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면 꼭 애부터 낳아.”심연희는 타일렀다.”나이도 작지 않잖아. 더 늦으면 임신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애를 낳을 때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그녀의 매 한마디는 성심성의인 것 같았지만 심유진의 마음을 찔러댔다.하지만 심유진은 걱정하지 않았다.오히려 심연희한테 맞장구까지 쳤다.“그래.”그녀는 열심히 머리를 끄덕였다.두사람은 에스컬레이터까지 왔다. 심유진이 한 발 내밀기도 전에 팔목에서 큰 힘이 전해졌다.심연희가 아마 발을 헛디뎠는지 앞으로 쏠리기 시작하면서 심유진까지 끌어간 것이다.심유진은 빠르게 에스컬레이터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지만 심연희는 그녀의 힘에 의해 계단에 쿵하고 나앉았다.“아!”심연희는 고통스럽게 큰 소리를 내였다.그녀의 보디가드는 신속히 급정지 버튼을 눌러 위에서부터 달려 내려와 그녀를 부추겨 일으켰다.심연희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심유진을 노려보았다. 울부짖듯이 소리 질렀다.”언니,왜 나를 밀어?!”심유진의 머리는 이 초 정도 공백이 되었다. 정신을 차린 후에야 이 모든 것들은 심연희의 트랩이라는것을 눈치챘다.“나는 밀지 않았어.”심유진은 덤덤하게 말했다.심연희의 눈물은 더 많아졌다.”언니. 양심에 손을 얹고 나는 언니한테 미안한 짓을 한적이 없어... 언니의 지금 삶도 내가 이렇게 만든 게 아니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몇몇 경호원은 그녀를 에워쌌다.“사모님, 병원에 가시죠. 여기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됐어요.”심연희는 손을 저어 억울한듯 심유진을 바라보고 경호원한테 말했다.”언니는... 잠시 정신이 나간 것 뿐이예요. 저는 지금 병원으로 갈 테니 이 일은 남편한테 얘기하지 말아줘요.”경호원은 난처했다.”하지만 주인께서 물으신다면...”“제가 부주의해서 넘어진 거라고 하세요.”심연희는 대범한 척 모든 책임을 자신한테 돌렸다.심유진은 심연희가 한무리의 사람들의 부축하에 떠나는 것을 보자 아까까지 배고파 죽을 것 같았지만
심유진은 허 씨 집에 들렸다.그녀가 연루되었으니 허태준의 부모님한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허 씨 집안 둘째 삼촌과 아주머니는 거실에 앉아있었다. 얼굴 색이 안 좋았다.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둘째 아주머니는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독한 년! 내 손주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친다면 너를 가만두지 않을 테야!”둘째 아주머니의 손톱은 길고 뾰족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심유진의 얼굴에는 핏자국이 세 가닥 나 있었다.허 아주머니는 한발 늦었다. 늦게 막아서다 보니 심유진이 얼굴을 감싸고 나서야 그녀를 뒤로 데려왔다.“진정 좀 해! 유진이가 하는 얘기도 듣고!”“듣긴 뭘 들어? 지 입으로 인정을 하겠어?”둘째 아주머니는 심유진을 노려보았다.”이렇게 악독한 사람은 처음 봐! 연희는 쟤 동생이야. 동생한테까지 손을 대다니!”심유진은 당당하게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저는 연희를 밀지 않았어요. 자기 절로 넘어진 거예요. 추궁하려 들면 제가 오히려 붙잡아줬기에 굴러 떨어지지 않은 거죠. 아니면 태아가 불안정한 게 아니라 유산을 했겠죠.”“거짓말!”둘째 아주머니는 그녀를 가리키며 욕을 했다. 앙칼진 목소리는 심유진의 고막을 찔러대 귀가 아팠다.“댁의 손주를 구한 게 겨우 이런 꼴이었으면 애초에 심연희의 손을 놨었어야 했어요. 적어도 욕을 먹어도 억울하지 않게요.”심유진은 웃었다.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사실이 어떻든 다들 관심이 없으시겠죠. 제가 잘못했다 치죠.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겠네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저는 신경도 안 쓰니까요. 하지만 하나 아셔야 할건, 저랑 허태준은 이미 이혼을 한 사이이기에 앞으로 저를 찾으시려 거든 여기에 오지 마세요.”허 씨 집안 사람들은 멍해졌다. 그녀가 당당하게 반박할 줄을 몰랐는지 아니면 그녀와 허태준이 이혼한 사실을 듣고 멍해졌는지.심유진은 허태준의 부모님께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죄송해요. 아버님 어머님. 폐를 끼쳐드렸네요.”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얼굴에 핏자국을 가리키며 둘째 아주머니한테
