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거든요!”원이는 성도윤의 심기를 제대로 긁으려고 비수를 꽂았다.“우리 엄마는 아저씨를 너무 싫어해서 상대하기도 귀찮아해요. 아저씨가 나쁜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우리가 조금만 조사하니 바로 나오던데요?”차설아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성도윤이 원이에 대한 인상이 너무 나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원아, 이렇게 버릇없이 굴면 안 돼.”‘그래도 네 아버지잖아!’라는 뜻이 숨겨져 있기도 했다.“엄마, 제가 언제 버릇없이 굴었어요? 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이 나쁜 놈이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했어요? 이 사람만 아니었다면 엄마도 그렇게 고생할 필요 없잖아요!”“나쁜 짓을 했으면, 모두에게 미움받는 결과를 감수해야죠. 제가 이 나쁜 놈을 싫어하는 건 도리에 전혀 어긋나지 않아요.”“미스터 Q 좀 봐요, 얼마나 좋아요. 엄마에게도, 저희에게도 잘해주고, 매일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어야 우리 사랑과 예의를 받을 자격이 있죠.”원이의 논리는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했다.차설아가 이마를 짚고는, 제발 성도윤이 자애로움을 베풀어, 아이에게 화내지 않기를 빌었다.성도윤의 차가운 눈동자는 원이를 한참이나 지그시 바라보더니,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아주 훌륭해. 내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군. 역시 내 유전자는 대단하다니까.”차설아와 원이는 어리둥절했다.성도윤은 손을 내밀어 원이의 뽀송뽀송한 머리를 툭툭 치며 물었다.“나랑 성씨 가문으로 가서, 내 밑에서 교육을 받으며, 나의 뒤를 잇는 차세대 왕이 되지 않을래?”원이는 오만불손한 태도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누가 그쪽이랑 성씨 가문으로 가요? 누가 그쪽 교육을 받으며 차세대 왕이 되고 싶대요? 차세대 나쁜 놈만 아니어도 다행이지!”“열혈 애니메이션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아저씨 중2병 걸린 거 가족분들은 아세요?”성도윤의 손은 허공에 뻣뻣하게 얼었고, 얼굴도 굳어지더니 한참 후에야 애써 말했다.“역시 훌륭해. 나에 버금가는 독설 능
토끼도 급하면 사람을 문다는 말이 있는데, 하물며 상대는 사람을 잡아먹고 뼈도 뱉지 않는 슈퍼 맹수이니, 차설아는 적당한 선에서 멈춰야 했다.원이와 달이도 성도윤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감지하고, 재빨리 그의 옷과 바지를 꺼내 성도윤의 손에 쥐여주었다.“이번에는 이쯤에서 봐줄게요. 다음번에 또 우리 손에 잡히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줄 알아요.”원이는 턱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말했다.“너희들도 기억해. 다음번에는 진짜 아빠가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줄게!”성도윤도 카리스마 넘치게 독설을 내뱉고는, 하이힐을 신은 채로 옷을 안고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푸하하하!”차설아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작게 웃던 데로부터 시작해 큰소리로 웃었다.그녀의 방자한 웃음소리는 건물 전체를 꿰뚫을 기세였다.지난 몇 년 동안, 그녀가 본 성도윤은 늘 고상하고 빈틈없이 우아한 모습이었는데, 오늘 이렇게 낭패한 꼴을 보았으니, 일종의 환상이 와르르 무너진 느낌이었다.역시, 성도윤을 다스릴 수 있는 건 리틀 성도윤뿐이었다. “너희들, 엄마가 이번에는 이대로 넘어가지만, 절대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돼. 저 안에 있는 놈이 미치면 악마보다 더 무서워. 그러다 진짜 화나기라도 하면 너희 둘 어떻게 될지 장담 못 해. 알겠어?”차설아는 실컷 웃은 후, 심각한 표정으로 원이와 달이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교육했다.그러자 달이가 말했다.“하지만 엄마, 나쁜 아빠 성격 꽤 좋아 보이는데요? 저희가 그렇게 괴롭혔는데도 화내지 않잖아요? 마치... 우리가 해준 스타일링을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혹시 속으로 좋아하는 건 아닐까요?”차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노파심에 말했다.“아니, 쉽게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맹수라서 그래. 화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속으로는 이미 화가 치밀어 올라 어떻게 복수할지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함부로 건드리며 안돼.”달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눈을 반짝였다.“그렇다면, 우리 차라리 전략을
“엄마는 늘 우리에게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잖아요. 만약 나쁜 아빠가 이미 잘못을 뉘우쳤다면, 우리는 왜 좋은 사람이 될 기회를 주지 않는 거죠?”“우리가 잘해주면, 아빠도 우리에게 잘해 줄 거예요. 우리가 괴롭히면, 똑같이 우리를 괴롭히겠죠. 그럼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또 한 명 늘어나도록, 아빠에게 잘해주면 안 돼요?”달이는 논리정연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어릴 때부터 달이는 원이의 1호 팬이었고,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다.그래서 차설아는, 만약 언젠가 원이가 사람을 죽였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칼을 건넨 사람은 분명 달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하지만, 지금 이 두 녀석은 성도윤 때문에 아주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음, 그게. 너희 둘...”차설아는 옆에서 듣다가, 두 녀석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런 장면은 처음이었느니 말이다.“달아, 네 생각은 문제가 있어. 나쁜 놈은 그냥 나쁜 놈이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나쁜 놈에게 마음이 약해지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아니야, 만약 누구든 잘못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왜 선생님이 있고 왜 경찰이 있는 건데?”