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는 남는 의자가 더 이상 없었고, 소파는 또 너무 멀었기에 허태준은 대충 심유진의 침대 발치에 앉아 작은 자리를 차지했고, 그의 엉덩이는 그녀의 발바닥에 닿았다. 심유진은 깜짝 놀라며 불에 덴 것처럼 다리를 움츠렸다. 허태준은 그녀의 급격한 움직임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어제 두 분 모두 감사합니다. 우리 유진이가 회복되어 퇴원하면 두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그는 마치 정말 심유진의 남자친구인 양 말했다. 심유진은 그의 ‘우리 유진이’ 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으며, 얼굴의 미소도 약간 부자연스러워졌다. 계약 내용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는 커플인 척할 필요는 없었다.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에게 협조해야 했다. “맞아요, 두 분이 아니었으면 전 지금 중환자실에 있었을 거예요!” 장 씨와 그녀의 남편은 둘 다 매우 당황스러워했다."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무시하지 않을 거예요.”그러자 심유진이 반박했다.“그래도 당연한 일이 아니야.” 세상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고, 그녀가 장 씨의 가족을 만난 것은 오직 그녀의 행운 덕분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어제와 같은 상황에서는 죽지 않더라도 생명만 거의 유지할 수 있었을 거다. “굳이 말하자면 저희가 더 감사해야죠.”장 씨는 감격에 가득 찬 눈으로 허태준을 바라보았다."오늘 아침 일찍 인부 몇 명이 와서 저희 집 방범문을 바꿔 주고 가셨어요. 그 사람들은 유진이가 보냈다고 말했지만 저는 유진이가 심하게 다쳤기 때문에 그런 걸 생각할 여력이 없을 거라고 했어요. 그러니, 분명 허 선생님께서 신경을 써주신 거겠죠?”허태준은 나서서 그의 공을 말하지는 않지만 일부러 숨기지도 않았다.“네.”그가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당연한 보상입니다.”심유진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장 씨가 말한 것처럼 생각할 여력이 없는 것이 아닌 아예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었다. 그녀는
그녀는 허태준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얼마예요?”허태준은 대답을 피하고 두루뭉술하게 말했다."별로 비싸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그러자 장 씨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부러워하며 말했다.“유진아, 허 선생님은 너무 친절하신 것 아니니!”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남편에게로 둔 채로 팔꿈치를 구부리고 그의 허리를 찔렀다.“당신도 좀 보고 배워!” 억울하게 연루된 장 씨의 남편은 조금 피곤해 보였고, 그는 애꿎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돈이 많아야지 보고 배우든가 하지!” 그러자 장 씨는 퉁명스럽게 말했다."당신은 말주변이 없어서 상사에게 아부할 줄도 모르잖아? 매일 열심히 일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당신과 같이 회사에 입사한 사람들을 좀 봐, 그 사람들은 부장으로 승진하거나 다른 회사로 이직해서 월급이 두 배로 올랐다고. 그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팀장으로 남아있는 사람은 당신 하나라고!” 장 씨의 남편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밖에서는 제발 내 체면도 생각해 주면 안 돼?” 장 씨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지만,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이때 허태준이 말을 꺼냈다.“실례지만 형님께서는 어느 회사에서 근무를 하고 계십니까?”장 씨의 남편은 이 씨로, 나이가 허태준보다 두 살 위였다. 장 씨의 남편이 대답했다.“YT 그룹 산하의 건축 설계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팔공산에 있는 그 성운 별장도 우리 팀이 설계한 거죠.”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성운 별장을 그가 성운 별장을 언급했을 때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1년 넘게 이웃으로 지내온 심유진은 직업이나 사생활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YT 그룹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 놀랐다. 허태준 또한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는 결코 많은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내면의 감정 변화를 전혀 알아챌 수 없었다. “저도 얼마 전에 성운 별장에
