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이 따라갈 리가 없었다. 비록 차는 망가졌지만 김욱이 오기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심유진이 한참 동안 차에서 내리지 않자 그 검은 옷의 사내가 화를 내며 말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가 곤봉으로 차창을 내리쳤다. 유리 파편이 차 내부로 튀였다. 심유진은 그 사내의 험악한 웃음이 더 잘 보였다. “이래도 안 내려와?” 그가 위협하자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침착함을 찾으려고 애썼다. “여기 사방이 cctv예요.” 심유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경찰이 못 찾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사내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웃기까지 했다. “내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알아?” 그가 우쭐거리며 심유진을 쳐다봤다. “지금 이 주차장의 모든 cctv는 다 꺼졌어. 내가 여기서 널 죽여도 경찰은 못 찾는다는 뜻이야.” 심유진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당당한데다가 차도 함부로 부수는 걸 보면... “너 호텔 직원이지.” 심유진이 물었다. 자유롭게 호텔 주차장에 들어오고 cctv도 끌 수 있는 사람은 호텔 직원 빼고는 없었다. 사내의 표정이 순간 굳어지자 심유진은 더 확신이 생겼다. 그녀는 이때다 싶어 머리를 굴렸다.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는 거야.” 사실 심유진은 호텔에서 일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고위급 간부들과 접촉하다 보니 직원들과는 만날 기회가 적었다. 지금 이 사내와도 뭔가 안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심유진은 그 어떤 직원과도 낯을 붉힌 적이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아니면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건가?” 아파서 오랫동안 일을 쉬었지만 본사에서는 아직도 자신의 자리를 채울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경주 킹 호텔의 총지배인은 여전히 심유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직원들이 그 속사정을 모른 채 호텔에 대한 불만을 자신에게 풀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사내가 다시 차창을 두드렸다. 파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차를 쾅쾅 두드리자 지하주차장에 메아리가 울렸다. 심유진은 조수석의 틈 사이에 몸을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몸이 차와 같이 흔들렸다. “이래도 안 나와?” 차창은 모두 박살이 났고 차 안에 유리파편이 가득했다. 그냥 심유진이 숨어있는 곳만 간신히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죽고 싶어?” 그가 또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심유진은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그와 대항할 수 없었기에 그냥 최대한 피하며 누군가가 구하러 오기까지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오면 안 건드린다고 약속할게.” 심유진이 물러서지 않자 그가 살짝 태도를 바꿨다. “어차피 널 다치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그냥 나랑 같이 가주기만 하면 돼.” 심유진은 귀를 틀어막으며 애초에 그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김욱이 나타나기를 바랐다. 사내도 이제는 심유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직도 누가 구해주러 올 거라고 생각해?” 사내의 웃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자 심유진은 귀를 막고 있던 손을 살짝 풀었다.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이미 고장 났어. 계단 쪽 문도 이미 잠갔고.” 사내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네 오빠가 먼저 도착할지 아니면 내가 먼저 널 잡아갈지 맞춰봐.” 심유진이 멈칫했다. 킹 호텔은 엘리베이터가 두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만 지하주차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만약 그게 고장 나고 계단으로 통하는 문도 잠겼다면 호텔 정문과 2,300 메터정도 떨어진 입구로 들어와야 했다. 하지만 지금 주차한 위치는 그 입구와 가장 먼 곳이었다. 사내가 심유진 쪽으로 손을 뻗었다. 곧 잡힐 것만 같았다. 추위에 얼어서 파래진 사내의 손끝을 보면서 심유진은 그 손을 덥석 잡고는 꽉 물었다. 그가 비명을 질렀다. “이 년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심유진은 손을 문채 놓지 않았다. 사내도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김욱이 가면서 차 키를 가져갔기에 문이 완
