있는 것처럼.상황이 좋지 않다고 느낀 손문덕이 급히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한 명씩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하 선생, 우리 가문의 항구를 이용하려는 거 아닙니까? 쓰고 싶은 대로 쓰십시오. 나는 절대로 간섭하지 않을 테니...” 손문덕의 말을 들은 지환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바보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손민우가 조급해했다.“할아버지, 절대 안 돼요...” “네가 뭘 알아?!”손문덕은 손민우를 걷어차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 선생, 민우의 생각일 뿐입니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지환은 이런 사람들을 경멸할 기력조차 없었기에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게 정리하겠다는 겁니까?” 손문덕이 마늘을 다지듯이 고개를 끄덕였다.“하 선생이 나를 놓아주기만 한다면, 무슨 일을 벌이든 눈감아 주리다!” 지환이 다리를 꼬며 나른하게 말했다.“이왕 이렇게 된 거, 항구 이용권을 넘겨주시죠.”얼굴이 하얗게 질린 손문덕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려 했다. 하지만 지환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고개와 몸이 굳어버리는 듯했다.“싫으십니까? 좋습니다, 그럼 손씨 가문을 대신해서 항구를 내어줄 가문을 찾아봐야겠네요. 손씨 가문 말고도 항구를 내어주려는 가문은 많을 테니까요.” 손문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만약 이때도 지환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바보나 하는 짓이지 않은가. “싫다니요, 알겠습니다. 내 항구를... 내어주리다.”‘H시 내에서 손씨 가문의 위상을 지킬 수만 있다면, 항구 하나쯤을 내어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지환이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은 어떻게 됐어?”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지환이 또 고개를 돌려 손문덕을 바라보았다. 손문덕은 상황이 바뀐 것이라 생각하여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지환이 수화기 너머의 이천에게 말했다.“다 처리된 셈이네. 지금 바로 계약서를 가지고 와.” 손문덕은 그제야 지환이 ‘처리’라고 말한 것이 호텔에서 일어난 파국이 아니라, 그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통화를 들어보니, 그 부하들도 지환과 같은 도시에서 온 것 같았
방으로 들어온 이천을 마주한 이서는 그의 뒤에 지환이 없는 것을 보고는 심장이 조이는 듯했다. ‘아까 그 사람들이 하 선생님의 가면을 벗긴 것 같았는데?’ 그녀는 비록 눈을 감아서 보지 않았지만, 이전에 몇 번이나 지환의 가면을 벗기려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봤다고 생각한 지환이 그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이렇게 생각한 이서는 심장이 뽑히는 듯했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이천의 제지를 받았다. 이천은 이서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윤 대표님, 조급해하지 마세요. 하 선생님은 밖에 계십니다. 다만, 아직 처리하지 않은 일이 있어서 저랑 먼저 가주셨으면 합니다.”이서가 말했다.“또 무슨 일이 있다는 거예요? 가면이 벗겨져서 저를 보기 싫은 건 아니고요?” “얼굴은 전혀 못 봤으니까 저를 피하지 말라고 전해주시면 안 돼요?” 이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구를 한 번 보았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윤 대표님은 저를 따라오지 않으실 거라고요.’ “윤 대표님.”이천이 목소리를 낮추었다.“하 선생님께서 지금 당장 윤 대표님을 만나러 오지 않으시는 건 가면이 없기 때문이에요. 대표님께서 본인의 진짜 얼굴을 볼까 봐 걱정돼서 저랑 먼저 가라고 하시는 거고요.” 이서는 이 말을 듣자 마음이 안정되는 듯했다.“그렇군요.”눈동자를 굴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저한테 방법이 하나 있어요.” 이서는 이천의 귓가에 나지막이 몇 마디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을 들은 이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방법은 윤 대표님만이 쓸 수 있는 방법이야! 게다가 윤 대표님만이 하 대표님께 쓸 수 있는 방법이지!’이천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이천은 이 말을 끝으로 룸을 떠났다.문밖의 지환은 이서가 동의하지 않는 소리를 진작 들었다. 다만, 후에 두 사람이 귓속말로 나눈
이서는 지환을 보자마자 스스럼없이 피식 웃었다.이천은 지환이 스카프를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화한 얼굴과 애정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쩝.’‘나는 웃지도 않았는데 월급을 깎겠다고 하시더니, 윤 대표님은 몸을 앞뒤로 젖히면서 웃으시는 데도 아무 말씀도 안 하시네.’‘이중잣대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항구에 관한 일을 처리한 이서는 즉시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우선 H시로 모든 화물을 보내고, 일주일 이상 쌓여 있던 화물들은 곧바로 수출할 수 있도록 조치해 줘.” 모든 계획을 세운 이서는 그제야 안심하고 지환과 함께 돌아가는 길에 오를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이서는 시종일관 지환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이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이어졌다.심지어 그가 짐을 챙기러 갈 때도 함께 했으며, 주위의 괴이한 시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이 호텔로 돌아와 입구에서 헤어질 때도 이서는 안심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갑자기 사라지는 건 아니겠죠?”그가 이서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아니야.”이서는 그 틈을 타서 지환의 팔을 안았고, 스카프를 사이에 두고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비록 스카프 위에 입을 맞춘 것이었지만, 그녀가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약속한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옅은 미소를 바라보며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가장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응.”이서는 그제야 안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하지만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지환의 눈빛이 음침하게 변했다.방문을 닫은 그는 곧 이천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하씨 그룹을 인수해!” 그의 단호한 어투는 선회할 여지가 없는 듯했다. ‘손민우는 부하들한테 내 가면을 벗기라고 지시했어. 이건 분명히 하은철의 지시가 있었던 거야. 그 자식만이 내 진짜 얼굴을 마주한 이서한테 일어날 일을 알고 있으니까!’ ‘하은철을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하는 지경이 이르렀구나.’[예.]이천도 이제는 무슨 말
