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경을 배웅한 성연은 혼자 저녁을 먹었다.식사를 하던 성연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강무진, 앞으로 매일 저녁 집에 와서 같이 밥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그런데 겨우 이틀도 못 버텨?’성연이 막 집사에게 물으려고 할 때, 마치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성연이 입을 열기 전에 집사가 먼저 정중하게 말했다.“작은 사모님, 도련님은 오늘 저녁에 회사에 긴급한 일이 있어 함께 식사하러 오지 못하신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집사의 말에 성연이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사실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제 막 회사 대표를 승계한 무진인지라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걸.돌아오지 못하는 일도 다반사라는 것도.그의 입장이 이해되면서 마음속에 일던 울적한 감정이 사라졌다.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강무진이 보이지 않는 순간 왜 저도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았는지.그런데 이제 또 괜찮아졌다.저녁을 다 먹은 후, 성연은 혼자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혼자서도 신나게 게임을 했다.하지만 가끔씩 저도 모르게 돌아갔다. 무진이 서류를 보며 늘 앉았던 곳이 텅 비어 있는 걸 보는 순간 계속 왠지 허전함을 느꼈다.성연은 너무 자주 강무진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세차게 머리를 흔든 성연이 강무진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내몰았다.‘참내, 그 사람을 생각해서 뭘 어쩔려고?’‘요즘 나도 비정상적으로 변한 건가?’잡념을 몰아낸 성연은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성연이 곧 레벨 통과하려던 순간, 휴대폰이 미친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휴대폰 화면을 켜 보던 성연의 안색이 변했다.TV를 끄고 바로 방으로 올라가 문을 잠근 성연이 자신의 노트북을 꺼냈다.방금 휴대폰에 메시지가 떴다. 지금 누군가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작동시키려 한다고.그녀의 휴대폰은 ‘스카이 아이 시스템’과 연동되어 있었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에서 조그마한 움직임이라도 감지되면 즉시 알 수 있도록.‘스카이 아이 시스템’이 강
마침내 성연이 약간 앞서며 무진은 시스템 진입에 실패했다.어찌 되었든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만든 이는 성연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외부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지도 더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두 손으로 키보드 위를 내리누르는 무진의 얼굴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을 눈앞에 두고 놓쳤다는 게 화가 났다.무진의 표정이 북풍한설처럼 차가웠다. 눈에서 뿜어 나오는 냉기는 쳐다보기만 해도 석빙고에 갇힌 듯했다.한옆에 선 손건호는 보스의 노여움이 자신에게 떨어질까 전전긍긍이었다.생각해보니 아무 말 하지 않는 것도 좋지 않은 것 같아 위로의 말을 건넸다.“보스, 패스워드가 정말 복잡하군요. 우리 쪽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연구한 다음에 겨우 대략적인 실마리만 건졌으니 말입니다.”줄곧 먹이사슬의 최상층에서 실패를 맛본 적이 없었던 무진이다.지금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정상이지, 하며 속으로 생각하는 손건호.한기가 가득한 표정임에도 무진의 어조는 꽤나 담담했다.“예전에 찾았던 단서는 이미 쓸모가 없게 됐어. 방금 상대하며 보니, 저쪽에서 이미 기회를 틈타 코드를 변조했더군. 암호방어를 위해 이미 여러 장치를 해 뒀고. 방금 다시 들어가려 했는데 이미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어.”무진은 입을 다문 채 컴퓨터를 노려봤다.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했는지 모른다.심지어 거금을 들여 세계 최고의 해커 팀을 스카우트까지 해서 간신히 실마리를 얻었다 싶은 순간, 코드가 단번에 변조되며 이전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버렸다.조금 전 시스템 해킹을 시도하려는 순간, 그렇게나 빨리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상대방의 대응 속도는 가공할 정도로 빨라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그러나 무진은 여기서 손 놓지 않을 것이다.“보스, 보스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까?” 손건호가 떠보듯이 물었다.무진이 직접 나서는 건 드물지만, 일단 한 번 나섰다면 절대 실패하지 않았다.지금 강무진이 실
무진의 말을 듣던 순간, 손건호는 머리가 지끈거려 우선 입을 다물었다. ‘스카이 아이 시스템’은 원래 자신들이 수단을 부려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원 주인이 패스워드를 자신들에게 알려주려 하겠는가?“스카이 아이 시스템은, 어쨌든 충분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야. 절대 소소한 게 아니야.”그리고 또 하나의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던 손건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누가 개발했는지도 모르는데 어디 가서 찾으려고요?”업계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사실은 여전히 비밀에 싸여 있었다.‘그렇다고 무작정 찾을 순 없잖아?’대강의 생각이나 아무런 단서도 없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아닌가 말이다.무진은 머릿속에서 이미 절묘한 방법을 하나 생각해냈다.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리던 그는 찌푸렸던 미간을 펴며 말했다.