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의 말을 듣던 순간, 손건호는 머리가 지끈거려 우선 입을 다물었다. ‘스카이 아이 시스템’은 원래 자신들이 수단을 부려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원 주인이 패스워드를 자신들에게 알려주려 하겠는가?“스카이 아이 시스템은, 어쨌든 충분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야. 절대 소소한 게 아니야.”그리고 또 하나의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던 손건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누가 개발했는지도 모르는데 어디 가서 찾으려고요?”업계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사실은 여전히 비밀에 싸여 있었다.‘그렇다고 무작정 찾을 순 없잖아?’대강의 생각이나 아무런 단서도 없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아닌가 말이다.무진은 머릿속에서 이미 절묘한 방법을 하나 생각해냈다.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리던 그는 찌푸렸던 미간을 펴며 말했다.“왜 찾아야 하지? 스스로 찾아오게 하면 되지.”“아…….” 망연자실한 듯한 표정의 손건호가 머리를 긁적였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설계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어리석지 않을 거야?’‘그런데 어떻게 먼저 찾아오게 한다는 거지?’그러나 자신만만한 보스의 모습을 보면서 분명 무슨 계획이 있으리라 생각했다.손건호를 힐끗 쳐다본 무진이 말했다.“말을 퍼트려. 이 업계 사람들에게 모두 알리는 게 제일 좋겠군. 내일 저녁 8시, 블랙스톤 클럽에서 ‘스카이 아이 시스템’ 전매 거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물건을 잃어버리고 가장 조급할 사람은 당연 물건의 주인일 터.소식을 듣고 온 첫 번째는 틀림없이 ‘스카이 아이 시스템’의 개발자일 것이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누군가가 그에게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무슨 방법을 쓰던 개발자의 입을 열게 할 것이다.어쨌든 그 입을 열게 만들 하나는 있을 터.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지시를 이행하러 나갔다.무진의 공격을 깨부수어 기분이 좋은 성연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목욕하러 들어갔다.목욕을 마치고 나온 성연은 미처 다 끝내지 못했던 게임의
밤이 늦어서야 무진이 집에 돌아왔더니 거실은 온통 게임 음향효과로 시끄러웠다.거실 쪽을 휙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작은 담요를 몸에 두른 채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성연이 눈에 들어왔다.집사가 황급히 다가왔다. “도련님, 식사하셨습니까?”“아직. 아무거나 간단히 준비해 주세요. 너무 번거롭지 않게요.”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 있었던 무진은 시스템 해킹에 실패하니 입맛도 사라졌다.집에 오니 그제서야 배고픔이 느껴졌다.“네, 도련님.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면 주방장은 이미 쉬러 간 상태다. 시간이 되어 바로 퇴근한 상태라 냉장고에 남아 있는 식자재도 없었다. 부득이 집사가 직접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30분 후, 일상적인 작은 메뉴 몇 개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성연 앞에 다가간 무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어.”여전히 게임에 빠진 성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안 먹었으면 얼른 가서 드세요.”“같이 먹어.” 무진이 대답했다.성연은 왠지 모르게 무진의 말투에서 약간 서운해하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게임을 하다 중단한 성연이 고개를 돌려 무진의 얼굴을 보더니 게임기를 내려 놓으며 대답했다.“알았어요, 알았어. 먹는 동안 옆에 있어 줄게요. 하지만 나는 이미 먹었어요.”“그래.” 성연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향하는 무진의 눈에 웃음기가 떠올랐다.식탁에 앉은 성연이 턱을 괸 채 무진을 바라보았다.성연의 주시에도 침착한 무진은 천천히 음식을 씹었다.식사하는 동작도 어찌나 우아한지 왠지 보는 눈이 즐거웠다.음식 냄새를 맡으니 약간의 허기를 느낀 성연이 배를 문질렀다.조금 전 간식도 많이 집어먹었는데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또 배고파지네.” 성연이 고개를 들어 무진을 보며 말했다.무진이 손수 성연에게 밥 한 공기를 퍼 주었다.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성연이 가끔씩 다리를 흔들었다. 성연의 기분이 좋다는 걸 알아차린 무진이 물었다.“오늘 무슨 기분
