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깬 성연은 옆 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이미 싸늘하게 식은 것을 보니 무진은 벌써 일어나 나간 모양이다.아래층으로 내려오니 거실도 텅 비어 있었다.보아하니 오늘 아침은 챙겨 먹이지 못할 것 같다.무진이 얼마나 바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뭐라 할 수도 없다. 이해할 수 밖에.하지만 이대로 가면 몸이 견디지 못하고 조만간 망가지고 말 것이다.원래부터 건강이 안 좋은 무진이 어떻게 그런 힘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거지?그러나 무진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겠지?어쨌든 할머니 안금여가 맡아 할 수는 없을 테니까.강상철, 강상규 쪽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무진도 절대 마음을 놓을 수 없을 테지.정말이지 무진이 너무 힘들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무진이 손에서 일을 놓을 수가 없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먹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강무진은 많이 먹어야 몸도 강해질 테니.’무진은 또 밖의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하지만 자신이 매일 그를 위해 음식을 해 줄 수는 없다.아직은 학생이어서 많은 시간을 낼 수 없기에.하지만 집에서 만든 음식이 아무래도 밖의 음식보다는 위생적이고 건강에도 좋을 것이다.이리저리 방법을 생각하던 성연은 아침을 다 먹은 후에 집사를 불렀다.종종걸음으로 곁으로 다가온 집사가 물었다.“작은 사모님, 무슨 지시할 게 있으세요?”“앞으로 주방에 무진 씨 먹을 것들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집사님이 직접 가져다 드리세요. 그리고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시고요.” 무진의 몸 상태는 정말 안심할 수 없었다.“아…….” 집사가 잠시 머뭇거렸다.도련님이 성연의 말이라면 듣겠지만,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할 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도련님이 식사할 때까지 지켜보려다가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건 아닌지?집사가 이 일을 내켜 하지 않는 듯하자 성연이 약간 화를 냈다.“무진 씨 건강을 설마 모르는 거예요? 계속 이렇게 나가면 몇 년 못 산다고요.”성연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그제야 집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
북성남고의 기말시험 기간이 다가오며 모의고사 등 시험이 점차 많아졌다.시험만큼은 성연도 내키는 대로 할 수 없었다.명문고에 해당하는 북성남고는 수업 수준만큼이나 시험 문제의 난이도도 높기로 유명하다.그래서 성연도 시험을 볼 때 최선을 다해야 했다.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집에 있을 때도 성연은 시험 준비를 해야했다.그렇지 않았다가는 성적이 떨어질 게 자명했다.절대적인 천재는 없는 법이니, 성연 또한 남들 모르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전교 1등이라는 석차를 늘 유지하지는 못했을 터.또 점점 올라가는 점수를 보면서 당연히 성취감도 느끼게 된다.이번 시험이 끝나고 학생들이 각자의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연정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성연의 점수를 흘깃 쳐다보던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함을 느꼈다.국어를 제외하고 성연은 거의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이게 사람이야?’연정이 속으로 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응.” 성연이 느릿한 음성으로 대답한 뒤, 책상 위에 엎드렸다.자신의 성적에 대해 성연은 조금의 감흥도 없는 듯하다.연정 역시 책상에 엎드린 채 성연과 눈을 마주했다.연정의 어투가 상당히 시니컬하다.“성연아, 네 이 머리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거니? 네 지능을 나에게 반만 나누어 주면 안 될까?” “다음에 더 열심히 하면 되잖아.” 성연이 연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시험이 꽤 힘들었는지 성연은 좀 피곤함을 느꼈다.예전에는 아무렇게나 시험을 쳐도 만점을 받을 수 있었지만이제는 좀 더 신중하게 임해야 했다.지난번 시험에서는 자만하다 실수로 선생님이 함정을 파놓은 문제를 놓쳤다.그래서 그 과목은 사상 최저점을 받았다.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만 성연 스스로 이런 성적을 참을 수가 없었다.수업 후, 며칠 동안 다시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함정이 숨겨진 문제들을 연습했다.성연은 스스로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은 편이다.연정은 머리가 다 벗겨진 느낌이다.“열심히 했단 말이야.”자신은 이미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하지만