“왜 찾아야 하지? 스스로 찾아오게 하면 되지.”“아…….” 망연자실한 듯한 표정의 손건호가 머리를 긁적였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설계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어리석지 않을 거야?’‘그런데 어떻게 먼저 찾아오게 한다는 거지?’그러나 자신만만한 보스의 모습을 보면서 분명 무슨 계획이 있으리라 생각했다.손건호를 힐끗 쳐다본 무진이 말했다.“말을 퍼트려. 이 업계 사람들에게 모두 알리는 게 제일 좋겠군. 내일 저녁 8시, 블랙스톤 클럽에서 ‘스카이 아이 시스템’ 전매 거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물건을 잃어버리고 가장 조급할 사람은 당연 물건의 주인일 터.소식을 듣고 온 첫 번째는 틀림없이 ‘스카이 아이 시스템’의 개발자일 것이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누군가가 그에게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무슨 방법을 쓰던 개발자의 입을 열게 할 것이다.어쨌든 그 입을 열게 만들 하나는 있을 터.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지시를 이행하러 나갔다.무진의 공격을 깨부수어 기분이 좋은 성연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목욕하러 들어갔다.목욕을 마치고 나온 성연은 미처 다 끝내지 못했던 게임의
밤이 늦어서야 무진이 집에 돌아왔더니 거실은 온통 게임 음향효과로 시끄러웠다.거실 쪽을 휙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작은 담요를 몸에 두른 채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성연이 눈에 들어왔다.집사가 황급히 다가왔다. “도련님, 식사하셨습니까?”“아직. 아무거나 간단히 준비해 주세요. 너무 번거롭지 않게요.”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 있었던 무진은 시스템 해킹에 실패하니 입맛도 사라졌다.집에 오니 그제서야 배고픔이 느껴졌다.“네, 도련님.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면 주방장은 이미 쉬러 간 상태다. 시간이 되어 바로 퇴근한 상태라 냉장고에 남아 있는 식자재도 없었다. 부득이 집사가 직접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30분 후, 일상적인 작은 메뉴 몇 개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성연 앞에 다가간 무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어.”여전히 게임에 빠진 성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안 먹었으면 얼른 가서 드세요.”“같이 먹어.” 무진이 대답했다.성연은 왠지 모르게 무진의 말투에서 약간 서운해하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게임을 하다 중단한 성연이 고개를 돌려 무진의 얼굴을 보더니 게임기를 내려 놓으며 대답했다.“알았어요, 알았어. 먹는 동안 옆에 있어 줄게요. 하지만 나는 이미 먹었어요.”“그래.” 성연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향하는 무진의 눈에 웃음기가 떠올랐다.식탁에 앉은 성연이 턱을 괸 채 무진을 바라보았다.성연의 주시에도 침착한 무진은 천천히 음식을 씹었다.식사하는 동작도 어찌나 우아한지 왠지 보는 눈이 즐거웠다.음식 냄새를 맡으니 약간의 허기를 느낀 성연이 배를 문질렀다.조금 전 간식도 많이 집어먹었는데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또 배고파지네.” 성연이 고개를 들어 무진을 보며 말했다.무진이 손수 성연에게 밥 한 공기를 퍼 주었다.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성연이 가끔씩 다리를 흔들었다. 성연의 기분이 좋다는 걸 알아차린 무진이 물었다.“오늘 무슨 기분
밤이 되자 무진은 성연에게 전화를 걸어 성연이 혼자 식사하라고 전했다. 자신은 오늘 저녁 야근으로 집에 오지 않는다면서.무진이 야근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성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아마 오늘 밤의 전매 현장에 무진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 역시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성연도 저녁에 동아리 활동이 있어 늦게 좀 늦을 거라고 대답했다.성연의 말을 들은 무진이 곧바로 동의했다.여자애들은 지금이야 말로 노는 걸 좋아할 때이니, 무진 또한 구속하지 않았다.평소 일이 있든 없든 집에 있는 성연이니, 자주 나가서 친구를 사귀는 것도 좋을 것이다.사실 성연은 동아리에 가지 않았다. 애초부터 할머니 안금여의 해독제를 연구하기 위해 얼렁뚱땅 지어냈던 것.하지만 이후 성연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 동아리에 가입했다.오늘 밤에도 확실히 작은 활동이 있긴 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성연은 직접 동아리장에게 휴가를 내어 서한기와 함께 외출했다.먼저 백화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산 후, 호텔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타이트한 긴 스커트를 입은 성연은 S라인 몸매를 드러내었다. 또 같은 색 계열의 하이힐을 매치한 모습은 평소 수수한 차림을 하던 소녀와는 그야말로 딴판이었다.환복을 끝낸 성연이 룸을 나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서한기가 성연을 보며 건들거리는 자세로 휘파람을 불었다.“보스, 몸매가 끝내 주는데요. 아주 섹시해요. 분명히 강 모씨가 보면 완전 홀딱 빠지겠는데요?”단지 농담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 성연은 개의치 않으며 냉소를 지었다.“너,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말이야?”말하면서 성연은 양 손가락의 관절을 꺽었다. 딱딱 관절 꺽이는 소리를 들으니 머리 밑이 저릿저릿해 왔다.서한기가 바로 말했다. “보스, 당연한 걸 물으시다니요. 보스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다시 냉소를 지은 성연이 거울을 향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평소와 비슷해 보여?”서한기가 얼른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아니요. 보스 변장술은 이미 입신의 경
