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을 나서는데 한 소년이 튀어나와 흥분한 표정으로 하연서를 막아섰다.“누나, 너무 대단한데요? 모여든 하객이 그렇게 많은데 배씨 가문과 하씨 가문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은 거잖아요.”“누나, 나는 아까 그 연놈에게 따귀 한 대씩은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해요...”“누구세요?”하연서는 갑자기 나타나 친한 척하는 소년이 살짝 당황스러웠다.“나는...”소년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한 주 전에 내가 운전했는데 실수로 누나가 탄 택시를 들이박았어요.”“아...”하연서는 따질 생각이 없는 듯 느긋하게 말했다.“누
“용감한 시민이 되려는 거죠.”연수호가 차를 운전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난 누나 보자마자 알아봤어요. 삼촌이 내가 하는 말 듣고 도와주겠다고 선뜻 나선 거 있죠? 삼촌이 신세 지는 거 싫어하거든요.”“삼촌, 내 말이 맞죠?”연지훈이 침묵하자 연수호는 자기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는 우쭐거리며 눈썹을 추켜세웠다.“화와 복은 늘 함께라는 말 오늘과 참 어울리는 말 같아요. 누나는 사고를 당해도 우리한테 당했으니 앞으로 복 받을 일만 남았어요.”“운전을 그렇게 해놓고 잘났다는 거야?”연지훈이 엄숙하게 쏘아붙이자 연수호가 멋쩍게
“연우는 네 동생이잖아. 형부로서 챙겨주는 게 뭐가 어때서?”배시혁의 시선이 하연서를 넘어 연지훈에게로 향했다.“그러는 너는 연지훈 씨와 무슨 사이인데? 연지훈 씨가 왜 너를 돕는 건데?”하연서의 시선도 배시혁의 시선을 따라갔다. 슈트 차림의 연지훈이 햇빛을 등지고 걸어오는데 그 아우라는 마치 세상 만물을 발 아래에 둔 것처럼 강압적이었다.배시혁의 질문은 동시에 두 사람을 향했다. 연지훈은 배시혁의 적대감을 무시하고 하연서 옆으로 다가갔다.“연서 씨, 도와줄 거 있어요?”정신을 차린 하연서가 물었다.“연지훈 씨가 왜..
한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하연서는 여러 배달을 받았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오늘도 꽃다발은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도착했고 예쁘게 핀 노란 장미였다. 장미를 들고 올라온 배달 기사는 너무 힘들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안녕하세요. 배달 왔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대문이 열렸다. 하연서가 이름이 적힌 카드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밑에 쓰레기통에 버려주세요.”“네?”배달 기사가 깜짝 놀랐다.“이렇게 좋은 꽃을...”“자리를 많이 차지해서요.”하연서가 웃으며 문을 닫았다. 전에는 일
“너도 연우 마음 너무 아니꼽게 생각하지 마.”배시혁이 하연서 앞에 멈춰서더니 질책이 담긴 눈빛으로 하연서가 하연우의 마음도 몰라주고 치사하게 나온다고 비평하고 있었다. 설명하기 귀찮았던 하연서가 서류를 받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빨리 이혼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배시혁은 하연서가 거들떠보지도 않자 언짢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연서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배시혁에게 물었다.“사업 자금만 돌려준다는 게 무슨 말이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거쳤는지 몰라?”“내가 줄
고민 끝에 배시혁은 그동안 그가 너무 오냐오냐해서 하연서의 기염이 날로 거만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역시 여자는 잘해주는 게 아니야.’하여 앞으로 한 주간 배시혁은 하연서를 신경 쓰지 않았다.어느 날, 회사에서 열린 주주총회에 참석한 배시혁이 상석에 앉아 직원들이 보고한 3분기 실적 상황을 체크하는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앞장선 사람은 하연서였고 그 뒤로 많은 기자들이 따라들어오는 걸 보고 배시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하연서, 지금 뭐 하자는 거야?”“아무것도 아니야. 주주들도 알 권리라는 게 있고, 기자
“사업 자금은 원래 내 돈이에요.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회사에 기여한 게 얼마인데요.”이 말에 주주들이 들고일어났다.“배 대표, 일을 왜 이렇게 해요?”“배 대표, 오늘 정말 좋은 구경하고 가네요. 이런 사람 일 줄은 몰랐어요.”“이렇게 악랄한 사람인 줄 알았으면 우리가 협력할 일도 없었겠지.”주주들의 불평불만에 넋을 잃은 배시혁이 상황을 안정시키려고 일부러 무게를 잡았다.“여러분들, 일단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요즘 연서랑 조금 다퉜는데 뒤처리를 잘못했어요. 내가...”“파혼했으니 주식 분할이 끝나면 우리 사이도 영영
“당연하죠.”“그러면 연지훈 씨 집으로 들어가도 돼요?”연지훈이 잠깐 멈칫하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지훈의 뒤를 따르던 보디가드의 표정도 살짝 흔들렸다. 여도경은 하연서가 겁도 없이 이런 요구를 하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조용한 걸 좋아하는 연지훈이었기에 도우미들도 연지훈이 들어가는 시간을 피해 별장에 진입해야 했다.“그래요.”연지훈의 대답에 여도경이 넋을 잃은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지훈을 바라봤다.‘아까 그래도 된다고 대답한 거 맞지?’“걱정하지 마요. 공짜로 살진 않을 거예요.”하연서가 핸드폰을 꺼내
“황 대표님과 사모님이 금실이 좋아 보여서요. 학창 시절부터 연애해서 지금까지 연을 이어왔다고 들었는데 황 대표님은 소문난 애처가라던데요?”하연서는 황 대표와 협업하기 위해 황 대표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오늘 두 눈으로 직접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걸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부러웠다. 하연서도 뭔가에 홀린 듯 이런 순수한 사랑을 갈망하며 배시혁을 오랫동안 사랑했고 언젠간 그들도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그런 부부가 되기를 바랐지만 결국 웃음거리가 되었고 누구든 이를 빌미로 하연서를 조롱하려 들었다. 운
