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들은 장희령은 즉시 음침한 눈동자로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온몸을 벌벌 떨던 매니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령아,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나는 단지... 심동 씨가 너를 돕지 않겠다고 한다면, 하은철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이었어.” “하은철은 지금 곳곳에서 윤이서를 겨냥하고 있잖아? 아마 하은철도 네가 한 일을 알고 있을 거란 말이지. 그 사람은 틀림없이 너를 도우려 할 거야.” 장희령의 얼굴에 점차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그래, 하은철은 윤이서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분명히 나를 도우려 할 거야, 분명히!” 그녀의 눈동자에는 다시금 희망이 피어올랐다. 장희령이 화장대로 다가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헝클어진 머리에 창백한 얼굴을 한 여자가 아닌, 위풍당당한 장희령이 서 있었다. 장희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매니저는 끊임없는 한기가 명치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장희령에 대한 인터넷상의 악플이 계속되는 것을 바라보던 이서가 홍보팀을 나와 1층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지환이 있었는데, 다른 고위층 임원들은 이미 자리를 떠난 상황이었다. 이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다들 어디 가셨어요?” “어떤 분들은 본인의 직장으로 돌아가셨고, 또 다른 분들은 병원에 가셨어.” ‘병원?’이 두 글자를 들은 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지만, 계속해서 묻지는 않았다.“일은 잘 해결됐어요.” 이서가 사탕을 요구하는 어린아이처럼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이 그녀의 코를 살며시 쥐며 말했다.“잘했어!”이서가 흡족해하며 말했다.“축하하는 의미에서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어때요? 하나랑 소희 씨도 부를까요?” 잠시 머뭇거리던 지환이 입을 열었다.“그래.” 이서가 말했다.“그럼 저는 그 전에 일부터 해야겠어요.” “응.”이서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지환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는 방금 마이클 천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았다. 어제 이서가 진행한 신체검사에
“세상에 어떤 부모가 매번 자기 딸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하겠어?” 지환의 말을 들은 이천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래, 나도 이런 부모는 처음 봤어. 처음에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매번 딸의 발목을 잡잖아? 정말 친자식이 아닌 걸까?’ [네, 대표님, 알겠습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이서는 문어귀에서 소희를 만났다. “이서 언니, 드디어 일이 완벽하게 해결되었네요.” “그러게.”“그래서 말인데, 오늘 저녁에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조용한 장소를 좀 알아봐 줄래?” 소희가 말했다.“네, 지금 바로 알아볼게요.” 이 말을 마친 그녀는 기뻐서 식사할 곳을 예약하러 갔다. 퇴근하자마자, 몇 사람이 호텔로 향했다.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는 요 며칠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갔는데, 딸을 찾는 일이 진전이 없어서 무력감을 느낀 하이먼 스웨이의 기분을 전환해주기 위하여 배미희가 계획한 것이었다. ‘그래, 너무 딸을 찾는 일에만 집중하지 말자.’ ‘어쩌면 무심코 한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거잖아?’ 하이먼 스웨이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배미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총 일곱 사람이 자리에 둘러앉았다. 모두가 짝을 이뤘는데 심소희만 혼자였다. 여은아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서를 향해 말했다.“윤 대표님, 전부 대표님 덕분이에요. 그 CCTV 영상을 복구하는 것도 대표님께서 도와주셨다고 들었는데... 대표님이 아니었으면 나나는 연예계에서 완전히 쫓겨났을 거예요!” 그녀는 거의 무릎을 꿇을 지경이었다. 여은아는 결코 이치를 모르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비록 이번에 겨냥된 건 나나였지만, 나도 나나와 같은 배를 탄 셈이잖아?’ ‘만약 나나가 연예계에서 완전히 쫓겨났다면, 다음 타깃은 내가 되었을 거야.’ 나나는 입을 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이서 언니, 언니는 정말이지 저의 제2의 부모님이나 다름없어요. 언니가 아니었으면 저는 정말...” 그녀가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 ‘만약
“오빠?”소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잠시 후, 소희는 자신도 모르게 임현태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현태의 근육투성이인 몸을 꽉 끌어안고서야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현태는 이 단단한 포옹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잠시 후에야 입술을 움찔거리며 조심스럽게 소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어휴, 방금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대표님께서 모두 여기에 모여서 회식 중이라는 연락을 주셨지 뭐야? 그래서 나도 곧장 여기로 온 거야.” 기억을 잃은 이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지환의 비밀을 알고 있던 참이었다. 현태는 더 이상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속임수를 쓰는 것은 그와같이 거칠고 서툰 사람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소희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고, 급히 현태를 놓아주며 말했다.“미안해요, 오빠. 오... 오빠를 너무 오래간만에 봐서 반가운 마음에 그만...” 현태가 고개를 숙인 소희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소희야...” 소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현태는 자신을 바라보는 소희를 보자마자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그나저나 왜 밖에 서 있는 거야? 회식 중인 거 아니었어?” 소희가 대답하려던 찰나,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어 확인한 소희는 안색이 약간 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하며 현태에게 말했다. “맞아요, 그냥 바람 좀 쐬러 나온 거였는데, 오빠는 어서 들어가 봐요. 엄청 오래간만에 모두와 만나는 거잖아요! 오빠도 모두가 정말 그리웠을 것 같아요.” 현태는 멍해졌다. ‘맞아, 나는 M국에 있으면서 확실히 H국을 그리워했어. 하지만 H국의 맛있는 음식이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리워한 건 아니었지. 소희가 말하는 모두를 그리워한 건 더더욱 아니었고... 나는 그저 눈앞의
