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준의 얼굴은 가까이에 확대되었고 까만 눈동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블랙홀 같았다. 그 눈 안에는 심유진이 알 듯 말 듯한 정서가 담겨져 있었다.심유진은 넋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발버둥 치려는 것조차 까먹었다.허태준의 혀끝은 심유진의 입술을 파고들어 갔다. 한 손은 그녀의 고개를 받쳐 들면서 이 입맞춤을 더 깊게 했다.심유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두 손은 무의식적으로 허태준의 어깨에 대고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하지만 허태준은 추호도 움직임이 없었다. 심유진은 혀끝이 저려났다. 허태준은 그제야 심유진을 놓아주었다.허태준은 심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면서 턱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볼로 그녀의 목을 부비댔다.찌릿찌릿한 전류가 심유진의 온몸에 전해졌다. 심유진은 손끝이 오그라들었다.“그런 말 하지 마.”허태준의 낮은 목소리에는 나약함이 섞여 있었다.“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마.”무언가가 심장을 명중한 것같았다. 심유진은 아픔에 이불 시트를 부여잡았다.“잘못을 많이 저질렀어.”허태준은 고백했다.“네가 날 용서하기를 바라지 않을게. 다만 기회를 줘. 너랑 별이한테 더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줘.”심유진의 마음은 쉽게 녹아내렸다.허태준의 뉘우치는 모습은 또 한 번 심유진의 마음을 흔들었다.하지만...“나와 별이는 앞으로 미국에 살게 될 거예요.”그녀의 가족, 그녀의 제일 친한 친구는 다 그쪽에 있다. 허태준은 아직 심유진한테 그들을 버릴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허태준 또한 심유진을 위해 자신이 건립한 상업제국을 포기할 리 없었다.“우리는 이미 잘살고 있어요. 행복한걸요. 허태준씨가 더 잘해주지 않아도 돼요.”몇 년간 심유진은 하은설의 도움하에 혼자 별이를 데리고 무탈히 보내왔다. 별이는 그들 옆에서 지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은 것 외에는 부족함이 없었다.“요즘 미국의 게임 회사와 인수합병을 할 계획에 대해 논하고 있어. 잘 되면 사업 중심을 그쪽에 옮기게 될 거야.”허태준은 말했다.육윤엽이 심유진을 한
갑자기 또 곤두선 심유진을 보면서 허태준은 자신을 믿지 않는 심유진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나한테 기대도 돼.”허태준은 말했다.“별이를 보호할 책임을 다 나한테로 돌려.”그녀의 가냘픈 어깨로 모든 것을 짊어질 필요는 없다.심유진은 멈칫했다. 코끝이 찡해 나자 심유진은 급히 고개를 숙여 눈물을 숨겼다.**“허대표와 얘기는 잘 마무리됐어?”김욱은 썬 사과를 내와 심유진한테 한 조각 건네주었다.심유진은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사과즙이 뿜어져 나오면서 새하얀 이불커버에 노란 자국을 남겼다.“그런 셈이죠.”심유진은 사과를 오물거리면서 말했다.심유진의 마음속에는 사실 많은 질문들이 있었다. 왜 허태준의 아이를 임신하게 했는지, 왜 정소월한테 그렇게까지 했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한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기억을 잃었다는 전제가 사라지니 예전에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도 가늠할 수 없게 변해버렸다.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이런 것들을 물을 수는 없었다.“무슨 계획이야?”김욱은 물었다.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갑자기 생각나서 물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심유진도 진지하게 답장해야 했다.심유진은 머리가 복잡했다. 오늘 마주한 메세지는 너무 많아 아직 소화할 수 없었다.“돌아가서 얘기해요.”심유진은 하은설과 상의를 해야 했다. 심유진 혼자서는 결정을 짓기 어려웠다.어쨌든 허태준이 심유진한테 요구하는 것은 따로 없으니 심유진은 너무 생각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계획대로 진행하면 된다.“응?”김욱은 그녀의 대답에 멍해졌다.“뭐라고?”심유진도 멍해졌다.“뭐라 했어요?”두 사람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김욱은 의혹스레 입을 열었다.“허대표가 널 찾은 이유가 이소연씨때문이 아니었어?”이소연은 조건웅의 어머니였다. 심유진의 전전 시어머니의 이름이다.“네?”심유진은 놀랐다. 이 일을 아예 까먹었다.김욱은 심유진의 표정을 보니 허태준이 이 일에 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머리가 아팠다. 허태준은 왜 이렇게