”네.”심유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비와 안개는 시선을 가렸고 그녀는 이십몇 년 동안을 미워한 이 도시를 잘 볼 수 없었다.차라리... 잘됐지.운전기사는 쉴새 없이 얘기를 해댔다. 그녀는 한 마디도 듣지 않았다.길이 너무 막혀 공항에 도착하자 심유진은 줄곧 뛰어다녔다. 겨우 비행기에 탑승을 했다.비행기가 뜨자 스튜어디스는 승객들더러 핸드폰을 꺼 놓으라고 했다.심유진은 못 참고 허태준한테 카톡을 남겼다.”안녕. 그 사람과 행복하길 바래.”몇 년이 지나서야 보겠지. 아니면 영원히 못 볼 수도 있고. 하지만 상관이 없었다.그녀한테 있어서 이것은 신성한 의식 같은 것이다.그와 작별을 해야만 자신의 과거와 작별을 하는 것이다.**긴 비행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이코노미석의 애기의 장난과 울음소리는 머리가 아프게 했다.심유진은 일어서서 화장실로 갔다. 잠시나마 혼란에서 벗어나려고.하지만 화장실 입구에서 바닥에 쓰러진 채 경련이 일어난 중년 남성을 보게 되었다.호텔 객실부 매니저로서 그녀는 간단한 응급처치를 배웠었다. 입에서 계속 거품이 나오자 간질병이 발작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외투를 벗고 소매를 실모양으로 접어서 물게 했다. 그리고 그의 입주변의 거품을 닦아냈다.“약이 있나요?”그녀는 급하게 물었다.중년 남자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손을 떨면서 바지주머니를 가리켰다.심유진은 그 안에서 작은 유리 약병을 꺼내 한 알을 집어서 그의 입에 넣었다.지나가던 스튜어디스는 깜짝 놀랐다. 겨우 진정을 해서 물었다.”무슨 일이시죠? 도움이 필요하신 가요?”“이분이 발작을 일으켰어요. 약은 먹었구요. 여기서 지켜보도록 하세요. 혀를 깨물지 못하게 하시구요.”심유진은 자세히 설명을 하고 스튜어디스가 떠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볼일을 보고 나오자 밖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바닥도 깨끗하게 청소되었다.환자가 회복했나 보다.그녀는 숨을 돌리고는 다시 자리로 가서 앉았다.심유진이 겨우 잠들었는데 얼마
중년 남성은 심유진과 같이 셔틀버스를 탔다.그는 열정적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심유진은 그의 성함이 육윤엽이라는 것과 국제 유명한 블루스타 항공회사에서 일하는 것과 업무 때문에 한국과 미국을 자주 드나든다는 것을 알았다.“보통은 조수를 데리고 다니는데 이번엔 조수 집에 일이 생겨서 저랑 같이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런 일이 생겼지 뭐예요.”육윤엽은 아직도 심장이 벌렁댔다.”다행히 아가씨를 만났으니 망정이예요.”그는 심유진의 명함을 받으려 했다.”오늘 회사에 일을 처리하러 가야 해요. 다음에 식사대접을 하면서 감사인사를 드리도록 하죠.”심유진은 미안하게 웃었다.”여기에는 공부하러 온 거라서요. 오늘에 도착했습니다.”육윤엽은 “오.”했다. 그리고는 이마를 찌푸렸다.”대학은 8월 말에 개강하지 않나요? 이렇게 빨리 왔어요?”“먼저 어학원에 좀 다니려고요.”심유진은 쑥쓰러워하면서 고개를 숙였다.”스피킹이 안돼서 바로 수업을 들으면 따라가지 못 할 것 같아서요.”육윤엽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준비할 건 다 준비했나요?”심유진에게 목숨을 구해준 값을 하려고 그러는지 그는 그녀의 상황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학교랑 머무를 곳은 찾았나요? 지인이 데리러 오나요? 차로 바래다 줄까요?”심유진은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친구가 있어요. 다 안배를 해줬습니다.”“그래요.”육윤엽은 아쉬웠다. 그는 주머니에서 도금을 한 펜을 꺼내 심유진의 손바닥에 숫자를 적었다.“제 전화번호입니다. 전화 카드를 발급받으면 꼭 연락 주세요.”심유진은 손바닥을 맞잡고 예의 있게 웃었다.”그럴게요.”**육윤엽이 나가자마자 양복 차림을 한 외국 남성 두 분이 다가와 그의 캐리어를 대신 잡았다.육윤엽은 다른 한분을 지휘했다.”저 아가씨도 좀 도와주세요!”심유진은 연거푸 거절했다.”아니에요! 제가 하면 됩니다!”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하은설은 위치를 발송해왔다. 심유진더러 나오자마자 그녀를 찾아오라고 했다.“제 친구를 만나러 가봐야겠어요.”심