학교가 막 끝났을 때 성연은 전화를 받았다.특수하게 처리된 알림음을 들은 성연은 잠시 멍했다.곧 정신을 차린 성연은 은밀한 곳을 찾아 전화를 받았다.그녀의 음성은 공손하면서도 흥분한 상태였다.“사부님, 어떻게 전화하실 시간이 다 있으셨어요?”평소 고학중이 성연에게 전화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아주 중요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말이다.성연은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사부님이 자신에게 전화를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수화기 저편에서 고학중이 바로 용건을 말했다.“이제 1년 남았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출국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둬. 네 진로는 스승인 내가 모두 안배해 두었다. 네가 이전에 시험을 보려고 했던 HF에 입학할 준비 해. 초심을 잊지 말거라.”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연 고학중이 훈계 조의 어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이 너에게 건네는 온정으로 기세를 잃으면 안된다. 너의 최종 목표는 결혼이 아니야. 너는 집에서 남편 내조하고 아이 양육하는 그런 생활에 맞지 않아.”사부님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성연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성연은 그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무진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왠지 모르게 성연의 마음이 괴로워졌다.마치 가슴에 큰 구멍이 나서 휘휘 바람이 불어대는 것 같아 성연을 당황스럽게 했다.그러나 성연은 아무런 내색 없이 차분한 음성으로 바로 대답했다.“네, 사부님. 말씀하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항상 건강 조심하세요.” “성연아, 누구보다 내가 너를 가장 잘 안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잃으면 안되느니라.”고학중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고학중은 성연의 마음이 다소 흔들리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아챘다.그러나 아마도 자신을 따뜻하게 대하는 강씨 집안 사람들에게 미련을 가지는 거겠지.어릴 때부터 혈육의 정을 제대로 못 느끼고 자란 데다 마음도 여린 성연이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하지만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간에 강
성연은 넋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언제나 생기발랄하던 성연이었다.그런데 창백한 얼굴로 현관문을 들어서는 성연을 보고 집사가걱정스럽게 물었다. “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멍한 표정으로 집사를 바라보던 성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바로 위층 침실로 올라가 침대에 쓰러져 잤다.저녁 식사를 차린 후 집사가 침실 문을 두드렸으나 성연은 안에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침대에 누워 있던 성연은 아무 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잠시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집사가 자신의 일을 무진에 알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무진은 지금 이미 충분히 바쁠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이게 하는 건 곤란했다.“잠시만요. 나가요.” 머리를 정리한 성연이 문을 열고 나갔다.집사가 보기에 성연은 여전히 좀 이상했다.집사가 관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작은 사모님, 몸이 불편하시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주치의 선생님을 부를까요? 아니면 도련님께 오시도록 연락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성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냥 최근에 시험이 좀 많아서 피곤했을 뿐이에요. 무진 씨 일도 많은데 알릴 필요 없어요.”집사는 다시 성연을 살펴보았다. 평소와 다름 없는 성연의 표정에 집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성연은 집사를 따라 내려가 저녁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성연은 올라가서 공부해야 하니 다른 사람들이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고 집사에게 일렀다.성연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평상시와 똑같이 보이려 했다.성연이 애써 연기를 한 덕에 자연히 집사는 알아챌 수 없었다.이제 성연이 별 문제가 없는 듯하자 집사는 그저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찌되었든 성연은 아직 청소년기의 아이였다.공부하느라 힘든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렇게 생각한 집사는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않았다.물론 성연도 자신에게 말하지 말라는 뜻을 내비쳤지만.그날 밤, 성연의 머리는 혼란의 극치였다.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일찌감치 잠을 잤다.무진이 언제 돌