김욱이 예상했던 것처럼 경찰은 조아주머니를 불러 얘기를 하고 훈육을 한 후 풀었다. 심지어 그들더러 화해하라는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호텔 측의 반응은 빨랐다. 당장에서 조아주머니를 짤랐다. 아마도 돌아와서 귀찮게 할 것 같아서인지 그달 월급까지 주었다.심유진이 머무른 층의 경비는 눈에 띄게 많아졌다. 호텔 부총매니저는 부하들을 이끌고 위문과 사과를 했고 선물까지 배달해 왔다.옛 동료들이었으니 심유진도 모두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다들 모여 앉아 얘기를 했다. 부총매니저는 심유진한테 물었다.“심매니저님, 앞으로 돌아올 생각이신가요?”심유진은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아니요! 부총매니저님은 열심히 하면 총매니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겁니다!”부총매니저도 심유진처럼 로열호텔에서 온 사람이었다. 로열에서 꽤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고 업무능력도 강했다.그는 심유진보다도 나이가 많았고 심유진보다 경험이 몇 년 더 많았다. 하지만 심유진이 총매니저가 된 이유는 그녀가 본부에서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부총매니저는 푸념하지 않았지만 심유진은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제가 본부에서 정식으로 이직 절차를 밟으면 재촉할게요. 부총매니저를 승진하게 하라구요!”모두들 부총매니저가 하루빨리 승진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부총매니저는 웃고 있었지만 딱히 기쁜 모습이 아니었다.**김욱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권을 끊었다.원래 김욱은 심유진이 이 기회를 빌어 허태준과 잘해보기를 바랬기에 급히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골칫덩어리가 찾아오니 김욱이 지금 떠나지 않고 아저씨가 오라고 할 때 간다면 다리가 끊어질 것이다.심유진은 김욱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떠나는 날, 호텔 문어구에는 적지 않은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유진과 허태준의 스캔들은 랭킹에서 없어졌지만 모두들 끊임없이 이 얘기를 하고 있었다.김욱은 심유진을 지하 주차장까지 데려다주고 심유진이 차에 무사히 타는 것까지 본 후 일층으로 돌아가 퇴실수속을 했다.지하 주차장의 신호는 있다가도 없어졌
심유진이 따라갈 리가 없었다. 비록 차는 망가졌지만 김욱이 오기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심유진이 한참 동안 차에서 내리지 않자 그 검은 옷의 사내가 화를 내며 말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가 곤봉으로 차창을 내리쳤다. 유리 파편이 차 내부로 튀였다. 심유진은 그 사내의 험악한 웃음이 더 잘 보였다. “이래도 안 내려와?” 그가 위협하자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침착함을 찾으려고 애썼다. “여기 사방이 cctv예요.” 심유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경찰이 못 찾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사내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웃기까지 했다. “내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알아?” 그가 우쭐거리며 심유진을 쳐다봤다. “지금 이 주차장의 모든 cctv는 다 꺼졌어. 내가 여기서 널 죽여도 경찰은 못 찾는다는 뜻이야.” 심유진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당당한데다가 차도 함부로 부수는 걸 보면... “너 호텔 직원이지.” 심유진이 물었다. 자유롭게 호텔 주차장에 들어오고 cctv도 끌 수 있는 사람은 호텔 직원 빼고는 없었다. 사내의 표정이 순간 굳어지자 심유진은 더 확신이 생겼다. 그녀는 이때다 싶어 머리를 굴렸다.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는 거야.” 사실 심유진은 호텔에서 일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고위급 간부들과 접촉하다 보니 직원들과는 만날 기회가 적었다. 지금 이 사내와도 뭔가 안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심유진은 그 어떤 직원과도 낯을 붉힌 적이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아니면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건가?” 아파서 오랫동안 일을 쉬었지만 본사에서는 아직도 자신의 자리를 채울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경주 킹 호텔의 총지배인은 여전히 심유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직원들이 그 속사정을 모른 채 호텔에 대한 불만을 자신에게 풀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사내가 다시 차창을 두드렸다. 파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차를 쾅쾅 두드리자 지하주차장에 메아리가 울렸다. 심유진은 조수석의 틈 사이에 몸을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몸이 차와 같이 흔들렸다. “이래도 안 나와?” 차창은 모두 박살이 났고 차 안에 유리파편이 가득했다. 그냥 심유진이 숨어있는 곳만 간신히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죽고 싶어?” 