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를 남겨두고 홍보 내용을 논의하라고 한 이서는 소희를 데리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곧 다른 회사도 내가 나나한테 리치푸드의 홍보를 담당하라고 한 사실을 알게 될 거야.”이서가 태블릿을 꺼내어 남아 있는 몇몇 회사의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아무래도 이 회사들에도 가봐야 할 것 같아.”“네, 그럼 저는 다음 길목에 내려서 혼자 회사로 가볼게요.” “그럴 필요 없어.”이서가 고개를 숙인 채 자료를 보며 말했다.“올 때 확인해 보니까 다음 회사에 가려면 마침 윤씨 그룹을 지나가야 하더라고.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굴 거 없어. 그냥 기사님께 소희 씨를 윤씨 그룹 입구에 내려 달라고 할게.” “좋아요.”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30분 후, 차가 윤씨 그룹의 입구에 도착하자, 소희는 여전히 자료를 보고 있는 이서에게 인사를 한 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소희가 채 문을 닫기도 전에 달려든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한바탕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이 계집애야! 왜 내 전화를 안 받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소희는 곧 눈앞의 사람이 정인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리의 수많은 눈동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소희가 급히 정인화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엄마, 좀 진정하세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요!” “아직도 체면을 차리는 거니?!”정인화는 이 말 때문에 오히려 더욱 화가 났다.“동생을 좀 돌보라고 했더니, 전화도 안 받고 뭐 하는 짓이야?! 그래서 이 어미가 시골에서부터 천 리 먼 길을 달려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겠니? 내가 이 길바닥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이 불효자식 같으니라고!” “네 아버지랑 고생스럽게 너를 키운 대가가 고작 이거니?! 그런 거야?!”이서는 차 안에서 인상을 찌푸린 채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을 본 정인화가 무대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아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부짖기 시작했다.“억울해서 못 산다! 이럴 바
소희는 이미 회사로 걸어가는 정인화를 불안하게 쳐다보다가 다시 이서를 돌아보았다.“이서 언니.” 이서가 말했다.“소희 씨, 아무래도 소희 씨의 집안일이다 보니까 나는 끼어들기가 좀 애매하네. 소희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이서는 다시 차에 올랐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던 소희의 마음속에 따뜻한 기운이 흘렀다. 이서의 말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했는데, 소희가 회사의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서 언니는 내가 경비원을 동원해서 엄마를 쫓아낸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소희는 복잡한 감정을 안고 정인화의 발걸음을 따라갔다. 같은 시각.차에서 곰곰이 생각하던 이서는 이 일은 현태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제 그녀는 현태가 온 이후에 소희가 눈에 띄게 즐거워한다는 것을 느꼈고, 현태 또한 수시로 소희를 바라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 아무래도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된 것 같지? 마지막 한 걸음만 남은 것 같아.’ ‘내가 현태 씨한테 이 상황을 말하면, 작은 도움을 주는 셈이 되지 않을까?’ 그 순간,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지환을 떠올렸다.‘하 선생님은 뭐 하고 계시려나?’ 정인화를 휴게실로 데려간 소희는 곧 문을 닫았다. 이서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정인화가 물었다.“네 대표는?” “업무차 외출하셨어요. 엄마,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죠? 여긴 회사고, 엄마가 소란을 피울 만한 곳이 아니라고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엄마도 집에 가고 싶지.”정인화가 의자에 앉으며 편안한 한숨을 내뱉었다.“그런데 소희야, 이 의자가 너무 편해서 갈 수가 있어야지... 도대체 얼마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거니?” 소희는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얼마를 드려야 집으로 가실 건데요?” “2000만 원, 네가 2000만 원만 주면 바로 집으로 간다니까?!”“2000만 원이요?!”소희가 눈을 크게 뜨고 정인화를 바라보았다.“저한테 그렇게
정인화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심플한 흰색 티셔츠를 입은 그 남자는 근육이 울퉁불퉁한 두 팔을 뽐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사나운 늑대처럼 매서워서, 안하무인인 정인화라 하더라도 그를 무섭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정인화를 뒤따라 나온 소희는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후 잠시 멍해졌고, 이내 솟아오르는 열등감을 느꼈다. 하지만 현태는 이런 것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인화를 응시하며 딱딱하게 말했다.“여기는 회사입니다. 소란 피우지 말고 나가주세요. 혹시라도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신다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정인화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내 딸을 찾으러 왔을 뿐인데, 왜 경찰을 부른다는 거예요? 설마, 이 회사는 내가 내 딸을 만나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정인화의 우렁찬 목소리는 곧 회사 안의 다른 사람들을 모두 끌어들였다. 그들은 평소에 소희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었는데, 정인화는 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연극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현태는 더 이상 예의를 차리지 않고, 곧장 정인화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갔다. 정인화는 급해져서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늙은이를 때리다니! 늙은이를 때렸어! 세상에 법이 없는 것처럼 군다고!”분분히 서로를 쳐다보던 사람들이 한 사람씩 달려가 현태를 도왔는데, 모두 그의 카리스마에 깜짝 놀랐기 때문이었다. 정인화는 반응할 틈도 없이 현태에 의해 1층으로 끌려갔다. 그가 입구에 있던 경비원에게 말했다.“당장 쫓아내세요. 혹시라도 이 여성분이 다시 회사를 찾아온다면, 사람이 없는 외딴곳으로 보내버리세요.” “당신들이 감히! 어떻게 감히...” 몇 명의 경비원들이 정인화가 계속해서 소란을 피울 것을 대비하여 서둘러 그녀를 차에 태워 보냈다. 뒤이어 온 소희는 정인화가 차에 태워져 떠나는