처음에는 시험이 힘들어서 성연이 저러는 줄 알았다.온종일 업무 처리하느라 바쁜 무진이다.그러나 성연의 상태가 뭔가 이상함을 예리하게 느끼고 있었다.며칠째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로 얼굴에는 웃음기조차 안 보였다.그래서 주말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성연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주말, 식사를 마친 성연은 아직 집에 있는 무진을 보고 좀 놀랐다.그동안 너무 바쁜 나머지 회사를 벗어나지 못하던 무진이었다.성연이 의심스럽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회사에 안 나가요?”무진이 대답했다.“너랑 같이 있으려고. 오늘 어디 놀러 가고 싶은 데 없어?”무진은 자신이 함께 보내는 것이 너무 적어서 성연의 기분이 안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그동안 확실히 자신이 좀 바쁘긴 했다.그러다 보니 두 사람이 함께 보낼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도 사실.‘일도 중요하지만, 성연이만큼 중요한 건 없어.’시간을 내서 성연이와 함께 보내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무진이다.요 며칠 간의 자신의 근심과 무진의 행동을 생각해 보던 성연은 바로 알아챘다.이 상항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성연은 무진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사실 그녀도 무진과 함께 있고 싶었다.잠시만이라도.만약 자신이 떠나게 되면 무진과는 평생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지금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무진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말했다.“교외에 있는 과수원을 알아요. 지금 가을이라 마침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을 텐데 무척 아름다울 거예요.”“알았어, 준비해. 바로 나가자.” 무진은 더 묻지도 않고 바로 승낙했다.오늘 그의 임무는 성연과 함께 하는 것, 그 뿐이다.성연이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기사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성연이 말한 과수원으로 갔다.과연 성연의 말이 맞았다. 온통 노란 빛으로 끝없이 이어진 과수원은 정말 아름다웠다.그리고 잘 익은 과일들이 아주 먹음직스럽고도 보기 좋았다.공기 중에 상큼한 과일 향기가 떠돌았다.과일 향을 맡으니
다음 날, 무진이 회사로 가자 강상철과 강상규가 그의 사무실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무진을 본 강상철은 무진이 자신 앞에 오자마자 생트집을 잡았다.“강무진, 어쨌든 나나 네 셋째 할아버지는 너보다 어른들인데, 네 사무실에 있는 직원이 우리를 못 들어오게 막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사무실 안에 중요한 서류들이 있는데 잃어버리면 또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작은 할아버님도 의심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으실 테죠? 제 밑의 사람들은 회사 기밀을 지키며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무진이 담담한 음성으로 조리 정연하게 설명했다.‘둘째, 셋째 할아버지가 이리 다급하게 자신을 찾아와 귀찮게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이런 핑계까지 대도록 견문을 넓혀 주시는군.’강상철과 강상규의 표정이 다소 경직되었지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콧방귀만 뀌었다.무진 문을 밀고 들어가자 강상철과 강상규도 따라 들어갔다.그들이 소파에 앉자 무진의 비서가 즉시 차를 가져왔다.‘회사니까, 어쨌든 시늉은 해야겠지.’무진이 아랫사람이니 결국 강상철과 강상규의 체면을 세워줄 수밖에 없다.‘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분명 또 아래 사람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따지고 들겠지.’강상철, 강상규는 오늘 골칫거리를 만들려고 온 거였다.이 일로 한 차례 들쑤셔서 무진이 더 이상 날뛰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차를 한 모금 마시며 살짝 입을 축이던 강상철이 별안간 입안에 있던 찻물을 뱉으며 소리쳤다.“이건 도대체 무슨 찻잎이야? 너는 이런 저질 찻잎으로 우리를 우롱하는 거냐?”강상철이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무진이다.업무 상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까 이런 작은 건수를 잡아 흠집 내려는 수법이 아닌가.“일반적인 찻잎입니다. 저는 마셔도 괜찮은데요?”무진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강상철은 꼭 솜방석에 대고 주먹질하는 것처럼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무진은 마치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아니면 꺼지라’는 식의 태도로 대답했다.세 사람이 마주 앉으니 상당