심유진의 휴식을 방해할까 봐 장 씨와 그녀의 남편은 잠시 앉아 있다가 떠났고, 허태준은 그들을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마중 나간 뒤 다시 돌아왔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심유진이 마치 새로운 종족을 발견한 듯 궁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허태준은 부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진 뒤 시선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무슨 일인데?”“네?”심유진은 자신의 행동이 너무 티가 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재빨리 눈을 내리깔며 얼버무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녀는 단지... 조금 놀랐다.손님을 배웅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한 행동이며 반대로 손님을 배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예의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허태준이 그 행동을 하자 심유진은 그가 매우 겸손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사실, 장 씨와 그의 남편이 이곳에 온 후 허태준이 한 모든 일은 그의 평소 성격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심유진은 심지어 허태준에게 알려지지 않은 쌍둥이 형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품었다.그렇지 않으면 그가 한 행동 중 어떤 것도 과학적 원리로 설명될 수 없다.허태준은 그녀를 한 번 더 쳐다보고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았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그는 장 씨와 남편이 앉아 있던 의자를 구석에 놓은 뒤 심유진에게 물었다. "지금 샤워할 거야?”심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다 보니, 살갗의 상처가 여전히 끔찍해 보이기는 했지만 어제만큼 아프지는 않았다.그녀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고, 두 발이 똑바로 땅에 닿은 후에야 허태준의 비스듬히 뻗은 손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녀를 부축하려 한 거겠지. “아……”심유진은 약간 괴로웠다, 그녀는 그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손바닥을 붙잡았다. "고마워요."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체리색 입술의 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눈동자는 파도의 물결처럼 흔들렸다. 그러자 허태준은 화들짝 놀라며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입술이 메마
그 과정이 조금 더 힘들었지만 그를 알몸으로 마주하는 것보다는 나았다.허태준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는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어 여유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럼 상의를 한 번 벗어봐 봐.” 그는 그녀가 혼자서 절대 옷을 벗을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심유진은 얼굴이 붉어지며 화를 내며 말했다. "태준 씨가 아직 여기에 있는데 어떻게 옷을 벗어요?” 그러자 허태준은 조용히 등을 돌렸다.“이제는 괜찮지?”그러자 심유진은 그가 엿보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한 후 그녀도 등을 돌렸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왼손으로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다행히 환자복의 단춧구멍이 커서 모든 과정에 많은 노력이 들지는 않았다.오른쪽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에 환자복을 평소보다 한 사이즈 크게 입었고, 왼쪽 옷깃을 뒤로 젖히자 소매 전체가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그런 다음 오른쪽 소매를 잡고 아래로 끌어내렸고, 상의를 완전히 벗어냈다. 그러자 심유진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다 벗었어요.”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허태준이 언제 돌아섰는지 그 순간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악!”심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벗은 상의로 몸을 가렸다. "변태! 빨리 나가요!” 그녀는 무심코 옆 선반에서 샤워젤인지 샴푸인지 알 수 없는 병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하지만 허태준은 침착하게 그 병을 잡아냈고, 어두운 눈동자에는 억울한 기색이 역력했다."나는 단지 네가 혼자 옷을 벗는 게 힘들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한 건데, 게다가 넌 부끄럼이 많으니까 절대로 나한테 직접 부탁하지도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물어봤을 뿐이야. 그리고……”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결백을 표시하면서 동시에 우스갯소리로 말했다."내가 정말로 뭔가를 하고 싶다면 이렇게 몰래 할 필요가 있을까? 네 체력은 나보다 훨씬 열등해. 또 넌 어깨를 다쳐서 저항할 힘도 없잖아.”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차분했고,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심유진의 마음은 점차 흔들렸다, 정말로 그를 오해한 걸까?"미안