원이도 처음으로 달이가 이렇게 고집부리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차설아를 전쟁터로 끌어들였다.“엄마가 좀 말해봐요. 저랑 달이, 누구 말이 맞아요? 아니면... 우리는 그 나쁜 아빠를 용서해야 하나요?”“글쎄...”차설아는 턱을 쥐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두 아이에게 상처도 주지 않으면서 갈등도 풀 수 있을까?“엄마는 말이야. 우리가 강해져야 하는 것도 맞고, 관대해야 하는 것도 틀리지 않은 것 같아. 그 정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아주 나쁜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면 안 되고, 착한 사람에게는 기회를 줘야겠지? 그래서...”“그러니까, 나쁜 아빠의 행동에 달렸다는 거죠?”원이는 단번에 차설아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말했다.그는 마치 애늙은이처럼 정색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말도 일리가 있어요
차설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앞으로 나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선생님, 어떻게 된 일이에요?”“알레르기로 인한 실신이에요. 큰 문제는 없어요.”의사는 이마를 찡그리더니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그런데, 가족분은 환자가 피 공포증이 있다는 걸 모르세요? 이미 심각한 상황이니 음식에 특히 주의하셔야 해요. 함부로 아무거나 먹어서 알레르기를 일으키면 즉사할 수도 있어요!”“어... 아무거나 먹어요?”“네. 수면제 같은 건 절대 입에 대면 안 돼요. 피 공포증을 치료하는 약이랑 반응을 일으켜, 심하면 진짜 죽을 수도 있어요!”의사의 말에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원이가 성도윤에게 수면제를 먹였다고 했었다. 잠시 성도윤을 자게 하려던 약이 이렇게 큰 영향이 있을 줄은 몰랐다.“제가 소홀했어요. 저 때문이에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그래요. 하지만 이번 일로 몸이 심하게 손상되어, 내일 아침 퇴원하셔도 집에서 일주일 정도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좋기는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고, 환자분이 화나거나 슬프지 않게 가족분들이 많이 신경 쓰셔야 해요. 뭐든 환자분에게 고분고분 순종하고, 최대한 기쁘게 해주고요...”의사는 진료기록 작성에 몰두하면서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네? 고분고분 순종까지 해야 한다고요?”차설아는 의학에 관한 연구가 깊지는 않지만, 이런 병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지금 의사의 소견을 의심하는 겁니까?”의사는 고개를 들고 매우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검사 보고서를 건네주었다.“여기 수치들 좀 보세요. 간이며 비장이며 위가 얼마나 손상되었는지. 만약 환자분이 화가 나서 심혈이 쌓인다면 절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가족분들이 좀 관심해주면 안 되나요?”“작은 수면제 한 알 때문에 내장이 손상돼요? 말도 안 돼요...”“수면제는 알레르기를 일으켰을 뿐이고, 내장의 손상은 피 공포증 때문에 복용한 약 때문이에요.”차설아는 검사 보고서의 수치들을 보면서, 잘 알지는 못하지
병실은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는 여전히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긴 속눈썹은 깃털처럼 촘촘했고, 오렌지색 스탠드는 그의 오똑한 콧등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차설아는 남자가 반응이 없자, 몸을 숙이고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관찰하니,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이 녀석, 다른 건 몰라도 얼굴 하나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조각상이라니까. 왜 이렇게 예뻐?”그녀는 남자의 완벽한 얼굴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이목구비가 아름다운 건 그렇다 치고, 성도윤은 피부까지 좋았다. 어떤 고급 스킨케어를 썼는지 모르지만, 부드럽고 매끄러운 것이 울퉁불퉁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전에 속은 경험이 있는 차설아는 경계심이 훨씬 높아졌고, 남자를 밀치며 말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똑같은 수법은 안 통해!”남자는 요지부동으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계속 연기하시겠다? 그래 좋아!”말을 마친 차설아는 장난스럽게 남자의 코를 잡고 그의 호흡을 막았다.남자는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이래도 안 일어나?”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선전포고했다.“좋아, 그럼 나의 필살기를 보여주는 수밖에!”말을 마친 그녀는 팔을 휘저으며 몸을 풀더니... 남자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또 빠르고 느리고를 반복하는 그녀의 간지럽히기 수법은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이래도 반응이 없다고?”차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마침내 성도윤이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믿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차설아는 이 남자가 깨어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그래, 일단은 믿어줄게. 지금 당신은 의식을 잃은 혼수상태가 맞아.”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남자를 정성껏 돌보기 시작했다.먼저 그에게 세수를 시켜주고, 또 약을 먹이고, 마지막으로 느린 템포의 음악도 들려주었다.의사가 편안한 환경일수록 성도윤이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렇게 편안하고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성도윤이