강상철, 강상규의 인내심은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점심 시간에 나가서 식사하고 온 것을 빼고는 무진의 사무실에 억지로 머물면서 오후까지 기다렸다.이번에 무진이 회수한 지사들은 모두 다섯 곳이었다.강상철과 강상규가 직접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무진은 평가자료를 두 사람에게도 건네주어 함께 보았다.평가를 결과를 토대로 무진은 당장 지사 두 곳을 문 닫겠다고 선포했다.새 프로젝트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가동시키기로 했다.이 지사는 더 이상 운영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어떻게 해도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킬 수가 없었다. 장기적으로 적자만 날 뿐.툭 까놓고 말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었다.그룹 본사의 돈을 여기에 쏟아붓기보다는 이렇게 적자만 나는 항목들을 아예 제거해 버리는 게 나을 터.강상철과 강상규가 무작정 여기서 기다린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함이었다.강상규가 바로 비꼬았다.“설마 네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고? 멀쩡한 회사를 네 손으로 바로 닫아버려?”무진은 속으로 저런 말을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싶었다.수치가 모두 저들 앞에 놓여 있는데 말이다.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설마 진짜 몰라서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어쩜 저리 뻔뻔스러운지.무진이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만약 두 분이 능력이 되시면 이 지사들 가지고 가세요.”어차피 무진은 의견이 없었다.이제는 지사 뒤에서 벌이던 그 추잡한 짓거리들을 모두 들켰으니.강상철과 강상규가 다시 회수해 간다 해도 더 이상 잔꾀를 부리지는 못 할 테지.회사가 위아래로 그렇게 많은 눈들이 주시하고 있는데, 경거망동하지는 않을 것이다.늙은 여우는 종일 남을 속일 궁리만 하는 법.무진을 말을 들은 강상철과 강상규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사실 최고 관리자로서 이 지사들이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건 자신들이 제일 잘 알았다.그러나 무진은 지사 두 곳을 포기하고 세 곳을 남겨 두었다. 설마 적자를 흑자로 돌릴 자신이 있단 말인가?
무진이 남긴 지사 세 곳은 모두 하이테크 제품을 생산하는 곳이었다.그러나 기술자 유출로 인해 오랫동안 아무것도 개발할 수 없었고, 그러다 결국 회사 경영이 어렵게 된 것이다.무진이 보기에 문을 닫기로 한 두 곳보다는 나은 편이라 해도 흑자로 전환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저녁 식사를 하면서 무진은 강운경, 안금여, 그리고 강상문과 함께 이 일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강상철, 강상규 그 둘의 속셈을 내가 모를 수 있겠어? 요즘 회사에서 무진의 입지가 점점 넓어지니 이 일을 꼬투리 삼으려는 거지.” 안금여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흥, 저 두 늙은 여우가 무슨 좋은 심보를 가지고 있겠어?’“확실히 그렇습니다. 오늘 두 사람은 남긴 지사 세 곳을 제가 어떻게 처리할 계획인지 떠보더군요.”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강상철과 강상규의 속셈은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나 있었다.‘자신이 아직도 그걸 모르겠는가?’하지만 세 곳을 그대로 남겼지만 절대 그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내 생각대로라면 저렇게 적자를 낸 회사들 모두 그냥 다 닫아도 돼. 주주들도 사정을 다 알고 있으니 네 탓을 하진 않을 거야.”운경이 옆에서 말했다.만약 모두 문을 닫아버리면 강상철과 강상규가 뛰어들어 문제를 일으킬 소지도 없을 것이다.“굳이 문 닫을 필요는 없어요. 제가 쭉 지켜봤습니다. 그 세 곳의 직원들은 열심히 일하는 편입니다. 다만 상부의 운영자가 능력이 없어서 그래요. 능력 있는 사람을 보내면 직원들을 잘 이끌어서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무진 생각에 그들은 모두 오랫동안 근무한 직원들이었다. 그리고 요 몇 년 동안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교활한 짓을 하는 자들이라면 무진은 절대 남기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모두 성실한 직원들이었다.자신의 일에만 몰두했지 위에서 하는 짓들을 몰랐을 뿐. 또 강상철과 강상규의 사람들이 줄곧 직원들의 임금을 탈취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조사로 밝혀졌다.일자리가 필요한 직원들은 감히 화를 내지도 입을 열지도 못했던
