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풍은 깜짝 놀라며 부러운 어투로 말했다.“정말? 무슨 맛인지 궁금하구먼.”심시몽은 웃으며 말했다.“공주께서 딱 하나라 아껴둔 것이라고 했소.”말을 마친 후, 심시몽은 앞으로 걸어갔다.강소풍은 한길 따라갔다. 원래 목소리가 커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서원의 모두가 심시몽이 어제 공주의 침궁에서 잠을 자고, 공주와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모두가 매우 궁금해했고, 많은 사람들이 심시몽을 둘러쌌다.강소풍은 계속 물었다.“참, 공주와 언제 그리 가까워진 거요?”“별거 아니오.”심시몽은 아무렇지 않은 척 책상을 정리했다.그러면서 연꽃 옥 장식을 빼어내고 조심스럽게 비단함에 넣은 다음 책상 위에 놓았다.옆에 있던 사람들도 궁금한 듯 물었다.“그러니까, 심시몽. 평소에는 얌전하더니, 언제 공주랑 사이가 그렇게 좋아진 거야?”“공주는 성격도 좋으시네, 너와 친하게 지내다니.”누군가의 의문에 심시몽의 안색이 변했다.“그게 어때서? 공주가 어릴 때 있었던 안 좋은 일도 얘기해 주셨는데.”“나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셨지.”이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정말?”“존귀하신 공주님께서 무슨 불우한 이야기가 있겠어?”심시몽은 말하기 싫었지만, 처음으로 관심을 한몸에 받아 주위 사람들의 추궁 끝에 공주의 과거를 이야기했다.하지만 너무 상세하게 이야기하진 않았다.그러나 이 말이 나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의 불우한 어린 시절에 대해 터무니없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들었어? 공주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께 팔릴 뻔했대. 그러다가 거지 신세가 되었다고 하더라.”“야, 들었어? 공주가 어린 시절에 가족들한테 청루에 팔려갔었대.”“정말? 그럼 어떻게 공주가 된 거래?”“운이 좋아서지. 청루에서 도망친 후 사방을 떠돌다 군주를 만난 거래.”“낙현책을 보면 알지, 공주도 군주께서 데려온 고아일 거야.”…낙요는 어화원을 지나면서 우연히 궁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듣고 의아했다.하여 월규를 불러 물어보았다.월
낙요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어찌 내용이 이것뿐이냐?”“그러니까요, 사부님. 여기 보면 양초도 있습니다.”“차강남은 매우 깔끔한 사람이라 옷에 머리카락이 묻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러니 절대 초를 서신에 떨굴 일은 없습니다.”“이렇게 중요한 일에 내용이 이것뿐인 게 수상합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이 서신이 필적은 차강남의 것 같지만, 평소의 어투가 아닙니다.”낙요도 고개를 끄덕였다.비록 차강남과 접촉이 많지 않았지만, 지난번 차강남의 답장을 보면 강여에게 이렇게 짧은 서신을 쓸 자는 아니었다.“이 서신은 이한도에서 보내온 것이냐?”“이한도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으냐?”강여는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비록 이한도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모르지만, 안 좋은 예감이 듭니다.”강여는 고개를 숙이고 서신을 보며 심각한 안색으로 말했다.“아마 위험한 처지라 서신을 이상하게 보내 구조 요청을 하는 것 같습니다.”“사부님, 이한도에 한번 가봐야겠습니다!”강여의 말을 듣자, 낙요는 급히 막아섰다.“충동하지 말아라!”“이한도에 정녕 무슨 일이 있다면,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다!”“이한도는 비록 강호 문파지만, 청주의 관할 범위에 있다. 청주에 주둔군이 있으니, 청주의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 이한도에 가보라고 하겠다.”“네가 가는 것보다 빠를 것이다.”“이 서신이 차강남이 보낸 거라면, 살아 있다는 것이니 계속 서신을 써보아라. 다른 소식을 전해올지도 모르니.”강여는 고개를 끄덕였다.“예, 사부님의 말대로 하겠습니다.”강여는 말을 마친 후 바로 떠났다.낙요는 그제야 궁에 소문이 떠돈다는 게 떠올랐으나, 강여를 불러 세우지 못했다.이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이한도와 차강남에게 정신이 팔려 있으니 말이다.저녁이 되자, 낙요는 정원에 앉아 천상을 보았다.남쪽이 확실히 이상했다.보고 있던 중, 우유가 벌써 정원에 들어섰다.“군주.”“왔느냐?”우유는 낙요 앞에 앉아 나침반을 탁자에 놓
