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깊은 밤의 고요를 깨뜨리려는 듯, 이상한 기운이 응집되고 있었다.낙청연은 짙은 불길한 기운에 눈을 번쩍 떴다.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그녀의 어깨를 눌러 제압한 뒤, 그녀를 끌고 방밖으로 나갔다.낙청연은 거칠게 바닥에 내쳐졌다. 온몸에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마당에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아홉 명의 악인이 한가하게 주변에 둘러앉아 있었다.한쪽에서 책을 읽는 남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악인들은 맹수의 눈빛으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두풍진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손으로 낙청연의 머리카락을 홱 잡아당겼다.“이번에는 병약한 미인을 보냈구만 그래….”두풍진은 꽤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으나 어딘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는 욕망이 득실거리는 눈빛으로 낙청연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았다.“나만 먼저 재미를 본다고 투덜대지 말고 이번에는 누가 먼저 할래?”두풍진이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일행에게 물었다.나머지가 말이 없자 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이런 맛있는 떡이 굴러들어 왔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아? 그럼 나도 사양하지 않을게.”말을 마친 그는 손가락으로 낙청연의 턱을 치켜들었다.“그럼 이번에도 내가 먼저 맛볼게.”그는 순식간에 낙청연의 옷깃을 잡아 찢어버렸다.찍!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옷이 찢어지고 하얀 등이 바깥으로 드러났다.낙청연은 눈물을 머금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이러지 마세요….”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가냘픈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악인 중 한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아직 제대로 된 경험도 쌓아보지 못한 초보 제사장인가 보네. 겁도 없이 천자호를 자기 발로 들어오다니.”두풍진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겁에 질린 낙청연의 얼굴을 감상했다.“나는 이런 애가 더 좋아.”말을 마친 그는 낙청연의 몸에 걸친 옷을 찢기 시작했다.낙청연은 다급히 몸을 피하며 몸부림쳤다.“이러지 마세요… 여기서는 싫어요.”
낙청연은 너덜너덜해진 옷을 찢어 두풍진의 입을 틀어막았다.모든 처리가 끝난 뒤, 그녀는 검은색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여기저기 뜯긴 옷을 가렸다.그러고는 허리를 숙이고 냉랭한 눈길로 두풍진을 응시했다.“서른 명이 넘는 여자를 겁탈한 역겨운 놈. 너 같은 걸 길들이는 건 나도 사양이야.”두풍진은 그제야 자신이 그녀의 연기에 속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악에 받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힘껏 몸부림쳐도 속박을 벗어날 수 없었다.낙청연은 비소를 꺼내 그의 옷을 찢었다.아니나 다를까.어깨 쪽에 아까 보았던 것과 똑같은 금혼부 낙인이 보였다.왜 이들은 같은 낙인을 새기게 된 걸까.여국에 중죄를 지은 노비들을 가두는 곳이 있다고 들은 적 있었다.그중에는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악질 죄수들도 있었는데 심지어 여국을 배신한 대역죄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죽지 않고 그곳에 갇히게 된다.이곳의 십대 악인들도 그곳에서 도망 나온 자들일까?하지만 그들의 악명은 오래전에 여국 곳곳에 퍼졌다.정상적인 절차대로라면 제사장이 이들을 길들인 뒤에 다시 그곳으로 보내야 맞다.정신을 차린 낙청연은 두풍진이 얼굴에 쓴 가면을 손으로 찢어 버렸다.한층, 또 한층 벗겨내자 그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선이 굵은 사내다운 얼굴이었다. 낙청연이 상상했던 것처럼 추악하고 음침한 얼굴이 아니었다.눈빛에 넘실거리던 음란한 기운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원망만 가득 찬 눈빛이었다.남자는 증오에 찬 눈빛으로 낙청연을 찢어 죽일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낙청연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나를 본 적 있어? 왜 나를 이토록 증오하는 거지?”두풍진의 눈빛에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숨기고 있던 비수로 밧줄을 끊어냈다.밧줄이 풀린 순간, 낙청연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두풍진이 차가운 빛이 번뜩이는 날카로운 비수로 낙청연을 향해 찔렀다.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그녀는 손으로 날카로운 비수를 잡고 장풍으로 칼날을 부러뜨렸다. 날카로운 칼끝이 방향을 바꿔 두풍진의 복부에 꽂혔다.
