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못 믿어?”수화기 저편에서 김명화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 그럴 리가…… 명화는 지금까지 날 도와줬잖아…….’결국 원유희는 김명화의 제안에 응했다.모든 준비는 김명화가 대신 한다고 했으니 원유희는 바로 엄마에게 자세한 계획을 알렸다.그리고 행여나 김신걸이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챌까 이틀 내내 아이들을 만나러 가지고 않았다.김명화가 예약한 항공편은 밤 12시. 최대한 김신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밤 시간대로 정한 것이기도 했다.드디어 디데이.저녁 10시쯤. 원유희는 최대한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핸드백 하나만을 챙겼다.위치 추적 장치가 들어있는 휴대폰은 집에 남겨둔 채 원유희는 비상 계단으로 아파트 뒷문을 나섰다.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김명화를 바라본 순간, 벅차오르는 기분에 원유희의 발걸음도 빨라졌다.김명화가 조수석 문을 열고 고개를 끄덕인 원유희가 차에 탔다.두 사람을 태운 포르쉐는 그렇게 공항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긴장 풀어.”김명화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원유희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사실 전에…… 공항에서 신걸이한테 다시 잡힌 적도 있어서…… 아직은 좀 불안해.”“오늘은 그럴 일 없을 거야. 형 지금 회사에서 야근 중이라 너한테 관심도 없을 걸?”김명화의 말에 원유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는…… 이번에는 제발…….’차량은 빠르게 달려 한산한 도로로 들어섰다. 어차피 공항은 교외에 위치해 있으니 원유희도 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눈 좀 붙일래? 도착하면 깨워줄게.”“이 상황에서 내가 잠이 올 리가 없잖아?”고개를 끄덕인 김명화는 다시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차창에 기댄 원유희는 검은 어둠 속에서 멀어지는 나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가는 나뭇가지들이 지금 이 순간은 그녀를 위협하는 악마의 손가락처럼 느껴졌다.‘왜 분명 떠나는 건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이유없는 불안감에 원유희의 숨이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그리고 잠시 후, 빠르게 달리던 포르쉐가 천천히
발끝부터 올라오는 한기에 원유희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나…… 나한테 왜 이래?”“왜 이러냐고? 재밌잖아? 너 설마…… 내가 정말 널 위해 형을 배신할 거라 생각했던 거야?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김명화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충격으로 커다래진 원유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항상 그녀에게 친절한 김명화를 보며 김신걸과는 참 다르다고 생각했는데…….‘그게 아니었어. 두 사람 전부 악마였다고!”“아이고, 우는 거야? 가여워라…….”김명화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던 순간, 거칠게 손을 쳐낸 원유희가 차문을 거칠게 열었다.“으악!”문에 부딪힌 김명화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그리고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와 원유희를 차에서 끄집어냈다.그가 원유희의 뺨을 날리려던 그때, 누군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고개를 돌린 김명화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물었다.“형?”“벌은 내가 직접 줄 거야.”김신걸이 거칠게 손목을 뿌리쳤다.“형, 이거 토사구팽이야. 나 아니었으면 원유희 이 계집애 꼼짝없이 도망쳤다고.”김명화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정말 몰랐을 거라 생각해?”차가운 눈빛으로 김명화를 노려보던 김신걸이 차 앞에 서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원유희를 향해 말했다.“타.”이미 차에 포위된 원유희가 도망칠 곳 따위는 없었다.이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마 잔혹한 고문이겠지.하지만 그녀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건 바로 믿었던 김명화의 배신이었다.‘나에게 했던 말들, 그 미소들…… 전부 가짜였다고?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믿었던 김명화가 그녀의 마지막 탈출 계획을 짓밟아 버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원유희는 김신걸에 손에 끌려가 듯 롤스로이스에 타고 차량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구석에 웅크린 채 줄 끊어진 인형처럼 앉아있던 원유희는 턱에서 느껴지는 거센 힘에 의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동자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마주쳤