하은설이 웃으며 말했다. “강한 척하는 건 여전하네?” 심유진도 입을 삐죽거렸다. “너도 나한테 시비 거는 건 여전하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좋다.”하은설의 말에 심유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두 사람 모두 많이 변했지만 그들의 우정만은 전혀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있었다. 하은설은 집까지 차를 몰고 갔다. 그녀의 집은 소위 말하는 “농촌”에 위치해 있었기에 고층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주위에 보이는 집들은 모두 넓은 마당이 있는 작은 별장들이었다. 하은설의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년간 차곡차곡 저축한 돈으로 마련한 집이었다. “경주 시중심에서 화장실 한 칸 살 정도의 가격이야.” 하은설이 얘기했다. 심유진은 이런 생활이 너무 부러웠다. 집안에 들어가니 주차장과 오락실, 헬스장까지 볼 수 있었다. 게임기나 운동기구 같은 건 심유진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그저 이 정도로 큰 집이 없을 뿐이었다. “집 값이 싼 게 장점이야.”하은설이 한숨을 쉬었다. “주변에 정말 아무것도 없거든. 마트나 병원 모두 여기서 몇천 킬로미터는 가야 돼. 저녁 8시만 돼도 길에 아무도 없어. 혼자 살 때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넌 모를 거야. 밤마다 누가 쳐들어와서 날 해치기라도 할까 봐 마음 졸였는데 이젠 네가 왔으니까.” 하은설이 심유진을 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이젠 무서워할 필요 없겠다!” 심유진은 자신을 데려온 것이 이 목적 때문이었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은설은 자신의 옆방을 내어줬다. “원래는 손님방이었어. 혹시 친구들이 오면 이 방을 쓰게 했었는데 사실 쓸 일이 별로 없으니까 방에 딱히 뭐가 없어. 이불은 다 새 거로 갈아 놨으니까 이 방은 네가 마음대로 인테리어 해도 돼. 이젠 네 거야.” 심유진은 방을 꾸밀 기력도 없었다. 샤워를 끝마치고 침대에 눕자마자 심유진은 잠에 들었고 짐도 풀지 못했다. 하은설이 방에 들어와서 심유진을 깨워서야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이 정도는 먹어줘야 하는 거 아냐?” ”그건 그래.” 하은설도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심유진은 여전히 하은설이 강제로 깨워야만 일어났다. 알람이 몇 번이나 울리는데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은설이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 ”네가 돼지야? 어제 온종일 잤으면서 밤에 잠이 와?” 시차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같이 밤새 얘기나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필요 없는 걱정이었다. 심유진이 하품을 하며 인정했다. ”나 진짜 돼지인가 봐.” 이 말을 하면서도 심유진은 몰려오는 졸음을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아침은 여전히 하은설이 준비했다. 토스트와 계란프라이, 베이컨, 그리고 우유 한잔이었다. 사실 아침 식사로 충분한 양이였는데도 심유진은 여전히 배가 부르지 않아 하은설 집에 남은 토스트까지 다 먹어 치웠다. ”너 진짜 좀 이상해.” 하은설이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오전에 볼일 다 끝나면 병원 가서 검사 한번 해보자. 아무 일도 없으면 좋은 거고 혹시 무슨 병이 있는 거면 빨리 치료할 수 있으니까.” 사실 심유진도 자신의 상태가 조금 달라진 걸 눈치챘다. 하지만 그저 환경이 달라지면서 생긴 변화일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굳이 병원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은설은 끝내 심유진을 병원까지 끌고 갔다. 심유진은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기에 대부분 하은설이 의사와 대화를 했다.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하은설이 놀란 표정을 하더니 복잡한 심정으로 심유진을 바라봤다. 심유진은 영문은 모르지만 굉장히 초조해졌다. “왜? 뭐라고 하시는데?” “너 혹시 이번 달에 생리 온 적 있어?” 하은설의 뜬금없는 질문에 심유진이 잠시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아직 없어.” 심유진은 일이 바쁜 데다가 야근까지 자주 했기에 생활패턴이 매우 불규칙적이었다. 그러니 생리 불순이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 데다