이상한 남자들이 두풍진의 처와 여동생을 강제로 데려가서 방에 가두었다.여인들의 비명이 방 밖으로 울려 퍼졌다.두풍진은 당장이라도 그들을 구하려고 했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이 짐승 같은 놈들아!”두풍진은 기를 쓰고 앞으로 달렸지만, 그를 막는 자들에 의해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다.“우린 이미 개과천선했는데 왜 아직도 저희에게 이러시는 거예요!”여자가 원통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돌아온 건 더 거친 매질뿐이었다.그녀의 귀뺨을 때린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노예는 어차피 노예야! 이게 너희의 쓸모라고!”“너희는 반항할 자격도 없어!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말을 마친 남자가 여자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문을 잠갔다.안에서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다.두풍진은 처절하게 처와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닫힌 문을 향해 내달렸다.하지만 남자들이 그를 막아섰다.그 순간, 낙청연은 그의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낙청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두풍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지만, 그때마다 남자들에게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나중에 기진맥진한 그가 힘없이 계단에 쓰러졌다.그는 멍한 표정으로 그 문을 통해 사람이 나오고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사랑하는 여인들이 고통을 받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이 불공정한 세상이 멸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모든 일이 드디어 끝나자 두풍진은 울며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그의 눈에 보인 것은 치욕을 참을 수 없어 발가벗겨진 몸으로 자결한 아내의 시체였다.그는 죽은 아내를 품에 안고 목 놓아 울었다.죄책감과 증오심이 그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운아(芸兒), 내가 복수해 줄게. 개 같은 제사장 놈들! 언젠가는 그들을 멸종시켜 버릴 거야! 악!”두풍진은 아내의 시체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그 뒤로 두풍진을 살게 한 동력은 오로지 원한이었다.그는 제사장 일족을 증오했고 노예들에게 고통만 더해
하지만 이곳에는 홍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남은 악인들도 있었다.그들이 다 같이 달려든다면 아무리 낙청연이라도 당해낼 수 없었다.결국 그녀는 다시 홍해에게 잡혀서 바닥에 제압당했다.홍해가 칼을 꺼내 들었다. 위에는 말라붙은 피가 덕지덕지 남아 있었다.“손부터 자를까?”말을 마친 홍해가 그녀의 손목을 비틀었다.예리한 칼끝이 그녀의 손목 관절 근처에서 배회했다.“여기가 좋겠군.”홍해의 잘 벼린 칼이 공중으로 치솟은 순간, 낙청연은 조급한 마음에 몸을 바둥거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녀의 눈길이 구십칠에게 닿았다. 그가 드디어 책을 덮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낙청연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책이었다.제사부전(祭司符典)!홍해의 칼이 내려앉던 순간, 낙쳥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나 금혼부를 해제할 수 있어!”순간 구십칠의 표정이 바뀌더니 다급히 소리쳤다.“그만!”홍해는 그녀의 손목과 한 치 차이를 남겨놓고 칼을 버렸다.칼을 내던진 홍해가 차갑게 낙청연을 노려보며 물었다.“금혼부를 해제할 수 있다고? 네가?”“딱 봐도 경험도 없는 제사장 같은데 무슨 수로?”“금혼부 때문에 수많은 제사장을 잡아들였지만,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은 한 명도 없었어.”“또 우리 가지고 장난치는 거라면 당장 그 입부터 도려낼 거야!”낙청연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나 정말 할 수 있어. 나는 그들과 다르니까.”과거 대제사장까지 했던 몸이었다.낙청연은 구십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네가 들고 있는 책, 나 처음부터 끝까지 암기할 수 있어. 내가 너희랑 다른 점은 너희는 책을 읽을 뿐이지만 나는 그 책과 오래전에 일심동체가 되었어.”구십칠이 천천히 낙청연에게 다가갔다.“풀어줘.”홍해가 낙청연을 풀어주었다.낙청연은 땅을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달빛 아래 반짝이는 창백한 피부와 아름다운 이목구비, 그리고 입가에 머금은 붉은 피는 그녀를 더욱 매혹적으로 보이게 했다.구십칠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제사장과 다르다는 그녀의 말을 믿을