하은철이 심동을 흘겨보았다.“왜, 이대로 물러나고 싶어?” 사실 심동은 물러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물러난다면, 윤이서와 하은철의 미움을 동시에 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연합해서 나를 상대하면 어쩌지?’ 그는 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서둘러 말했다.“하 사장,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나는 단지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을 뿐이야. 손문덕 어르신 같은 분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예사롭지 않은 사람인 게 분명해.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심 사장은 그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윤이서나 잘 상대하면 된다고.” 하은철이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하나만 묻자, 윤이서가 H시의 항구를 사용하는 걸 막을 방법이 전혀 없을까?”잠시 침묵하던 심동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있긴 하지만... 위험부담이 꽤 클 거야.” “무슨 방법이길래 그래?”하은철이 물었다. “윤 대표의 화물이 지나는 길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거야. 그러면 화물이 제대로 수출될 수 없지 않을까?”심동이 대답했다. 잠시 침묵하던 심동이 계속해서 말했다.“그런데 이 방법은 너무 모험적이야. 우리 심씨 가문의 자원을 이용하면 윤 대표의 화물이 지나는 걸 막을 수는 있겠지만, 윤 대표가 이 일을 폭로하는 순간, 하 사장이랑 나한테도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게 될 거야.”심동은 이러한 이유를 근거로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추천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 일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윤이서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일 필요는 없잖아?’ ‘어쨌든 윤이서는 여자인 데다가 막강한 가족이라는 버팀목도 없으니까.’ 하지만 찌푸렸던 인상을 편 하은철은 심동이 말한 계획의 실행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했다.심사숙고한 그는 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이 방법이 통한다면...’ ‘만약에 통하지 않는다면...’하은철은 자신이 피해를 보지 않을 방법도 생각해 보았다. “심 사장이 말한 대로 하자. 지금 당장 고속도로의 책임자
‘가장 큰 항구를 윤씨 그룹에게 임대해 주다니, 상대는 정말 대범한 것 같아.’ 이서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소희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일이 이렇게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거야.’ 그녀는 하은철이 여전히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자.’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소희를 바라보았다.“내가 없는 기간 동안, 장희령이 왜 일부러 소희 씨를 겨냥했는지는 알아냈어?” 소희가 고개를 저었다.“똑똑히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두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이상한 점?” “장희령이랑 심동이 곧 결혼한대요.” “그게 뭐가 이상해?” “이서 언니, 언니가 몰라서 그래요. 장희령이랑 심동은 이미 꽤 오랫동안 사귀었잖아요. 하지만 심씨 가문은 여전히 미래 후계자의 배우자가 연기자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고요.” “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을 계속 동의하지 않았던 거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동의하다니,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이서는 잠시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깨닫지 못하고 물었다.“두 번째 이상한 점은 뭔데?”“최근에 누군가가 몰래 저를 미행하고 있어요.” 이 순간, 이서의 안색이 변했다.“어떤 사람인지 알아?” 고개를 숙인 소희가 땅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알아요.” “누군데?”“심 회장님 부부예요.”이서는 깜짝 놀랐다.“그분들이 왜 소희 씨를 미행하겠어?” “그래서 저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제가 잘못 안 줄 알았는데, 나중에 찾아보니까 저를 미행하던 차가 심 회장님 부부의 차량이더라고요.” “게다가 최근에는 제가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셨어요.” 이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설마... 내가 소희 씨랑 사이가 좋다는 걸 알아서 소희 씨에게도 손을 쓸 작정인 건가?’“그래, 알았어. 내가 한번 알아볼게. 소희 씨도 그동안 조심해.”이 말을 마친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현태 씨랑은 어떻게 돼 가?”“아주 잘 지내요.”현태 이야기를 꺼내자,
이서와 소희는 모두 괴물을 본 것처럼 정인화를 바라보았다. 정인화의 입에서 ‘내가 잘못했다’라는 말을 듣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지 않은가.“엄마가 잘못했어, 진심이야.” 두 사람이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소희를 바라보던 정인화가 얼른 다시 말했다. 그녀의 어투에는 약간의 비위를 맞추려는 속셈도 숨겨져 있는 듯했다. “맞다, 다음에 누가 엄마가 너한테 사과했냐고 물으면, 이미 했다고 말해야 해, 알았지?” 이 말을 들은 이서는 더욱 옳지 않다고 느꼈다.그녀가 정인화를 덥석 잡았다.“누가 어머니더러 사과하라고 시킨 거예요?”정인화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넌지시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이서가 소희를 한번 보고 말했다.“소희 씨, 난 이 사과가 조금의 성의도 없다고 생각해. 이만 가자.” 소희는 곧 이서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말을 따라 말했다.“네, 이서 언니.” 소희는 냉정하게 몸을 돌렸고, 자리를 떠났다. 이 장면을 본 정인화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황급히 소희를 가로막고 말했다.“안 돼, 너는 반드시 나를 용서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연거푸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말을 뱉었으나, 끝내 까닭을 말하지는 않았다. 이서가 말했다.“어머니, 소희 씨의 체면을 생각해서 경비원을 부르지 않은 거예요. 하지만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주지 않으신다면, 경비원한테 어머니를 끌어내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어요.” 이서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경비원을 힐끗 보았다. 이서가 이렇게 모질다는 것을 본 정인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래요, 말하면 되잖아요. 며칠 전에 어떤 부부가 찾아와서 반드시 소희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할 거라는 말도 덧붙였고요.”“처음에는 그 말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튿날 소희 아버지로부터 실직했다는 전화를 받았어요.”“이유 따위는 없는 갑작스러운 통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