그가 또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심유진은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그와 대항할 수 없었기에 그냥 최대한 피하며 누군가가 구하러 오기까지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오면 안 건드린다고 약속할게.” 심유진이 물러서지 않자 그가 살짝 태도를 바꿨다. “어차피 널 다치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그냥 나랑 같이 가주기만 하면 돼.” 심유진은 귀를 틀어막으며 애초에 그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김욱이 나타나기를 바랐다. 사내도 이제는 심유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직도 누가 구해주러 올 거라고 생각해?” 사내의 웃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자 심유진은 귀를 막고 있던 손을 살짝 풀었다.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이미 고장 났어. 계단 쪽 문도 이미 잠갔고.” 사내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네 오빠가 먼저 도착할지 아니면 내가 먼저 널 잡아갈지 맞춰봐.” 심유진이 멈칫했다. 킹 호텔은 엘리베이터가 두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만 지하주차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만약 그게 고장 나고 계단으로 통하는 문도 잠겼다면 호텔 정문과 2,300 메터정도 떨어진 입구로 들어와야 했다. 하지만 지금 주차한 위치는 그 입구와 가장 먼 곳이었다. 사내가 심유진 쪽으로 손을 뻗었다. 곧 잡힐 것만 같았다. 추위에 얼어서 파래진 사내의 손끝을 보면서 심유진은 그 손을 덥석 잡고는 꽉 물었다. 그가 비명을 질렀다. “이 년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심유진은 손을 문채 놓지 않았다. 사내도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김욱이 가면서 차 키를 가져갔기에 문이 완
사내는 얼른 몸을 피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심유진의 손도 놓아버렸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기에 파편에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심유진은 손바닥에 상처가 가득했고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반항에 사내는 더욱 분노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예리한 칼날에 빛이 반사되어 번쩍번쩍거렸다. “그래, 죽고 싶다면 그렇게 만들어줄게.” 그가 이성을 잃고 칼을 휘둘렀다. 심유진은 필사적으로 피했다. 이미 체력이 동난 상태였지만 살고 싶다는 의지로 최후의 저항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급박한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심유진은 그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허태준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걱정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심유진이 큰소리로 소리쳤다. “오지 마요, 이 사람 칼 있어요!” 사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허태준일지도 모르니 지금은 자신보다 허태준이 훨씬 위험했다. 하지만 허태준은 심유진의 경고에도 멈추지 않고 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사내도 더 이상 심유진과 실랑이하지 않고 허태준을 바라봤다. “허 대표님.” 그가 손에 든 칼을 흔들며 말했다. “이렇게 찾아오셨으니 저랑 같이 어디 좀 가실까요?” 허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유진은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허태준이 분노하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이 아끼는 여인이 다치는 걸 보고 싶은 건 아니죠?” 허태준이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 건드리면 넌 오늘 여기서 죽어.”그의 싸늘함에 사내의 기세도 많이 죽었다. “헛소리하지 마.” 그가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 “살인은 불법이야.” 허태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네가 하는 짓은 합법적이고?” “우린 다르지!”사내는 당당했다. “내가 무슨 회사 대표도 아니고 기껏해야 감옥에서 몇 년 살다가 나오겠지. 난 잃을 게 없어.” “그렇
