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허공을 주시던 무진이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이 일을 떠올리지 않을 생각이었다.무진이 손을 들어 말했다. “모두 물러가.”“네, 보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오늘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잃어버렸는데도 보스의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도대체 뭐 때문이지?’엄청난 금액을 주고 산 게 아닌가? 또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하고서야 손에 넣었던 물건인데 말이다.그러나 지금 누군가 가져가겠다고 하고 가져가 버렸는데도 보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강무진의 평소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손건호의 마음속에 많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보스 강무진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 명령에 복종해 왔었다.수하들에게 철수하라고 지시한 후 보스를 수행해서 엠파이어 하우스로 돌아왔다.무진이 집에 돌아왔을 때, 성연은 이미 목욕을 끝내고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달걀형의 뽀얀 얼굴로 성연은 평범한 만화 캐릭터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이유 없이 성연을 보자마자 무진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의 여자와 성연이 겹쳐졌다.분명히 두 사람은 닮은 데가 하나도 없었다.성연을 힐끗 쳐다본 무진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언제 왔어?”성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휴대폰을 보며 대답했다.“돌아온 지 얼마 안됐어요.”타이밍도 정말 기막히지 않은가?무진이 예의 주시하는 듯한 눈빛을 한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한 사람을 만났는데, 너랑 많이 닮았다고 느꼈어.”성연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무진의 시선을 받으며 웃었다.“그래요? 아마 미녀들은 모두 다 비슷한 모양이네요?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무진 씨한테 아주 인상 깊게 남았나 봐요? 약혼녀 앞에서 다른 여자 얘기를 꺼내다니, 내가 질투하면 어떡하려고요?”무진이 성연의 눈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질투 나?”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대답이 듣고 싶었다.도대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생각할수록 마음의 가책이 더 커지는 느낌이었다.그래서 성연은 위층으로 올라가 자발적으로 무진에게 침을 놓아주겠다고 말했다.‘적어도 강무진이 저렇게 손해보게 해서는 안 돼.’강무진의 다리는 거의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회복하기까지는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국부적으로 침을 놓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마사지를 해도 처음처럼 그렇게 피곤할 정도는 아니었다.무진의 다리에 침을 다 놓은 성연이 침을 뽑고 물러서려 할 때, 오늘 힘을 너무 써서 그런지 실수로 뒤에 있던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혔다.모서리는 매끄러웠지만, 성연은 허리에 상처가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 부딪혔을 때 너무 아픈 나머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허리 뒤의 부딪힌 자리를 더듬으며 눌러보니 여전히 아팠다.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성연이 손을 들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아무 것도 아니에요. 동아리 모임에서 좀 부딪혔어요.”사실, 오늘 저녁 대결하면서 실수로 부딪혔던 거지만.당시 긴장감과 흥분이 차 올라있는 상태에 아프고 말고 따질 겨를이 어디 있기나 했겠나?이제야 제 정신이 돌아오며 아프다는 걸 알아차린 거지.물론 성연은 아주 침착한 태도로 무진 앞에서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무진의 머리가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자칫하면 그에게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었다.“괜찮아? 의사를 부를까?” 관심을 주며 묻는 무진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성연은 손을 내저었다.“됐어요. 그냥 작은 상처일 뿐인데요. 한 이틀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에요. 지금은 의사들도 모두 쉬는 시간이에요.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요.”말하는 동시에 성연은 천연덕스럽게 침을 정리해서 한쪽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손을 씻고 와서 무진의 다리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무진의 근육을 주무르며 움직이던 성연이 놀라워했다.“운동 효과가 정말 좋아요. 다리 상처가 정말 잘 아물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겠어요.”의사의