안금여가 한숨을 내쉬었다.“너와 성연이 모두 착한 아이들이야. 만약 정말 무슨 부득이한 상황이 닥치면, 이 할머니는 너희들이 좋게 헤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니 그러지 마, 무진아.”“할머니, 말씀하신 그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무진은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안금여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강운경이 옆에서 말렸다.“엄마, 우리도 잘 알고 있잖아요. 엄마가 성연이를 얼마나 마음에 들어하시는지요. 하지만 무진이와 성연이 서로 감정이 깊어요. 둘 다 사리가 분명한 애들이에요. 무진이 우리를 찾아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건 기쁜 일이잖아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안금여의 말은 두 사람을 위한 것이 맞다. 불길한 말은 두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잠시 멍하니 있던 안금여가 입을 열었다.“성연이에 대해서는 네 말이 맞다. 우리 집 무진이가 마침내 일생을 함께 할 사람을 찾다니, 이 할머니가 당연히 기뻐해야지. 모두 이 할머니 잘못이다, 요 방정맞은 입 같으니라구.”무진이 얼른 말했다.“할머니, 할머니 탓하지 마세요. 모두 저와 성연일 위해서 하신 말씀이시잖아요?”“그렇네, 얼른 무진과 성연이 결혼식을 예약해야지. 성연이가 외국에서 나쁜 마음을 품은 놈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말이다!” 강운경은 성연의 성격을 안다.겉으로 보기에는 성격이 강하고 털털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마음이 여린 아이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조그만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간다면...‘정말 무진이 죽으려고 하겠네.’“그래, 근데 성연이 나이가 한참 어린데, 그렇게 하겠다고 해?” 강운경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두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계획을 다 세웠다.그러나 성연이 그러겠다고 할지는 아직 미지수.“성연이는 분명히 그러겠다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성연이 곧 개학할 텐데, 성연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그러면 성연이 공부하러 가는 것을 막는 양상이 된다.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사실, 불안한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성연이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시 돌아왔다.무진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그러나 마음이 심란해지며 성연이 떠나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그래서 무진은 성연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고택에 들렀다.무진이 고택으로 들어왔을 때, 안금여와 강운경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무진을 보던 안금여는 무진의 뒤를 쳐다보았다.“아니 왜 성연이는 너와 함께 오지 않았어?”무진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저었다.“같이 안 왔어요. 제가 오늘 여기에 온 것은 두 분에게 드릴 말이 있어서예요.”무진의 태도가 너무 공적이고 진지한 터라, 안금여와 강운경도 덩달아 긴장하며 다급히 물었다.“무슨 일이냐?”두 사람은 무의식 중에 회사의 일을 떠올렸다.“성연이가 곧 학교로 돌아갈 겁니다. 그런데 저는 성연이가 더 뛰어나게 성장하는 걸 가로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연이 떠나면, 더 이상 제가 마음을 놓고 지낼 수가 없습니다.”무진의 음성이 유난히 침중했다.성연은 아직 너무 젊었다. 외부에는 성연이를 끌어당기는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무진이라 해도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무진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조바심과 불안은 오직 눈앞의 가족 두 사람 앞에서만 드러낼 수 있었다.무진이 에둘러 말했지만, 안금여와 강운경은 바로 알아들었다.무진의 말을 듣던 안금여와 강운경이 서로 마주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무슨 큰 일인가 했더니, 그걸 걱정하고 있었어?” 안금여와 강운경이 박장대소를 했다.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무진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날이 있다니.제 마음이 이리도 빨리 들통나 버리자 무진은 좀 민망함을 느꼈다.무진이 입술만 오물거리며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강운경이 그런 무진을 놀렸다.“예전에 내가 무진이 너에게 괜찮은 아가씨들을 참 많이도 소개해 줬는데, 그때는 너 꿈쩍 하지도 않더니. 그때 나 정말 걱정했었어. 네가 고독한 모습으로 혼자 늙어가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야.