구십칠은 잠시 머뭇거리나 싶더니 상의를 벗고 그녀의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낙청연은 부적을 꺼내 낙인 위에 붙였다.그러자 낙인 주변에 부문과 금빛이 나타났다.“이거 보이지? 이게 금혼부의 존재를 증명하는 표식이야.”“금혼부가 해제되면 이곳에는 낙인과 흉터만 남을 거야. 금빛으로 번쩍이는 부문이 사라질 거라고.”낙청연은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설명했다.만약 그들과 평화롭게 담판을 지을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결과였다. 그녀는 이들과 다시 무력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이들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설명을 알아들은 홍해 일행이 고민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빨리 시작해! 일단 내가 보는 앞에서 해제해 보라고.”그러고 보면 낙청연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 세상에 금혼부를 해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녀가 그 소수 중 한 명이었다.하지만 내력 소모가 너무 컸다.그녀는 부적을 꺼내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부문을 그린 뒤, 구십칠의 어깨에 붙였다. 금빛의 진법이 나타나더니 금혼부를 새긴 흉터에 스며들었다.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이제 됐어.”낙청연이 담담하게 말했다.구십칠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어깨를 살폈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이러면 다 된 거야?”낙청연은 다시 부적을 꺼내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금혼부가 새겨진 낙인에서 더 이상 부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흉터로 남았을 뿐이다.“정말 사라졌다고?”홍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대단하네!”홍해는 구십칠을 자리에서 일으키고는 자신이 상의를 벗고 낙청연의 앞에 앉았다.“나도 해줘!”낙청연은 동일한 방법으로 금혼부를 해제했다.하지만 세 번째 의식을 행하게 되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힘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피를 토했다.“좀 쉬어야겠어. 내력 소모가 엄청나거든.”낙청연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달빛 아래 핏기 한 점 없는 채로 쓰러진 여자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유리구슬 같았다.구십칠이 다가가서 그녀의 맥을 짚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내가 도성에 남으려면 너희들을 길들여야만 해.”구십칠이 냉소를 지었다.“길들여? 우린 사람이야. 가축이 아니라고. 설마 금혼부 해제해 줬다고 우리한테 얌전히 네 명령에 따르라는 헛소리는 하지 않을 거지?”낙청연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아니.”“난 너희들을 데리고 노예 감옥을 나갈 거야.”그 말에 구십칠은 큰 충격을 받았다.노예 감옥은 곳곳에 수많은 진법을 쳐놓은 곳이다. 이곳을 살아서 나간 노예는 한 명도 없었다.게다가 간수들의 경비도 삼엄했다.“그 몸으로 우리를 데리고 노예 감옥을 탈출하겠다고? 네가 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어떻게 그걸 믿지?”낙청연은 구십칠이 그녀와 손을 잡을 의사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한가하게 잡담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금혼부를 해제하고 싶은 사람은 너희뿐이 아니잖아. 너희의 친구, 가족들도 내가 필요하잖아.”그 말에 구십칠은 반박할 수 없었다.그의 반응을 살피던 낙청연은 자신의 방법이 성공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금혼부에 묶여 있었는데 너희는 어떻게 그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어.”구십칠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는 노예곡(奴隸谷)에서 도망쳐 나왔어.”“노예곡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어. 노예곡에서 태어난 아이는 다섯 살이 되면 등에 금혼부 낙인을 새기고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해.”“그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지만 태어났다는 자체가 죄가 된 거야.”“맨 처음에는 아무도 노예곡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어. 다들 그들에게 개과천선하고 다시 시작할 터전을 주었다고 생각했지.”“나중에야 알았어. 그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그들에게는 노예가 필요했어. 공을 들여 노예를 가르치기도 했고 약한 사람들에게 말도 안 되는 죄명을 씌워 노예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지.”“그런데 그 많은 노예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제사장 일족에게 훈육