성연의 말을 들으며 무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연의 대답은 앞뒤가 너무 딱딱 맞아서 아무런 꼬투리도 찾지 못할 정도였다.게다가, 너무 떠보면 상처받을 수도 있었다. 만약 성연이 그 여자가 아니라면, 쓸데없는 짓을 한 게 아니겠는가?성연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보아하니 앞으로 시간이 있을 때 무진의 블랙카드를 긁어서 더 이상 의심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 같았다.‘이 사람도 참, 돈을 쓰게 하는 괴벽이 가지고 있네? 돈 안 쓴다고 싫어하다니 말이야.’성연이 입을 삐죽거리며 생각했다.무진의 다리를 마사지한 뒤 정리까지 마무리한 성연이 베개에 머리를 대자 바로 잠이 들었다.무진은 성연의 옆에서 잠들었다.매번 성연 옆에서 잘 때마다 그는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불면증이 사라진 지도 이미 한참 되었다.그래서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한밤중에 목이 몹시 말랐던 무진이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마셨다.물을 마시고 침대로 돌아온 무진은 통증이 관통한 듯 자면서도 찡그리고 있는 성연의 얼굴이 보였다. 온몸을 이불로 돌돌 말고 있었다. 헐렁한 잠옷 차림으로 이리저리 뒤척인 탓에 상의가 위로 올라가 뽀얀 허리살을 드러내고 있었다.유난히 하얀 피부 탓에 허리의 멍도 무척이나 선명했다.미옥에 흠집이 난 것처럼 무척이나 눈에 거슬렸다.성연이 오늘 저녁의 그 여자인지, 무진은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이 푸른 멍은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약을 바르지 않는다면 성연의 허리는 분명 더 심해질 터.무진이 서랍 안을 이리저리 뒤졌으나 타박상 연고가 보이지 않았다.눈살을 찌푸렸다. 예전에 분명 여기에 두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안 보이는 건가 말이다.자신의 동작에 성연이 시끄러워 깰까 봐 아래층으로 내려가 찾아볼 생각이었다.계단 입구에 도착하자 아래층에서 조그만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내려 보니, 집사였다.발자국 소리를 들은 집사가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에 무진과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도련
이튿날 성연이 깨어났을 때 좀 의외였다. 허리를 다친 곳이 벌써 아물었는지 별로 아프지 않았다.어제 그녀는 게으름을 피운 데다가 집에서 약을 바르기도 불편해 상처를 무시한 채 저절로 낫기를 기다렸다.그런데 상처가 이렇게 빨리 나을 정도로 자신의 몸이 좋은 줄은 몰랐다.아마 크게 다치지도 않았던 모양이다.뿐만 아니라 욕실에 들어가 옷자락을 들춰 본 성연은 멍이 벌써 거의 사라지고 없는 걸 보았다.정말 예상치 못한 놀라움이었다. 자신이 약을 바르는 번거로움을 덜어주다니. 약을 바르기도 썩 좋지 못한 부위였는데 말이다.학교에 갔을 때 성연은 하던 대로 보건실로 갔다. 그러나 오늘은 잠을 자러 가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하러 갔다.이틀 전, 매우 재미있는 게임 두 개를 발견했었다. 지금 1분 1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스테이지를 통과한 후 어떻게 전개될지 보고 싶을 뿐이다.보건실에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게임을 하는 성연을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다는 포기의 빛이 서한기의 눈에 어렸다.성연은 평소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아마 가장 좋아하는 게 게임일 것이다.일단 한 번 시작하면 완전히 푹 빠져서 아예 침식도 잊어벼렸다.기다리다고 있자니 성연이 가까스로 게임을 멈추었다. 서한기는 성연에게 약병을 건넸다.“보스, 이건 보스가 지난번에 연구, 제조한 거예요. 효과가 아주 좋아서 가져왔어요.”성연과 가까운 관계인데다 그녀의 곁에 있으면 좋은 점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성연은 때때로 상처 치료약을 주었는데 모두 효과가 최고였다.빨리 회복되니 오래 동안 힘들어 할 필요가 없었다.강무진과 맞붙는 과정에서 성연이 분명 부상을 입었을 것이라고 짐작했었다.강씨 집안에 있는 성연은 분명히 약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 성연이 자신에게 준 것을 가지고 온 것.마침 스테이지 하나를 넘긴 성연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필요 없어. 내 상처는 거의 다 나았어.”서한기는 완전 의문에 찬 눈빛이다. ‘어젯밤에 입은 상처가
성연은 서한기에게 편지를 가져오라고 했다.날아갈 듯 휘갈겨 쓴 익숙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성연이 이전에 받은 편지와 마찬가지로 먼저 간단한 인사말 몇 마디로 시작되었다. 자신은 평안하니 성연에게도 자신을 잘 돌보라고 당부했다.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편지를 쓰라는 말도 있었다. 또 여하튼 자신을 잘 지키고 어디에 가든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도. 사부님은 언제나 자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셨다.간단한 몇 글자이지만, 성연은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벌써 여러 번째다.마음이 훈훈해졌다.이미 수없이 한 말들이었지만 성연은 매번 감동받았다.사부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않고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셨다.하지만 예전에는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뿐이었는데, 어째 이번 편지에는 편지지가 한 장 더 들어 있었다.성연은 편지지를 꺼냈다.눈으로 몇 차례 훑은 성연은 이 펀지지에 쓰인 내용이야 말로 사부님이 편지를 보내오신 목적이라는 걸 발견했다.편지에서는 사부님 한 친구가 중병에 걸렸지만 밝힐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은 돌아올 수 없으니, 성연에게 가서 대신 진찰을 받으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어떤 구체적인 이유인지는 모르나 사부님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으셨다.그러나 성연은 언제나 인정을 중시하는 사부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정말 무슨 부득이한 이유가 있지 않았다면, 분명 직접 오셨을 것이다. 성연을 대신 보내지 않고 말이다.사부님의 일이라면 성연은 늘 120%를 다해 왔다.자세히 살펴보니, 사부님 친구의 상세한 주소와 신분이 아래에 적혀 있었다.아래의 신분을 본 성연은 한순간 깜짝 놀랐다.사부님께 이런 클래스의 친구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사부님의 진짜 신분은 성연도 잘 모른다.다만 사부님의 신들린 의술이라면 이런 인물을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터.