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어요…….”염민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입구에 서 있는 엄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누…… 누나. 여긴 어쩐 일이야?”엄혜정은 멍하니 거기에 서서 염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금 얘기하고 있던 사람을 봤다.“하늘나라라뇨? 저희 부모님이 왜 하늘나라에 계셔요?”“아니야,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고 있었어.”엄혜정은 두 사람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엄혜정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다급하게 핸드폰을 찾았다.핸드폰을 못 찾자 바로 차로 뛰어갔다.“누나!”염민우는 엄혜정을 쫓아갔다.“뭐 하려고 그래?”“엄마 아빠한테 전화할 거야.”“지금 여행 중이시니까, 방해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엄혜정은 그를 보면서 물었다.“사실대로 얘기해줘. 엄마 아빠 왜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은 거야? 거짓말하지 마! 사실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임신했는데 엄마랑 아빠가 계속 안 오시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두 분 무슨 일이 생긴 거 맞지?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거야?”염민우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꾹 참고 말했다.“더 이상 묻지 마…….”“염민우! 계속 우물쭈물 얘기 안 하면, 나 이젠 널 안 봐!”염민우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집에 오는 게 아니었어, 그나저나 아저씨는 왜 또 그런 허튼소리를 해서 참…….’“맞아, 누나 임신 3개월쯤 되었을 때,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셨어.”엄혜정은 몸이 휘청거렸다. 염민우는 바로 그녀를 부축했다.“침착해요! 엄마랑 아빠는 누나가 무사하기를 원하셨을 거야. 난 누나가 못 받아들일 것 같아서 장례식 때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어.”엄혜정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염민우를 바라보았다.“너 이러고도 내 친동생이 맞아? 어떻게 안 알려줄 수가 있어! 아기만 중요하고 부모님은 안 중요할 것 같아? 너…….”너무 충격 받은 엄혜정은 눈앞이 점점 캄캄해지더니 기절을 하고 말았다.“누나!”
육성현은 엄혜정을 끌어안았다.“김명화가 죽었대. 복수한 셈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네가 무사히 지내야 장인어른 장모님이 안심하시지 않겠어? 침착해.”엄혜정은 울면서 그의 품에 쓰러졌다.그러고는 배가 간간이 쑤시자, 엄혜정의 얼굴은 하얗게 질렀다.육성현은 그녀의 상황을 바로 눈치채고 기사에게 소리쳤다.“얼른 병원으로 가!”“얼른!”염민우도 재촉했다. 그는 얼른 엄혜정의 손을 잡았는데, 그녀의 손이 얼음처럼 차갑다는 것을 발견했다.“누나, 아직 나도 있잖아. 그러니까 아무 일도 생기면 안 돼. 누나, 꼭 버텨줘.”엄혜정은 눈에 눈물을 머금고 그를 보고 있었다.그녀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고,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난 부모님을 가질 자격이 없는 걸까……?’엄혜정이 깨어났을 때 그녀는 이미 병원에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만졌다.육성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지금 안정을 취해야 한대.”엄혜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민우는?”“밖에 있어. 너무 걱정되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어.”엄혜정은 육성현의 손에서 자기 손을 뺐다.“두 사람 너무해. 이렇게 큰일을 어떻게 나한테 숨길 수가 있어? 평생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육성현, 우리 부모님의 목소리를 합성해서 나랑 통화하게 했어? 네 아이디어지? 넌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잖아!”“혜정아,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너한테 알려준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네 옆에는 나랑 아이가 있고, 민우에게 남은 가족이라곤 너밖에 없어. 너한테도 무슨 일이 생기면, 민우는 더 고통스러워질 거야.”엄혜정은 말을 하지 않았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엄혜정도 염민우가 더 고통스러워질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때 엄혜정은 염민우가 갑자기 엄청나게 말라갔던 것이 생각이났다. 엄혜정은 염민우의 일이 바쁜 줄로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염민우는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울지 마. 의사가 지금은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했어.”
