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와 소희는 모두 괴물을 본 것처럼 정인화를 바라보았다. 정인화의 입에서 ‘내가 잘못했다’라는 말을 듣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지 않은가.“엄마가 잘못했어, 진심이야.” 두 사람이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소희를 바라보던 정인화가 얼른 다시 말했다. 그녀의 어투에는 약간의 비위를 맞추려는 속셈도 숨겨져 있는 듯했다. “맞다, 다음에 누가 엄마가 너한테 사과했냐고 물으면, 이미 했다고 말해야 해, 알았지?” 이 말을 들은 이서는 더욱 옳지 않다고 느꼈다.그녀가 정인화를 덥석 잡았다.“누가 어머니더러 사과하라고 시킨 거예요?”정인화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넌지시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이서가 소희를 한번 보고 말했다.“소희 씨, 난 이 사과가 조금의 성의도 없다고 생각해. 이만 가자.” 소희는 곧 이서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말을 따라 말했다.“네, 이서 언니.” 소희는 냉정하게 몸을 돌렸고, 자리를 떠났다. 이 장면을 본 정인화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황급히 소희를 가로막고 말했다.“안 돼, 너는 반드시 나를 용서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연거푸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말을 뱉었으나, 끝내 까닭을 말하지는 않았다. 이서가 말했다.“어머니, 소희 씨의 체면을 생각해서 경비원을 부르지 않은 거예요. 하지만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주지 않으신다면, 경비원한테 어머니를 끌어내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어요.” 이서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경비원을 힐끗 보았다. 이서가 이렇게 모질다는 것을 본 정인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래요, 말하면 되잖아요. 며칠 전에 어떤 부부가 찾아와서 반드시 소희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할 거라는 말도 덧붙였고요.”“처음에는 그 말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튿날 소희 아버지로부터 실직했다는 전화를 받았어요.”“이유 따위는 없는 갑작스러운 통보
최근에 겪은 일들을 떠올린 정인화가 이 가능성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부부는 돈이 꽤 많은 것 같지?’ 정인화는 2억 원이라는 큰돈을 쉽게 꺼내는 장희령의 모습을 떠올리며 불쾌해했고, 사과할 마음이 사라진 듯 돌아섰다.소희는 뒤늦게 어머니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이상하네요, 엄마가 왜 그냥 가셨을까요?” 이서는 사실 진작 눈치챘다. 정인화가 혼비백산하여 자리를 떠났다는 것을.그 모습은 마치 2억이라는 돈을 놓친 것처럼 보였다.이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가시게 내버려둬. 어머니만 가시면 소희 씨도 며칠 동안 쉴 수 있잖아.”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거야 그렇죠.” 그동안 그녀는 정인화 때문에 짜증이 났다. “이제 들어가자.”이 말을 마친 이서는 회사 안으로 들어갔고, 소희는 얼른 뒤를 따랐다.이서가 사무실에 도착해서야 두 사람은 갈라섰다.사무실에 들어선 이서는 머릿속에서 이상한 전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심 회장님 부부가 왜 소희 씨를 도우려 하는 걸까?’ ‘그리고 왜 갑자기 장희령과 심동의 결혼을 허락하신 걸까?’ 스크린을 주시하던 그녀의 머릿속을 대담하게 파고드는 생각이 있었다. ‘소희 씨가... 심 회장님 부부가 찾던 딸은 아니겠지?’ 그녀는 지난번 심씨 가문의 고택에 갔을 때, 심근영 부부가 소희를 바라보던 눈빛을 떠올렸다. 게다가 심근영 부부는 외지에서 돌아온 후로 딸을 찾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그렇다면...’이서는 생각할수록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곧장 홍보팀 팀장 최미영을 찾아갔다.“심 회장님 부부가 외지에 딸을 찾으러 갔을 때,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는지 좀 알아봐 주세요.” 최미영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알겠습니다.” 이 말을 마친 이서는 별다른 분부 없이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이런 일은 전화로 지시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굳이 여기까지 오신 거지?’홍보팀을 떠난 후에도 이서의
곰곰이 생각하던 이서는 그 직원에게 화물 운송을 담당하는 임원에게 전화를 바꿔 달라고 했다. 그녀가 임원에게 말했다.“우선 거기서 기다려주세요. 저는 방법을 강구해서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할 거예요.”이 말을 마친 그녀는 임원이 뭐라고 하든 그냥 전화를 끊었다. ‘말할 필요도 없어. 분명 하은철이 뒤에서 음모를 꾸민 걸 거야.’ 하지만 윤씨 그룹의 수출을 막는 것은 심씨 가문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일은 심동이 한 짓임이 틀림없었다.이서는 곧 소희를 떠올렸다. ‘소희 씨를 나서게 하면...’이서는 곧바로 이 생각을 부결시켰다.‘아마 소희 씨는 정인화가 자신의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야.’ ‘내가 이 사실을 소희 씨한테 말한다면, 겨우 진정된 소희 씨는 엄청나게 괴로워하겠지?’ ‘게다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소희 씨가 심동과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소희 씨의 체면을 생각한 심동이 나에게 맞서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 이렇게 생각한 이서는 소희의 출생에 관한 일에 자신이 개입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개되도록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어 심동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일이 심동이 한 일이라면, 당사자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심동은 망설이지 않고 이서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윤 대표가 웬일로 나한테 전화를 다 한 거지?] “저희 화물의 수출을 막은 사람, 심 사장님이죠?”이서는 심동과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심동이 웃으며 말했다.[윤 대표, 생사람 잡는 거 아니야? 