중병에 걸린 분은 일찍이 부대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진정한 철혈 영웅이었다. 그의 몸에는 수많은 영예와 훈장이 가득 걸려있었다.원래의 신체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고개를 끄덕인 서한기는 성연이 수업을 하는 동안 모든 일을 안배해 두었다.저녁에 수업이 끝난 후 성연은 보건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단순한 흰 티셔츠를 입고 아래는 평범한 검정 진을 입었다. 또 인피 가면을 뒤집어써서 예쁜 얼굴을 가렸다. 즉시 거칠어진 얼굴 피부에 무척이나 평범하며 나이든 외모로 변했다.좀 더 신뢰감을 주기 위해 검은 테의 안경을 쓰기도 했다.환복을 마친 성연은 택시를 타고 충해원 제1공관, 연씨 저택으로 갔다.이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은 모두 군인 집안들이었다.이곳에 와서 엄숙한 분위기를 보니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옷 매무새를 정리한 성연이 공관 안으로 걸어 들어가 초인종을 눌렀다.관리인이 문을 열자 성연은 사부님의 말에 따라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했다.성연의 말을 들은 관리인이 얼른 공손한 태도로 안으로 안내했다.문에 들어서니 방안에는 세 사람이 더 있었다. 연씨 집안의 어르신과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자였다.연씨 어르신의 손자는 매우 젊어 보였는데 아마 20대 초반정도로 보였다.검은색 티셔츠 차림의 손자는 아주 준수한 외모에 큰 키를 가진 소년미가 넘치는 청년이었다. 또 가슴에는 좀 커다란 스컬 패턴이 들어가 있었고 최신형 스니커즈를 신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세련되어 보였다.잘 생겼지만 보기에는 좀 냉소적이고 오만한 분위기를 풍겼다.성연이 들어가자 소파에 기대 앉아 업신여기듯 성연을 한 번 쓰윽 훑어보았다.그 아버지와 어머니로 보이는 이들은 성연에게 아주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연씨 집안 며느리가 성연에게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미안해요. 번거롭게 이리 오게 해서. 달리 방법이 없었답니다.”“저는 사부님께서 부탁하신 것이니 당연한 일인 걸요.” 성연 또한 겸손한 태도로 차를 들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아버님이 얼마 전까지 괜찮으신가 했는데 요즘은 왠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제발 도와주세요.”말하는 며느리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보니 정말 어르신에게 효성스러운 것 같았다.성연이
연씨 며느리가 불현듯 이렇게 움직일 줄은 예상하지 못 했던 성연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연씨 집안의 사람들은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보아하니 이들 집안의 분위기는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외부인 앞에서 체면을 구긴 연경훈은 정말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쪽 팔리다는 생각을 했다.참지 못한 연경훈이 어머니에게 불평했다.“이렇게 다 컸는데도 머리를 때리다니요. 머리 나빠지면 어떡하라고요?”미워 죽겠다는 눈길로 연경훈을 한 번 째려본 연씨 집안 며느리는 어쩌다 자신이 이런 아들을 낳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너 같은 멍청이라 때린 거야.”머리를 가린 연경훈의 눈빛이 온통 원망투성이였다.그런 아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며느리는 고개를 돌려 성연에게 웃어 보였다.“신경 쓰지 마세요. 이 녀석은 평소 이런 행실로 늘 쥐어 터지는 놈이예요.”나이가 어린 성연으로서는 확실히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저은 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사부님께서 병증을 말씀해 주시긴 했는데, 제가 직접 어르신의 상황을 보면 좋겠습니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에 관리인이 들어와 말했다. “주인 어르신, 마님, 강씨 집안 도련님이 찾아오셨습니다.”북성 시 전체에 강씨 집안은 하나밖에 없었다. 성연은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그녀의 생각이 틀렸기를.연씨 집안 며느리 뒤에 서서 자신의 몸을 가린 성연이 머리만 빼꼼이 내밀어 바라보았다.그리고 거실에 거구의 인물이 나타났다.성연의 동공이 수축해 들어갔다. 이 사람은 확실히 강무진이 맞았다.이런 상황에서 강무진과 마주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해서인지 속으로 몹시 당황스러웠다.그러나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한쪽에 서 있었다.이럴 때일수록 의심을 사는 내색을 드러내서는 절대 안 되었다.강씨 집안과 연씨 집안은 대대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지금도 협력 관계로 어느 한 쪽이 어려우면 두 팔 벌려 도와줄 터였다.강무진이 어렸을 때도 자주 이곳으로 놀러 오곤 했었다
조금 전까지 세상을 발 아래로 내려다보던 태도를 싹 집어던진 연경훈이 소파에서 일어서며 아주 예의 바른 모습으로 무진을 불렀다.“무진 형.”무진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다 연씨 집안 아주머니 곁에 서 있는 성연을 보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이 분은?”보통 연씨 집안에 외부인이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그렇게 물은 것이다.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서둘러 옆에서 소개했다.“이 분은 아버님 병을 치료하러 오신 분이야. 아버님 옛 친구 분의 제자이시고.”“어르신이 인정하시는 분이라면 분명 능력이 뛰어나시겠군요.”성연은 뒤에서 긴장하여 식은땀을 흘렸다.무슨 작은 단서라도 드러나 강무진에게 들킬 새라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손바닥에 땀이 나 끈적끈적해서 무척이나 불편한 기분이었다.그러나 조금 전의 신분으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진과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아무런 말이 없는 태도가 좀 오만해 보였다.