사내는 얼른 몸을 피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심유진의 손도 놓아버렸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기에 파편에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심유진은 손바닥에 상처가 가득했고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반항에 사내는 더욱 분노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예리한 칼날에 빛이 반사되어 번쩍번쩍거렸다. “그래, 죽고 싶다면 그렇게 만들어줄게.” 그가 이성을 잃고 칼을 휘둘렀다. 심유진은 필사적으로 피했다. 이미 체력이 동난 상태였지만 살고 싶다는 의지로 최후의 저항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급박한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심유진은 그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허태준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걱정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심유진이 큰소리로 소리쳤다. “오지 마요, 이 사람 칼 있어요!” 사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허태준일지도 모르니 지금은 자신보다 허태준이 훨씬 위험했다. 하지만 허태준은 심유진의 경고에도 멈추지 않고 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사내도 더 이상 심유진과 실랑이하지 않고 허태준을 바라봤다. “허 대표님.” 그가 손에 든 칼을 흔들며 말했다. “이렇게 찾아오셨으니 저랑 같이 어디 좀 가실까요?” 허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유진은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허태준이 분노하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이 아끼는 여인이 다치는 걸 보고 싶은 건 아니죠?” 허태준이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 건드리면 넌 오늘 여기서 죽어.”그의 싸늘함에 사내의 기세도 많이 죽었다. “헛소리하지 마.” 그가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 “살인은 불법이야.” 허태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네가 하는 짓은 합법적이고?” “우린 다르지!”사내는 당당했다. “내가 무슨 회사 대표도 아니고 기껏해야 감옥에서 몇 년 살다가 나오겠지. 난 잃을 게 없어.” “그렇
허태준은 심유진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여전히 가만히 서있었다. 심지어는 심유진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사내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그가 팔을 뻗을 때 정확이 상대의 손목을 낚아챘다. “악!”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트렸다. 허태준은 얼른 칼을 발로 차서 멀리 보냈다. 칼이 사라지자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황스러움과 절망이 가득했다. “너...” 사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그의 두 발이 지면을 벗어났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가 바닥에 엎어졌다. 바닥과 부딪히면서 전해진 거대한 충격에 그는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허태준은 그 옆에 서서 발로 그를 밟은 채 내려다봤다. “누가 보냈어.” 허태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사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허태준이 발에 힘을 줬다.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말할 수 없어! 우리 집안사람들을 다 죽일 거야!” 허태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먼저 너네 집안사람들을 다 죽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사내가 멈칫했다.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살인을 청부하는 것쯤이야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허태준은 위협적인 말투가 아니라 정말 평온하게 이런 살벌한 말을 건넸다. 사내는 두려워하면서 고민하는 것 같았다. 허태준은 다시 미끼를 던졌다. “약속할게. 사실대로 얘기하면 너네 집안은 지켜주는 걸로.” “진짜?” 사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걱정 마, 내가 그 사람들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울 거니까.” 사내는 고민하다가 끝내 결정을 내렸다. “믿을게요.” “전 정철이라고 합니다. 킹 호텔의 보디가드고요. 심 지배인님을 납치해 오라고 시킨 사람은 부 지배인 유경원이에요.” 허태준은 많은 가능성을 예상해 봤지만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차 안의 심유진을 쳐다봤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사내를 지켜보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사실인지는 이제 조사해 볼게.” 허태준이 말했다. “못