이 대표가 얼른 슈트를 주웠다.“내가... 내가 다시 똑같은 걸로 사다가 보내줄게요.”“아니요.”연지훈이 모델을 매섭게 쏘아보자 화들짝 놀란 모델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이 대표가 가슴을 치며 약속했다.“책임지고 사라지게 할게요.”모델이 넋을 잃었다. 어젯밤만 해도 결혼하자고 칭얼대던 남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를 버린 것이다.모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도 하연서는 조금의 쾌감도 느끼지 못했고 그저 무료하게만 느껴졌다.“그만 가요.”하연서가 이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자 연지훈이 그 뒤를 바짝 따
“콜록콜록...”이 여사가 기침하며 눈빛으로 그 여자에게 헛소리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모델은 그 눈빛을 무시한 채 빨간 입술을 다시 열었다.“언니, 좀 가르쳐줘요. 나도 언니처럼 돈 많은 남자 만나고 싶어요.”다른 참석자들이 서로 눈치만 볼 뿐 상황을 모르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복잡한 눈빛이 오가는데 하연서가 그 모델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그쪽은 안 돼요.”모델이 멈칫하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내가 왜요? 외모면 외모, 몸매면 몸매, 게다가 젊은데.”“실컷 가지고 놀다 버림받은 주제에 무슨 자격으
연지훈 같은 인물이 참가하는 파티라면 업계 거물들과 거래를 하러 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영업기밀이 오갈 수도 있었다.하연서는 자신의 포지션을 파티에 도착한 일반 파트너이기에 겨우 체면을 차리는 데 쓰이는 행거칩 정도라고 생각했다.연지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하연서를 보며 설명 대신 자신의 팔 위에 올려진 하연서의 손을 바라봤다.“가요.”두 사람이 파티장에 들어서자 많은 참석자의 시선이 쏠렸다. 곧이어 한 중년 남자가 다가와 인사하더니 흥분하며 말했다.“연 대표,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보네. 어떻게 파티에 여자를 데려올
거액의 돈이 들어왔다는 소식이었다. 하연우가 실눈을 뜨고 계좌에 적힌 숫자를 열심히 세봤다. 사업 자금뿐만이 아니라 지분 분할 후 현금화한 돈까지 들어있어 하연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이제 돈이 들어왔으니 하연서도 나름 부자 행렬에 오른 것이다.연지훈이 하연서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무슨 일인데 그렇게 기뻐요?”하연서가 핸드폰을 도로 넣었다. 연지훈에겐 하찮을 수 있는 금액이라 딱히 자랑하지도 않았다.“아니에요. 그냥 내가 갖고 싶었던 물건을 가졌거든요.”“배시혁이 돈을 돌려준 거예요?”연지훈이 물
이연희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더니 결국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만약 연서가 정말 장난친 거라면 나는 평생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배시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말 할아버지가 연서랑 짠 거라면 할아버지가 연서를 너무 예뻐하는데. 연서랑 결혼하면 할아버지가 어떻게든 나를 통제하려고 할 텐데 연서가 옆에서 돕는다면 나는 영원히 연서의 그늘에서 살 수밖에 없잖아.’생각이 깊어질수록 연시훈의 마음도 무거워졌다....별장.연지훈이 하연서의 방 앞을 서성였지만 문을 두드리진 못했다. 하연서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
둘째 하연호가 제일 먼저 반응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시혁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애가 왜...”“무슨 그런 장난을 해요?”배시혁이 씁쓸하게 웃었다.“가능하다면 나도 이게 장난이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걸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어요.”배시혁의 진지한 표정에 불안해진 이연희가 배시혁의 손을 덥석 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말해. 연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머리에 종양이 자랐는데 위치가 좋지 않아서 성공 확률이 매우 낮대요.”하씨 가문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기에 다들
연지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여기서 사람을 납치해 가겠다는 말인가요? 그런 거라면 하씨 가문의 힘이 그 정도 되는지부터 생각해 봐요. 협박의 의미가 다분하게 담겨있는 말투에 하도영이 멈칫했다. 하연서가 직접 따라나서지 않으면 하씨 가문도 달리 어쩔 방법이 없다는 소리였다.“언니.”하연우가 울먹이며 하연서를 부르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줘요... 더는 엄마, 아빠랑 싸우지 마요 네?”이에 하연호가 하연우를 말렸다.“뭐 하는 거야, 일어나.”“연우야, 네가 빌긴 왜 빌어.”이연희가 갈라진
가을이 되자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하연서는 통유리창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아 호숫가에 심은 나무들이 바람에 따라 날리는 걸 바라봤다. 낙엽도 바람에 맞춰 나비처럼 훨훨 춤을 추다 바닥에 떨어졌다.며칠 동안 조용히 쉬었더니 정신상태도 훨씬 맑아진 것 같았다. 노크 소리에 하연서가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었다.“연지훈 씨, 오늘은 출근 안 하나요?”“주말이에요.”연지훈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하연서에게 라테 한잔을 건네줬다.“내가 내린 건데 맛 좀 봐봐요.”“고마워요”하연서가 두 손으로 컵을 받아 들자 따듯한 기운이 두 손을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