차설아는 남자의 말을 끊고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너무 창피하잖아!이 자식이 언제 깬 건지는 몰라도, 옆에서 쿨쿨 자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웃었을까!그녀는 남자에게 맹렬하게 쏘아붙이려다 의사의 당부를 생각해서 화를 억누르려고 애썼다.“지금 좀 어때. 아직도 어지러워?”성도윤의 깊은 눈이 차설아를 응시했다. 그는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날 이렇게 걱정한다고?”“착각은 넣어둬. 관심이 아니라 짐을 내가 다 짊어질까 봐 두려워서 그런 거야. 아직 애들이 철도 못 들었는데. 당신한테 일이 생겨서 나한테도 피해가 가면 어떡해?”차설아가 작고 예쁜 얼굴을 쳐들며 본인이 지혜롭고 이성적인 사람인 양 도도하게 말했다.“그런 거였어?”성도윤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물었다. 실망인지 아니면 흥미진진한 건지.“그럼?”차설아가 차갑게 코웃음 쳤다. 마치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도도한 공주님 같았다.“난 다른 사람을 쉽게 걱정해 주지 않아. 난 비싸거든.”“그렇다면 두 아이한테 신경 좀 써야겠는걸.”성도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두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머리도 어지럽고 기운이 없는 데다 기분까지 별로니 언제쯤 회복될지 모르겠네, 원.”“금방이야. 일주일이면 나아질 거야.”차설아는 성도윤이 아픈 척하는 건지 정말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의사가 말씀하시길 상태가 좋지 않아 신경 써서 돌보아야 한다고 했으니.아픈 척하는 것이더라도 빨리 낫도록 살뜰히 보살펴야 했다.“걱정 하지 마. 내가 책임지고 잘 보살필 테니.”차설아가 남자를 향해 진지한 태도로 약속했다.“그래? 그럼 기대할게.”성도윤이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갑자기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이 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다음날, 남자는 퇴원하여 집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성도윤은 차설아와 두 아이가 큰집에 갈 것을 제안했는데, 그 이유로는 그가 낯선 환경에서 특히 잠자리에 대해 거부감이 들기 때
아파트로 돌아가던 차설아는 두 아이가 없는 틈을 타 미스터 Q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죠?”전화기 너머의 미스터 Q는 차설아의 연락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중요한 일이 생겨서요. 지금 어디 계세요?”“그게...”남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대답했다.“지금 성심 전당포에 있어요. 처리할 일이 있어서.”“그렇군요. 그럼 언제 시간이 빌 때 아파트에 잠깐 들르실 수 있겠어요?”차설아는 남자와 중요하게 상의할 일이 있는 듯 조급한 말투였다.“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차설아의 다급함을 눈치챈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아파트로 돌아온 차설아는 그녀와 아이들의 일상용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대략 한 시간 뒤 미스터 Q가 약속대로 도착했다.“오셨네요.”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든든해지는 느낌이었다.비록 이 남자는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매번 함께 있을 때마다 가정의 온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하여 은연중에 이 소문 무성한 남자를 자기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여인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집에는 ‘남자’의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든든한 산이 되어줄 수도 있고 따뜻한 물결이 되어줄 수도 있는 그런 존재.미스터 Q는 싸늘하게 방안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정리가 다 되어있는 캐리어를 보더니 짙은 눈썹을 추켜세웠다.“이사... 하는 겁니까?”“아뇨, 아뇨. 일주일만 잠시 떠나 있는 거예요.”“어디로요?”“아, 그게...”차설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조금 어색해했다. 이 남자에게 어떻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비록 연기라고 분명히 해두었어도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들은 어느새 정이 들었다.만일 어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한다면 화내겠지?“그럼 제가 맞춰볼게요...”미스터 Q의 얇은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전남편과 화해했을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사하는
차설아가 미스터 Q에게 성도윤과의 일을 고백했다. 그녀는 자신이 미스터 Q와 어떤 관계든 간에 그도 이 사실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 추측이 맞았네요.”미스터 Q는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당신의 선택은요?”“전 재혼하지 않을 거예요. 양육권은 더더욱 주지 않을 거고.”차설아가 매우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눈앞의 남자를 응시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듯 말했다. “그러니까 제 선택은, 당신과 혼인신고 하는 거예요.”미스터 Q가 여전히 감정변화 없이 담담히 말했다. “그래서, 절 선택한 원인은 두 아이의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서다. 맞습니까?”차설아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들 때문만은 아니에요.”“그럼 더 이상한데요...”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차설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설마 저에게 설레기라도 한 거예요?”“전 몰라요.”차설아는 남자의 스킨십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속마음은 그녀 자신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망설여졌다...“사랑이라기엔 너무 거창하고, 설렘이라기에도 맞지 않은데.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가족 같은 따뜻함을 느껴요. 