김욱은 이미 차문을 열고 심유진을 빼냈다. “괜찮아?” 김욱은 심유진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얼굴이나 목 쪽에는 상처가 없었지만 손의 상처가 깊었다. “얼른 병원부터 가자.” 병원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허태준은 심장이 철렁해서 얼른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김욱이 심유진의 손바닥을 보여줬다. 유리에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요.” 심유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김욱은 놓아주지 않았다. 허태준은 심유진에게서 시선을 못 뗐다. 심유진이 말한 것처럼 사실 보기가 좀 그럴 뿐 심하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허태준은 두려움과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안해요.” 허태준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사과하는 거예요?” 아까 정철과 나누는 대화를 심유진도 들었었다. 지시한 사람은 부 지배인이고 부 지배인이 자신에게 어떤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허태준과는 관계가 없었다. “더 빨리 구하러 오지 못해서.” 허태준이 고개를 숙였다. 슬픔에 젖은 그가 유달리 약해 보였다. 축 처진 어깨 때문에 큰 덩치도 왠지 작아진 것 같았다. 심유진은 그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 “태준 씨가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심유진이 김욱은 째려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김욱이 코를 긁적이며 심유진의 시선을 피했다. “로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 좀 나누느라...”김욱이 해석했다. “좀 늦을 것 같다고 문자 보냈는데 못 받았어?” “여기에서 신호가 잘 잡히겠냐고!” 심유진이 화를 냈다.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여자한테 빠져서 동생은 뒷전이라고.” 이 말은 당연히 장난이었다. 만약 오늘의 이 일을 아버지한테 얘기한다면 앞으로 심유진에게 어떤 자유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미안해, 잘못했어.” 김욱이 진심으로 사과했다. “근데 대표님이 여기 계셔서 다행이다.” 허태준을 바라보는 김욱의 눈빛에 고마움이 가득했다. 허태준이
김욱의 차는 철저히 고장이 나서 더 이상 운전 할 수가 없었다. 허태준은 김욱의 요구에 따라 그들을 가장 가까운 병원에 데려다줬다. 심유진은 가는 길 내내 저항했다.“이제 피도 안나.”“아프지도 않고.”“며칠 지나면 괜찮아져.”“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하지만 차 안의 누구도 심유진의 말에 대꾸를 해 주지 않았다. 병원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매우 많았다. 허태준은 아는 사람을 통해 심유진이 먼저 진료를 받게 하려고 했지만 심유진은 그를 말렸다.“어차피 비행기는 이미 놓쳤는데요.”심유진의 눈빛에 원망이 가득했다. 허태준은 불만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허태준은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따뜻하게 말했다.“화내지 마요.”허태준이 심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진료받고 나면 공항으로 데려다 줄게요. 오늘 꼭 갈 수 있을 거예요.”심유진은 불쾌했던 감정이 허태준 덕분에 말끔하게 사라졌다. 심유진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서 기다리는 1시간 동안 허태준은 전화를 몇 통이나 쳤다. 허태준이 자꾸 멀리 떨어져서 전화를 받는 데다가 병원에 사람이 많았기에 심유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허태준의 표정이 자신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확연히 어두워졌다는 것만 볼 수 있었다. 심유진은 허태준이 일이 바쁜 줄 알고 몇 번이나 먼저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허태준은 번번이 거절했다.“중요한 일 아니에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꼭 제가 공항까지 데려다줄게요.”드디어 심유진이 진료를 받을 차례가 왔다. 심유진은 진료실로 들어가서 다친 손을 의사에게 보여줬다. 의사는 나이가 좀 있는 중년 여성이었는데 말투나 행동이 매우 부드러웠다.“어쩌다 이렇게 심하게 다쳤어요?”심하게 라는 말이 나오자 두 남성이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많이 심각한가요?”허태준이 물었다.“혹시 입원해야 하는 건가요?”김욱도 말했다.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두 사람 때문에 의사가 웃음을 터뜨렸다.“입원할 필요