그를 건드린 어떤 사람도 가만둘 그가 아니었다.원유희는 부들부들 떨며 한쪽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돌아가면 벌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였다.지금 그녀의 엄마와 아이들이 공항에서 그녀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여채아는 병아리 같은 아이들을 거느리고 공항에서 음식을 먹으며 기다리고 있었다.세쌍둥이는 조그마한 입속에 음식을 볼이 미어지도록 넣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외할머니, 엄마는 언제 와요?”조한이 물었다.“너무 오래 기다렸어요.”상우가 말했다.“외할머니, 엄마가 안 오는 거 아니에요?”유담이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야, 엄마 곧 오실 거니까 우리 조금만 더 기다리자.”여채아는 마음대로 원유희에게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원유희가 전화를 기다리라고 했기 때문이다.40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이미 두 시간이 다 돼간다.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롤스로이스가 어전원에서 멈추자 원유희는 어둠 속에서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그림자를 보며 불안감에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김신걸이 몸을 돌리더니 음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도와줘?”“아…… 나 혼자 내릴 수 있어…….”원유희는 황급히 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삐끗하는 바람에 넘어질 뻔했다.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요염하게 차려입은 손예인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신걸 오빠, 왔어? 한참이나 기다…….”뒤에 있는 원유희를 본 그녀는 말을 삼켰고 눈빛에 적의로 변했다.손예인을 본 원유희는 이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김신걸이 자신을 향한 벌을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하지만 익숙한듯한 손예인의 모습을 보니 처음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그럴지도 몰랐다. 그녀는 지금 김씨 가문의 며느리 신분이니 자연스럽게 이런 장소에 드나들 수 있었다.“누가 오라고 했어?”김신걸은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손예인은 곧 나긋나긋한 태도를 보였다.“신걸 오빠. 방금 남월만을 지나다가 오빠 생각이 나서 와봤어. 오빠가 없길래 막
원유희는 그들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녀와 그녀가 아끼는 사람을 다치게 하지만 않으면 된다.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휴대폰은 김명화의 조수석 밑에 숨겨져 있었다.엄마한테 연락하지 않았는데 계속 기다리고 계실까?그녀는 고개를 들고 먼 곳에 있는 경호원을 보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그럴 줄 알았더라면 구석에 서 있을 걸 그랬다.하지만 그녀는 엄마에게 세 시간 동안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라고 했다.원유희는 김명화에게 걸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그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다. 어전원에 와서 그녀를 구하고 김신걸이 그녀를 해치지 못하게 차로 벽을 들이 받았다…… 이 모든 게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연기력으로 연예계에 진출하지 않는 게 아까울 정도라고 생각했다.참으로 불가사의했다.김씨 가문에서 김신걸만 고집스럽고 포악한 변태인 줄로 알았는데 김명화 역시 진심이 왜곡된 것 같았다.그녀는 재수 없게도 한꺼번에 두 사람이나 만난 것이다…….얼마나 서 있었을까, 물방울이 콧등에 떨어졌다.곧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을 떨어지더니 점점 더 많아졌다…….원유희는 고개를 살짝 들고 칠흑 같은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의 불빛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커다란 유리창 앞에 훤칠한 키를 뽐내고 있는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김신걸은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알 수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가로등 아래에 서 있는 가녀린 그녀가 비에 흠뻑 젖은 채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손예인은 와인 잔을 손에 들고 쑥스러운 듯 다가갔다.“봐. 정말 비 오잖아. 하나님도 저 여자가 마음에 안 드나 봐. 신걸 오빠, 기분이 좀 좋아졌어?”김신걸은 잔에 든 술을 원샷하고 사냥감을 노리듯 빗속에 있는 사람을 노려보았다. “돌아가.”“뭐? 신걸 오빠…….”