그 말에 구십칠이 충격에 빠진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제사장?”낙청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내가 대제사장이 되어야 이 불공정한 법과 질서를 파괴할 수 있고 네가 구하고 싶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어.”“너희들이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여도 이 법과 질서가 존재하는 한 여전히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노예로 전락할 거야.”그녀의 설명을 들은 구십칠은 동요하는 눈빛을 보였다.그러다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듯, 미심쩍은 표정으로 낙청연을 바라보았다.“네가 지금 했던 말 다 지킬 수 있어?”“당연하지.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없었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어.”구십칠은 눈앞의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그녀와 손을 잡으면 대업을 이루기 전에 그녀가 먼저 죽어버릴까 봐 걱정도 되었다.하지만 확신에 찬 눈빛과 말투는 묘한 신뢰감을 안겨주었다.구십칠이 여전히 결정을 못 내리자 낙청연은 천명 나침반을 꺼냈다.그러고는 바닥에 쓰러진 두풍진을 바라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저 남자의 과거를 봤어. 노예의 존재 이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어. 그의 가족들이 수모를 당했다고 해서 그가 무고한 사람을 죽인 건 정당화될 수 없어. 그 가해자들과 다를 게 뭔데? 심지어 더 악랄했지. 그래서 저 자를 죽인 건 후회하지 않아.”“하지만 구십칠, 당신은 달라. 물건을 훔치기만 했지 한 번도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어. 너는 끝까지 공정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는 거야. 무고한 피를 보기 싫었던 거겠지. 내 말 틀렸어?”“그래서 나는 당신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해.”“저들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난 당신을 이해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도 있어.”말을 마친 낙청연은 피곤한 기색으로 침대 머리에 몸을 기댔다.그 모습은 전혀 약자로 보이지 않았다.구십칠의 눈빛에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는 작은 몸집안에 숨은 강직한 영혼을 본 것 같았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검은 인영이 마당으로 나왔다. 안색은 어제처럼 초췌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창백했다.그녀는 마당을 둘러보다가 눈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아직도 햇살이 적응되지 않는다.바로 눈이 시큰거리면서 눈물이 나왔다.밀실에서 나온 뒤로 더는 강한 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나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구십칠이 나머지 일행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안색이 많이 좋아졌네.”그가 낙청연의 얼굴을 관찰하며 인사를 건넸다.낙청연도 대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금혼부를 해제해도 될 것 같아.”그렇게 한 명, 또 한 명, 낙청연은 단숨에 모든 악인들의 금혼부를 해제했다.낙인의 흉터만 남은 곳에 부문의 흔적이 사라지자 모두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이는 그들의 자유를 의미했으니까!홍해는 아예 칼을 들어 어깨에 있는 흉터까지 말끔히 도려냈다.“앞으로 더 이상 노예가 아니야!”“평생 노예로 살지 않을 거야!”“아무도 내 몸에 이따위 흔적을 새기게 하지 않겠어!”분명 피가 튕기고 잔혹한 행위였지만 그들이 삶을 향한 희망과 희열에 불타오르고 있음을 낙청연은 느낄 수 있었다.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낙청연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너희들을 데리고 나갈 거야.”말을 마친 그녀가 대문 쪽으로 다가가서 천명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금색의 법진이 그려지더니 그녀가 손짓하자 거대한 힘이 땅에 내리쳤다. 이곳을 감싸고 있던 진법들이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거친 바람이 불어와서 대문을 열었다.“가자!”구십칠은 서둘러 대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들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사람을 죽이면 안 돼. 안 그러면 다시 잡혀 올 거야.”그렇게 일행은 천자호 노예 감옥을 뛰쳐나갔다.소동에 놀란 병사들이 달려와서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상당한 병력이 모였기에 다들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사람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 뚫고 나가?”“그냥 다 죽이고 나가자!”홍해는 저들의 목을 칠 준비