상상 속의 ‘가족’의 느낌이랄까요.”“그럼 성도윤한테서는 그런 느낌을 못 받았어요?”“사실대로 말하자면, 성도윤을 처음 봤을 때도 이런 기분을 느꼈었어요. 비록 매우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전 이상하게도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꼈어요.”차설아가 왠지 모르게 점차 추억 속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에는 성도윤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의 따뜻한 감정이 다시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제가 얼마나 사랑에 미친 여자였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 사람을 처음 본 순간 저는 이미 그와 아이를 낳고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티비를 보고, 여행을 가는 모습까지 상상했었어요.”“결혼한 이후에
모든 주주들이 일제히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충격이 서려 있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부대표님께서 실명했다고 하지 않았어?”“전에는 몸 상태도 많이 약해서 부대표님 자리까지 내려놓았는데 지금 보니 아주 생기가 넘치잖아?”“돌아왔다니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제 성대 그룹도 다시 살아날 수 있겠어!”주주들은 성진의 복귀를 환영해 주었다. 그들은 성진이 성도윤을 대신해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를 기대하며 중얼거렸다.성진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곧장 성도윤의 곁으로 다가갔다.“형, 미안해. 그동안 형 혼자 성대 그룹을 관리하느라 정말 힘들었을 텐데... 이젠 나도 회복했으니 형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성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성진을 응시했다.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성도윤은 심장이 순간적으로 옥죄어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성도윤은 그 생각을 깊이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회복했다니 다행이네. 앞으로 잘해보자. 우린 같은 배를 탄 사람이니까. 정말로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만 있다면 나도 네가 돌아온 걸 환영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성도윤은 마음속의 불안을 접어두고 형식적인 말로 대응했다.“역시 형은 큰 그림을 보는 사람이야. 걱정 마,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내가 형의 자리를 대신해 성대 그룹을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속에는 권력을 향한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다.순간, 주주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다.“좋아, 그럴 실력이 있다면 말이지.”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성진은 의자를 당겨서 자리에 앉았고 그의 비서인 석현이 나서서 주주들에게 새로운 전략과 방안을 설명했다.주주들은 숨죽이며 그의 말을 들었고 그들의 표정은 점점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해외 지사를 맡아왔던 만큼 확실히 사고방식이 개방적이네. 만약 이 계
“성 대표님, 지금 하셔야 할 말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저희는 지금 주주총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인 겁니다. 저희에게는 지금 수많은 경쟁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 내부에서도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능력 있는 인재들조차 불안함을 느껴 대거 이탈하는 상황이죠. 이대로 가다간 회사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장기준이 말했다. 직접적으로 성도윤에게 대표직에서 물러나라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의도는 뻔히 보였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어떤 해결책이 가장 좋다고 보십니까?”“그건 저도 모르죠. 제가 뭘 알겠습니까...”성도윤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장기준은 순간적으로 주춤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오준현이 나섰다.“간단합니다.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거죠. 그리고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도록 해요.”이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에 있던 수십 명의 주주들은 순간 숨을 죽였다.각자의 속셈을 감추듯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도윤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장기준 씨,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아뇨, 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성대 그룹을 위해서, 또 성 대표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장기준은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해명했다.“그럼 그 깊은 배려에 감사드려야겠군요.”성도윤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섬뜩할 정도로 서늘했다.그때, 한 주주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장기준 씨의 의견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 대표님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죠. 괜히 대표 자리를 바꿨다가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건 아닐까요?”