손민철의 안배로 조수경의 미모를 이용해서 돈 많은 사장들을 꼬셔냈다.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아주 빠르게 올라갔다.지난 번의 거의 두 배에 가깝게.이런 놀라운 업무 실적 상승에 사람들은 조수경의 능력을 다시 보게 되었다.이전에 조수경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들도 이번 성과를 본 후에는 완전히 승복했다.사람들은 그 내막을 모르는 상태로 그저 조수경이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라고만 생각했다.앞으로 조수경은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옆에서 조수경을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다.대표실 안.비서 손건호가 서류 파일 하나를 손에 들고 있다. 바로 조수경의 업무 보고서가 들어 있는 파일이다.“보스, 좀 보시죠.”두텁게 쌓인 서류는 상당히 무게가 있어 보인다.무진이 눈을 들어 손건호를 한 번 쳐다본 후, 고개를 숙여 눈앞의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몇 분 동안 집중해서 문서를 모두 살폈다.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무진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보고서를 다 확인한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어떻게 이렇게 많지?”손건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는 조수경 쪽을 직접 주시하지 않고 따로 사람을 보내 지켜보게 했었다.그러나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조수경의 이 업무 실적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았다.손건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했다.“지금 조수경 씨의 이 업무 실적이라면 이론상 팀장의 위치까지 승진해야 합니다.”무진은 어렴풋이 조수경이 이렇게 하는 목적을 알아챘다.지금 강씨 집안 사람들 모두가 조수경을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방법을 썼을 테고...“묵살해!”손건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건 담당 부서의 책임자가 제출한 겁니다. 묵살할 방법이 없습니다.”만약 묵살해 버린다면, 회사 내의 많은 직원들이 실망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어쨌든 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여기에 이렇게 버젓이 있는 이상, 누구
조수경의 표정이 좀 어정쩡했다.사실 마음속은 성연에 대한 원망으로 꽉 차 있었다.고택에 찾아갔더니, 안금여와 강운경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강무진도 자신에게 어찌나 냉담한지.조수경은 성연이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라고 생각했다.물론 강씨 집안에서 충분히 많은 것들을 해 주었겠지만, 외부인이 송성연에게 이런 명품들을 선물한 적은 없을 것이다.송성연 쪽에서부터 손을 쓰기로 생각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성연은 자신들보다 더 상대하기 힘든 강골이었다.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수경의 얼굴에는 거꾸로 억울하고 불쌍한 표정이 가득 차 있었다.“성연 씨, 당신 생각을 이해해요. 앞으로 꼭 무진 오빠와 거리를 둘 게요. 다만...”조수경은 성연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말했다.“나는 할머님과 고모님을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고모님과 할머님은 지금 나를 전혀 만나시려고 하질 않으세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어 성연 씨를 찾아온 거예요. 성연 씨가 나를 용서해 준다면, 두 분도 나를 다시 만나 주실 거라고 믿어요.”조수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찾아왔는가 싶었더니, 알고 보니 조수경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택에 찾아가면, 무슨 일을 하든 훨씬 편리할 테니까.“할머니랑 고모가 어떻다고요? 그 분들 뜻이에요. 나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나도 두 분 어른의 뜻은 못 꺽어요. 나를 핑계로 해서 그 분들을 설득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건 말도 안 돼는 일이에요. 생각도 하지 말아요.” 성연이 딱 잘라 말했다.자신의 마음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을 본 조수경은 얼굴의 미소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래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는 그냥 우리 두 사람의 오해를 풀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때는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어요. 송성연 씨, 정말 미안해요. 나는 정말 일이 이렇게 되는 걸 원한 게 아니에요.”