클럽 블랙스톤의 룸 안.무진은 이미 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옆에 서서 걱정스럽게 말했다.“보스, 정말 올까요?”“올 테니 걱정하지 마.” 무진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무진이 차분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자, 손건호 또한 마음이 차분해졌다.과연 7시 반경에 룸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성연이 룸 안으로 들어왔다.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몸매는 더 늘씬해 보였다. 성연의 등장으로 룸 안 가득 향기가 퍼지며 강한 아우라마저 느껴져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히고 싶게 했다.룸에 들어간 사람은 송성연 혼자였다.서한기는 밖에서 수하들을 한데 모아 잠시 후에 발생할 비상 상황에 대비했다. 언제든 바로 성연을 도울 수 있도록.무진과 손건호가 고개를 들어 성연을 쳐다보았다.그녀는 온몸을 꽁꽁 둘러 싸맨 채 뽀얀 살결 한 점만 살짝 드러내었다. 손까지 레이스 장갑을 끼고 있는 상태였다.그러나 이런 큰 인물들은 등장하면서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당연했다.외부 사람들 모두 ‘스카이 아이 시스템’이 강씨 집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그래서 오늘 무진이 WS그룹 대표로 나온 것이다.얼굴의 절반이 은색 가면에 가려진 무진은 룸 안으로 들어오던 성연과 눈을 마주쳤다.그러나 성연이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무진이 어떤 실마리도 알아채지 못하게 해야 했다.이런 위험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바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성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물건을 되찾으러 왔어요. 충분히 오래 시간 동안 물건을 갖고 있지 않았나요? 이제 주인에게 돌려줄 차례예요.”고의로 목소리를 낮추어서인지 약간 쉰 목소리가 성연의 입에서 나와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였다. 아무도 그녀의 실제 나이를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성연을 본 손건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개발한 사람이 여자일 거라는 건 전혀 예상 밖이었다.어젯밤의 실력을 생각하니 절로 성연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요즘 여성 해커는 무척 적었다.특히 자신
무진 또한 직설적으로 말했다.“이 물건은 내가 거액을 들여 산 것이니, 지금은 내 것이죠.”성연은 하마터면 무진에게 화를 낼 뻔했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은 자신이 개발한 것이며, 그 거취를 결정할 권리 또한 자신에게 있었다.도대체 강무진이 무슨 근거로 ‘스카이 아이 시스템’이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지 그 내막을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속에서 화가 치민 성연말의 말투도 따라서 차가워졌다.“말 만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요.”그녀 또한 숨기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어젯밤 맞대결에서 이게 내 것이라는 것을 이미 증명했다고 생각하는데요.”이어 무진을 바라보았다.“허세는 그만 부리시죠. 어떻게 해야 내 물건을 다시 돌려줄 건가요?”‘스카이 아이 시스템’의 가치는 무척 높아서 손 안에 들어온 걸 강무진이 쉽게 양보할 리 없었다.무진 역시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자리에 나온 목적 또한 성연에게 되돌려주려는 게 아닌 만큼.잠시 후, 무진이 대꾸했다.“그쪽도 잘 알 텐데 말이죠. 사람들이 말하는 ‘스카이 아이 시스템’의 뛰어난 점에 대해선 이미 돈을 지불했으니, 당연히 내 것입니다. 이게 상규라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요?”무진의 말투는 되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게 확연했다.무진이 양보할 생각이 없자, 성연은 모자를 쓴 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성연이 입을 열지 않자 무진이 계속 말했다.“차라리 같이 개발하는 게 낫겠군요. 어찌 되었든 나도 헛돈을 쓸 순 없으니 말이죠.”성연의 안색이 가라앉았다.물건은 결코 자신이 원해서 판 게 아니었다. 혈귀가 훔쳐 판 것이다.그렇지 않았다면 조직의 능력으로 외부의 누구도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직접 볼 생각 같은 건 못하게 했을 터였다.하지만 혈귀 같은 개쓰레기 배신자 때문에 이처럼 많은 일들로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다음에 다시 혈귀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말 테다!’성연은 이를 악문 채 참으며 무진과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누가 당신에게 사기를 쳤다면 가서 돈을 되찾
손을 들어 올린 무진이 성연의 동작을 피했다. 성연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재빨리 기회를 틈타 공격하며 무진을 구석으로 몰았다.유연성이 아주 뛰어난 성연은 모든 장애물을 쉽게 넘으며 무진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섰다.그러나 무진의 동작도 날카로워 상대하기가 점차 힘들어졌다. 간신히 응수하는 정도였다.한동안 매우 격렬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다.두 사람이 룸에서 싸우는 동안 쿵, 쾅 하는 소리들이 들렸다.손건호는 옆에서 보고만 있을 뿐 끼어들지 않았다.눈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지금 가능하다면 옆에서 해바라기씨를 까면서 구경할 텐데.‘이게 바로 두 거물 간의 대결 아니겠나? 정말이지 너무 멋져!’‘얼마나 혹독하게 훈련해야 이런 실력이 되는 것일까?’강무진의 곁을 지키는 손건호 또한 나름 상당한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다.물론 강무진 앞에서는 열 합을 넘기지 못하지만 말이다. 보스랑 저리 오랫동안 겨루고 있는 그녀가 정말 대단한 거였다.