별이는 괜찮았지만 눈치 빠른 아버지가 알아챌까 봐 무서웠다. “아니면 여기에 며칠 더 있다가 갈까?” “안돼!” “안돼!” 동시에 외치는 두 사람 때문에 심유진은 깜짝 놀랐다. 국내에서 위험에 노출될 바에야 육윤엽에게 들키는 게 훨씬 나았다. “오늘 꼭 떠나야 돼.” 김욱이 말했다. 허태준도 운전속도를 빨리며 계속 공항으로 향했다. 김욱은 원래 샀던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그 바로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샀다. 다행히 공항에 도착했을 때 늦지 않았다. 심유진은 허태준과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얼른 비행기를 타러 갔다. 허태준은 눈으로 그들을 배웅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둘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휴대폰을 꺼내 여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간 있어? 나랑 경찰서 좀 가자.” 경찰서에 도착한 정철은 조사실에 갇힌 채 허태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형민은 경찰들과 인사를 나누고 허태준과 같이 조사실로 들어갔다. 안에서 지키고 있던 경찰들은 모두 자리를 피했고 cctv전원도 꺼버렸다. 정철은 수갑을 찬 상태로 조용히 의자에 앉아있었다. 마스크를 벗으니 날렵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허태준을 보자 흥분해서 말했다. “약속 지켜요. 저희 가족한테 아무 일도 있어서는 안 돼요. 아니면 전 아무 말도 안할 거예요.” “됐어.” 여형민이 귀찮아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네가 잡혀서 다들 자기 목숨 부지하느라 바쁠 텐데 언제 너네 가족을 신경 써.” 정철은 그제야 진정했다. “유경원이 심유진을 왜 납치하라고 한 건지 말해.” 여형민이 맞은쪽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정철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라요. 그 얘기는 안 했어요.” 시선을 피하지 않는 걸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돈을 주면서 부탁할 게 있다고 했어요. 아들 학비를 마련해야 하니까 전 수락했고요.” “그럼 납치하고 심유진을 어떻게 처리하라는 얘기는 안 했어?” 여형민이 또 물었다. “주소를 보
40분 후 형사가 4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 부인과 함께 들어왔다. 여성은 옷차림이 검소했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빨갰다. 정철을 보자마자 그녀는 또 눈물을 흘렸다. “다른 사람 차는 왜 부숴!”형사는 밖에서 이미 여성에게 사건의 경과를 다 설명해 줬다. 당연히 정철이 차를 부수고 절도를 저질렀다고만 얘기했다.“우리 둘 다 다 일자리가 있고 월급도 낮지 않은데 왜 도둑질해!”아내의 질문에 정철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정철은 뭔가를 얘기하려다가 결국 한숨만 쉬었다.“가져오라던 물건은 가져왔어?”정철이 화제를 돌렸다. 여성은 눈물을 닦아 내고는 패딩 주머니에서 USB를 하나 꺼냈다.“이게 뭔데 그 멀리서부터 가져오라고 하는 거야?”아내는 여전히 분노와 원망이 가득한 것 같았다.“그건 신경 쓰지 마.”정철이 귀찮아하며 대답했다. “이 와중에 당당하지?”여성의 표정이 확 변했다. 당장이라도 정철과 싸움이 날 것만 같았다.여형민이 얼른 그녀를 말리며 USB를 받아서 컴퓨터에 꼽았다. 녹음 파일이 하나 있었다.“먼저 나가서 기다려 주세요.”여형민이 정철의 아내에게 말했다. 정철의 아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여형민과 정철을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고문할 건 아니죠?”여형민이 웃음을 터트렸다.“고문 같은 건 없어요. 그거 걸리면 다 처벌받아요.”정철의 아내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그럼 언제 나갈 수 있어요?”그녀가 다시 물었다.“그건...”여형민이 정철을 한번 쳐다 보고는 말했다.“모르죠. 조사에 협조하는지 봐야 돼요.”아내가 얼른 정철을 타일렀다.“꼭 조사에 잘 협조해. 잘못은 인정하고 벌을 받아. 나랑 당신 아들이 다 기다리고 있으니까.”정철이 눈시울을 붉히면서 대답했다.“알겠어.” USB 안에 담겨 있는 녹음 파일에는 정철이 말한 것처럼 그와 유경원이 거래를 하는 과정이 담겨 있었다. 유경원은 심유진이 호텔을 떠나는 시간을 알려줬고 그전에 임무를 완성하라고 당부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