나는 그저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떻게 윤씨 그룹의 화물을 압류할 수 있겠어?]이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심 사장님, 하은철과 협력하고 있다는 거, 잘 알아요. 그게 무슨 일이든, 심 사장님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는 것도요. 물론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겠죠.” “하지만 심 사장님이 사업가고, 이익만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저희도 협력하는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심 사장님이 저희 화물이 잘 수출되도록 도와만 주신다면요.”[그래, 생각해 볼게.]심동은 마음이 편치 않아서 전화를 끊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든 채 입꼬리를 올렸다.심동이 하은철과 협력한 것은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하지만 이서의 관찰에 따르면, 심동은 전력을 다해 그녀를 상대했지만,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큰 유인책을 제시하여 심동이 하씨 가문과의 협력을 포기하도록 한 이유였다. 다만 이서는 심동이 쉽게 승낙하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반드시 외부 압력이 있어야 해.’‘하은철과 협력해 봤자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걸 깨달아야지만 내 제안을 승낙할 테니까.’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어디서 외부 압력을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방법이 없었던 이서는 우선 임원에게 화물을 정리한 뒤, 어디든 기사들과 함께 쉴 만한 곳을 찾으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은 H시에 갈 수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나만의 항구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목이 졸리지 않아도 될 텐데.’ 곰곰이 생각하던 이서는 또 한 번 각 도시의 항구 분포도를 꺼냈다. 하씨, 소씨, 심씨 가문은 모두 자신만의 항구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모두 대형 항구였으며, 나머지 몇 개의 작은 항구도 다른 자그마한 가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가문들은 손씨 가문처럼 손문덕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가문이 연합하여 점령한 항구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항구를 차지하려면 틀림없이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고, 그때쯤이면 밀도 모두 익어버릴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녀에게 항구를 내어주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이서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계속해서 각 가문의 정보를 뒤적거렸다. 그녀는 결국 심씨 가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심씨 가문의 오양 항구를 얻어낼 수 있다면 가장 좋겠어.’ 오양 항구는 도시 전체에서 가장 큰 항구였다.
차갑고도 뜨거운 입맞춤, 이 두 가지 다른 감각이 끊임없이 이서의 마음을 휘감았다. 지환은 이서를 놓아주었을 때야 그녀가 이슬에 젖은 듯한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습을 본 지환은 덩달아 마음이 조이는 듯했고, 특정한 감정이 더욱 심하게 들끓는 것 같았다. 이서가 지환을 바라보며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밤, 저랑 함께 있어 줄래요?” 이 말을 마친 이서는 지환의 반응을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지환은 그녀의 불그스름한 뺨을 보고 있었는데, ‘좋아’라는 말이 입술 사이를 맴돌았다. 하지만... 이성을 붙잡아야만 했다.“안 돼.” 이서의 얼굴에 만연했던 수줍음이 굳어졌다. 그녀가 이내 초조하다는 듯 그의 몸에 기대었다.“왜요?” 깊은숨을 내쉬는 지환의 이마에서는 이미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이서의 두 눈과 자신 위에 드리워진 아름다운 곡선을 보자,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왜냐면...”다행히도 그는 이성이 완전히 붕괴될 무렵에 이천의 전화를 받았다. 지환의 이성이 다시금 그를 끌어온 것이었다. “전화, 전화 받아야 해!” 그가 이서를 밀치며 말했다.침대에 주저앉은 이서는 도망가는 지환을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불쾌하다는 듯 붉은 입술을 내밀었다. ‘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가면을 벗기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줬는데, 왜 나랑 잠자리를 하지 않으려는 거지?’ ‘내가 귀신이나 맹수도 아닌데!’ 반대쪽에서는 지환이 난감하다는 듯 이천의 전화를 받았다. “언제?”지환의 거친 숨결을 듣고 깜짝 놀란 이천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희로애락을 분간할 수는 없었다. 그가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대표님, 하씨 가문 쪽이었어요.] [저희는 이미 하씨 가문과 시장 가격보다 5%로 높은 가격에 그들이 가진 지분을 인수하기로 협상했어요. 하지만 방금 하나 같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전화를 걸어와서는 저희와 계약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잠옷을 입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몸매를 특별히 한 번 살펴보았다. ‘살이 있어야 할 곳에는 있고, 없어야 할 곳에는 없는데, 이런 내가 왜 싫다는 걸까...?’ 이서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지환을 땅굴에 묻고 싶어질 정도였다.더 이상 환각이라 생각할 수 없었던 지환은 그녀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이서야, 난 너한테 불만 없어.”“그럼 왜 저랑... 저랑...” 이서는 생각할수록 억울했고, 곧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백화점에서 하은철에게 겨냥당했을 때도, 이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하지만 지금은...지환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이서가 눈물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서가 울자, 모든 것을 잊은 그는 앞으로 나아가 그녀를 안아주었다.