밤이 되자 무진은 성연에게 전화를 걸어 성연이 혼자 식사하라고 전했다. 자신은 오늘 저녁 야근으로 집에 오지 않는다면서.무진이 야근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성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아마 오늘 밤의 전매 현장에 무진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 역시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성연도 저녁에 동아리 활동이 있어 늦게 좀 늦을 거라고 대답했다.성연의 말을 들은 무진이 곧바로 동의했다.여자애들은 지금이야 말로 노는 걸 좋아할 때이니, 무진 또한 구속하지 않았다.평소 일이 있든 없든 집에 있는 성연이니, 자주 나가서 친구를 사귀는 것도 좋을 것이다.사실 성연은 동아리에 가지 않았다. 애초부터 할머니 안금여의 해독제를 연구하기 위해 얼렁뚱땅 지어냈던 것.하지만 이후 성연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 동아리에 가입했다.오늘 밤에도 확실히 작은 활동이 있긴 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성연은 직접 동아리장에게 휴가를 내어 서한기와 함께 외출했다.먼저 백화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산 후, 호텔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타이트한 긴 스커트를 입은 성연은 S라인 몸매를 드러내었다. 또 같은 색 계열의 하이힐을 매치한 모습은 평소 수수한 차림을 하던 소녀와는 그야말로 딴판이었다.환복을 끝낸 성연이 룸을 나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서한기가 성연을 보며 건들거리는 자세로 휘파람을 불었다.“보스, 몸매가 끝내 주는데요. 아주 섹시해요. 분명히 강 모씨가 보면 완전 홀딱 빠지겠는데요?”단지 농담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 성연은 개의치 않으며 냉소를 지었다.“너,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말이야?”말하면서 성연은 양 손가락의 관절을 꺽었다. 딱딱 관절 꺽이는 소리를 들으니 머리 밑이 저릿저릿해 왔다.서한기가 바로 말했다. “보스, 당연한 걸 물으시다니요. 보스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다시 냉소를 지은 성연이 거울을 향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평소와 비슷해 보여?”서한기가 얼른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아니요. 보스 변장술은 이미 입신의 경
클럽 블랙스톤의 룸 안.무진은 이미 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옆에 서서 걱정스럽게 말했다.“보스, 정말 올까요?”“올 테니 걱정하지 마.” 무진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무진이 차분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자, 손건호 또한 마음이 차분해졌다.과연 7시 반경에 룸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성연이 룸 안으로 들어왔다.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몸매는 더 늘씬해 보였다. 성연의 등장으로 룸 안 가득 향기가 퍼지며 강한 아우라마저 느껴져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히고 싶게 했다.룸에 들어간 사람은 송성연 혼자였다.서한기는 밖에서 수하들을 한데 모아 잠시 후에 발생할 비상 상황에 대비했다. 언제든 바로 성연을 도울 수 있도록.무진과 손건호가 고개를 들어 성연을 쳐다보았다.그녀는 온몸을 꽁꽁 둘러 싸맨 채 뽀얀 살결 한 점만 살짝 드러내었다. 손까지 레이스 장갑을 끼고 있는 상태였다.그러나 이런 큰 인물들은 등장하면서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당연했다.외부 사람들 모두 ‘스카이 아이 시스템’이 강씨 집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그래서 오늘 무진이 WS그룹 대표로 나온 것이다.얼굴의 절반이 은색 가면에 가려진 무진은 룸 안으로 들어오던 성연과 눈을 마주쳤다.그러나 성연이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무진이 어떤 실마리도 알아채지 못하게 해야 했다.이런 위험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바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성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물건을 되찾으러 왔어요. 충분히 오래 시간 동안 물건을 갖고 있지 않았나요? 이제 주인에게 돌려줄 차례예요.”고의로 목소리를 낮추어서인지 약간 쉰 목소리가 성연의 입에서 나와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였다. 아무도 그녀의 실제 나이를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성연을 본 손건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개발한 사람이 여자일 거라는 건 전혀 예상 밖이었다.어젯밤의 실력을 생각하니 절로 성연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요즘 여성 해커는 무척 적었다.특히 자신