아니 강무진 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다.뛰어난 해킹 기술에, 이처럼 대단한 무술 실력을 가진 사람이 여성이라니. 속으로 받은 엄청난 충격을 도저히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를 정도였다.바로 그때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딪쳐 열리자 서한기가 수하들을 이끌고 들어왔다.상황을 지켜보던 손건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손뼉을 쳤다. 그러자 곧바로 온 사방에서 몰려온 수하들이 보스와 상대가 맞서 싸우는 걸 지켜보았다.당연히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수하들이 바로 룸 안에서 싸우기 시작했다.수하들이 들이닥치는 걸 본 성연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무진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체력도 아주 뛰어났다.처음에는 무진과 서로 엇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성연은 힘에 부쳤다.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공격 위주였으나 후반부에는 주로 강무진의 공격을 막는 방어 동작밖에 할 수 없었다.성연의 동작을 보면서 무진은 조급함 없이 느릿느릿 공격하기 시작했다.“숙녀분, 다시 한 번 잘 생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
목현수도 한숨을 돌렸다.방금 성연에게 일이 생기자 목현수는 바로 손건호에게 알렸다.원래 다른 곳에 있던 손건호가 그제서야 달려왔다.“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성연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본 손건호의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난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던 성연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이 일은 무진 씨에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면 돼요.”손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이 옷을 갈아입게 민박집을 좀 잡아주세요. 자칫하다 감기에 걸리겠어요.”이 관광지는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근처에 민박집들이 많이 있었다.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성연이 미리 조사한 사항들이다.“예.” 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모두 차에 올랐다.차에 올라탄 성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말했다.“미스 샤넬, 고맙습니다. 오늘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물속에서의 질식감을 떠올린 성연은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했다.“괜찮아요. 당신은 내 친구니까 구할 수 있었어요. 물론 내가 구하긴 했지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친구끼리는 서로 도와야지요.” 미스 샤넬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대범하게 말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연은 그전에 미스 샤넬과 적지 않은 오해를 겪었다.그런데도 그녀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미스 샤넬의 손을 잡은 성연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곧 그들은 손건호가 잡은 민박집으로 들어갔다.목현수가 미스 샤넬과 성연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은 먼저 들어가서 좀 씻어. 내가 갈아입을 옷을 구해올 게. 여기 있는 옷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래요.” 미스 샤넬은 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목현수가 옷을 사 주겠다고 하자 성연은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예전엔 별일 아니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자란 성인들이었다.성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 나는 필요 없으니까 미스 샤넬만 사주면 돼요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
“누가 물에 빠졌어요.”“빨리 와요, 사람 살려요.”“빨리 여기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빨리 사람을 구하러 오게 해.”주위에서는 모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성연은 물에 빠지는 순간 바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다행히 호수의 물이 깊어서 바닥에 부딪치지는 않았다.그러나 갑자기 물살에 충격을 받자 현기증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아래의 물살이 좀 급해서 물살에 말려들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성연은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짙은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성연의 몸은 천천히 계속해서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이럴 수가, 누구 수영을 할 줄 알아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주세요.” 구조된 소년의 어머니도 옆에서 소리쳤다.자신의 과실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당에,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비록 자기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몹시 조급해진 목현수는 몇 번이나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주위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갔지만, 구조대는 한참이나 오지 않고 있었다.