손예인은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 많은 일이 생기길 기대하고 있었다. 일부러 섹시한 옷을 입고 왔는데 한 번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원유희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욕조 안에서 몸을 돌려 도망가려 했다.하지만 욕조에서 나오자마자 목덜미를 잡혔다.“악! 하지 마…….”원유희가 비명을 질렀다.몸은 세면대 앞에 눌렸고 공포에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깨끗한 거울에 비쳤다.김신걸의 악마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네 모습을 봐. 거절하는 척하며 즐기는 거잖아.”“아니야…… 김신걸, 날 놔줘, 그만해…….”원유희는 치욕감에 눈을 감고 거울에 비친 비참한 모습을 감히 볼 수 없었다.“아직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너도 알잖아.”김신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차갑게 들려왔다.원유희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2년 전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했다. 그녀는 김신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눈물이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원유희는 침대에 던져졌고 옷가지가 거의 다 벗겨졌다.손가락힘마저 다 빠져 겨우 침대 옆으로 기어가려 했다.하지만 목적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고 침실에 있던 희미한 빛 줄기 마저 사라졌다. 그림자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원유희의 몸에 비췄다.악마의 손아귀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목을 잡더니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도록 했다.원유희의 등이 남자의 튼튼한 가슴팍에 밀착했고 흉근과 복근이 느껴졌다. 남자의 힘과 뜨거움을 느낀 그녀는 더 두려워졌다.“안돼…….”원유희가 발버둥 쳤다.그녀는 그게 뭔지 몰랐지만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김신걸은 그녀의 목을 잡은 채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손을 천천히 아래턱까지 올리더니 그녀가 얼굴을 들 수 있도록 턱을 추어올렸다. 원유희는 그렇게 그를 쳐다보게 되었다.동시에 기다란 손가락으로 약을 그녀의 목구멍에 밀어 넣고 있었다.“읍!”원유희는 더 격렬하게 발버둥 치며 두 다리로 마구 찼다.“삼켜!”김신걸이 명령했다.원유희는 어쩔 수 없이 삼켰고 그 조그마한 알약은 그녀의 식도를 따라 내려갔다.그제야 겨우 풀려났다.원유희는 한편에 옹크리고 죽기살기로 기침을 했다. 눈물과 침이 함께
하지만 계속 전화기를 꺼놓을 수 없어 저녁에 다시 켰다.원유희의 그 번호로 다시 전화할 수 없다면 새 휴대폰은?여채아는 이것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원유희가 전화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그러니 집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점심이 지나자 도우미가 방에 들어가 상황을 살펴보았다.침실에 들어가 침대 위의 광경을 본 도우미는 놀라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마음을 추스르고 난 후에야 겨우 입에서 손을 뗐다.어수선한 침대 위에는 여자 한 명이 누워 있었다.비참한 몰골을 한 여자는 이미 생기를 잃어갔다.밖으로 드러난 팔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빨간 자국이 나 있었는데 뽀얀 피부에 특별히 눈에 띄었다.도우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살펴보았다.김 대표님이 어젯밤에 여기를 떠났는데 여자가 여기에서 자고 있을 줄은 몰랐다.아예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이런 상황은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해 해림에게 보고했고 해림은 송욱에게 전화를 해 빨리 오라고 했다.방에 들어선 송욱도 침대 위에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얼굴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보니 얼굴색은 그저 잠을 자는 것으로 보였다.침대 머리 옆에 놓인 탁자 위에는 하얀 알약이 있었다.이것은 잠자리에 복용하는 약(피임약)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하지만 침대 위에 있는 여자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기에 미처 먹지 못한 것이다.송욱은 원유희에게 검사를 한 후 몸에 있는 흔적을 제외하고는 혼수상태에 빠질만한 부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그녀는 단지 잠을 자고 있는 듯 숨결마저 고르게 들려왔다.아주 많이 피곤한 뒤에야 나타나는 그런 수면 증세였다. 몸이 거덜 나 당장 휴식이 필요한 그런 수면 증세였다.송욱은 방에서 나와 말했다.“괜찮아요. 자고 있는 것 뿐이에요.”“잔다고요? 24시간이 지나가는데요?”해림은 김 대표님이 떠난 시간으로 계산해서 말했다.“알아요. 좀 더 기다려 봐요. 도우미에게 지켜보라고 하고요. 내일 아