무진 또한 직설적으로 말했다.“이 물건은 내가 거액을 들여 산 것이니, 지금은 내 것이죠.”성연은 하마터면 무진에게 화를 낼 뻔했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은 자신이 개발한 것이며, 그 거취를 결정할 권리 또한 자신에게 있었다.도대체 강무진이 무슨 근거로 ‘스카이 아이 시스템’이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지 그 내막을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속에서 화가 치민 성연말의 말투도 따라서 차가워졌다.“말 만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요.”그녀 또한 숨기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어젯밤 맞대결에서 이게 내 것이라는 것을 이미 증명했다고 생각하는데요.”이어 무진을 바라보았다.“허세는 그만 부리시죠. 어떻게 해야 내 물건을 다시 돌려줄 건가요?”‘스카이 아이 시스템’의 가치는 무척 높아서 손 안에 들어온 걸 강무진이 쉽게 양보할 리 없었다.무진 역시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자리에 나온 목적 또한 성연에게 되돌려주려는 게 아닌 만큼.잠시 후, 무진이 대꾸했다.“그쪽도 잘 알 텐데 말이죠. 사람들이 말하는 ‘스카이 아이 시스템’의 뛰어난 점에 대해선 이미 돈을 지불했으니, 당연히 내 것입니다. 이게 상규라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요?”무진의 말투는 되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게 확연했다.무진이 양보할 생각이 없자, 성연은 모자를 쓴 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성연이 입을 열지 않자 무진이 계속 말했다.“차라리 같이 개발하는 게 낫겠군요. 어찌 되었든 나도 헛돈을 쓸 순 없으니 말이죠.”성연의 안색이 가라앉았다.물건은 결코 자신이 원해서 판 게 아니었다. 혈귀가 훔쳐 판 것이다.그렇지 않았다면 조직의 능력으로 외부의 누구도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직접 볼 생각 같은 건 못하게 했을 터였다.하지만 혈귀 같은 개쓰레기 배신자 때문에 이처럼 많은 일들로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다음에 다시 혈귀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말 테다!’성연은 이를 악문 채 참으며 무진과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누가 당신에게 사기를 쳤다면 가서 돈을 되찾
손을 들어 올린 무진이 성연의 동작을 피했다. 성연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재빨리 기회를 틈타 공격하며 무진을 구석으로 몰았다.유연성이 아주 뛰어난 성연은 모든 장애물을 쉽게 넘으며 무진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섰다.그러나 무진의 동작도 날카로워 상대하기가 점차 힘들어졌다. 간신히 응수하는 정도였다.한동안 매우 격렬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다.두 사람이 룸에서 싸우는 동안 쿵, 쾅 하는 소리들이 들렸다.손건호는 옆에서 보고만 있을 뿐 끼어들지 않았다.눈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지금 가능하다면 옆에서 해바라기씨를 까면서 구경할 텐데.‘이게 바로 두 거물 간의 대결 아니겠나? 정말이지 너무 멋져!’‘얼마나 혹독하게 훈련해야 이런 실력이 되는 것일까?’강무진의 곁을 지키는 손건호 또한 나름 상당한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다.물론 강무진 앞에서는 열 합을 넘기지 못하지만 말이다. 보스랑 저리 오랫동안 겨루고 있는 그녀가 정말 대단한 거였다.아니 강무진 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다.뛰어난 해킹 기술에, 이처럼 대단한 무술 실력을 가진 사람이 여성이라니. 속으로 받은 엄청난 충격을 도저히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를 정도였다.바로 그때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딪쳐 열리자 서한기가 수하들을 이끌고 들어왔다.상황을 지켜보던 손건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손뼉을 쳤다. 그러자 곧바로 온 사방에서 몰려온 수하들이 보스와 상대가 맞서 싸우는 걸 지켜보았다.당연히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수하들이 바로 룸 안에서 싸우기 시작했다.수하들이 들이닥치는 걸 본 성연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무진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체력도 아주 뛰어났다.처음에는 무진과 서로 엇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성연은 힘에 부쳤다.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공격 위주였으나 후반부에는 주로 강무진의 공격을 막는 방어 동작밖에 할 수 없었다.성연의 동작을 보면서 무진은 조급함 없이 느릿느릿 공격하기 시작했다.“숙녀분, 다시 한 번 잘 생
성연의 공격에 무진이 아주 빠르게 반응하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몸은 아주 보기 좋았다.싸우고 있는 지금도 마치 장난치는 듯, 또는 춤을 추듯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인 시각적 효과를 줄 만큼 멋있었다.싸우는 과정에 무진의 동작에 힘이 실리며 아주 묵직했다. 잠시 방심한 사이 성연의 부드러운 가슴 부분을 무진의 손이 스치고 지나갔다.손끝으로 긁고 지나간 느낌이 너무 뚜렷해서 성연이 놀란 얼굴로 무진을 쳐다보았다.무진 또한 느꼈는지 얼굴 표정이 다소 어색해졌다. 정말 이 여자를 봐 줄 마음이 없어서 손속에 힘을 풀지하지 않았을 뿐이었다.원래 이미 화가 나 있던 성연은 무진에게 희롱을 당했다고 생각하자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부끄럽기도 한 성연이 바로 입으로 무진의 손등을 물어버렸다.무진은 성연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그러자 성연도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스카이 아이 시스템도 다시 손에 들어왔겠다,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그 기세를 틈타 성연이 철수하자 뒤를 겹겹이 둘러싼 수하들이 성연을 엄호했다.