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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그리고 두번째 사랑
시한부, 그리고 두번째 사랑
Author: 일립

1 화

Author: 일립
“뇌종양이 자라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위치도 좋지 않아 수술을 한다 해도 성공률이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1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의사의 말이 오랫동안 귓가를 떠나지 않아 하연서는 멍한 표정으로 병원에서 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손에 들린 검사보고서는 이미 꼬깃꼬깃해진 상태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하연서는 이 일을 약혼자인 배시혁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떨리는 손으로 겨우 문자를 보냈다.

[시혁 씨, 오늘 일찍 들어와. 할 얘기 있어.]

순간 굉음과 함께 차가 휘청거렸다. 관성을 이기지 못해 머리를 좌석에 박은 하연서는 너무 아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이 시끌벅적해졌고 하연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차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젊은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저기요...”

“저 괜찮아요...”

하연서는 소년의 표정이 변한 걸 눈치채지 못하고 얼른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저었지만 소년이 하연서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

“병원에 데려다줄게요.”

“괜찮아요...”

소년은 하연서의 거절을 무시하고 하연서를 번쩍 안아 든 채 롤스로이스 뒷좌석으로 향했다.

“삼촌, 나 병원에 좀 다녀올게요.”

반쯤 내려진 창문으로 남자의 차갑지만 준수한 옆모습이 보였다. 오뚝한 콧날에는 금테 안경이 살포시 올려졌고 안경 뒤로 보이는 예쁜 눈은 태블릿으로 업무를 확인했다. 주변은 엉망이었지만 남자는 전혀 영향받지 않은 듯 보였다.

“그래.”

소년을 허락받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하연서는 머리가 점점 무거워 자기도 모르게 소년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

다시 깨어났을 때 하연서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변에 아무 사람도 없음을 확인한 하연서는 겨우 몸을 일으키고 숨을 돌리다가 배시혁과 약속을 잡은 사실을 떠올렸다. 배시혁은 지각을 제일 싫어했다.

마음이 덜컹한 하연서는 머리가 어지러움에도 불구하고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병실을 나섰다. 오가는 사람을 뚫으며 벽을 짚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그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보였다.

‘시혁 씨?’

배시혁은 품에 하연우를 안은 채 긴장한 표정으로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하연서가 시간을 잊은 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데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진동했다. 확인해 보니 배시혁이 보내온 문자였다.

[오늘 못 들어가. 무슨 일 있으면 내일 얘기해.]

얼마나 비참하고 익숙한 시나리오인가, 배시혁은 늘 그녀가 뒷전이었고 누구든, 무슨 일이든 약혼녀인 하연서보다 더 중요했다. 하지만 하연서는 동생 하연우까지 그녀의 앞자리를 차지할 줄은 몰랐다.

‘왜?’

하연서는 칼로 가슴을 후벼파는 것처럼 너무 아팠다.

‘왜 하필 하연우인데?’

하연서는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배시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신호음이 한참 울려서야 전화를 받았지만 목소리에서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못 들어간다고 말했잖아...”

“지금 어디야?”

하연서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목이 메어왔다.

“어디긴 어디야.”

배시혁이 켕기는 게 있는 듯한 말투로 되묻더니 설명을 덧붙였다.

“회사지. 바빠.”

하연서가 핸드폰을 꽉 움켜쥐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거짓말한다는 거지.’

배시혁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연서야. 집에서 얌전히 기다려. 일 끝나면 바로 들어갈게.”

“아야...”

엄살이 잔뜩 묻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연서도 분명히 들었지만 못 들은 척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기다릴게.”

통화가 뚝 끊겼다. 배시혁은 하연서에게 인사할 새도 없이 얼른 하연우에게로 달려갔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하연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통에 파르르 떨리던 심장이 박동을 멈춘 듯 공허했다.

‘역시 잊어버렸네.’

사실 오늘 오후 두 사람은 약혼식에 입을 옷을 가지러 가야 했다.

...

별장으로 돌아간 하연서는 늘 신혼방에 틀어박혀 눕자마자 잠을 이뤘다. 꿈에서 26년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났다.

태어나자마자 인생을 도둑 맞힌 하연서는 12살 되던 해 양아버지가 도박하면서 엄청난 빚을 졌고 양어머니는 그 빚을 갚기 위해 하연서를 팔아 돈을 바꾸려다 실패해 옥살이하게 되었다. 하씨 가문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그녀의 인생을 도둑질한 하연우는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처음엔 하씨 가문 사람들도 어떻게든 하연서를 보상해 주려 했고 이는 하연서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모든 것이 차차 변해가기 시작했다. 낯선 혈연관계는 결국 하씨 가문이 하연우와 쌓아온 감정을 이기지 못했고 하연서는 결국 하씨 가문에 녹아들지 못했다.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가족 간의 사랑은 하연우가 하연서 앞에서 우쭐댈 수 있는 밑천이 되었다.

배시혁의 등장은 하연서의 어두운 인생에 비친 한 줄기 빛이었다. 사람들은 하연서를 배시혁의 키링이라고 놀렸지만 하연서에게 배시혁은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다. 하연서는 늘 배시혁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아니면 결혼까지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한 주만 지나면 두 사람의 약혼식이다.

“결혼하자. 평생 잘해줄게.”

“그래.”

찬란한 불빛 속에 하연서는 무대에 서 있는 사람이 그녀가 아닌 하연우가 되었음을 알아챘다. 하연서는 그 자리에 갇힌 채 하연우가 결혼반지를 끼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놀라서 깬 하연서는 온몸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날이 밝았지만 옆엔 아무도 없었다. 어젯밤 배시혁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하연서는 배시혁이 하연우 곁을 지킨 게 맞는지 따지고 싶지 않았다. 밤새 꾼 꿈에 머리가 너무 아팠는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씻으러 들어간 하연서는 그제야 이마에 칭칭 감은 붕대에 피가 새어 나온 걸 발견했다.

‘어제 사고가 꽤 크게 났구나.’

약상자를 꺼내 약을 바르다 너무 아파 눈물이 핑 돌았지만 곧 죽을 판에 이런 고통도 이기지 못해서 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약을 바른 하연서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물끄러머 바라봤다. 창백한 얼굴에 아무 생기 없는 눈동자, 하룻밤 사이에 많이 푸석해진 것 같았다.

‘이번 생에는 사람답게 살긴 글렀네.’

하연서는 이토록 짧은 인생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았다는 게 너무 우스웠다. 복잡하기만 했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순간이었다.

느긋하게 샤워하고 아래로 내려와 보니 임춘자가 주방에서 분주히 돌아치고 있었다.

“아가씨, 정리 끝나면 더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보세요. 제가...”

“아니요. 면이나 삶아주세요.”

이 말에 임춘자가 멈칫하더니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하연서를 바라봤다.

“오늘 대표님 안 들어오시는 날인가요?”

“몰라요.”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핸드폰으로 문자를 작성하던 하연서가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들어오겠죠.”

하지만 입맛이 없어 한 모금도 먹지 못할 테니 준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하연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작성한 문자를 여러 사람들에게 보냈다.

[시혁 씨와 파혼하겠습니다.]

임춘자는 하연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기에 그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지금까지 배시혁의 식사는 하연서가 직접 준비했기에 배시혁의 입맛은 날로 까다로워졌고 하연서가 한 요리만 먹었다. 아파도 배시혁이 끼니를 거를까 봐 직접 요리하던 하연서가 오늘은 아예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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