“이걸 어떡하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서 구해달라고 해.”“여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CCTV도 있지 않아? 왜 이렇게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을 해대고 있었지만, 직접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었다. 성연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물에 뛰어들 용기는 부족했다.자기 자식이 잘못된 걸 본다면 뛰어들었겠지만 말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던 미스 샤넬이 주저함 없이 바로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그러나 옆에 있던 목현수가 눈치 빠르게 붙잡았다.“샤넬, 뭘 하려는 거야?”성연 한 명이 빠진 걸로 이미 충분히 애
성연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데리고 온 관광지는 교외에 있었다.산과 물을 끼고 곳곳에 푸른 풀이 깔려 있어서 생동감이 넘쳤다.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관광지에는 또 전문적으로 설계된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넓은 숲의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어서 또 그 속으로 소풍을 갈 수도 있다.미스 샤넬이 앞으로 걸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이곳의 공기는 정말 좋네요.”“맞아요, 내가 오기 전에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순수하고 천연적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은 채 약간만 손을 댔을 뿐이니, 진정한 원래의 생태 관광지인 셈이죠.”성연은 설명할 때, 미스 샤넬이 일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미스 샤넬은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성연 씨, 아는 게 정말 많네요.”“아니에요, 이런 관광지는 우리 A국에 아주 흔해서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어요. 유럽 각지에 정통한 미스 샤넬을 난 따라가지도 못하는 걸요.”각기 장점이 있다. 성연은 북성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서 기본적인 상식을 좀 알고 있는 것이지, 칭찬할 건 아니다.“성연 씨가 그렇게 전면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가요,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샤넬 양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성연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미스 샤넬의 뒤를 따라가면서 목현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목현수는 성연이 자신을 계속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됐어, 성연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샤넬 양과의 관계는 정말 잘 생각해봐야 해.’그들은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아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호수였다.미스 샤넬이 포즈를 취하고 성연이 사진을 찍었다.성연은 여러 장면을 잘 포착해서 찍었다.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미스 샤넬이 달려왔다. “어떤 지 내가 한번 볼게요.”성연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미스 샤넬은 한 장 한 장 살펴보면서 감탄했다.“성연 씨, 사진 촬영 기술이
눈썰미가 좋은 미스 샤넬은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같이 손을 잡고 가던 성연도 덩달아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목현수가 물었다. “왜 그래?”미스 샤넬이 사실대로 말했다.“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안진검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미스 샤넬을 보았다.미스 샤넬이 자신을 알아봤음을 눈치 챈 안진검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계속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지만 그래도 좀 낭패스러웠다.속으로는 정말 놀랐다.샤넬 가문의 장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빌어먹을?’‘그녀가 나를 말했을 지도 몰라.’‘미스 샤넬이 정말 내 이름을 말한다면, 내 신분 배경이 드러나면서 전체 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안진검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앞으로 계속 동정을 살피면서 들켰는지 어떤지 지켜보는 수밖에.’‘만약 진짜 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계획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어.’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안진검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계획이 이렇게 틀어지다니!’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낀 성연도 바로 물었다.“누군데요?”미스 샤넬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죠.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이곳 북성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목현수가 옆에서 바로 말했다.“잘못 본 게 분명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맞아요, 나는 여전히 성연 씨가 나를 데리고 놀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 샤넬은 다시 성연의 손을 잡았다.그들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손건호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을 관광지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았기 때문.무진에 대해서는 목현수도 자료를 좀 조사한 적이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이번에 손건호가 성연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양이군.’그러나 강무진이 직접 자신을 예의 감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마음을 놓았음을 의미했다.목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