“백여 년간 많은 변경 국가들이 침범해 왔지만, 우리 여국은 제사 일족이 있어 무너지지 않았고 적대 세력을 숙청했지. 하여 아무도 그 잠깐 나타났던 나라를 신경 쓰지 않았다.낙요도 성수에 관한 일을 조사하면서 장서각의 모든 책을 살펴보다 본 것이라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이 말을 들은 우유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도 봤던 것 같습니다. 동하국이었던 거 같습니다.”“백 년 전 우리를 공격했던 나라라면, 지금은 실력이 그때보다 훨씬 성장했을 겁니다.”“지금 이한도에 사람을 보낼까요?”낙요가 답했다.“청주의 상 장군에게 서신을 보내 이한도의 상황을 알아보라고 했다.”“변방 순찰을 강화하고, 수상한 곳이 있으면 제때 보고하라고 했다.”“우리뿐만이 아니라 만족과 천궐국도 있으니, 랑모에게 서신을 보내야겠구나.”낙요는 붓을 들고 쪽지 하나를 쓴 다음, 아신을 불러 빨리 랑목에게 전달하라고 했다.한참 후, 부진환도 현학서원의 일을 마치고 급히 달려왔다.“무슨 일인데 이리 급한 것이오?”“대제사장도 계시고.”부진환은 우유도 있는 걸 보고 큰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낙요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이 말을 들은 부진환의 안색은 어두워졌다.하지만 생각에 잠긴 후 곧바로 대답했다.“송령산은 지세가 험준해 정녕 적이 습격한다고 해도 시기를 노려 산을 공격해 천궐국을 침략할 것이오.”“이제 이 일을 알았으니, 들어오기 쉽지 않을 것이오. 지세가 수비에 유리해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바로 서신을 보내 처리하겠소.”“그나저나 이한도의 상황이 더 심각할 텐데, 준비하였소?”낙요가 답했다.“청주의 상 장군에게 서신을 보냈소. 답장이 오길 기다려야지.”부진환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됐소.”“동하국이란 나라는 나도 들어봤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소. 동시에 천궐국, 만족, 여국을 침략하는 걸 보니 야망이 큰 것 같소.”“소서에게 천궐국에 가서 동하국에 관한 기록을 조사해 보라고 하겠소.”세 사람은 저녁
“이한도가 가장 먼저 적군에 점령당했으니, 살아있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곧바로 쳐들어 가면 됩니다!”말을 마치자, 궁전 밖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됩니다!”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운서 공주가 급히 궁전 안으로 들어왔다.소 장군은 차갑게 운서 공주를 보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여인이 어찌 감히 조정에 발을 들이는 겁니까?”강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소진오를 보며 물었다.“군주도 여인 아닙니까?”“어찌 감히 군주와 비교하는 겁니까!”소진오는 큰 소리로 호통쳤다.강여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신을 건넸다.“이한도 주인이 보낸 서신으로, 암호로 소식을 전했습니다. 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살아 있으며, 무공이 뛰어난 자들도 갇혀 있어 총 75명이라고 합니다.”“그러니 이한도를 공격하면 안 됩니다!”낙요는 서신을 보았다. 확실히 차강남의 서신이었다.“섬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으니, 이한도를 섣불리 공격할 순 없다.”이 말을 들은 소진오가 물었다.“이한도가 가장 먼저 점령되었는데, 적군이 보는 아래에서 어찌 서신이 전달된단 말입니까! 이건 적군의 음모입니다!”“어쩌면 그 섬 주인도 이미 적군의 편으로 돌아서 가짜 소식을 퍼뜨리는 걸 수도 있습니다!”이 말을 들은 강여는 분노하며 꾸짖었다.“차강남은 이한도의 주인으로, 강호에서 명성이 높습니다. 적에게 굴복하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겁니다!”소진오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공주는 어찌 이 강호 인물을 이리 잘 아는 겁니까? 그 소문들도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군요.”이 말을 강여가 공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청루에 있었다는 소문을 비꼬는 것이었다.이 말을 들은 조정의 많은 사람들이 강여의 출신을 떠올렸다.낙요는 차가운 목소리로 반박했다.“나도 차강남을 안다. 운서 공주와 함께 여행하면서 차강남을 알게 된 것이다.”“차강남은 믿을 만하다.”“소 장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소진오는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그제야 수그러들었다.“아닙니다.”“소신이 청주에 가서
섭정왕부(攝政王府).동상방(東廂房) 내 꽃무늬가 새겨진 침상 주위에 옷들이 널브러져 있었다.낙청연(洛清淵)은 몸을 일으켜 앉더니 침상 위의 난잡한 흔적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햇빛이 빨간색의 흔적을 또렷이 비추고 있었다. 어젯밤 신방(新房)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쳐들어왔던 기억을 떠올리니 다시 한번 수치심과 모욕감이 울컥 치밀어올라 돌연 그녀를 견딜 수 없었고 굴욕으로 인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왜 우는 것이냐? 