퇴원한 후, 엄혜정은 방에 혼자 남았을 때 원유희에게 연락했다.“유희야, 괜찮아? 김명화가 널 납치했다고 들었는데, 구출됐다고?”“응, 괜찮아. 지금은 집에 도착했어.”“다행이다.”원유희는 그녀의 정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부모님이 돌아가신 일 말이야. 나 다 알게 됐어.”원유희는 순간 멈칫했다.‘다 알았다고?’“미안해 혜정아, 숨기는 게 아니었는데.”“괜찮아, 나랑 아이를 생각해서 숨긴 거잖아.”엄혜정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네가 김명화를 죽였어?”“아니. 그날에 크루즈에서 김명화가 도망쳤거든. 우리가 김명화를 찾았을 땐 이미 주검으로 됐어. 그 주검도 바다에서 건져낸 거야.”“육성현도 있었지?”“응, 얘기해줬어?”엄혜정은 덤덤하게 물었다.“육성현을 의심해 보지 않았어?”원유희는 흠칫했고 아무런 얘기도 할 수가 없었다.“김명화를 죽인 사람, 그리고 우리 부모님을 죽인 사람 말이야…….”“그럴 리가?”원유희는 당황했다. 그녀는 엄혜정이 왜 육성현을 의심하게 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무슨 단서라도 발견한 거야? 아니면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유희야, 저 사람 진짜 육성현이 아니잖아. 김하준이라고. 나 그 사람 잘 알아.”엄혜정은 목이 메였지만 울먹이면서 끝까지 말했다.“난 그 사람 고칠 줄 알았어, 적어도 아이를 위해서…….”“혜정아, 아직 조사하고 있어.”“그럼 너희들도 육성현을 의심하고 있다는 얘기잖아, 맞지?”“오해일 수도 있어.”“오해일 리가 없어.”엄혜정은 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원유희가 다시 전화를 걸어오자 그녀는 아예 핸드폰을 꺼버렸다.그리고 시체처럼 무기력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엄혜정은 서재에서 나온 육성현을 보면서 얘기했다.“나 물만두 먹고 싶은데, 사다 줄래? 예전에 빈민가에서 자주 사주던 물만두 말이야.”“그래.”육성현은 엄혜정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먼저 우유 좀 마시고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육성현은 흠칫 놀랐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누구를 죽였다고 그래? 혜정아, 다 오해야. 나 지금 다 고쳤어. 진짜야, 어서 내려와. 물만두가 식겠다.”“오지 마!”엄혜정은 감정이 격해져서 소리쳤다.“다가오면 뛰어내릴 거라고 얘기했어!”“그래, 안 갈게.”육성현은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혜정아, 진짜야.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우선 먼저 내려와. 내려오면 내가 다 설명해 줄게. 다 오해야.”“사실 처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냥 유희의 말이 날 깨닫게 했을 뿐이야.”엄혜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육성현을 바라보면서 얘기했다.“근데 나 지금 다 알게 됐어. 증거는 없지만 넌 김하준이잖아. 난 적어도 아이를 위해서 네가 달라질 거라 기대했어. 근데, 넌 어떻게 네 아이의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를 죽일 수 있어? 김하준, 넌 도대체 정체가 뭐야? 세상에 어떻게 너 같은 괴물이 다 존재해?”“혜정아, 내려와서 천천히 얘기하자, 응? 거긴 너무 위험해.”“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기분을 모르지? 너도 한번 느껴봐야 해.”엄혜정은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안돼!”육성현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갔다. 하지만 엄혜정의 옷자락도 미처 잡지 못했다.그는 엄혜정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밑에 서 있던 하인 중 그 누구도 엄혜정을 받아내지 못했다.“다 죽일 거야!”육성현은 미친 듯이 달려갔고, 눈에 거슬리는 하인들을 모조리 걷어차 버렸다. 그는 엄혜정 옆으로 기어가 부드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혜정아, 혜정아. 병원에 데려다줄게. 아무 일도 없을 거야!”엄혜정은 눈을 떴다. 그녀의 머리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초점이 점차 사라지는 눈으로 육성현을 바라보았다.“김하준, 다음 생이 있다면, 난 다시는 널 만나지 않을 거야…….”이렇게 한마디만 남기고 엄혜정은 숨을 끊게 되었다.“그래, 만나지 마,