현태는 손을 흔들며 소희와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서야 이서에게 상황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꺼낸 그의 입가에 끊임없는 웃음기가 피어올랐다. [대표님, 잘 처리했습니다.] 같은 시각.이미 협력 회사에 도착한 이서는 현태의 메시지를 받고 미소를 지었다.‘내 예상이 맞았어. 현태 씨, 소희 씨를 아주 좋아하는구나.’ 핸드폰을 접은 이서가 발길이 닿는 대로 협력 회사로 들어갔다. 그녀가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안내 데스크 직원이 친절하게 말했다.“윤 대표님이시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희 대표님께서도 곧 내려오실 겁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한 무리가 이서를 보자마자 친절하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바로 이 회사의 대표입니다. 이름은 진재호입니다만, 편하게 진 대표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이서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윤 대표님, 올라가서 이야기하시죠.”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네.”위층으로 올라가 대표실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이서를 향해 목례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이서를 무슨 중요한 지도자처럼 여기는 듯했다. 게다가 회의실에 다다른 진재호는 이서가 제시한 계약서를 보지도 않고 바로 계약을 맺었다. 많은 말을 준비했던 이서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진 대표님,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진재호가 웃으며 말했다. “윤 대표님,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듣자 하니, 이전에는 저희 윤씨 그룹과 협력할 생각이 없다고 하셨다던데, 지금은 왜...” 진재호는 얼굴이 몹시 두꺼워 전혀 쑥스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그런 적 없습니다, 전혀요. 아마 제 부하직원이 제 뜻을 잘못 전달한 모양입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윤 대표님께서 떠나시면, 제가 아주 혼쭐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진재호가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윤 대표님, 강명철 대표를 도와 경영 방면
비록 1년여의 기억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서는 여전히 심동에 관한 기억을 되새길 수 있었다. ‘심동은 심씨 가문의 후계자로서 줄곧 호평을 받아오던 사람이야. 아주 능력 있는 남자가 어쩌다가 장희령과 엮이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곰곰이 생각하던 이서가 체면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가 연결되자, 심동은 주동적으로 입을 열어 이서와 인사를 했다. [윤 대표, 지금 시간 있어? 내 여자 친구가 인터넷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에 대해서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해서 그래.] 신사적으로 말하는 심동의 시선이 옆에 있던 장희령에게 향했다.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사과는 필요 없어요. 저는 여전히 법적인 절차를 밟을 생각이거든요.” 심동은 그 언론사들의 존망은 개의치 않았으나, 그로 인해 심씨 가문이 피해를 볼까 걱정하고 있었다. [이서야,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셈이잖아. 그래, 이번 일은 희령이가 확실히 지나쳤어. 하지만 희령이도 본인이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고소 취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너한테 분명히 사과하고 싶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으면, 나랑 희령이는 평생 너한테 미안한 마음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잖아.] 이서가 인상을 찌푸렸다.“심 사장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사과를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장희령 씨가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낀다면, 제가 아니라 나나 씨한테 사과하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네요.” 이 말을 마친 이서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은 스피커로 전환되어 있었기에 장희령은 모든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전화가 끊기자, 억울함을 느낀 장희령이 눈시울을 붉혔다.“봤지? 윤이서가 사과를 받지 않은 거지, 내가 사과하지 않은 게 아니란 말이야!”심동은 장희령의 얼굴을 보지 않았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울 때 더욱 예뻐 보이기 때문이었다.그는 자신이 이성을 잃을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 “그럼 윤이서가 말