드디어 네 바람대로 섭정왕부에 시집왔으니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낙청연은 등골이 오싹했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니 의자 위에 정좌로 앉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위엄 있으면서도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의 차가우면서도 냉담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 낙청연은 그의 시선이 칼이 되어 살을 에이는 것 같았고 온몸이 피 칠갑이 된 것 같았다.낙청연은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내 가슴 부근이 꽉 막힌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왕야(王爺)… 줄곧 여기 계셨습니까?”남자는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너와 내가 혼인을 올린 날인데 본왕이 여기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그 순간, 낙청연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고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어젯밤 신방에 쳐들어왔던 남자들과 도처에 남겨진 어지러운 흔적들에 그녀는 수치스러웠고 분했는데 그녀와 함께 첫날밤을 보내야 했던 남자는 그 방 안에서 밤사이 그 남자들이 어떻게 그녀의 옷을 찢어발겼는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왜입니까? 제가 그렇게나 미우십니까?”정신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낙청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분통을 터뜨렸다.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는 첫날밤 하인들더러 그녀의 순결을 빼앗게 했고 그녀의 몸과 마음을 더럽혔다.낙청연은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그를 경모했었고 당시 태황태후(太皇太后)는 두 사람이 금동옥
촤악.차가운 물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고 낙청연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었다. ‘난 죽었는데? 왜 아픔이 느껴지는 것이지?’어멈처럼 보이는 하인이 대야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울고불고 소란 피울 생각은 마시옵소서. 왕야께서는 그런 수작에 넘어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제 주제를 알아야지, 감히 동생을 대신해서 혼인을 치르러 하다니요? 섭정왕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등 어멈(邓嬤嬤)은 얼굴에는 노여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원래 집으로 돌아가 늙은 어미를 모시려 했으나 염치를 모르는 왕비가 자결 시도를 하는 바람에 다시 돌아와 그녀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승상부의 아씨로서 살 것이지 이런 추접한 일이나 벌리다니, 차라리 죽어버리지.”머리 위로 욕설과 불평이 끊임없이 쏟아졌고 낙청연은 이 모든 게 낯설었다. 그녀의 것이 아닌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어젯밤은 섭정왕과 낙월영의 혼인날이었다. 그러나 낙청원은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신부로 위장하고는 방 안에 미정향(迷情香)을 피워놓고 섭정왕의 아이를 가질 생각이었다.그런데 부진환이 결정적인 시각에 정신을 되찾았고 화가 나서 사람들을 대여섯 명 불러들였으며 낙청연은 깨어난 뒤 굴욕을 참지 못하고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벽에 머리를 찧어 죽으려 했다.몸의 원래 주인은 그를 미치도록 사랑했었고 그녀의 몸에서 그녀의 괴로움과 마지못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여국(黎國)의 대제사장(大祭司)으로서 그녀는 죽을 운명이었지만 영혼이 흩어지지 않았고 천궐국(天闕國) 승상의 딸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데 난폭한 하인이 그녀를 바닥으로 밀어서 넘어뜨렸고 그 바람에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머리를 찧게 되었다. 뒤이어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자 낙청연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면서 손을 뻗어 머리를 만져봤고 피가 흥건했다.“돼지처럼 무거운데 누가 아씨를 옮기겠습니까? 눈치 좀 챙기세요. 섭정왕부로 시집왔다고 해서 정말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아