그래도 무진은 개의치 않았다. 다만 까만 눈동자에 이채가 스칠 뿐이었다. 사실 성연의 성연을 한눈에 알아차린 무진이었다.늘 이런 사람들과 접촉하고 거래하는 그였기에 성연의 가면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얼굴의 피부와 목 부위에 드러난 피부가 완전히 달랐다.하지만 성연이 사용한 인피의 재질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이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만 있을 뿐인.만약 다른 일반인들이라면, 당연히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민난 사람은 강무진었다.성연의 위장은 그의 눈에 크게 들어온 뒤에 하나씩 해체되었다.무진은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연씨 어르신의 오랜 친구분 제자라고 하면서, 무엇때문에 자신의 얼굴을 위장한 채 사람들에 보여주지 않는 거지?’‘설마 어르신의 몸을 나쁘게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어쨌든 일단 대비하고 봐야겠군.’손건호도 무진을 따라와 있었다. 수간 무진이 곧장 손건호에게 눈빛을 보냈다.‘만약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라면, 절대로 도망가게 해서는 안 돼.’무진의 뜻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
목현수도 한숨을 돌렸다.방금 성연에게 일이 생기자 목현수는 바로 손건호에게 알렸다.원래 다른 곳에 있던 손건호가 그제서야 달려왔다.“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성연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본 손건호의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난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던 성연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이 일은 무진 씨에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면 돼요.”손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이 옷을 갈아입게 민박집을 좀 잡아주세요. 자칫하다 감기에 걸리겠어요.”이 관광지는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근처에 민박집들이 많이 있었다.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성연이 미리 조사한 사항들이다.“예.” 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모두 차에 올랐다.차에 올라탄 성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말했다.“미스 샤넬, 고맙습니다. 오늘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물속에서의 질식감을 떠올린 성연은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했다.“괜찮아요. 당신은 내 친구니까 구할 수 있었어요. 물론 내가 구하긴 했지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친구끼리는 서로 도와야지요.” 미스 샤넬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대범하게 말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연은 그전에 미스 샤넬과 적지 않은 오해를 겪었다.그런데도 그녀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미스 샤넬의 손을 잡은 성연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곧 그들은 손건호가 잡은 민박집으로 들어갔다.목현수가 미스 샤넬과 성연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은 먼저 들어가서 좀 씻어. 내가 갈아입을 옷을 구해올 게. 여기 있는 옷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래요.” 미스 샤넬은 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목현수가 옷을 사 주겠다고 하자 성연은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예전엔 별일 아니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자란 성인들이었다.성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 나는 필요 없으니까 미스 샤넬만 사주면 돼요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
“누가 물에 빠졌어요.”“빨리 와요, 사람 살려요.”“빨리 여기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빨리 사람을 구하러 오게 해.”주위에서는 모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성연은 물에 빠지는 순간 바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다행히 호수의 물이 깊어서 바닥에 부딪치지는 않았다.그러나 갑자기 물살에 충격을 받자 현기증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아래의 물살이 좀 급해서 물살에 말려들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성연은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짙은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성연의 몸은 천천히 계속해서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이럴 수가, 누구 수영을 할 줄 알아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주세요.” 구조된 소년의 어머니도 옆에서 소리쳤다.자신의 과실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당에,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비록 자기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몹시 조급해진 목현수는 몇 번이나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주위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갔지만, 구조대는 한참이나 오지 않고 있었다.