손건호가 수하들을 데리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그러나 차고에 도착했을 때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진로가 막혔다.거의 안전 지대에 다다르자 서한기가 성연의 앞으로 달려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보스, 어때요? 손에 넣었습니까?”성연이 씨익 웃으며 손에서 USB를 꺼내 앞에서 흔들었다.“내가 나섰는데 실패할 리가 있겠어?”성연의 손에 든 USB를 본 서한기도 온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보스, 정말 손에 넣었어요? 꿈은 아니지요?”분명 조금 전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봤을 때, 성연은 이미 기운이 빠져 있었다.그래서 이번에도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되찾기엔 가망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달리면서 밤의 어두움을 빌어 몸을 숨긴 성연은 뒤에서 추격하는 이들의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추격자들이 저 뒤로 멀리 떨어진 걸 본 뒤에 말했다.“손에 넣었어. 그런데 강무진
잠시 허공을 주시던 무진이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이 일을 떠올리지 않을 생각이었다.무진이 손을 들어 말했다. “모두 물러가.”“네, 보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오늘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잃어버렸는데도 보스의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도대체 뭐 때문이지?’엄청난 금액을 주고 산 게 아닌가? 또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하고서야 손에 넣었던 물건인데 말이다.그러나 지금 누군가 가져가겠다고 하고 가져가 버렸는데도 보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강무진의 평소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손건호의 마음속에 많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보스 강무진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 명령에 복종해 왔었다.수하들에게 철수하라고 지시한 후 보스를 수행해서 엠파이어 하우스로 돌아왔다.무진이 집에 돌아왔을 때, 성연은 이미 목욕을 끝내고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달걀형의 뽀얀 얼굴로 성연은 평범한 만화 캐릭터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이유 없이 성연을 보자마자 무진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의 여자와 성연이 겹쳐졌다.분명히 두 사람은 닮은 데가 하나도 없었다.성연을 힐끗 쳐다본 무진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언제 왔어?”성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휴대폰을 보며 대답했다.“돌아온 지 얼마 안됐어요.”타이밍도 정말 기막히지 않은가?무진이 예의 주시하는 듯한 눈빛을 한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한 사람을 만났는데, 너랑 많이 닮았다고 느꼈어.”성연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무진의 시선을 받으며 웃었다.“그래요? 아마 미녀들은 모두 다 비슷한 모양이네요?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무진 씨한테 아주 인상 깊게 남았나 봐요? 약혼녀 앞에서 다른 여자 얘기를 꺼내다니, 내가 질투하면 어떡하려고요?”무진이 성연의 눈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질투 나?”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대답이 듣고 싶었다.도대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을 마친 사무는 옆의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뚱뚱한 남자를 재빠르게 발견했다.“아저씨, 바로 저 사람이 사진이를 이렇게 다치게 했어요!”사무는 우렁찬 목소리로 방금 엘리베이터를 나온 남자를 가리켰다.팍!쿵!서한기가 재빨리 깔끔하게 손을 쓰자, 남자의 커다란 몸은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심지어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남자는 온몸의 뼈마디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 아이들은 네가 감히 건드릴 수도 감당할 수도 없어! 꺼져!”피에 굶주린 듯 핏발선 눈으로 쏘아보면서, 서한기가 나지막하게 외쳤다.쓰러져 있던 남자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온몸의 통증을 느끼면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다.그러나 막 일어나려던 남자는 등줄기의 시큰한 통증에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아!”다시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결국 주저앉은 채 고통스럽게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다른 쪽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무진은 자연스럽게 이쪽의 소동에 시선이 향했다.