등 어멈은 화들짝 놀라면서 말했다.“아이고, 둘째 아씨 손이!”그러면서 등 어멈은 얼른 낙월영을 부축하면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악독하기 그지없군요. 둘째 아씨의 혼사를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둘째 아씨가 약을 먹여주는데 밀어서 넘어뜨리다니요!”바로 다음 순간, 한 인영이 빠른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낙월영의 옆에 섰다.“월영아!”낙월영은 미간을 좁히더니 피로 얼룩진 손바닥을 들어 보았는데 그 모습은 못내 애처로워 보였다.부진환은 낙월영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더니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낙청연을 쏘아보았고 낙청연은 곧바로 입을 열려고 했다.“전…”그러나 해명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부진환이 억센 힘으로 그녀를 침상 위에서 끌어 내렸다. 바닥에 쓰러져서 몸의 중심을 잡기도 전에 부진환이 매섭게 따귀를 때렸다.그 순간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뺨이 덴 것처럼 뜨거웠고 아렸다.낙청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낙월영은 부진환의 옷소매를 잡으면서 간청했다.“왕야, 제가 부주의해서 넘어진 것입니다. 언니 잘못이 아닙니다.”등 어멈이 섭정왕에게 고자질했다.“왕야,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둘째 아씨께서 좋은 마음으로 약을 먹이는데 그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할망정 둘째 아씨를 밀쳤습니다. 둘째 아씨께서 선량하셔서 그냥 넘어가 주려고 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해서야 되겠습니까?”“둘째 아씨를 데리고 가서 약을 발라주거라.”부진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예.”등 어멈은 낙월영을 부축하면서 떠났다.방 안에는 낙청연과 부진환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자신의 서늘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힘주어 잡았다. 만약 그가 잡은 것이 낙청연의 목이었다면 그녀는 아마도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진짜 네가 왕비라도 된 것 같으냐? 월영이가 부탁하지만 않았다면 난 널 죽였을 것이다. 또 한 번
낙요는 눈가가 빨갰지만 눈빛만은 의연하고 차가웠다.방문을 닫은 뒤 그녀는 아직도 쑤시듯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침상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이 몸으로 환생해서인지 무력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그녀가 여국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풍수와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능력이 출중한 것도 있지만 혼자서 백여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무공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거기까지 생각하니 그녀는 자기 몸이 못내 그리워졌다. 어릴 때부터 무공을 배워서 경맥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강인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괴롭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몸은 이미 좌골양회(挫骨揚灰: 원한이 깊거나 중죄를 저지른 사람이 죽은 후 그 뼈를 갈아서 뿌리는 것)를 당했다.서방(書房)으로 돌아온 부진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마음도 심란했다.소유(蘇游)가 그의 방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왕야, 오늘 밤도 그 사람들을 불러 큰아씨께 겁을 줄까요?”그의 말에 부진환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아니, 오늘은 됐다.”어젯밤 그녀를 단단히 혼냈으니 다시 한번 그런 일을 겪는다면 또 자결하겠다고 난리를 칠 게 뻔했고, 혹시라도 진짜 죽기라도 한다면 승상부 쪽에 얘기하기가 껄끄러워진다.소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희미한 광선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젊고 예쁘장한 계집종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오만한 태도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왕비 마마께서는 신선이라도 되려고 그러십니까?”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낙청연이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고 날카로웠고 그 눈빛에 맹금우(孟錦雨)는 순간 겁을 먹었다.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밖에 있는 사람을 불러들이더니 일부러 거드름을 피우면서 느긋하게 얘기했다.“왕비 마마께서 온종일 음식을 드시지 않았으니 배가 많이 고플 것이라 하여 왕야께서 자비를 베풀어 이것들을 하사해주셨습니다.”계집종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