로얄 스위트 룸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룸 내부 구석구석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스위트 룸에 들어서자 마자 은은한 향이 났다.“나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묙현수의 볼에 키스를 한 미스 샤넬은 목현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목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30분 후.찰칵, 소리가 났다.욕실 문이 열리면서 미스 샤넬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무심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던 목현수.눈앞의 장면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물빛 실크 가운을 걸친 미스 샤넬의 허리에는 얇은 띠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실크 가운 사이로 풍만한 가슴 계곡과 희고 긴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가 천천히 목현수를 향해 걸어오자, 가운 안의 나신이 슬쩍 드러났다.목현수의 머리가 띵해 오기 시작했다.한 호텔 룸 안에서 내보이고 있는 샤넬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건강한 성인 남자인 목현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미스 샤넬은 목현수에게 다가가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들었다.자신의 몸까지 드러내며 이렇게 다가가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목현수.점점 서운한 마음이 커지는 미스 샤넬.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현수 씨,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목현수도 미스 샤넬이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미스 샤넬은 항상 씩씩하고 쾌활한 사람이어서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목현수 자신도 깜짝 놀랐다당황한 목현수가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그냥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줄 몰랐을 뿐이야.”미스 샤넬이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유혹하려는 거죠!”그녀의 눈에 원망과 질책의 빛이 들어찼다. 또한 짙은 실망감도.목현수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
성연은 수시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음식을 먹으면서 성연이 농담처럼 물었다.“사형, 사형은 미스 샤넬과 언제 결혼할 거예요? 이번에 돌아왔으니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예쁜 미인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형을 따라다니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어요?”성연은 그저 슬쩍 물어보았을 뿐이다.지난번에도 물어봤지만 매번 이 문제를 회피하는 목현수였기에.“곧 할 거야. 다음 달 즈음에 돌아가서 결혼할 거야.”그런데 목현수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던 성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무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옆에서 목현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두 달이면 목현수가 유부남이 된다는 말이지?’‘엄밀히 말해 지금 미스 샤넬은 목현수의 약혼녀.’‘이제는 목현수도 더 이상 성연이에게 매달릴 수 없다는 거지.’무진은 이제야 정말 위기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그도 옆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그럼 이게 신혼여행인가요?” 그 말을 들은 목현수가 눈을 치켜 떴다.‘하, 내가 강무진 네 놈의 얄팍한 생각을 모르는 줄 알아?’‘성연이를 내가 뺏을까 봐 겁이 났던 거 아니야?’‘이제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강무진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어.’“그런 셈이지요.” 목현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무진은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슬쩍 가렸다.주문했던 음식들을 다 먹자, 디저트가 나왔다.이 음식점의 주요 메뉴 중 하나가 바로 A국 특유의 디저트였다.미스 샤넬은 방금 먹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랄 만큼 맛있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디저트로 나온 이 케익들.동물을 본떠 동그랗게 만든 모양이 무척 사랑스러웠다.미스 샤넬은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포크를 들었다.“이 케익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성연이 손을 흔들었다.“모두 먹는 것들이에요. 미스 샤넬. 많은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