묵계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뱀독이 확산하여 썩어가는 송천초의 피부를 보니, 그녀는 못내 싫어졌다.시간이 흐르면 뱀독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그러다 오장육부를 다치면 이 몸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묵계는 갑자기 방법이 떠올랐다.“좋다. 진법을 거두거라. 나오겠다.”묵계도 조금 조급해졌다.“약속하거라. 너에게 다른 몸을 찾아줄 테니 절대 다른 짓 하지 말거라.”낙요가 말했다.“그래. 어서!”두 사람은 드디어 의견이 맞았다.낙요가 진법을 없애자, 묵계도 순순히 송천초의 몸에서 나왔다.낙요는 특별히 두 가닥의 혼이 모두 나왔는지 확인했다.낙요는 얼른 부적을 송천초의 몸에 붙였고 묵계는 다시 송천초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하지만 묵계는 낙요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낙요가 가까이 오자 바로 낙요의 미간을 파고들었다.그녀는 순식간에 낙요의 몸속으로 들어갔다.낙요는 심한 충격을 입은 듯 휘청이며 뒤로 물러서서 의자를 붙잡고 그제야 안정을 찾았다.그녀의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하하. 다른 몸을 찾을 필요 없다. 네 몸이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혼을 빼앗는 것에 난 도가 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를 대신하여 여국의 여제가 될 것이다.”낙요는 안정을 찾고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동하국에 너무 오래 있어, 바깥세상을 본 적 없는 모양이구나.”“아무나 너에게 혼과 몸을 빼앗기는 것은 아니다.”“제사장족의 대제사장들을 들어본 적 있느냐?”묵계는 낙요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제사장족? 동하국 사람한테서 들은 적 있다. 그때 나를 공격한 젊은이들도 제사장족 사람들이었다.”“그들이 쓰는 진법은 네 진법과 다를 것이 없다. 보아하니 너도 제사장족이구나.”“잘됐구나. 네가 강할수록 너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묵계는 아직도 기뻐하고 있었다.낙요가 난감한 듯 웃었다.“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구나.”“너처럼 순진한 요괴는 처음 보
백서는 바로 방에서 물러나 방문을 닫았다.조영궁 밖이 조용해지자, 병풍 뒤에서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초경이었다.그는 쓰러져 있는 송천초를 품에 안고 있었다.낙요는 안색을 굳히고 다급히 앞으로 걸어갔다.“어찌 된 일입니까?”초경은 송천초를 연탑에 눕히고 설명했다.“동하국에서 괴물을 만났습니다...”초경은 사건의 경과를 간단히 설명했고 묵계의 신분도 알려주었다.그의 말을 듣고 낙요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렇습니까?”“방법이 있습니까? 그 괴물은 천초의 몸을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독을 없애서 깨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천초가 위험할 것입니다!”초경은 몹시 조급했다.낙요가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급해하지 마십시오. 방법이 있습니다.”“천초 몸 안에 있는 묵계의 혼을 뽑는 것은 자신 있습니다.”“밖을 지키고 있으세요.”초경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놓였다.낙요는 여국에서 제일 강한 대제사장이었으니, 분명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천초는 괜찮을 것이다!“예. 밖에 있겠습니다.”초경은 바로 방에서 나가 정원을 지키고 있었다.낙요는 피로 진을 그려 송천초의 몸을 뒤덮었다.그리고 송천초 몸 안의 혼을 빼내기 시작했다.물론 묵계가 그녀의 몸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아, 과정이 쉽지 않았다.손을 세게 쓰면 송천초를 다치게 할 수도 있고 약하게 하면 묵계를 꺼낼 수 없었다.“넌 누구냐? 감히 나를 상대하려는 것이냐?”묵계의 낮고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국과 오랫동안 싸웠는데, 여국의 여제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낙요는 가소롭다는 듯 답했다.그 말을 듣고 묵계는 깜짝 놀랐다.“여국 여제? 평범한 사람을 위해 이 진까지 쓰는 것이냐?”“이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난 너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 나와 손을 잡지 않겠느냐?”낙요가 가볍게 웃었다.“보아하니 넌 사람의 감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사랑도 모르고 우정도 모른다.”“네가 몸을 원한다면 더 좋은 몸을 찾아주겠다. 얌전히 송천
“대체 뭘 하려는 거냐!”초경이 매섭게 물었다.“나는 살고 싶다. 나를 풀어주면 안전한 곳에 가서 이 여자를 풀어주마.”그 말을 듣고 초경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너를 풀어주면 천초를 놓아줄 것이라 믿지 않는다.”묵계가 담담하게 웃었다.“비록 웅황주가 나를 몰아냈지만, 이미 이 여인의 몸에 혼을 한 가닥 남겼다. 지금 두 가닥의 혼이 몸에 들어있으니, 7일 후 혼을 잃고 나의 몸이 될 것이다.”“이 몸은 이제 내 것이다.”“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얘기할 자격도 없다. 내 말대로 해야 이 여자는 살 기회가 있다!”“나를 놓아주거라!”묵계의 위협에 초경은 주먹을 꽉 쥐고 분노를 억눌렀다.“가거라.”“3일 후, 반드시 천초를 만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널 찾아 죽일 것이다.”묵계가 입꼬리를 올렸다.“좋다!”말을 마치고 묵계는 약사의 몸을 끌고 빠르게 그곳을 떠났다.