“이걸 어떡하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서 구해달라고 해.”“여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CCTV도 있지 않아? 왜 이렇게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을 해대고 있었지만, 직접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었다. 성연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물에 뛰어들 용기는 부족했다.자기 자식이 잘못된 걸 본다면 뛰어들었겠지만 말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던 미스 샤넬이 주저함 없이 바로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그러나 옆에 있던 목현수가 눈치 빠르게 붙잡았다.“샤넬, 뭘 하려는 거야?”성연 한 명이 빠진 걸로 이미 충분히 애
성연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데리고 온 관광지는 교외에 있었다.산과 물을 끼고 곳곳에 푸른 풀이 깔려 있어서 생동감이 넘쳤다.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관광지에는 또 전문적으로 설계된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넓은 숲의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어서 또 그 속으로 소풍을 갈 수도 있다.미스 샤넬이 앞으로 걸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이곳의 공기는 정말 좋네요.”“맞아요, 내가 오기 전에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순수하고 천연적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은 채 약간만 손을 댔을 뿐이니, 진정한 원래의 생태 관광지인 셈이죠.”성연은 설명할 때, 미스 샤넬이 일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미스 샤넬은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성연 씨, 아는 게 정말 많네요.”“아니에요, 이런 관광지는 우리 A국에 아주 흔해서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어요. 유럽 각지에 정통한 미스 샤넬을 난 따라가지도 못하는 걸요.”각기 장점이 있다. 성연은 북성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서 기본적인 상식을 좀 알고 있는 것이지, 칭찬할 건 아니다.“성연 씨가 그렇게 전면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가요,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샤넬 양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성연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미스 샤넬의 뒤를 따라가면서 목현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목현수는 성연이 자신을 계속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됐어, 성연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샤넬 양과의 관계는 정말 잘 생각해봐야 해.’그들은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아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호수였다.미스 샤넬이 포즈를 취하고 성연이 사진을 찍었다.성연은 여러 장면을 잘 포착해서 찍었다.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미스 샤넬이 달려왔다. “어떤 지 내가 한번 볼게요.”성연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미스 샤넬은 한 장 한 장 살펴보면서 감탄했다.“성연 씨, 사진 촬영 기술이
눈썰미가 좋은 미스 샤넬은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같이 손을 잡고 가던 성연도 덩달아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목현수가 물었다. “왜 그래?”미스 샤넬이 사실대로 말했다.“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안진검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미스 샤넬을 보았다.미스 샤넬이 자신을 알아봤음을 눈치 챈 안진검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계속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지만 그래도 좀 낭패스러웠다.속으로는 정말 놀랐다.샤넬 가문의 장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빌어먹을?’‘그녀가 나를 말했을 지도 몰라.’‘미스 샤넬이 정말 내 이름을 말한다면, 내 신분 배경이 드러나면서 전체 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안진검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앞으로 계속 동정을 살피면서 들켰는지 어떤지 지켜보는 수밖에.’‘만약 진짜 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계획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어.’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안진검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계획이 이렇게 틀어지다니!’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낀 성연도 바로 물었다.“누군데요?”미스 샤넬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죠.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이곳 북성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목현수가 옆에서 바로 말했다.“잘못 본 게 분명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맞아요, 나는 여전히 성연 씨가 나를 데리고 놀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 샤넬은 다시 성연의 손을 잡았다.그들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손건호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을 관광지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았기 때문.무진에 대해서는 목현수도 자료를 좀 조사한 적이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이번에 손건호가 성연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양이군.’그러나 강무진이 직접 자신을 예의 감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마음을 놓았음을 의미했다.목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