사람들 속에서 처참한 모습의 마케팅팀 팀장과, 그 앞에 서서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미간을 찌푸린 무진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뒤를 바라보았다.“아이들이 아직 안 갔어?”그리고 무진이 엘리베이터 문을 나설 때, 손건호는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했던 서한기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그들 두 사람은 예전 진성 조직의 공동 대장이었다. 여러 해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인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지난 일 때문에 서로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이 가슴이 찢어질 듯한 느낌도 그들 두 사람만 알 수 있을 뿐...왜인지는 모르지만 서한기의 망설임이 느껴지자,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아직도 안 가보고 뭐 해?”‘저 두 아이는 뭔가 나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머릿속에서 어떤
아직도 물린 곳에 통증을 느끼고 있던 마케팅팀 팀장은, 갑자기 사무가 이런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심적으로 위축되었다.‘어린 애가 어떻게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방금 전에 행동은 치밀하게 생각하고 한 건가?’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던 마케팅팀 팀장은 곧 한숨을 돌렸다.‘내가 뭘 무서워하는 거야? 기껏해야 아이일 뿐인데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어?’이렇게 생각하자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변했다.“이 조그만 녀석이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이렇게 버릇없게 말이지!”사무는 코웃음을 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이 버릇없는 새끼가 감히 욕을 해! 보아하니 너는 혼나는 걸로도 부족하겠어!”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줄곧 말을 하지 않던 무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됐어, 너희 두 아이는 빨리 나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때문에 너희 엄마가 회사의 징계를 받게 돼.”사무는 무진의 얘기하는 모습을 힐끗 보았다. 전혀 감정이 없는 눈빛으로 볼 뿐.‘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맞는’ 걸 보면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있는 이런 아버지라니! 얼마나 마음이 독한 사람인지 충분히 알겠어.’‘오늘 아버지를 찾아온 건 결코 잘한 선택이 아닌 것 같아.’사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마케팅팀 팀장을 흘겨보기만 했다. ‘얼마나 더 웃을 수 있는지 보겠어. 조금 있다가 한기 아저씨가 시원하게 혼내 줄 테니까!’조심스럽게 여동생을 일으켜 세운 사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동생을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사진아, 가자!”사진도 지금은 여기에 더 있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악문 채 오빠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입구로 걸어가던 사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상 앞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무진도 마침 사진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무진은 왠지 가슴이 아팠다.그러나 무진이 움직이기 전에, 고개를 돌린 사진은 오빠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마침내 소동이 마무리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두 아이는 쌍동이겠지. 한 네다섯 살 정도 된 것 같아.’‘아이들 나이와 지금 상황을 보면...’‘혹시 이 두 아이가 정말 보스와 사모님 사이의 아이인 거야?’‘사모님이 낙태한 뒤 출국한 게 아니라, 모두를 속이고 아이들을 낳은 건가?’너무나 엄청난 상상이라서, 손건호는 곧 뭔가 큰일이 닥칠 거라는 느낌마저 들었다.지금은 원래 마케팅팀 팀장이 보고하면서 무진의 눈에 들 기회를 찾던 중이었다.그러나 오늘 보고는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무려 30분 동안이나 저기압인 대표의 기세에 눌려 있던 상태였다.‘지금 대표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면 칭찬을 받겠지.’눈빛을 빛내던 남자는 손을 비비면서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너희들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 빨리 나가지 않고 뭐 해!”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면서, 마케팅팀 팀장이 사진의 여린 팔을 꽉 쥐었다.“어린 애들이 함부로 아빠라고 거짓말이나 하다니, 도대체 부모가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이게 얼마나 심한 장난인지 알기나 해?”