그러자 오준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그건 여러분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한편, 성대 그룹에서.성도윤의 지각은 이미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주요 주주들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비서가 연간 그룹의 매출과 주요 프로젝트 성과를 보고했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회의실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다.“성 대표님, 보시다시피 올해 성대 그룹의 전체 이익이 계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관련 주가 역시 계속해서 하락세를 보고 있어요. 지금의 성대 그룹은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회사를 이끄는 책임자로서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실질적인 해결책이 있습니까?”7대 주주 중 한 명인 오준현이 말했다.그는 평소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매년 주주총회에서만 나타났다. 그리고 나타날 때마다 날카롭게 비판을 던졌는데 항상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성도윤을 깎아내렸다.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성씨 가문 사람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그러자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박지훈이 나섰다.“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이익을 볼 때도 있고 손해를 볼 때도 있는 법입니다. 성 대표님께서 성대 그룹을 맡은 후로 회사는 점점 성장해 왔습니다. 주가가 조금 하락했다고 이러시는 건가요?”“다들 아시다시피, 최근 몇 년간 특수 상황 때문에 대다수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성대 그룹은 그나마 하락폭이 적은 편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성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이미 파산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요?”박지훈은 성도윤을 강하게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지분은 많지 않았지만 성도윤과의 친분 덕분에 회사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그러나 오준현은 코웃음을 쳤다.“그럼 성대 그룹이 몇 달째 내리막길을 걷는 것도 성 대표님 덕분이란 말이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성 대표님께 상을 하나 드려야겠네요?”그의 냉소적인 말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오준현만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는 단순히 배경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을
“네가 감히 나를 때려? 두고 봐! 우리 아빠한테 이를 거야. 우리 아빠가 널 완전히 부숴버릴 거라고!”서은아는 분을 못 이겨 울먹이더니 퉁퉁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쥐고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차설아가 이미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이다.“엄마, 엄청 멋졌어요! 나쁜 사람을 한 방에 쫓아내다니... 완전 슈퍼우먼이었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달이도 커서 엄마처럼 슈퍼우먼으로 될 거예요!”차설아는 달이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슈퍼 우먼은 무슨... 우리 달이는 그냥 예쁜 공주님이면 돼. 괜히 다른 사람에게 시비 걸진 말되 누군가를 두려워하진 마.”원이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엄마, 저 아줌마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일부러 찾아와서 우리를 괴롭히려 한 거라고요! 뺨 몇 대만 맞고 도망가게 내버려두다니... 너무 쉽게 놔준 거 아니에요?”“원이야, 오늘 충분히 화풀이했잖아. 적당한 선에서 그만둬야 해.”차설아는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저 아줌마 아무리 꿍꿍이를 가지고 왔다 해도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야. 단지 좀 삐뚤어진 것뿐이지.”“사실 저 아줌마도 피해자이긴 해. 불쌍한 사람이거든. 오늘 받은 교훈이면 충분할 거야.”차설아는 원이를 다독였다.솔직히 말해서 서은아에 대한 그녀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수단이 좀 극단적일 뿐이지 말이다.그녀는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솔직했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진심으로 성도윤을 사랑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같은 남자를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차설아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서은아같이 대놓고 싸움을 거는 유형이 아니었다. 진짜 무서운 건 뒤에서 몰래 함정을 파고 그녀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몸을 살짝 떨었다.임