3일 뒤, 심유진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허태준은 그녀의 퇴원 절차를 밟았다.사실 그날 밤 통증으로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그녀의 몸에 있는 그 정도 상처로는 병원에 입원할 필요도 없었다. 심유진은 허태준에게 은행 계좌 번호를 물었고 지난 며칠 동안의 입원비와 치료비를 갚으려 했지만 그에 의해 거절당했다. 그때 허태준은 심유진의 집을 떠나려던 참이었고, 한 손은 이미 문고리를 잡고 있었고, 문고리를 살짝 내리자 대문에 미세한 틈이 생겼다.심유진의 말을 들은 그는 고개를 돌려 짙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렇게 많은 돈도 아니야.”그는 순간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드러냈다. "게다가 여자친구한테 돈 쓰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는 이 말을 가볍게 내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나섰고, 심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여자……친구? 그녀는 그가 ‘가짜’ 라는 단어를 놓친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얼굴을 붉혔다. 심유진은 며칠 더 집에서 쉬다가 오른팔을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된 후 휴가를 취소하기 위해 호텔로 돌아갔다.허태준은 여전히 매일 같은 시간에 그녀를 데려다주었지만 단지 더 이상 그녀에게 점심에 CY 그룹으로 달려와 점심을 배달하라고 요청하지 않았다.일은 산더미처럼 쌓였고, 심유진은 며칠 동안 바쁘게 지낸 후 마침내 시간을 내어 집의 자물쇠를 교체할 사람을 찾았다.그녀는 중개인에게 다시 연락해 그와 약속을 잡았고, 그에게 새 문 열쇠를 주고는 구매자를 데리고 집을 보러 가도록 요청하려 했다. 중개인은 구매자가 이미 마음을 정했고, 집을 보는 것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그 자리에서 계약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자신이 그 자리에 있으면 더 좋겠다고 말했다.심유진은 확실히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여 구매자에게 언제 시간이 되는지 물어보라고 요청했다.중개인은 자신의 성과와 커미션에 대해 매우 의욕이 넘쳤고 신속하게 날짜를 정했다. "이번 주 금요일 오전 어떠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장선생님은 차분하고 행동이 점잖아 보였다. 심유진은 그가 급히 집을 사러 온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집을 둘러보지 않고 그저 심유진을 따라 내내 걸었다. 예의를 갖추면서 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심유진은 이분의 신분이 심상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왜 위치도 별로 좋지 않고 크지도 않은 이 집을 사려는 걸까? 궁금했으나 물어볼 수가 없었다. 겨우 집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 이유가 뭐가 됐던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됐다. 집을 다 둘러보고 나서 장선생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음에 드네요. 혹시 지금 계약해도 될까요?” 그는 심유진의 집문서라던지 신분증 같은 것들을 확인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부동산 직원이 재빨리 미리 준비해 뒀던 계약서를 꺼냈다. 심유진은 계약서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 확인한 후 신중하게 서명을 했다. 하지만 장선생님은 달랐다. 그는 계약서를 받자마자 가장 뒷페이지를 펼치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장욱이라는 두 글자를 적어 넣었다. 심유진이 말했다. “계약서 검토 안 해보셔도 괜찮으시겠어요? 혹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장욱이 웃으면서 물었다. “있어요?” “어... 없긴 한데요...” 심유진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장욱도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심유진 것과 바꾸며 다시 한번 서명했다. 이로써 계약이 성사되었다. 계약서는 두 사람과 부동산 측이 각각 하나씩 가지고 있어야 했다. 장욱이 시계를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혹시 이다음에 다른 일이 있으실까요?” “아니요. 왜 그러세요?” “그럼 오늘 바로 나머지 수속도 밟는 건 어떨까요?” “그래요.” 심유진도 이참에 계약을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약서에 따르면 수속을 마무리 짓기 전 장욱은 심유진에게 일정한 금액을 먼저 지불해야 했다. 은행으로 가는 길에 장욱은 심유진에게 모든 금액을 이체해 줬다.