마케팅팀 팀장은 거칠게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무방비 상태였던 사진은 그저 팔이 꽉 잡힌 채 끌려갈 뿐이다.사진은 본능정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어린아이가 어떻게 어른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까?사진의 발버둥은 결국 전혀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했다.“오빠, 오빠, 사진이 너무 아파!”“아아, 아파...”팔의 통증에 몸부림치던 사진은 기어이 기회를 틈타서 남자의 팔을 물었다.갑작스럽게 팔에 통증을 느끼자, 남자는 아이들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서 나뒹굴었다“아! 이 계집애가 감히 나를 물었어!”잔뜩 살이 찐 남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으름장을 놓았다.갑자기 바닥에 떨어졌지만, 사무는 별다른 이상 없이 일어섰다.하지만 팔을 물린 남자는 사진을 떨쳐내려고 거칠게 밀쳤다.결국 힘에 밀린 사진은 의자에 이마와 팔을 부딪혔다. 부딪친 곳은 바로 빨갛
사진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어제 오빠 컴퓨터에서 아빠의 사진을 봤을 때도 천하제일 미남인 아빠 모습에 감탄했지만!오똑한 콧날에 굳게 닫힌 두 입술, 단정한 헤어 스타일에 온몸에 남성미가 가득한 건장한 모습!지금 그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경외심이 들면서 엄숙한 분위기였다. 이 모든 아우라는 바로 책상 앞에 앉은 무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야!’‘우리한테 이런 멋진 아빠가 있다니!’ 지금 사진은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아빠!”두 아이는 곧바로 책상 앞으로 달려갔고, 사진이 크게 외쳤다.가뜩이나 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에 ‘아빠’라는 소리가 들리자, 무진은 미간을 점점 찌푸리면서 그윽한 눈빛으로 두 아이를 훑어보았다.“어디서 온 애들이야? 언제부터 우리 회사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게 됐지?”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뒤로 젖혔다.“게다가 아무 데서나 아빠라니?”기쁨에 겨워 아빠에게 다가가려던 사진은 무진의 바로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의 눈에서는 순식간에 눈물이 솟아났다.애절하게 흐느끼면서 사진이 말했다.“아빠, 바로 우리 아빠잖아! 우리는 오늘 특별히 아빠를 찾으러 온 거야.”아이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무진은 마치 가슴속이 꽉 막힌 듯했다. 당황한 무진은 얼른 내선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두 아이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하는 무진의 목소리에는 왠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나는 너희들 아빠가 아니야. 거짓말하면 안 돼. 얼른 너희 엄마한테 가야지.”잠시 후, 수화기에서 시원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네, 보스.]무진은 다시 두 아이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들어와서 두 아이를 데려가.”[아이들요?] 손건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응.”무진은 단지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아빠는 우리가 그렇게 싫어요?”갑자기 사진의 옆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앳된 얼굴이지만
사무가 눈을 치켜뜨면서 말했다. “그래야 해?”다시 한 번 우유 막대사탕을 입에 넣은 채, 사진이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그럼, 오빠 그건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데?”“하지만 내 말은 사실이야, 설마 네 오빠가 뛰어나지 않다는 거야?”사무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진지한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사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면서 다시 빌딩을 바라보았다.“우리 그래도 일을 해야지. 사람들이 우리가 아빠를 찾으러 올라가게 할까?”웃음을 거둔 사무는 입술을 꼭 닫은 채 앞을 보면서 진지 모드로 돌입했다.“당연히 우리를 못 들어가게 할 거야.”“그럼 어떡해?”사진은 바로 풀이 죽었다.‘이미 집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빠 회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곤란한 일이 생기면 정말 피곤해.’다음 순간.사진은 익숙한 오빠 손에 이끌려서 따라갔다.사무가 앞에 서고 사진은 따라서 함께 빌딩의 옆쪽의 작은 문으로 걸어갔다.입구에 선 두 아이는 작은 키 때문에 아주 순조롭게 입구의 경비원 순찰을 피할 수 있었다. 한바탕 민첩하게 왔다 갔다 한 끝에 이미 계단 앞에 도착했다.고개를 든 두 아이는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입을 삐죽 내민 사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텔레비전에 나오는 회장 사무실은 모두 맨 꼭대기층에 있어. 오빠, 아빠도 꼭대기층에 있는 건 아니겠지.”사무도 이 많은 계단을 보자 약간 풀이 죽었다.