겨우 눈을 뜬 서은아는 원이가 했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지난 일까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 망할 꼬맹이가... 또 너야? 지난번엔 날 강에 빠뜨릴 뻔하더니 이번엔 물총까지 쏘면서 날 도발한다고? 죽고 싶어?”서은아는 이를 악물고 원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녀는 물을 또 한 번 맞았다.원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마치 자기가 어른인 것처럼 경고했다.“아줌마는 우리 집 손님이 아니에요. 여긴 아줌마를 환영하지 않아요. 지금 당장 나가세요!”“어린놈이 감히!”서은아는 자기가 어린아이에게 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했지만 원이의 민첩함을 과소평가한 것이 실수였다.아무리 쫓아다녀도 그녀는 원이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며 풀밭에 얼굴을 처박았다. 흙이 입안 가득 들어가고 온몸이 엉망이 되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설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원아, 너무 심하게 하진 마. 그래도 여자잖아.”“엄마,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 아줌마가 먼저 덤벼든 거라니까요? 그리고 이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에요. 그냥 나쁜 놈이죠! 완전 악당이에요! 지난번에 저를 호수에 빠뜨리려고 했어요! 나쁜 사람도 봐줘야 하나요?”원이의 입이 뿌루퉁해졌다.차설아만 옆에 없었더라면 원이는 벌써 ‘필살기’까지 써버렸을 것이다.“뭐라고? 널 호수에 빠뜨렸다고?”차설아는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서은아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원이가 하는 말이 사실인가요? 정말 어린 애한테까지 손을 댔다고요?”서은아가 어릴 때부터 삐뚤어졌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아이에게까지 손을 댈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어른들끼리의 다툼에 아이를 끌어들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서은아는 가까스로 일어났지만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입 안은 흙과 풀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눈물을 글썽하
“내가 말했었잖아! 도윤이만 가질 수만 있다면 망가뜨려도 상관없다고. 모든 걸 잃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을 때야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달을 거야. 그러면 내 곁으로 돌아오는 것도 시간문제지.”서은아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하, 웃기지도 않네!”차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도윤 씨는 사람이에요, 물건이 아니라. 그쪽이 부순다고 해서 부서질 존재가 아니라고요.”“그리고 도윤 씨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도윤 씨가 대기업 대표님이든, 그저 평범한 사람이든 나랑 아이들은 절대 그 곁을 떠나지 않을 거니까요.”“차설아,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직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아서야. 만약 도윤이가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받는 존재로 된다면? 도윤이와 엮이면 너까지 불행해지는 상황이라면? 그때도 떠나지 않을 자신 있어?”“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네까짓 게 어떻게 장담해? 사람이 발밑으로 내쳐지는 건 한순간이라고. 그러면 도윤이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거야. 결국 모든 사람이 도윤이를 외면할 거고 도윤이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무너질 수도 있어. 그렇게 된다고 해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첫째, 그럴 리 없어요. 둘째, 그렇게 될 때까지 제가 가만히 있을 것 같나요? 무너지면 제가 다시 일어서면 돼요. 비록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저한테도 나름대로 운영하는 작은 회사는 있거든요. 그 정도면 우리 가족이 먹고사는 데 부족할 게 없을걸요?”차설아가 말하는 ‘작은 회사’는 신흥 IT 강자인 천신 그룹과 거대한 자본을 가진 KCL 그룹이었다.하지만 두 그룹 모두 차설아의 소유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서은아도 그녀 앞에서 저렇게 우쭐거릴 수 있었다. 만약 서은아가 알게 된다면 얼굴도 들지 못하고 도망쳤을 것이었다.“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겨우 작은 회사라고 말이야. 그걸로 성대 그룹 같은 대기업을 살리겠다고? 꿈도 크네. 만약 진짜 도윤이를 위한다면 헤어지
“차설아 씨, 지금 절 협박하는 건가요?”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차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그건 아니에요.”차설아는 다시 한번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은아 씨가 저를 반대하는 건 좋지만 본인이 억울한 것처럼 절 비난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은아 씨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닌 듯싶어서요.”차설아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은아에게 약속했었다. 성도윤의 세상에서 물러나 두 사람을 이어 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전제는 서은아가 성도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를 위한 선택을 할 거라는 믿음이었다.그녀의 사랑이 이 정도로 극단적인 방식일 줄 모르고 말이다. 성도윤의 건강까지 해칠 정도라면 차설아는 더 이상 그를 서은아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만약 언젠가 도윤 씨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전 도윤 씨에게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이 세상에서 성도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차설아였다.그의 곁을 떠났던 건 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떠나고 보니 두 사람 모두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고통에 빠졌다.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두 사람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함께 극복해 나가는 게 그들에게 맞는 방식이었다.진정한 행복은 서로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말도 안 돼!”서은아는 눈을 붉히며 집착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내가 도윤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럴 일은 없어! 난 평생 도윤이만 사랑할 거고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그를 망가뜨리는 일도 할 수 있다고!”“서은아 씨, 진짜 미쳤어요? 그쪽은 사랑이 뭔지도 몰라요. 서은아 씨가 사랑하는 건 서은아 씨 자신 뿐이에요!”차설아는 서은아의 광기 어린 발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사랑이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
