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같이 먹는 저녁식사는 오순도순 분위기가 좋았다. 별이와 하은설은 식사시간내내 허태준의 솜씨를 칭찬했다. 다행히 허태준은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는지 태연했다. 심유진은 그 대화에 끼지 않으며 묵묵히 밥만 먹었다. 그때 허태준이 갑자기 하은설에게 물었다. “혹시 연락하던 그 친구는 언제 온대요? 제가 데리러 갈수 있을것 같은데.” 하은설은 그말에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했다. 심유진은 얼른 물을 건네주며 등을 두드려줬다. 하은설은 그제야 진정이 됐다. “괜찮아요!”하은설은 허태준의 호의를 거절했다. “회사측에서 데리러 간대요. 호텔도 이미 다 잡아놨거요.” “그럼 다행이고요. 필요하면 저 불러요.” “네.” 하은설은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심유진은 그 대화를 들으며 의문이 들었다. 허태준은 이렇게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였고 공항에까지 마중을 가는 성격도 아니였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행동에 의심이 생겼다. 심유진은 식사를 하며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전에 이 일에 대해 허태준에게 말한적이 없었고 하은설은 더더욱 말한적이 없을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그 썸남이 허태준에게 하은설과의 관계를 말해주어서 알게 되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정도로 허태준과 친한 사람이라면 여형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정말 여형민이라면 하은설이 숨기는것도 이해가 갔다.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려서 좋을게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텔 사업으로 인해 유럽에 오는거라면 변호사인 여형민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아까 통화할때 들은 목소리는 아무리봐도 여형민 같지 않았다. 심유진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 원인은 자신이 허태준에 대해 아는게 너무 적은 탓도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심유진은 갑자기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허태준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생일, 별자리, 혈액형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친한 동료까지 다 알고 있는데 심유진은 허태준에 대해 그 정도로 알지 못했다.갑자기 심유진이 조금 우울해한다는걸 허태준은 눈
심유진은 억지로 같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허태준은 문부터 닫더니 물었다. “아까 왜 그랬어?” 허태준은 문을 막고 섰다. “아까요? 무슨 뜻이에요?” “아까 밥 먹을 때 표정이 어두웠어.” 심유진은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조금 당황했다. 심유진은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하은설을 방패로 세웠다. “그냥 은설이가 저한테 얘기 안 해주는 게 속상해서요.” 심유진은 일부러 입을 삐죽거리면서 말했다. “저랑 제일 친한 친구고 저는 다 얘기하는데... 저한테까지 속일 줄은 몰랐어요.” 허태준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심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위로했다. “그냥 어색해서 그런 거겠지 아니면...” 순간 허태준의 눈빛이 변했다. “그 남자가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널 만나기 싫어하거나.” 심유진은 순간 눈빛이 반짝해서 허태준에게 바짝 붙었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 보면 누군지 아는 거죠?” 허태준은 당장이라도 심유진을 품에 안고 싶었지만 이 질문에 대답을 해주기가 난감해서 일단 그녀를 밀어냈다. “모른다고 했잖아.” “그럴 리가 없어요!”심유진은 더욱 확신했다. “아니면 왜 데리러 간다고 했어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난 정말 몰라.” 허태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냥 은설 씨를 도와주려던 거뿐이야.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근데 그렇게 쉽게 도와주는 사람 아니잖아요.” 심유진은 허태준과 오래 같이 지낸 데다가 여형민에게 많이 전해 들었기에 이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여형민의 말처럼 허태준은 이익을 보고 사람을 사귀는 타입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받을 게 없다면 도움도 주지 않았다. 비록 친한 사람들은 예외이긴 했지만 하은설은 당연히 그 안에 속해있지 않았다. “은설이한테 빚진 것도 없잖아요.” 심유진의 눈에 의심이 가득했다. 허태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지. 은설 씨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 사람인데.” “네?” 심유진이 미처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심유진의 뜻밖의 행동에 허태준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도 갈래!” 별이도 얼른 일어나서 허태준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하은설이 별이를 잽싸게 품에 안았다.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려고. 감기 걸려.” 별이가 반항하려 하자 하은설이 별이를 째려보더니 귓가에 대고 말했다. “움직이면 앞으로 엄마 몰래 햄버거 안 사줄 거야.” 별이는 그제야 조용해졌다. 하은설은 심유진과 허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별이는 제가 챙길 테니까 둘 다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는 대표님 데려다주고 너무 늦으면 안 돌아와도 돼.” 심유진은 조용하라는 듯 눈빛을 쏴주더니 허태준의 손을 잡았다. “가요.” 심유진네 집은 집 밖을 나가기만 하면 바로 도로였다. 허태준은 차를 도로변에 주차했기에 걸어서 1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허태준이 차에 올라타려고 하자 심유진은 당황하더니 저도 모르게 허태준의 손을 잡았다. “걸어가요.” 