당부를 마친 이서는 지환과 함께 차에 올랐고, 다른 사람들도 계속해서 차에 올랐다.이 만찬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이서가 배를 어루만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배가 너무 부르네요.” 이 말을 들은 지환이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내가 좀 문질러 줄까?” 하지만 이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지환의 넓은 손은 이서의 배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순간, 간지럽고 찌릿찌릿한 느낌이 온몸에 퍼졌고, 이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하 선생님...” 지환이 고개를 들어 깊은 눈동자로 이서를 쳐다보았다.“아직도 불편해?” 이서는 더 괴로워졌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 이유는 배가 아니라 지환의 행동 때문이었기에 애써 웃으며 말했다.“많이 괜찮아졌어요.”“정말 괜찮아진 거야?”이서의 눈을 바라보던 지환이 다소 진지하게 물었다.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이서의 등이 저절로 꼿꼿해졌다. “정말 많이 괜찮아졌어요.” ‘하 선생님... 지금 좀 무서운 것 같은데?’ “거짓말!”지환은 마치 투시안을 가진 사람처럼 반박할 수 없는 어투로 말했다. “아직도 불편하면서,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이서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는...”“이서야, 왜 날 속이려는 거야?”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 듯했지만, 이서는 몸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 이서가 화장실에 몸을 숨긴 그날, 지환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지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긴장한 이서가 즉시 그의 손을 잡았다.“저는 정말 괜찮아요, 계속 힘든 것도 아니고요. 그때도 아주 잠깐 힘들었을 뿐이에요. 선생님도 보셨잖아요... 저는 그날 기절하지도 않았다고요. 그게 바로 제가 버틸 수 있다는 뜻이에요. 제발, 제발 저를 떠나지 말아 주세요.” 지환은 눈물이 금세 솟아오른 이서를 보면서 꽉 쥔 주먹을 놓았다가 다시 쥐었다.“나는 널 떠나지 않을 거야. 이서야, 나는 단지 네가 다음
하은철이 장희령을 등지고 말했다.“이유는 묻지 마시고, 이서한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세요. 그리고 이서가 무조건 그 남자를 데리고 오게 해야 합니다. 장희령 씨가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꼭 그 남자를 데려오게 하세요.” 이 말을 들은 장희령은 길을 찾은 것 같았다. ‘아, 하은철의 목표는 윤이서가 아니라, 윤이서 주변에 있는 그 남자구나?’ 잠시 후, 하은철이 말을 덧붙였다.“내가 그 사람들을 만나면, 장희령 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남자의 얼굴에 있는 가면을 벗기면 됩니다.” 잠시 침묵하던 장희령이 자신에게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최선을 다해볼게요.”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입술을 오므린 장희령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네, 하 사장님, 그럼 저는 먼저 돌아가서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하은철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야 자리를 떠났다. 차에 오른 장희령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매니저가 다가와서 물었다.“어때, 하은철이 도와주겠대?” 장희령이 대답했다.“그런 셈이야.” “그런 셈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장희령이 짜증스럽게 말했다.“묻지만 말고 윤이서의 옆에 있다는 가면을 쓴 남자나 좀 알아봐 줘.” 매니저는 혼란스러웠지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차는 천천히 움직여 하씨 가문의 고택을 떠났다. ...이튿날 이른 아침.몸을 뒤척이며 일어난 이서가 곧장 옆방의 문을 두드렸다.“하 선생님!” 하지만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서는 순간 당혹감을 느꼈다.“하 선생님!”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서가 초조하게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하 선생님, 안에 계세요?” 그녀가 두 번째 두드리려던 찰나, 문이 열리고 바지만 입은 채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 있는 지환의 모습이 보였다. 이 모습을 본 이서는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이서