힘겹게 몸을 일으킨 원유희가 거울을 등지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바닥에 떨어진 이불, 그녀의 갸녀린 등에 남겨진 온갖 흔적들…….어젯밤 김신걸이 얼마나 미쳐날뛰었는지 엿볼 수 있었다.휴…….깊은 한숨을 내쉰 원유희가 어전원을 나섰다.김신걸이 미리 당부한 걸까? 기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휴, 여긴 택시 잡기도 힘든데 다행이다…….’잠시 후, 차량이 아파트 앞에 멈춰서고 원유희는 비틀거리며 차에 내렸다.“유희야!”차에서 내린 원수정이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고모.”“김신걸 그 자식이 너한테 뭐 어떻게 한 거 아니지?”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던 원유희가 물었다.“너 목은 왜 그래? 김신걸이 이런 거야? 걔 정말 미친 거 아니니?”“괜찮아요.”그녀의 눈동자가 눈물로 반짝였다.‘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사실을 고모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하지만 그녀의 몸과 마음을 처참히 짓밟은 김신걸의 잔인한 징벌에 대해서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무사하니까 다행이다. 고모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알아?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고민까지 했었어.”‘고모…… 경찰에 신고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곳에서 그 누가 김신걸을 건드릴 수 있을까?창백한 안색의 원유희를 바라보던 원수정이 말했다.“많이 힘들지? 일단 집으로 들어가자.”잠시 후, 원유희의 아파트.테이블 위에 있는 휴대폰을 들어 통화내역을 살피던 원유희가 미간을 찌푸렸다.‘이때는 어전원에 있을 때인데 누가 전화를 받은 거지?”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원수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엄마랑은 언제부터 연락하기 시작한 거니?”“그게…….”날카로운 원수정과 시선을 마주친 그녀가 솔직하게 대답했다.“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어요.”“유희야, 넌 속도 없어? 그런 여자랑 왜 다시 연락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널 버린 여자야!”원수정의 언짢은 목소리에 원유희가 엄마의 편을 들었다.“그…
저녁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에 원유희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파트를 나섰다.길가에서 택시를 잡는 그녀의 모습을 차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원수정이 말했다.“얼른 따라가요.”‘유희를 설득할 수 없다면 여채아를 떼어놓을 수밖에.”잠시 후, 여채아 집 앞에서 내린 원유희가 부랴부랴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마침 방에서 나온 여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유희야?”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원유희가 현관문을 닫았다.“엄마, 괜찮아요?”“괜찮지 그럼. 애들 방금 잠 들었어. 너야말로 왜 연락이 안 돼? 무슨 일 있었던 거니?”원유희는 대답 대신 종종걸음으로 아이들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잠 든 아이들의 뺨을 쓰다듬고 익숙한 체취를 맡은 뒤에야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살았다는 안도감과 결국 탈출에 실패했다는 절망감이 같이 밀려들며 원유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김신걸한테 들켰어요.”“도와주는 사람 있다면서?”여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하, 김명화요? 그 자식이…… 날 배신하고 김신걸한테 다 알려줬어요.”다시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지 원유희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김명화 그 자식만 아니었다면…… 정말 성공했을지도 모르는데…….’“그럼 이제 어떡하니?”유담의 통통한 볼에 입을 맞춘 원유희가 말했다.“모르겠어요. 주민등록증도 여권도 다 다시 빼앗겼어요…….”답답한 마음에 여채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제성에 살면서 김신걸에게 아이들 존재를 들키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요?”원유희가 중얼거리듯 물었다.엄마에게 묻는 건지 그녀 자신에게 묻는 건지 원유희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더 조심해야겠지…….”잠시 후, 두 사람이 아이들 방에서 나오고 원유희가 물었다.“어제…… 오래 기다렸어요? 애들 실망 많이 했죠?”“아니. 실망보다는 걱정이 더 컸지 뭐. 그리고 3시간 안에 네가 안 오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잖니. 별로 애 안 먹었어.”“다행이네요. 저 여기 오래 못 있어요. 밤에 다시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