심유진은 목도리에 얼굴을 푹 묻으며 말했다. “걸어가자고?” “네.” “추워.” 허태준은 딱히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 얇게 입었어.” 허태준은 코트 안에 얇은 셔츠 한 장만 입었고 목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었다. 심유진은 매혹적인 그의 목젖을 보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허태준은 그 표정을 보며 웃더니 심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에 타. 드라이브하자.” 유럽의 밤거리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저녁 9시가 거의 되는 시간이었지만 이때야말로 모두가 저녁 활동을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길에는 조명이 반짝거리고 개성 있는 젊은 남녀들이 밤거리를 즐기고 있었다. 허태준은 차를 매우 천천히 운전했기에 뒤에서 차량들이 경적을 몇 번이나 울렸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속도대로 나아갔다. 차 안은 히터를 빵빵하게 틀었기에 심유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이 났다. 심유진은 목도리와 겉옷을 벗어서 손에 들었다. 허태준은 휴지를 뽑아서 자상하게 심유진의 이마에 난 땀을 닦아주었
막상 말을 꺼내려고 하니 심유진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였다. 하지만 겨우 결심을 내렸기에 오늘을 놓치면 다시는 용기를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심유진은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일주일 준다고 했잖아요. 일주일은 이미 지났어요.” 심유진은 일주일이 언제 지나는지 매일 체크했다. 그리고 마침 일주일이 됐을 때 허태준이 자신에게 대답을 구하기를 기다렸으나 허태준은 까먹은 건지 내내 질문이 없었다. 심유진은 더 이상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심유진의 말을 듣고 허태준은 두 눈을 반짝였다. “어?” 허태준은 요즘 심유진과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그래서 이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기에 시간이 다 돼도 답을 구하지 않은 것이었다. 심유진은 확실하지 않은 일은 회피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낸 걸 보면 일이 허태준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결혼할래요.” 심유진의 대답에 허태준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순간 자기가 운전하고 있다는 것도 까먹고 엉뚱한 길로 들어설뻔했기에 허태준은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응.” 허태준은 침착한척하며 대답했지만 입꼬리는 감출 수가 없었다. “근데요...” 심유진이 말을 보탰다. “당분간 귀국할 생각이 없어서 혼인신고는 못해요.” 심유진은 아직 정식으로 이민수속을 밟은 것이 아니였기에 여전히 대한민국 국적이었다. 외국에서 혼인신고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수속이 훨씬 복잡하기에 심유진은 귀국해서 한 번에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래.” 허태준은 이해했지만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사실 아직까지 심유진에게 숨기고 있는게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었다. 심유진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심유진이 자신을 정말 좋아하고 진심으로 결혼을 원할 때가 되여서야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희가 결혼한다는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하면 안 될까요? 저희 둘이랑 별이, 그리고 은설이까지만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
차량은 심유진 아파트 입구에 멈췄다. 익숙한 창밖 풍경에 심유진이 물었다. “왜 돌아왔어요?” 허태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랑 같이 호텔로 갈래?” 허태준은 다시 차에 시동을 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럼 가던지.” “아니요!” 심유진이 얼른 허태준을 말렸다. “별이가 기다리고 있어요.” “갈래? 그래도 되고.”허태준이 자신의 볼을 톡톡 치며 말했다. “뽀뽀해 주면 보내줄게.” 심유진은 허태준의 완벽한 옆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차 안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서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심유진은 서서히 허태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심유진의 입술이 허태준의 볼에 닿였고 또 금방 떨어졌다. “갈게요.” 심유진은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허태준은 아직도 입술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볼을 만지며 입꼬리를 올렸다. 집으로 가던 심유진은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허태준 쪽으로 걸어왔다. 조수석의 창문이 열리자 심유진은 붉어진 얼굴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내일 봐요.” “응.” 허태준이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 봐.” 아침 여덟 시에 허태준은 아침을 가지고 왔다. 허태준은 가져온 음식들을 식탁에 차려놓고 자연스럽게 심유진 옆에 앉았다. 하은설은 예리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두 사람...” 하은설은 아침부터 두 사람이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처음 봤다. 허태준은 항상 별이와 붙어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 허태준은 별이가 안중에도 없었다. 허태준은 웃으며 심유진의 허리를 감았다. 하은설은 눈을 더 크게 떴다. “결혼하려고요.” 허태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폭탄발언을 했다. “뭐라고요?”하은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거 아니죠?” 별이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좋아!”