그래도 앳되지만 무게 있는 목소리로 사무가 나지막히 말했다.“그 점은 드라마도 틀리지 않았어.”“아!” 오빠가 말을 하자 사진의 작은 다리는 벌써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만약에 이렇게 높은 층을 걸어서 올라간다면, 오늘 내 다리는 아마 망가지겠지?사진이 자신의 짧은 다리를 위해 ‘묵념’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사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가자, 위층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2층.지금은 출근 시간이라서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느라, 오히려 두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진 오빠의 이전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면, 내가 했던 짓도 모두 드러나지 않을까?’예민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처럼 느꼈다.‘약효가 줄어들면 그 뒤에는 반드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할 거야.’ ‘안 돼. 방법을 생각해야 해. 그런 상황이 절대 일어나게 해서는 안 돼.’찢어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무진을 보자, 예민주의 머릿속에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그 약을 다시 한번 더 먹여도 될까?’‘하지만... 하지만 또 복용하면, 나도 잊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겨.’‘이거 어떻게 해야 해?’일시에 모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모두 머릿속에 맴돌면서, 가뜩이나 초조한 예민주는 머리가 터질 듯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돌린 무진의 눈은 전혀 초점도 맞지 않은 채 암울해 보였다.걸음을 떼고도 마음의 피로로 인해서 이미 얼마나 붕 떠있는지도 몰랐다.무진이 예민주의 곁으로 다가가자, 예민주가 무의식중에 무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진은 다른 사람의 접촉을 원하지 않는 듯이 아주 교묘하게 예민주의 손길을 피했다.차로 향하면서 예민주에게 단 한 마디만 남겼을 뿐이다.“좀 있다가 너 혼자 돌아가. 오늘 일은 잠시 미루자.”그리고 곧바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남겨진 예민주만 어수선한 심정이었다.이어진 며칠 동안 무진은 여전히 평소와 마찬가지로 바빴다. 낮에는 업무를 볼 뿐만 아니라 접대도 해야 했다.그날, 산기슭의 별장 2층.위층에서 성연의 차가 점차 사라지는 걸 본 두 아이는 신속하게 작은 숄더백을 꺼냈다.사진은 동그란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맞은편에 있는 사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오빠, 정말로 이렇게 할 거야?”고개를 끄덕이는 사무의 눈에는 확고한 결의가 가득했다.“응, 엄마가 그날 돌아온 뒤 요 며칠 상태가 어떤지 못 봤어? 엄마는 분명히 아버지를 만났을 거야.” “내가 이미 아버지 위치를 알아냈어. 우리는 곧 아버지를 찾아갈 거야!”지금 집에 두 아이들밖에 없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성연은 낯선
“그렇게 트집을 잡겠다고?”“나는 단지 이 옷을 매우 좋아할 뿐이에요. 나와 무진 오빠의 결혼식에서 입고 싶은데 당신들도 마음에 들었는지는 몰랐는데요?”억울한 듯한 예민주의 얼굴.임서희는 마음이 우울했다. ‘무슨 이런 여우 같은 년이 다 있어? 그야말로 겉만 번드르르한 년이네!’“2억2천만 원! 빨리 카드 결제해요!”말을 마친 성연이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예민주는 마치 성연이 가는 방향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바로 성연의 앞을 막았다.짝!성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로 예민주의 따귀를 때렸다.얼굴의 통증을 느끼자 예민주는 무의식적으로 직접 만든 독약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성연은 이미 진작부터 예민주가 그럴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성연의 오른손에 갑자기 가는 은침 하나가 나타나더니, 예민주의 팔에 바로 박히면서 순식간에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좋은 개는 길을 막지 않는 법이야!”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지금 성연의 눈에서는 불꽃이 타오르면서 온몸의 피가 들끓는 듯했다.“서희야, 가자!”말이 끝나자 성연은 임서희를 데리고 웨딩 숍을 나섰다.오른쪽 얼굴의 화끈한 통증과 주위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느끼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화가 난 예민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무진 오빠!”그러나 다음 순간, 곧바로 문밖으로 나간 무진은 차의 시동을 걸고 바로 성연을 따라갔다. 울부짖는 예민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방금 회사를 나섰던 성연은, 임서희를 먼저 회사로 돌려보낸 뒤에 자신은 혼자 차를 몰고 떠났다.차 안.백미러를 통해 자신의 뒤를 바짝 뒤쫓는 무진을 발견하자, 성연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뭘 하려는 거야?’마음이 초조하자, 액셀러레이터를 바로 끝까지 밟았다. 성연의 차는 넓은 도로 위를 나는 듯이 달려갔다.고가도로 위.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진의 차가 성연의 차에 부딪치면서 곧바로 멈추게 만들었다. 빠른 속도로 달렸기 때문에 관성에 의해서 부딪친 것이다.성연은 입가가 찢어지면서 끈