“조수경 씨가 무진 씨와 거리를 두기만 한다면,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생길 리가 없겠죠.”성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조수경을 쳐다보았다.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낸 후 성연의 시간은 다시 한가해졌다.지금 성연은 정원에서 꽃나무에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꽃모종이라고 하지만, 사실 다소 귀한 약재들이다.엠파이어 하우스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거의 비료를 준 적이 없는 셈인데도 토양이 아주 비옥했다.성연이 몇 그루를 심어 보았는데 모두 살아남았다.손을 씻고 거실로 들어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낯선 번호에 성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누구지, 이 사람은?’‘기억에 없는 번호인 것 같은데?’원래 받기 싫은 마음에 잠시 망설이던 성연이 결국 전화를 받았다.“네.”“송성연 양, 저 조수경이에요.”휴대폰 건너편에서 조수경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성연의 두 눈썹 앞머리가 올라갔다.“조수경 씨가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조수경이 자신 때문에 고택에서 쫓겨난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성연은 조수경을 보지 못했다.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자신에게 전화를 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그런데 내 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조수경은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송성연 씨, 얘기 좀 하고 싶어요.”성연은 나갈 생각이 없었다. 조수경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고.조수경을 본다면 그날 밤의 그 장면이 떠오르며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그런데 왜 조수경은 자신의 화를 돋우려 하는 거지?’“죄송합니다만, 요즘 바빠서 시간이 없네요.” 성연의 음성은 의외로 담담했다. 음성이 오르내림이 전혀 없이.오늘 반드시 성연을 만날 결심을 한 조수경이 애원을 하듯이 사정했다.“송성연 씨, 제발, 한 번만 저를 만나 주세요. 요 며칠 저는 무척 괴로웠어요.”성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수경이 더 간절히 매달리며 이어 말했다.“그냥 송성연 씨와 몇 마디 하고 싶을 뿐이에요.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성연 씨, 제발 부탁해요.”성연이 조수경을 겁내서가 아니었다.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억울하다는 듯이 사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도대체 조수경이 자신에게 무슨 이
5일의 일정 동안 세 사람은 북성의 명소 네다섯 곳을 돌아다녔다.원래 좀 더 있을 생각이었지만, 샤넬 가문에 뭔가 일이 생겼는지 곧 돌아가야 했다.성연은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더 재미난 곳도 많은데.풀이 죽어 있는 성연의 모습에 미스 샤넬이 웃으며 성연의 뺨을 꼬집었다.“그러지 마. 나중에 우리 다시 올 기회가 있을 거야.”갑자기 일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에 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성연은 매일 같이 업무로 바쁜 무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떠나는 미스 샤넬과 목현수를 대접하기 위해 음식점 한 곳을 예약했다.성연이 이번에 예약한 곳은 평이 좋은 가정식 요리 전문점이었다.오랜 시간 외국에서 생활한 목현수가 이런 정통 가정식을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을 거라 생각한 성연이 특별히 그에게 맛 보여 주기 위해 선택한 곳이었다.테이블에 오른 음식들은 소담하면서도 먹음직스러웠다. 미스 샤넬은 눈앞의 음식들을 보며 폰을 들어 한참 촬영을 한 후에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정말 맛있어. 와, 매번 색다른 맛을 경험하게 해 주네요.” 이곳의 음식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미스 샤넬이 연신 감탄했다.입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맞아요. 우리 북성에는 맛있는 음식과 재미난 것들이 정말 많아요.” 성연이 미스 샤넬씨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맞아요. 이곳은 산수가 수려해서 경치도 너무 아름다워요. 앞으로 현수 씨가 원한다면, 현수 씨를 따라 이곳에 와서 정착해도 좋겠어요.” 첫날을 제외하고 그 이후의 시간을 미스 샤넬은 무척 즐겁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좋아요. 그러면 그 때 우리 적당한 곳을 고를 수 있어요. 나랑 무진 씨도 두 사람과 같은 곳에 살고.” 그 생각을 하던 성연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것도 좋죠.” 샤넬 양이 맞장구를 쳤다.그러나 그 가능성은 몹시 희박했다.샤넬 가문은 유럽에서 세력이 무척 큰 가문 중의 하나.지금 연세가 많은 미스 샤넬의 아버지는