정신을 차리자 온 몸이 쑤시고 아팠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옆에 덥수룩한 머리의 남자 뒤통수가 보였다. 원유희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는 어젯밤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할 수만 있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24시간 전으로 돌아가 자신의 선택을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바람 피웠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어제 미친듯이 술집을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술을 퍼 마셨고, 그 결과로 이름 모를 남자와 한 침대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점점 더 또렷해지는 기억에 그녀는 고개를 휘저었다. 그녀는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와 옆에 남자의 얼굴도 확인하지 않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 입고 후다닥 도망쳤다. *2년 후.귀국행 비행기에 오른 원유희는 핸드폰 속 영상을 보며 웃고 있었다.영상에는 두 살 정도 된 아이의 모습이 있었다.“엄마!”“엄마!”“엄마!”뒤뚱거리며 걸어오는 아이의 모습에 원유희의 코끝에 잠시 분유 냄새가 스치는 것 같았다. 원유희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기분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2년 전 스위트룸에서의 하룻밤으로 꿈 많던 신입생 원유희는 엄마가 됐다.생리를 하지 않자 원유희는 약국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샀고,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선명한 두 줄. 그녀는 테스트기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산부인과로 향했다. “세 쌍둥이입니다.”의사의 말에 원유희는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 그녀는 그날 바로 수술 예약을 잡고 수술대에 올랐다. 마취과 전문의가 와서 그녀에게 호흡기를 장착하려던 순간 그녀는 수술대에서 일어나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뱃속에 있는 두 아들과 딸의 생명을 내가 무슨 권리로 빼앗겠어 그래 이건 아닌 것 같아.’그게 벌써 2년 전 일이다. 원유희는 핸드폰 속의 아이들을 보며 그때 수술을 하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얼마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녀는 거의 5~6년을 해외에서 지냈다. 고모와 고모부만 아니었다면,
죽기 살기로 달리다 대로변으로 나온 원유희는 달리는 차 사이를 비집고 도망쳤다. 운전자들은 창문을 열고 욕을 하며 클락션을 울려댔고, 장정의 두 남자는 멈추지 않고 그녀를 쫓았다. ‘이러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야. 어디 숨을 곳을 찾아야 해!’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길 맞은편에 서있는 검은색 롤스로이스를 보았다. 그 차는 마치 잠에 든 범고래처럼 크고 웅장했다. 그녀는 생각할 겨를 없이 롤스로이스 뒤로 몸을 숨겼다. 원유희는 차체에 기대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헐떡이는 숨을 억눌렀다. 차는 선텐이 잘 되어있어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않았다. 순간 그녀의 핸드백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놀라서 핸드폰의 수신버튼을 누르고 몸을 살그머니 내밀어 길 맞은편 남자들의 동태를 파악했다.유희야, 어디 갔니?”고모, 저 먼저 가볼게요.”왜 무슨 일이야? 호텔로 돌아갈 거니? 너만 괜찮다면 고모 집으로 들어와. 방 하나 마련해 줄게. 아니면…… 예전에 쓰던 방에서 지내도 되고.고모와 통화를 하고 있는데 그녀의 뒤에서 가로등에 비친 그림자가 흔들렸다. 원유희는 몸이 굳어진 채 핸드폰을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롤스로이스 창문이 내려오자 서서히 안에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차갑고도 깊은 그의 눈동자가 원유희를 향하자, 그녀의 호흡이 순감 멈추었고 핸드폰 너머 사람의 말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꺅!” 원유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유희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원유희가 핸드폰을 가방에 욱여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맞은편의 경호원들이 달려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순간 롤스로이스 차문이 열렸고 장신의 남자가 차 밖으로 나왔다.“나한테서 도망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나 보네.” 김신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너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 으악!”김신걸은 큰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끌었다.그의 아귀힘이 어찌나 좋은지 원유희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김신걸은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조용히