허태준이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별이도 허태준의 품에 안겼다. “언제 결혼해? 어디에서 결혼해? 드라마처럼 손님도 엄청 많이 오고 그런 거야? 친구들도 초대해도 돼? 근데 어른들 결혼에 애들은 못 오는 건가? 나도 못 가?” 흥분해서 여러 질문들을 던지던 별이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별이를 바라보던 어른들은 웃음이 터졌다. “별이도 당연히 참가할 수 있지.” 허태준이 차분하게 말해줬다. “친구들도 초대할 수 있어. 근데 언제 결혼식을 올릴지는 정해지지 않아서 조금 기다려야 할 수도 있어.” “알겠어.” 별이는 조금 실망한 것 같았지만 바로 화제를 돌렸다. “여기에서 결혼할 거야 아니면 경주에 가서 할 거야? 경주에서 하면 친구들 초대해도 돼? 그리고 우리 경주에서 살아? 나 또 전학가?” 별이가 하는 질문들은 모두 허태준과 심유진이 상의하지 않은 문제여서 대답을 줄수 없었다. “음... 어디에서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는데 별이는 어떻게 하고 싶어?” 허태준이 별이에게 믈었다. “난 두 곳에서 다하고 싶어.” 별이는 이미 행복한 결혼식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럼 모든 친구들 다 초대할 수 있잖아! 경주에 있는 친구들도 보고 싶어.” 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심유진은 이미 결혼식을 한번 치렀었다. 비록 비극으로 끝난 결혼이지만 그래도 소녀시절의 꿈을 이뤘으니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원인보다 일단 결혼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허태준과 별이 모두 결혼에 로망이 있는 것 같으니 심유진은 그 환상을 깰 수가 없었다. “나중에 얘기해요. 급한 건 아니니까.” 심유진은 허태준과 공개하지 않기로 협상을 했기에 당분간 결혼식은 역시 열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동안 결혼식을 포기하도록 밑밥을 깔기로 했다. “그래.” 허태준은 화제를 돌렸다. 심유진이 겨우 한 발자국 뗐는데 이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고 다급하게 밀어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심유진이 놀라서 허태준을 쳐다봤다. “유진이가 시간 될 때 이사하려고요.” 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토요일에는 유치원 행사가 있으니까 일요일로 할까?” 심유진의 눈이 더 커졌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심유진은 말도 더듬었다. “어디로 이사 가요? 전 모르는 일인데?”허태준은 심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허태준은 일요일이 되기 전까지 심유진이 아무리 졸라도 절대 새집에 대한 힌트를 주지 않았다. 심유진은 출근길 내내 물어봤으나 입도 뻥끗하지 않는 허태준 때문에 화가 나서 차문을 쾅 닫고 내렸다. 허태준은 멀어져 가는 심유진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심유진은 정각에 출근했고 동기들은 이미 다 도착해서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서로 친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성격인지 옆에 사람이 지나가는데도 다들 고개도 들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차림을 가지고 수군대지도 않았다. 심유진은 드디어 자신의 업무환경이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조심스럽게 다닐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자리로 돌아갔을 때 심유진은 먼 곳에서 원망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선의 주인공은 Maria였다. 심유진은 그 시선에 영문을 몰라 일단 문자부터 보냈다. “왜 그래요?” 심유진은 어제 헤어지고 나서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떠올려봤으나 그 후로 연락을 안 했으니 Maria의 원망을 살만한 일은 없었다. Maria는 화를 내는 캐릭터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왔다. 무슨 뜻인지 추측하고 있는데 격렬한 타자 소리가 들렸다. 타자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기분이 안 좋은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심유진은 조금 초조해졌다. “너무해요! 어떻게 김욱 씨한테 데려다주라고 얘기할 수가 있어요? 제가 어제 얼마나 어색했는데요! 진짜 너무해요!” 심유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만약 어제 심유진이 기회를 만들어준 게
심유진은 그제야 조금 후회됐다. 둘을 엮어줄 생각만 했지 타이밍이 알맞은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사과의 의미를 담아서 오늘 저녁은 저희 집에서 드실래요?”어제 약을 제때에 발라서인지 Maria 얼굴에서 이제는 흉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침 지금이 기회였다.“그래요.”심유진은 김욱의 차를 타고 가면 됐기에 일부러 허태준에게 데리러 오지 말라고 했다. Maria가 안 가겠다고 할까 봐 김욱도 온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퇴근해서도 김욱을 버리고 Maria랑만 나왔다. 아파트 단지 앞에는 차량 두 대가 도착해 있었다. 심유진과 Maria가 차에서 내렸을 때는 흰색 차량 한 대가 주차를 하고 있었다. Maria는 어제 김욱의 차를 탔었기에 한눈에 누구 차인지 알아차렸다.“저건...”Maria가 놀라워하는 사이 김욱도 차에서 내렸다. Maria는 저도 모르게 심유진의 뒤에 붙으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김욱은 그 둘을 보고 다가왔다. Maria를 보자 김욱도 눈빛이 흔들렸으나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왜 안 올라가요?”“마침 마주쳤네요!”심유진은 Maria를 잡아당기고는 머쓱해하며 말했다.“김욱 씨도 초대했다는 걸 말했어야 하는데 깜빡했어요. 그래도 괜찮죠?”“그럼요.”Maria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셋은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리니 별이가 열어줬다.“엄마!”별이는 심유진을 보고 기뻐하다가 등뒤의 두 사람을 보고 멈칫했다. 한 사람은 익숙한 삼촌이었지만 한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예전부터 하은설과 심유진이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아들이라는 걸 밝히지 말라고 가르쳤기에 별이는 얼른 호칭을 바꿔서 심유진과 김욱을 불렀다.“이모! 삼촌!”심유진과 김욱이 오히려 당황했지만 별이는 심유진의 손을 잡고 Maria를 가리키면서 물었다.“이모! 이 이쁜 이모는 누구야?”Maria는 별이의 달콤한 말에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별이에게 자신을 소개했다.“이모 회사 동료야. 이모라고 불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