낙현책이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정말 이렇게 풀어주는 것입니까? 천초 고모를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초경은 묵계가 떠난 방향을 빤히 보며 말했다.“괜찮다.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다.”낙현책은 살짝 놀랐다.이내 다들 그녀를 따라갔다.그들은 바닷가 암초에서 묵계를 따라잡았고 그녀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유생은 그녀가 중독된 것을 알아차렸다. 발목을 보니, 어느새 뱀에게 물려 있었다.유생이 고개를 돌려 초경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초경이 한 일인 것 같았다.초경은 놀라지 않고 마음 아픈 표정으로 송천초를 안았다.“천초를 데리고 먼저 돌아갈 테니 너희들은 부 태사를 돕거라.”“예!”이내 초경은 시선 속에서 사라졌다.다들 부 태사를 도우러 갔다.부진환은 병사를 이끌고 동하국을 공격했다. 비록 동하국 사람은 적지 않았지만, 방어에 강한 성벽과 무기가 없었고 선박뿐이었다.여국 병사들이 끊임없이 섬에 오르고 있으니, 동하국이 멸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다.초경은 송천초를 안고 청주로 돌아와 묵계의 혼을 어떻게든 몰아내려고 했지만, 줄곧 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금색 진법이 나타나 묵계를 진법 안으로 가두었다. 귀를 뚫을 듯한 그 노랫소리는 진법 속에 가로막혔다.흰옷을 입은 제사장족 제자 수십 명이 하늘에서 나타났다.그들은 복숭아나무 위에 가볍게 서서 열 손가락으로 진법을 그렸고 손끝에는 금빛 부문이 흐르고 있었다.묵계는 깜짝 놀란 후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는 깜짝 놀라 송천초를 바라보았다.“너구나!”송천초가 차갑게 웃었다.“설마 내가 혼자 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묵계는 굳은 표정으로 분노에 찬 듯 말했다.“괘씸하구나! 너에게 속다니!”그때, 밖에서도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송천초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부 태사가 사람을 데리고 동하국을 공격했으니, 당신은 도망가지 못할 것입니다.”“차라리 순순히 잡히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그녀는 어젯밤 묵계를 만난 후 막사로 돌아가 바로 이 일을 부진환에게 알리고 대책을 논의했다.부진환은 그 여자가 동하국 약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초경도 분명 그 여자의 손에 있을 테니 그에 따른 계획을 세웠다.그녀가 혼자 묵계를 만나러 간 것도 다른 사람에게 길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다들 기관선을 이용해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묵계가 뱀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송천초는 웅황을 가득 챙겨 몸을 지키려 했다.묵계는 진법 속에서 절망하여 초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너와 나도 동족이라 할 수 있다. 나한테 한 짓을 다시 너한테도 할 것이다! 사람은 절대 믿어선 안 된다!”“정말 저 사람들을 도우려는 것이냐?”“초경. 난 너를 죽이려 한 적 없다!”초경은 한숨을 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의 처지가 안쓰럽지만, 우린 동족이 아니다.”“우린 다르니, 같다고 하지 말거라.”“너의 딱한 처지를 보아, 솔직히 말하마. 동하국은 곧 멸망할 것이니, 너도 원수를 갚은 셈이다. 마음 놓고 떠나거라.”그 말을 듣고 묵계는 넋을 잃고 그들을 싸늘하게 훑어보았다.“죽으려면 함께 죽겠다!”묵계는 하늘을 향해 소
“그는 감금되었다. 우리는 그를 구할 수 없다. 그를 구할 유일한 방법은 바로 너의 몸과 나의 힘을 합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기회가 있다.”그 말을 듣고 송천초는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뜻입니까?”묵계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나와 하나가 될 수 있느냐? 그를 구할 수도 있고 그와 같은 수명을 가질 수도 있다.”“두 사람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하지만 대가로 아픔을 겪을 수도 있다.”“할 수 있느냐?”송천초는 미간을 찌푸리고 사색에 잠겨 대답하지 않았다.묵계가 말을 이었다.“이곳은 동하국이다. 그들이 설치한 함정에 나는 들어갈 수 없고 평범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들어가도 그를 구할 수 있겠느냐?”“우리가 힘을 합치면 할 수 있다! 잠시 힘을 합쳐 그를 구하고 다시 방법을 생각해 떨어지는 것이 어떠냐?”묵계가 한참 말을 한 뒤에야 송천초는 그녀의 말을 허락했다.“좋습니다. 허락하겠습니다.”그 말을 듣고 묵계는 기쁠 따름이었다. 송천초가 이렇게 쉽게 넘어올 줄은 몰랐다.만약 이 몸을 빼앗는다면 초경에게 청신요를 쓰지 않아도 된다.“좋다. 바로 자리를 옮겨서 시작하자.”송천초는 고개를 끄덕이고 묵계를 따라 복숭아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갔다.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복숭아나무였고 다른 것은 없었다.송천초는 묵계의 말에 따라 다리를 꼬고 앉았다.묵계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와 손바닥을 마주하고 있었다.“시작할 것이다. 조금 불편할 테니 참거라.”묵계는 말을 마치자마자 시작했다.송천초는 괴로워하며 눈살을 찌푸렸고 온몸의 기운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옆에 있던 복숭아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밀실에서 독을 없애려 애쓰고 있던 초경은 순간 송천초의 존재를 느꼈다.그는 번뜩 눈을 뜨고 송천초가 주위에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게다가 그녀는 지금 위험하다!초경은 마음이 초조했다. 그는 송천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독을 없애기도 전에 다급히 밀실 문을 부수고 뛰쳐나갔다.묵계의 혼이