“울지 마, 울지 마, 네가 나쁜 게 아니라 내가 나쁜 거야!” 울음을 뚝 그친 이서가 시선을 아래로 옮기며 얼굴을 붉혔다.“그럼, 설마...” 지환의 이마에 붉어진 핏줄이 더욱 선명해졌다. 의심을 받은 그는 화가 나서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이서를 위해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서야, 그만하고 얼른 네 방으로 돌아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선 그녀가 말했다.“안 갈래요. 오늘 저녁에는 여기서 잘 거라고요.” “선생님이 제 방에 안 오실 거면, 제가 여기서 잘 거예요, 괜찮죠?”하연이 이마를 문질렀다. ‘기억을 잃은 내 와이프가 왜 이렇게 무대포로 변한 거지?’ 지환이 몸을 돌려 옆방으로 가려고 하자, 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침대에 앉았다.“매니저님께 부탁해서 그 방 예약을 취소해 뒀어요.”발걸음을 멈춘 지환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상관없어, 방이야 다시 얻으면 되는 거니까.” “...”문이 천천히 닫히는 것을 본 이서는 화가 나서 손에 들고 있던 베개를 집어 던져버렸다. ‘바보, 바보, 바보!’ 지환은 곧바로 매니저를 불러 옆방을 예약했다.매니저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가 옆방으로 옮기려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부부간의 감정 문제일 수도 있겠다고
이서가 아주 부자연스럽게 말했다.“그냥 간단한 일이야.” 소희의 의심은 더욱 짙어져 갔다.‘형부가 간단한 일을 승낙하지 않았을 리 없는데...’“이서 언니, 쉬운 일이라는 게 어떤 건데요?” 소희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서도 그녀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소희 씨도 알다시피, 우리는 지금 각방을 쓰고 있잖아?”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그녀가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난 더 이상 각방을 쓰고 싶지 않아... 무슨 뜻인지 알겠지?” 소희의 얼굴이 살며시 빨개졌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았다.“엄청 간단한 일이었네요. 그런데 왜 하 선생님은 지금까지도 언니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걸까요...” 소희는 말할수록 더욱 얼굴을 붉혔다.그녀와 현태는 이미 함께였지만, 두 사람의 가장 친밀한 동작은 손을 잡는 것이 전부였다. 이서가 손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누가 알겠어?” 그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하 선생님의 마음은 나를 향해 움직였어.’‘다만 매번 참고 있을 뿐이라고.’ 정말이지 이서는 그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침한 소희가 부자연스럽게 말했다.“이서 언니, 사실 저는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 선생님은 언니를 정말 아끼시잖아요. 언니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실 거란 말이죠.” “그 일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요?”“안 된다고 하더라고...”이서는 소희에게 숨길 것이 없었다.“소희 씨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구슬렸는지 모를 거야. 그런데 죽어도 나랑 자기 싫대.”“내가 기억을 잃지 않았을 때도 이랬을까?” 안색이 변한 소희는 이서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서가 소희를 힐끗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됐어, 됐어. 소희 씨한테 묻는 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소희 씨도 대답할 필요 없어.” 그녀는
이서가 곁에 서 있는 소희를 힐끗 보았다.소희의 안색은 한마디로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이서 언니, 이게 정말 우연일까요?” ‘우리 회사의 맞은편 백화점에서 쇼핑하는데, 장희령을 만난다고?’‘이게 무슨 거지 같은 상황이야?’ 이서가 침착하게 쇼윈도에 있는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이걸로 포장해 주세요.” 직원들은 그녀가 윤씨 그룹의 대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시계를 포장했고, 소희에게 건네주었다. 소희가 이서에게 시계를 건네며 말했다.“이서 언니, 이제 갈까요?”“응.”이서가 소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매장을 나섰다. 시계 매장의 바로 옆은 액세서리 매장이었다.그리고 두 사람이 시계 매장을 나가려면 그곳을 지나야만 했다. 이서는 정말이지 장희령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은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희령이 일부러 백화점에서 이서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서가 나오는 것을 본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반지를 내려놓은 채,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액세서리 매장을 나섰다. “윤 대표님,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공교롭네요.” 이서는 곁눈질조차 하지 않고 장희령의 곁을 지나쳤다.그 순간, 장희령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하며 분노를 억눌렀고, 이서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빨리 가요? 혹시, 내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러는 거예요?” ‘장희령, 정말 미친 거 아니야?’ ‘네가 결혼하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계속 길이 막힌 이서가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장희령 씨,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녀가 마침내 발걸음을 멈추는 것을 본 장희령이 득의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무슨 말이요?” “착한 개는 길을 막지 않는 법이에요.” 장희령은 목이 메어 말하지 못하다가 한참 만에야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았다. “윤 대표님, 내가 곧 심씨 가문에 시집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