이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소희 씨,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아? 어제 저녁에 제대로 못 쉰 거야?” 소희가 얼른 부인했다.‘제대로 쉬지 못해서 얼굴이 엉망인 거겠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아무래도 제대로 못 쉬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나나랑 같이 나가면, 소희 씨는 회사에 남아서 푹 쉬도록 해.” 이 말을 마친 이서가 이미 화장을 마친 나나에게 물었다.“나나야, 이제 출발할까?” 거울을 한 번 확인한 나나가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이서에게 말했다.“네, 이서 언니.” “응, 가자.”“이서 언니.”소희가 이서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저는 괜찮아요, 따로 쉴 필요도 없고요. 그냥 저도 같이 갈래요.” 이서가 안심하지 못하고 소희를 한번 보았다.“정말 괜찮겠어?” 소희가 재차 대답했다.“네, 정말 괜찮아요.”시간을 힐끗 바라본 이서가 소희에게 말했다.“불편하면 언제든지 말해줘.”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 네 명은 그제야 출발했다.이서가 이미 출구를 지키고 있던 기자들을 해산시켰기 때문에, 차는 막힘없이 강명철의 회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리치푸드에 도착한 나나와 이서는 마스크를 벗고 있었는데, 이를 본 강명철의 직원들은 즉시 비명을 질렀다. “으악! 서나나 씨잖아? 내가 일하는 곳에 서나나 씨가 오다니!” “맙소사, 서나나 씨 정말 아름답고 매력적이네요!” “윤 대표님, 팬입니다. 사인 하나 해줄 수 있으십니까?”리치푸드에는 나나의 팬뿐만 아니라 이서의 팬도 있었다. 하긴, 미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큰 인기척은 자연히 사무실에 있던 강명철과 그의 비서의 주의를 끌었다. 자신의 회사가 팬미팅 현장으로 변해버린 것을 본 강명철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이 현재 가장 뜨거운 논쟁의 주인공인 나나와 이서인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명철은 이서가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그의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나나를 남겨두고 홍보 내용을 논의하라고 한 이서는 소희를 데리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곧 다른 회사도 내가 나나한테 리치푸드의 홍보를 담당하라고 한 사실을 알게 될 거야.”이서가 태블릿을 꺼내어 남아 있는 몇몇 회사의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아무래도 이 회사들에도 가봐야 할 것 같아.”“네, 그럼 저는 다음 길목에 내려서 혼자 회사로 가볼게요.” “그럴 필요 없어.”이서가 고개를 숙인 채 자료를 보며 말했다.“올 때 확인해 보니까 다음 회사에 가려면 마침 윤씨 그룹을 지나가야 하더라고.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굴 거 없어. 그냥 기사님께 소희 씨를 윤씨 그룹 입구에 내려 달라고 할게.” “좋아요.”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30분 후, 차가 윤씨 그룹의 입구에 도착하자, 소희는 여전히 자료를 보고 있는 이서에게 인사를 한 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소희가 채 문을 닫기도 전에 달려든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한바탕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이 계집애야! 왜 내 전화를 안 받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소희는 곧 눈앞의 사람이 정인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리의 수많은 눈동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소희가 급히 정인화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엄마, 좀 진정하세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요!” “아직도 체면을 차리는 거니?!”정인화는 이 말 때문에 오히려 더욱 화가 났다.“동생을 좀 돌보라고 했더니, 전화도 안 받고 뭐 하는 짓이야?! 그래서 이 어미가 시골에서부터 천 리 먼 길을 달려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겠니? 내가 이 길바닥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이 불효자식 같으니라고!” “네 아버지랑 고생스럽게 너를 키운 대가가 고작 이거니?! 그런 거야?!”이서는 차 안에서 인상을 찌푸린 채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을 본 정인화가 무대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아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부짖기 시작했다.“억울해서 못 산다! 이럴 바
소희는 이미 회사로 걸어가는 정인화를 불안하게 쳐다보다가 다시 이서를 돌아보았다.“이서 언니.” 이서가 말했다.“소희 씨, 아무래도 소희 씨의 집안일이다 보니까 나는 끼어들기가 좀 애매하네. 소희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이서는 다시 차에 올랐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던 소희의 마음속에 따뜻한 기운이 흘렀다. 이서의 말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했는데, 소희가 회사의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서 언니는 내가 경비원을 동원해서 엄마를 쫓아낸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소희는 복잡한 감정을 안고 정인화의 발걸음을 따라갔다. 같은 시각.차에서 곰곰이 생각하던 이서는 이 일은 현태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제 그녀는 현태가 온 이후에 소희가 눈에 띄게 즐거워한다는 것을 느꼈고, 현태 또한 수시로 소희를 바라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 아무래도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된 것 같지? 마지막 한 걸음만 남은 것 같아.’ ‘내가 현태 씨한테 이 상황을 말하면, 작은 도움을 주는 셈이 되지 않을까?’ 그 순간,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지환을 떠올렸다.‘하 선생님은 뭐 하고 계시려나?’ 정인화를 휴게실로 데려간 소희는 곧 문을 닫았다. 이서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정인화가 물었다.“네 대표는?” “업무차 외출하셨어요. 엄마,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죠? 여긴 회사고, 엄마가 소란을 피울 만한 곳이 아니라고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엄마도 집에 가고 싶지.”정인화가 의자에 앉으며 편안한 한숨을 내뱉었다.“그런데 소희야, 이 의자가 너무 편해서 갈 수가 있어야지... 도대체 얼마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거니?” 소희는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얼마를 드려야 집으로 가실 건데요?” “2000만 원, 네가 2000만 원만 주면 바로 집으로 간다니까?!”“2000만 원이요?!”소희가 눈을 크게 뜨고 정인화를 바라보았다.“저한테 그렇게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