허태준은 심유진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여전히 가만히 서있었다. 심지어는 심유진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사내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그가 팔을 뻗을 때 정확이 상대의 손목을 낚아챘다. “악!”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트렸다. 허태준은 얼른 칼을 발로 차서 멀리 보냈다. 칼이 사라지자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황스러움과 절망이 가득했다. “너...” 사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그의 두 발이 지면을 벗어났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가 바닥에 엎어졌다. 바닥과 부딪히면서 전해진 거대한 충격에 그는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허태준은 그 옆에 서서 발로 그를 밟은 채 내려다봤다. “누가 보냈어.” 허태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사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허태준이 발에 힘을 줬다.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말할 수 없어! 우리 집안사람들을 다 죽일 거야!” 허태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먼저 너네 집안사람들을 다 죽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사내가 멈칫했다.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살인을 청부하는 것쯤이야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허태준은 위협적인 말투가 아니라 정말 평온하게 이런 살벌한 말을 건넸다. 사내는 두려워하면서 고민하는 것 같았다. 허태준은 다시 미끼를 던졌다. “약속할게. 사실대로 얘기하면 너네 집안은 지켜주는 걸로.” “진짜?” 사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걱정 마, 내가 그 사람들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울 거니까.” 사내는 고민하다가 끝내 결정을 내렸다. “믿을게요.” “전 정철이라고 합니다. 킹 호텔의 보디가드고요. 심 지배인님을 납치해 오라고 시킨 사람은 부 지배인 유경원이에요.” 허태준은 많은 가능성을 예상해 봤지만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차 안의 심유진을 쳐다봤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사내를 지켜보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사실인지는 이제 조사해 볼게.” 허태준이 말했다. “못
김욱은 이미 차문을 열고 심유진을 빼냈다. “괜찮아?” 김욱은 심유진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얼굴이나 목 쪽에는 상처가 없었지만 손의 상처가 깊었다. “얼른 병원부터 가자.” 병원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허태준은 심장이 철렁해서 얼른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김욱이 심유진의 손바닥을 보여줬다. 유리에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요.” 심유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김욱은 놓아주지 않았다. 허태준은 심유진에게서 시선을 못 뗐다. 심유진이 말한 것처럼 사실 보기가 좀 그럴 뿐 심하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허태준은 두려움과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안해요.” 허태준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사과하는 거예요?” 아까 정철과 나누는 대화를 심유진도 들었었다. 지시한 사람은 부 지배인이고 부 지배인이 자신에게 어떤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허태준과는 관계가 없었다. “더 빨리 구하러 오지 못해서.” 허태준이 고개를 숙였다. 슬픔에 젖은 그가 유달리 약해 보였다. 축 처진 어깨 때문에 큰 덩치도 왠지 작아진 것 같았다. 심유진은 그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 “태준 씨가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심유진이 김욱은 째려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김욱이 코를 긁적이며 심유진의 시선을 피했다. “로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 좀 나누느라...”김욱이 해석했다. “좀 늦을 것 같다고 문자 보냈는데 못 받았어?” “여기에서 신호가 잘 잡히겠냐고!” 심유진이 화를 냈다.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여자한테 빠져서 동생은 뒷전이라고.” 이 말은 당연히 장난이었다. 만약 오늘의 이 일을 아버지한테 얘기한다면 앞으로 심유진에게 어떤 자유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미안해, 잘못했어.” 김욱이 진심으로 사과했다. “근데 대표님이 여기 계셔서 다행이다.” 허태준을 바라보는 김욱의 눈빛에 고마움이 가득했다. 허태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