서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을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서은아 씨?”차설아는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드디어 절 보셨군요?”서은아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차설아의 감정이 너무나도 안정적이었기에 방금까지 확신했던 그녀의 생각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당연하죠.”차설아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옆자리를 가리키며 덤덤히 말했다.“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늦게 올 줄은 몰랐네요. 생각보다 멘탈이 좋은가 봐요?”서은아는 차설아의 반응을 보고 더욱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에 겉모습은 눈이 먼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 표정 하나하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서은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차설아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설아 씨도 멘탈이 대단하시네요.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뻔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원수지간인데도 이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셔서 참 고맙네요?”서은아는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차설아는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달이야, 착하지? 엄마가 이 아줌마랑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너는 민이 이모랑 잠깐 놀고 올래?”“싫어요! 이 아줌마 나쁜 사람 같아요. 아줌마가 엄마를 괴롭히면 어떡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으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서은아를 노려보았다.“게다가 이 아줌마 분명 아빠를 뺏으러 온 거예요. 전 절대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걱정 마, 달아. 아빠는 영원히 네 아빠야. 그 누구도 달이 아빠를 빼앗아 갈 수는 없어. 엄마가 이 아줌마랑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빠에 대한 얘기 말이야. 그러니까 엄마 말 들어. 가서 민이 이모랑 놀고 있어, 알겠지?”“알겠어요. 위험하면 꼭 소리 질러요! 제가 바로 달려와서 엄마 지켜줄 거예요.”차설아가 여러
성도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서은아는 차설아의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차설아가 달이와 함께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낮인데도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움직임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설마...’“엄마, 한번 맞혀봐요! 달이가 뭘 그렸게요?”달이는 차설아 앞에 앉아 물감으로 나비 한 마리를 그렸다. 그리고는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음... 강아지?”“틀렸어요! 달이가 그린 건 나비예요! 틀렸으니까 엄마 간지럼 태울 거예요!”달이는 해맑게 웃으며 차설아 품에 파고들어 그녀를 간질였고 두 사람은 잔디밭 위에서 장난을 치며 한바탕 웃었다.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가운데 그 장면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뜻해 보였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은아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차설아, 넌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난 거야? 성도윤이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사랑해 주는 데다가 너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오빠도 있고, 또 배경수, 배경윤 같은 친구도 곁에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똑똑한 아이까지 있다니...’‘근데 나는?’서은아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키우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에 따뜻한 기억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가까운 친구나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고 게다가 최근 아버지께서는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며 사생아까지 낳았다. 앞으로 그녀가 받을 사랑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었다.‘그래서일까? 내가 성도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 것도.’서은아에게 성도윤은 어둠 속 유일한 한 줄기 빛이었다. 그 빛은 오직 그녀만을 비춰주던 것이었는데 차설아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 모든 걸 빼앗아 간 사람인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고!’서은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것을 가로챈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엄마, 한 번 더 할래요! 그림을 그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