로얄 스위트 룸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룸 내부 구석구석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스위트 룸에 들어서자 마자 은은한 향이 났다.“나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묙현수의 볼에 키스를 한 미스 샤넬은 목현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목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30분 후.찰칵, 소리가 났다.욕실 문이 열리면서 미스 샤넬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무심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던 목현수.눈앞의 장면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물빛 실크 가운을 걸친 미스 샤넬의 허리에는 얇은 띠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실크 가운 사이로 풍만한 가슴 계곡과 희고 긴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가 천천히 목현수를 향해 걸어오자, 가운 안의 나신이 슬쩍 드러났다.목현수의 머리가 띵해 오기 시작했다.한 호텔 룸 안에서 내보이고 있는 샤넬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건강한 성인 남자인 목현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미스 샤넬은 목현수에게 다가가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들었다.자신의 몸까지 드러내며 이렇게 다가가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목현수.점점 서운한 마음이 커지는 미스 샤넬.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현수 씨,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목현수도 미스 샤넬이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미스 샤넬은 항상 씩씩하고 쾌활한 사람이어서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목현수 자신도 깜짝 놀랐다당황한 목현수가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그냥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줄 몰랐을 뿐이야.”미스 샤넬이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유혹하려는 거죠!”그녀의 눈에 원망과 질책의 빛이 들어찼다. 또한 짙은 실망감도.목현수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
성연은 수시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음식을 먹으면서 성연이 농담처럼 물었다.“사형, 사형은 미스 샤넬과 언제 결혼할 거예요? 이번에 돌아왔으니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예쁜 미인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형을 따라다니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어요?”성연은 그저 슬쩍 물어보았을 뿐이다.지난번에도 물어봤지만 매번 이 문제를 회피하는 목현수였기에.“곧 할 거야. 다음 달 즈음에 돌아가서 결혼할 거야.”그런데 목현수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던 성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무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옆에서 목현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두 달이면 목현수가 유부남이 된다는 말이지?’‘엄밀히 말해 지금 미스 샤넬은 목현수의 약혼녀.’‘이제는 목현수도 더 이상 성연이에게 매달릴 수 없다는 거지.’무진은 이제야 정말 위기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그도 옆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그럼 이게 신혼여행인가요?” 그 말을 들은 목현수가 눈을 치켜 떴다.‘하, 내가 강무진 네 놈의 얄팍한 생각을 모르는 줄 알아?’‘성연이를 내가 뺏을까 봐 겁이 났던 거 아니야?’‘이제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강무진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어.’“그런 셈이지요.” 목현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무진은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슬쩍 가렸다.주문했던 음식들을 다 먹자, 디저트가 나왔다.이 음식점의 주요 메뉴 중 하나가 바로 A국 특유의 디저트였다.미스 샤넬은 방금 먹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랄 만큼 맛있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디저트로 나온 이 케익들.동물을 본떠 동그랗게 만든 모양이 무척 사랑스러웠다.미스 샤넬은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포크를 들었다.“이 케익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성연이 손을 흔들었다.“모두 먹는 것들이에요. 미스 샤넬. 많은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