남은 일정 내내 성연은 미스 샤넬, 목현수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북성 주위의 관광 명소들은 전부 한 바퀴 돈 셈이다.무진의 당부를 새기며 최대한 깊은 물이 있는 곳은 피하면서.또 성현은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을 위해 온갖 명소들을 방문해서 즐길 계획을 짰다.성연은 하룻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그래도 무진의 말을 잘 따른 셈이다. 위험한 곳들은 가지 않았으니까.오늘 그들이 함께 온 곳은 커플들을 위한 테마파크였다. 주위에는 온통 팔짱을 낀 젊은 커플들이었다. 공기 중에는 핑크빛 기운이 가득했다.반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의 사이에 혼자 낀 성연은 눈치 없는 들러리 같았다.성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거니까 말이다.그러나 지금 서로 손을 깍지 낀 채 닭 털을 날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성연 자신이 피해 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성연은 속으로 후회했다. ‘괜히 사서 고생한 거 아냐?’‘진즉 알았으면 무진 씨를 데리고 올 걸 그랬지.’“샤넬, 저기 아이스크림 파는데, 먹을래요?”성연은 핑크색으로 장식을 한 건너편의 가판대를 가리켰다.성연과 미스 샤넬은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성연은 미스 샤넬이나, 샤넬 양이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해서 그냥 바로 이름을 불렀다.“나도 먹어요.” 미스 샤넬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목현수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낮 시간.하지만 건녀편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목현수는 양산을 두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두 사람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내가 사올 게. 무턱대고 저쪽으로 갔다가 더위 먹으면 어떡하려고?”고개를 살짝 끄덕인 성연은 목현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샤넬,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야?” 목현수가 먼저 미스 샤넬에게 물었다.“다 괜찮아요, 당신이 사 주는 거랴면요.”
식당 안.미스 샤넬은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앞접시에 가득 담았다.그러나 목현수는 음료수 한 잔만 손에 쥔 채 미스 샤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의아하게 쳐다보던 미스 샤넬이 물었다.“안 먹어요? 왜 날 쳐다보고 있어요?”오늘 목현수가 좀 이상했다.“많이 먹어. 부족하면 더 시켜줄 게.” 정상적인 대화이긴 하지만, 목현수의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진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조금 전에는 먼저 수저를 놓아주기도 했다.이전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 목현수였다.미스 샤넬의 오늘 모습은 목현수로서는 정말이지 좀 새롭게 보였다.주스를 한 모금 마신 목현수가 입을 열었다.“미스 샤넬, 오늘 왜 굳이 성연을 구하러 강에 뛰어들었어? 설마 네도 위험하게 될 줄 몰랐어?”목현수의 눈에 미스 샤넬은 늘 연약하기만 한 존재였다.그런데 위급한 상황에 제일 먼저 강에 뛰어들어 성연을 구한 사람은 미스 샤넬이었다. 목현수의 물음에 잠시 멍해 있던 미스 샤넬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송성연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어요. 만약 그때 그러지 않고 송성연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평생 자책하며 살 테죠. 그래서 나는 반드시 송성연을 구해야 했어요.”그러니까 미스 샤넬은 목현수 때문에 송성연을 구했다는 의미.만약 송성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강물에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을 터였다.미스 샤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어 말했다.“공교롭게도 내가 한 수영하잖아요? 그러니까 내려갔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감히 그런 용기 못 냈지.”미스 샤넬의 유머러스한 표현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순간 목현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목현수를 위해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은 미스 샤넬.목현수 자신이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목현수가 진지한 음성으로 미스 샤넬에게 약속했다.“이전에는 정말이지 결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미스 샤넬 당신과 기꺼이 결혼할 거야.”미스 샤넬의 눈에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