김신걸은 외투를 벗어 소파 위에 던져놓았다. 그의 거대한 몸에 딱 붙는 검정 와이셔츠 때문인지, 옷을 다 입고 있어도 야한 느낌이 들었다. 와이셔츠 안에 그의 실루엣이 어떤지, 그가 침대에서 얼마나 야성적인지……. 원유희는 2년 전의 그날을 떠올리면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거야…….”원유희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김신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비행기에서 내린 뒤로 지금까지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한 원유희는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았다. “배가 고픈 모양이군.” 김신걸은 하인에게 미리 준비된 음식을 가져오라고 했다.잠시 후 중년의 남자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를 들고 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김 선생님. 해물 짬뽕을 준비해 왔습니다.” 집사 해림이 두 손을 모은 채 한편으로 물러났다.원유희는 ‘해물’이라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렸다.“배고프다며. 이리 와서 먹어.” 김신걸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나…… 해산물 못 먹어. 알레르기가 있어서.”원유희는 해산물을 먹으면 목구멍이 붓고 입술이 간지럽다. 어릴 때, 알레르기를 모르고 먹었다가 기도가 막혀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내 성의를 무시하겠다고?”원유희는 김신걸의 말투에서 그가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해물 짬뽕을 준비했다는 것을 알았다.“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걸 먹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원유희는 뒷걸음질 쳤다.김신걸이 원유희를 잡아끌어 탁자 쪽으로 내동댕이쳤다.“그럼 보기라도 해.”원유희는 탁자에 부딪혀 들고 있던 핸드백을 떨어뜨렸다. 핸드백이 떨어지자 그 안에 있던 핸드폰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원유희는 무릎이 아픈 것도 잊고 긴장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쳐다봤다.김신걸은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었고, 원유희는 큰일 났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떨어질 때 충격 때문인지 핸드폰의 전원이 꺼져있었다.김신걸은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보았다. 핸드폰에 푸른 불
“너 여권도 없이 어딜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여권, 신분증 다 나한테 있어!”“제 여권이 고모한테 있다고요?”“그래! 전화해도 안 받고, 묵는 호텔에 가서 널 찾으니까 여권이랑 신분증을 두고 갔다고 하더라! 내가 고모라고 하고 받아왔어. 너는 무슨 배짱으로 5성급 미만 호텔을 잡아? 제성에 지내는 동안은 고모네 집에서 지내도록 해!”원유희는 지금 당장이라도 고모 집으로 가고 싶었다. “못 가요. 오랜만에 친구네 집에 왔더니 며칠 좀 더 있다가 가라네요. 여권 받으러 갈 때 연락 드릴게요.”“얘는 무슨, 몇 년 동안 안 돌아왔었잖아. 네가 친구가 어디 있어?”“예전에 고등학교 동창들이요…….”원유희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유희야, 나는 네가 김신걸 때문에…… 이미 지난 일이니 너무 거기에 머물러 있지는 마.”……“고모네 집으로 와.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나중에 갈게요.”원유희는 전화를 끊고 미끄러지듯 침대 끝에 걸터 앉았다.김신걸이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는 이 저택을 나갈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김신걸은 순순히 그녀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김신걸의 눈에는 고모가 자신의 가정을 파괴한 아버지의 내연녀일 뿐이니까.*점심시간.원유희는 경호원의 안내로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그녀는 식탁 가득 차려진 해산물 요리를 보고 얼굴이 굳었다. 캐비어, 자연산 전복, 무늬오징어…… 모두 비싼 식재료였지만, 그녀에게는 모두 독일뿐이다.원유희는 애피타이저로 준비된 샐러드만 깨작거렸다. 그 순간 하인이 가져오는 음식 냄새에 그녀가 젓가락을 던지고 숨을 헐떡였다.“잠깐 멈춰요! 지금 들고 오는 그거 뭐죠?”“해물탕입니다.” 하인이 말했다.원유희는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못 먹었는데, 뭐라도 먹어야지……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체력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원유희는 식탁에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살폈다.“나보고 맨밥이나 먹으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