이곳의 웨딩드레스는 모두 디자이너의 작품들로, 이 웨딩드레스도 당연히 하나밖에 없다. 이걸 예민주가 가져가면, 자신은 당연히 다른 웨딩드레스를 찾을 수밖에 없다.‘게다가 이건 분명히 우리가 먼저 보고 결정했어.’임서희가 무의식적으로 막았다.“아가씨, 이 옷은 우리가 방금 이미 고른 거예요. 면사포도 모두 골랐는데, 아가씨의 이런 행동은 우아하지 않은데요?”임서희는 아주 완곡하게 표현했다.하지만... 예민주는 임서희의 태도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호호, 당신이 어떻게 먼저 골랐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 웨딩드레스는 이미 오랫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거예요.”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이건 원래 일찍부터 내 소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예민주는 임서희의 반응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피식 비웃으면서 다시 직원에게 그 웨딩드레스를 가져오라고 했다.직원이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고 고민하자, 예민주는 짜증이 난 목소리로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너 거기서 뭐하고 있어? 빨리 안 움직여?”직원은 양쪽의 손님들 사이에 낀 채 난처한 표정이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야?’‘이 두 손님들은 척 봐도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지금 웨딩드레스 하나를 놓고 서로 싸우려는 기세인데, 우리는 이쪽을 도와도 안 되고, 저쪽을 위해도 안 돼.’“저는...”직원은 순간 말을 더듬으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래 좋은 기분이던 성연은 예민주에게 방해를 받자, 아예 신용카드를 꺼내서 직원에게 건네주었다.“이 웨딩드레스는 우리가 사겠어요. 카드로 결제할게요.”성연의 목소리에는 말참견을 용납하지 않는 힘이 실려 있었다.성연의 이 말은 또 마침 직원도 정확한 답안을 제시할 수 있게 도왔다. ‘옷을 입어보는 목적은 옷이 어울리는지 보기 위한 것이고, 어울리면 사는 거야.’‘하지만 이들은 지금 입어보는 단계를 건너뛰고 구매하겠다고 하니 가장 명확한 답이겠지.’“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포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말하면서 직원이 은행카드를 받으려고 했다.“잠깐만
지금 직원의 설명을 듣자 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어때? 직원에게 한번 입어보게 가져오라고 해볼까?”임서희가 정말 마음에 들어한다는 걸 눈치챈 성연이 다가와서 건의했다.가게 앞.바로 같은 시간에 한 쌍의 남녀가 밖에서 들어왔다. 여자는 앙증맞은 표정으로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매달려 있었다.“무진 오빠, 이 브랜드의 웨딩 숍은 운성에 이곳 한 곳밖에 없어요.” “이 가게 웨딩드레스가 정말 예쁘다고 해요. 심플한 스타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좀 화려한 스타일이 좋을까요?”예민주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했다. 마치 꼬리를 활짝 편 공작새처럼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웨딩 숍 안으로 들어섰다.예민주가 팔을 꽉 잡고 있어서 무진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천천히 팔을 풀었지만 눈빛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좀 심플한 스타일로 해. 그렇게 화려한 걸 입을 필요는 없어.”예민주는 사실 결코 온화한 사람이 아니지만, 무진의 곁에 있으면서 오히려 많이 순해졌다.하지만 평생에 한 번 밖에 없는 결혼이기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무진의 말이 떨어지자, 예민주는 무의식 중에 그 말에 반박하려고 했다.“하지만...”‘지금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저건... 송성연이잖아?’머릿속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다시 자세히 보니 정말 성연이 맞았다.말을 하다가 만 예민주가 마치 뭔가에 시선이 고정된 듯이 바라보자, 무진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예민주의 시선을 따라갔다.‘왜 또 저 여자야?’성연을 보는 순간, 무진은 다시 한번 참기 힘든 두통을 느꼈다.‘왜, 왜 매번 저 여자를 볼 때마다 냉정을 유지할 수 없는지 모르겠어. 또 익숙한 느낌도 있지만, 분명히 저 여자를 만난 적도 없잖아.’또각또각!무진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예민주는 성연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갔다. 이미 조금 전처럼 놀라지 않았고, 온통 거만한 표정을 지으면서.“공교롭게도 이런 데서 만나게 되다니.”임서희와 함께 면사포를 고르고 있던 성연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눈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