그녀는 확실히 성생활을 오랫동안 안 했다. 하은설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물었다. “이 아이 낳을 거야?”“아니!”심유진의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겪었던 비극을 아이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은설이 심유진의 선택을 의사에게 전달했다. 의사 선생님의 얼굴에서 웃음이 점차 사라지더니 아쉬움만 남았다.“수술 날짜는 빠른 시일 내에 잡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더 자세한 검사가 필요해요.”한 시간 가량의 검사를 마친 후 의사가 얘기했다. “지금 상태로는 당장 수술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심유진은 약을 잔뜩 처방받았다. “일단 몸상태부터 회복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검사하러 오세요. 그 사이에 정말 아이를 낳지 않으실 건지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네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심유진과 하은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 안은 너무 조용해서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한참 지나 하은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이를 안 낳는 게 맞는 것 같아. 이제야 새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는데 아이한테 잡혀 있을 수는 없지. 게다가 낳는다 하더라도 온전한 가족의 사랑을 줄 수 없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심유진은 아이를 낳을지 말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 아빠가 누구일지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을 계산해 보면 병실에서 병간호를 해주던 그때 임신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상하게 몸이 쑤시긴 했는데 설마 밤중에 누군가 허태준의 병실에 들어가 그런 짓을 했던 걸까? 어떤 일이 있었던 간에 이제 심유진은 증거를 댈 수도 없었다. “시내에 타로점을 봐주시는 분이 있는데 진짜 용하대!” 하은설이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이따 같이 가서 운세나 한번 보자.” 심유진은 이런 걸 잘 믿지 않았지만 하은설이 기대하는 듯하니 그냥 한번 체험이나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동의했다. 시내는 확실히 흥성흥성했다.
심유진은 몰래 도망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은설이 신속하게 그녀를 자리에 앉혔기 때문이었다. 심유진은 타로술사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테이블 우에는 촛불과 타로 카드밖에 없었다. “나랑 가장 친구, Shen이에요.”하은설이 타로술사에게 심유진은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왠지 음산한 목소리에 심유진은 또 조금 무서워졌다. “안녕하세요.” 심유진이 억지로 웃으며 인사하자 타로술사가 타로 카드를 손에 들며 말했다. “어떤 타로를 보시겠어요?” 하은설이 대신 대답했다. “해외에서 여기로 온지 얼마 안 됐어요. 이제 과거는 잊고 새 출발을 할 생각인데 앞으로 일이 순탄하게 풀릴지 좀 봐줘요.” 타로술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카드를 테이블에 깔고 심유진에게 다섯 장 뽑으라고 했다. 심유진은 딱히 이 타로점을 믿지 않았기에 대충 다섯 장 뽑아서 내밀었다. 그중 첫 장을 뒤집은 타로술사가 걱정 어린 눈길로 심유진을 보며 말했다. “얼마 전에 잘못된 선택을 하셨군요.” 얼마 전이라는 말은 매우 애매한 단어였다. 1분 전이 될 수도 있고 한시간 전이 될 수도 있고 한 달 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은 일생 동안 수많은 틀린 선택들을 하는 법이다. 심유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은설은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타로술사가 두 번째 카드를 해석했다. “아마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일 거예요.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지만 이것 또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죠. 감정상에서는 굉장히 타격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사랑을 놓지 못했군요. 비록 지금은 눈앞에 많은 시련들이 있지만 다 이겨내고 나면 앞길이 평탄할 거예요.” 지금 심유진의 상태와 비슷했다. 사랑을 아직 놓지 못했다는 말만 빼고. 그 말 때문에 심유진은 타로술사가 하는 말들이 들어맞는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카드는 가장 최근의 사랑이 당신의 도피로 인해 끝난다고 알려주네요. 상대를 위해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