집을 살 계획이 생긴 다음부터 심유진은 한가할 때마다 인터넷에서 새집 관련 정보를 찾아봤다. 그러면서 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체크해 뒀다가 전화를 걸어 더 자세히 알아봤다. 심연희가 심유진에게 선물을 건네주러 왔다가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 “언니, 집 사려고?” 심연희가 놀라서 물었다. 심유진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니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응.” “왜?” 심연희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대표님이랑 결혼할 거야?” “그게 아니라...” 심유진이 멈칫했다. 심연희한테 자기가 살 집이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심연희가 분명 허태준과의 관계를 의심할 것이다. “투자하려고.” “그렇구나.” 심연희는 더는 의심하지 않고 그 말을 믿었다. “근데 정말 경주에는 안 돌아갈 거야?” “응.” 심유진은 더는 심연희와 이 화제를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뭐 마실래? 가져다줄게.” “난 물.” 심연희가 소파에 앉으면서 물었다. “언니, 나 저녁 먹고 가도 돼?” 심유진은 부상을 입은 후로 계속 허태준이랑 여형민과 함께 밥을 먹었다. 낮에 집에 있을 때면 허태준이 아줌마에게 부탁해 밥을 차려주곤 했다. 그래서 심연희의 이 부탁이 조금 곤란했다. 선물을 줬으니 밥 한 끼 같이 먹는 게 맞는 행동이겠지만 이건 심유진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유진은 한참 고민하다가 물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우리 둘이 나가서 먹자.” 심연희는 생각만큼 기뻐하지 않았다. “어... 나 출근하고 나서부터는 항상 밖에서 먹어서 이젠 다 질렸어. 집밥 먹고 싶어.” “근데 사놓은 재료도 없어. 그리고...” 심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울렸다. 허태준에게서 온 전화였다. 당연히 밥 먹으러 오라고 건 전화일 것이다. “밥 다 됐어. 내려와서 먹어.”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심유진은 심연희를 힐끗 쳐다보고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연희가 선물을 가져와
심연희는 심유진 앞을 가로막고 들고 온 종이백을 쳐들었다. “안녕하세요, 이건 선물이에요.” 여형민은 갑자기 튀어 나온 심연희에 깜짝 놀랐지만 종이백을 받고 웃으며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식사하러 들어가시죠.” 허태준이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연희는 심유진과 여형민을 제치고 그의 옆에 앉았다. “대표님,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심연희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종이백을 허태준에게 건넸다. “너무 귀중한 선물이네.” 허태준이 종이백을 심연희 쪽으로 밀어놨다. “심연희 씨 남자친구한테 주는 게 낫겠어.” 심연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자친구 없는데요. 그리고 이건 대표님을 생각하면서 고른 거예요. 비싼 것도 아니고요.” 심연희가 머뭇거리며 해명했다. “이 브랜드는 웬만해서는 다 몇백만 원씩 할 텐데요. 아리 라이브에서 일하신다면서요. 월급도 높지 않으실 텐데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여형민이 돌직구를 날렸다. “괜찮아요, 이번달에 수입이 짭짤하거든요.” “아, 아리 라이브에서 1,2위를 한 bj들이 다 심연희 씨가 데리고 있는 애들이죠? 광고도 받고 대형 행사에도 초대받았다면서요.” 여형민의 말에 심연희는 더욱 우쭐해졌다. “맞아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실적을 따내다니 대단한데요.” 여형민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심연희는 저도 모르게 허태준 쪽을 힐끔 바라봤다. 그에게서도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허태준은 이 대화에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유진.” 허태준이 뻘쭘하게 옆에 서있던 심유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와.” 그 따뜻한 목소리와 다정하게 챙겨주는 모습에 심연희는 질투가 나 이를 꽉 깨물었다. 여형민네 집의 식탁은 긴 장방형 모양이었고 양쪽에 의자가 세 개씩 있었다. 허태준은 가장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고 심연희가 그 옆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 두 자리와 맞은쪽의 자리에만 수저가 세팅되어 있었고 밥도 이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