송천초는 깜짝 놀랐다.그 여자는 분명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송천초를 향해 걸어오는 도중 옷과 머리카락이 말랐다.송천초는 위험을 감지하고 바로 사람을 부르려 했다.그녀가 있던 곳에 마침 암초가 있어 그 여자의 모습을 막았다. 옆에 바로 청주군의 막사가 있었는데 이렇게 대담하게 이곳으로 오다니!송천초가 사람을 부르려는 그때, 여자가 입을 열고 그녀를 저지했다.“나는 적의가 없다. 그저 너를 찾으러 왔다.”“저요?”송천초는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송천초라 하느냐?”묵계는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녀가 본 기억 속의 그 여자와 똑같이 생겼다.“어떻게 아는 것입니까?”묵계가 웃으며 말했다.“나는 묵계라고 한다. 초경이 위험에 처해 있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송천초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졸이며 저도 몰래 앞으로 한 걸음 걸어갔다.“무슨 일입니까?”“당신은 대체 무슨 사람입니까? 어찌 당신을 믿을 수 있습니까?”묵계 뒤에서 뱀 꼬리가 나타났다. 송천초는 깜짝 놀랐다.“나는 그와 동족이다. 그가 너를 찾아오라 한 것이다.”“만약 그를 구하고 싶다면 오늘 밤 홀로 이곳에 오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너를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가겠다.”그 말을 듣고 송천초가 물었다.“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동하국입니까?”“그곳 말고 더 있느냐?”“오직 너만이 그를 구할 수 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거라. 초경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면 내가 시킨 대로 하거라.”말을 마치고 묵계는 경계하며 막사를 힐긋 보고 몸을 돌려 바다로 사라졌다.송천초가 추궁하기도 전에 묵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그녀가 무슨 사람인지 말한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종일 불안했던 것을 생각하면, 초경에게 정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병사가 상황을 보러 왔다.“방금 이쪽에서 인기척이 있길래 보러 왔습니다. 무슨 일 없는 것입니까?”송천초는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들리는 그 노랫소리는 그의 의식을 흐릿하게 했다. 그는 애써 소리를 막으려고 했지만, 자꾸 귀를 파고들었다.초경은 한참 몸부림치다가 결국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머리를 움켜쥐고 고통스럽게 바닥에 쓰러졌다.묵계는 그 모습을 보고, 그제야 그에게 다가갔다.“너를 상대하기가 참 어렵구나. 하지만 나를 너무 얕본 것 같구나. 인어족의 청신요는 죽어가던 사람도 깨울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현혹해 행동을 조종할 수도 있다. 쉬이 사용하지 않던 방법인데 이렇게 너에게 쓰게 됐구나.”묵계는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웅크리고 앉아 손을 뻗어 초경의 얼굴을 스쳤다.“청신요로 너의 기억을 바꾸면 오늘부터 나의 명을 따르며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거부하지 말거라. 자칫 잘못하면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묵계는 웃으며 말을 마치고 손을 초경의 머리 위에 얹은 후 청신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맑은 소리가 주문처럼 초경의 귓가에 맴돌면서 바늘처럼 그의 머리를 파고들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묵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애먹였다.그녀는 의지력이 이렇게 강한 사람을 본 적 없었다.묵계는 싸늘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버티고 있는지 봐야겠구나!”그녀의 손끝이 초경의 미간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실패의 원인을 찾았다.그의 기억 속에는 온통 다른 여자뿐이다.그것도 평범한 여자였다.청신요의 통제를 받지 않고 기억을 지우지도 못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니.묵계는 내키지 않았다. 그 여자가 자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않은 원인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고작 수십 년의 수명만 갖고 있어 결국 늙어 죽기에 그들과는 다르다.감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의 육체가 다치지 않았다면 청신요를 쓰는 것도 애먹을 리 없었을 것이다.보아하니 이 방법으로는 그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그럼...묵계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묵계는 초경을 업고 돌아가 밀실에 가두었다.묵계는 그녀가 자리를 비웠을