장희령은 짧게 대답했지만, 조금도 자신이 없었다. ‘하은철이 윤이서의 곁에 있는 가면 쓴 남자를 알려주면 뭐 해? 그 남자는커녕 윤이서를 만나는 것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데...’ ‘하지만...’ ‘하은철이 시킨 일이니까 순조롭게 해결될 수 있을 거야.’ 그녀가 핸드폰을 세게 움켜쥐었다. ‘윤이서, 조금만 기다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게 만들어 줄게!’ ...바삐 돌아다니던 이서가 호텔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저녁 10시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지환의 모습이 보였다. 따스한 불빛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의 기다란 몸에 떨어졌다. ‘멋있다...’ 이서의 탐욕스러운 시선은 지환의 몸을 따라 위로 올라가다가, 아쉬운 듯이 그의 얼굴에서 멈췄다. ‘만약...’ 지환이 이서의 속마음을 들은 듯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왔어?” “네.”이서가 말했다.지환이 이서를 향해 손을 흔들자, 그녀가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가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배고프지?” 이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환의 가면 위로 눈길을 돌렸다. 지환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하며 일어나서 말했다.“목욕물 받아줄게.” 그 순간, 이서가 뒤에서 그를 잡아당겼다.“하 선생님...”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는데, 일부러 그런 목소리를 내는 듯했으며, 이 목소리를 들은 지환은 몸이 한바탕 건조하고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얼굴 좀 보여주시면 안 돼요?”‘너무 궁금해.’ ‘이런 황홀하고 멋진 몸매에 어울리는 얼굴은 어떨까?’ 하지만 지환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의 마지노선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난번에 CCTV를 복구할 때 이서를 자극한 바가 있었던 지환은 절대 이서에게 자신의 생김새를 보여주지 않을 것이었다. “이서야, 얼른 목욕하러 가!” 지환의 말투는 다소 무거웠다. 그가 다소 화가 난 것을 알아차린 이서가 어쩔 수 없이 입
이튿날 이른 아침.하은철은 장희령 쪽이 이미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며칠 간의 걱정이 사그라드는 듯했다. 주경모는 하은철이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기회를 틈타 말했다.“도련님, 송씨 가문이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답니다.” 하은철이 눈썹을 찌푸렸다.“송씨 가문이요?” “네, 송씨 가문 산하의 한 제약회사가 최근에 어린아이의 성장에 특별한 효과가 있는 약을 개발했답니다. 하지만 수년간의 연구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은 아직 시장에 출시되지 않았고, 자금 문제까지 발생해서 특허를 팔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하은철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런 희소식이 있단 말입니까? 함정일 리는 없겠죠?”주경모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조사를 해봤는데, 함정은 아닌 걸로 보였습니다.” “와,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려나 봅니다. 알겠습니다. 내려가서 곧 가겠다고 전해주세요.” “예.”주경모가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은철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이서가 작은 아빠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틀림없이 발작을 일으킬 거야. 그때가 되면, 작은 아빠는 이서를 멀리할 수밖에 없을 거고...’‘그러면 나한테도 기회가 오는 거야.’ 곰곰이 생각하던 하은철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호텔.이서는 문을 열자마자 동시에 문을 연 지환과 마주쳤다. “어디 나가?”“어디 나가세요?”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회사에 가려고.“회사에 가요.” 다시 한번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쳤다. 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지환을 쳐다보았다.“그러고 보니, 하 선생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지환은 매일 바빴으나, 이서는 그가 무슨 일은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서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던 지환은 이서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울려 퍼지고서야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도대체 뭘 보고 계시는 거예요? 혹시, 제 얼굴에 이상한 거라도 묻었어요?” 이서는 작은 거울을
지환의 강한 카리스마에 놀란 심동은 슬그머니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미소를 지었다.“윤 대표, 우리는 진심으로 윤 대표한테 사과하고 싶어.” 그 순간, 장희령의 시선이 이서의 곁에 있는 지환에게 떨어졌다. 그녀는 군침을 흘리고 있는 듯했다. 연예계 사람들은 당연히 일반인보다 잘생긴 남자를 많이 보는 법이었다. 그래서 장희령도 이미 외모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지환을 마주한 그녀의 마음속에는 질투의 불씨가 더욱 활활 타올랐다. ‘얼굴은 볼 필요도 없겠어. 저 드넓은 어깨와 좁은 엉덩이 좀 보라고!’장희령은 정말이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전에도 윤이서의 옆에 저런 남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 남자는 안경을 쓰지 않았었지, 아마?’‘그새 남자를 갈아치운 거야?’ ‘윤이서는 도대체 어디서 저렇게 훌륭한 남자들을 꼬드기는 거지?’ 이제 하은철의 명령은 필요가 없었다. 장희령은 지환의 얼굴에 씌워진 가면을 직접 벗기고 싶었으니 말이다. 장희령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지환에게 향하자, 이서는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서는 곧장 지환을 끌고 가려고 했다.“심 사장님, 제 생각은 여전합니다. 저는 절대 두 분의 사과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니까 다시는 저를 찾아와서 사과하지 마세요!” 이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바로 그때, 갑자기 자신의 임무를 떠올린 장희령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고, 성큼성큼 걸어가 이서의 앞을 막았다. “윤 대표님,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이 말을 뱉는 장희령의 시선은 지환을 향하고 있었다. 이서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하 선생님, 어서 가요!” 두 사람의 몸이 교차되는 그 순간, 장희령은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즉각 손을 뻗어 지환의 가면을 잡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서와 심동은 온몸이 얼어붙었는데, 그들의 시선은 모두 지환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희령이 손이 지환의 가면에 닿는 순간, ‘찰싹’하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