묵계는 이 남자를 죽이기 아까웠다. 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나긴 수명을 갖고 있어 함께 수련할 수 있었다.이런 사람을 또 찾기 어려울 것이다.초경은 그 말을 듣고 조금 의아했다.“그럼, 너는 진정한 약사가 아니냐?”묵계가 콧방귀를 뀌었다.“물론이다. 그 여자는 이미 죽었다. 나의 몸을 망가트렸으니, 그녀가 바다로 들어간 기회를 틈타 그녀를 죽이고 몸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 뱀의 기운은 무슨 수를 써도 사라지지 않았다.”“그동안 약사의 신분으로 동하국에서 지내며 바다에서 보물을 발견하여 일반인과 다른 힘을 얻었다고 그들을 속이고 바다에 들어가 보물을 찾게 했다.”“이로써 그들의 내전을 일으켜 영원히 평화로이 지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나의 한을 풀었다!”초경은 그제야 이유를 깨달았다.“여국 바다에 있는 진도 네가 깬 것 같구나.”초경은 부진환에게서 여국과 동하국의 전쟁에 관해 많은 얘기를 전해 들었다.다들 대진이 깨지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동하국 사람은 여국 땅으로 침입할 수 없다.하지만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눈앞에 있는 이 괴물은 할 수 있었다.역시나 묵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물론 나다.”“내가 아니었다면 동하국 사람은 평생 여국 땅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초경이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복수를 하고 싶지만, 동하국 사람을 모두 죽이지 않았다. 살생을 저질러 화를 입고 싶지 않은 것이구나.”“그래서 대진을 파괴하고, 동하국 내전을 일으키고 그들을 선동하여 여국을 공격한 것이냐? 그들이 전쟁으로 죽게 만들려는 것이냐?”“아주 완벽한 계획이구나. 하지만 전쟁을 일으켰으니, 결국 운명의 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묵계가 만족스럽게 웃기 시작했다.“나의 계획을 알아차리다니 정말 똑똑하구나.”“그들이 싸우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대진이 사라졌다 해도 여국을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나와 상관없다.”“내가 화를 입는다 해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말을 마치고
그는 이내 약사를 찾으러 갔다.그러나 도림을 벗어나기도 전에 초경은 앞에 길이 없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자리에 멈춰 서서 사방을 관찰하다 이곳이 미로라는 깨달았다. 그는 손바닥을 들었지만,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자세히 맡아보니, 바람 속에 복숭아 꽃향기와 옅은 약재의 향기가 섞여 있었다.독이 있다!뒤에서 여유로운 발소리와 묵계의 웃음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왜 앞으로 가지 않습니까?”초경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묵계는 무서운 표정이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득의양양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초경은 가슴이 떨려왔고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네가 바로 약사냐?”묵계가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먼 곳에서 나를 찾아왔는데, 약사라는 이름만 알고 계십니까? 제 이름도 모르는 것입니까?”“다들 저를 자릉약사라 부릅니다.”“이곳에 온 순간부터 알아차렸습니다. 비록 신분을 모르지만, 홀로 이곳에 온다는 건 분명 만만치 않은 상대겠지요. 그래서 도림에 손을 조금 썼습니다.”“도림에 들어선 후부터 이미 중독되었습니다. 이곳에 오래 있을수록 독은 더욱 세질 것입니다.”“그리고 이 독은 사족을 겨냥한 독입니다.”묵계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초경을 바라보았다.초경은 슬쩍 내공을 써봤지만, 사지가 무기력했다. 무언가가 갑자기 그의 경맥을 막은 것처럼 내공이 안정을 잃고 통제하기 어려웠다.그는 손을 움켜쥐고 불편함을 참으며 내색하지 않았다.“사족? 나를 무서워하지 않은 것이냐? 넌 대체 누구냐?”초경은 의아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이상할 것 없이 평범한 사람 같았다.묵계가 가볍게 웃자, 뒤에 환영이 나타났고 그녀의 꼬리가 보였다.하지만 재빨리 사라져 버려서 초경은 뱀 꼬리인지 아닌지를 똑똑히 보지 못했다.“공자, 우린 같습니다. 저를 죽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주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습니다.”묵계는 흥미진진하게 초경을 훑어보았고 눈빛에는 탐욕의 빛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초경의 강한 수위를 탐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