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미스터 Q와의 대화가 끝난 뒤, 짐을 챙겨 두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바로 향했다.멀리서 차설아를 본 아이들이 기뻐하며 옆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봤지? 저기 부모 중 제일 예쁜 사람이 바로 나랑 오빠 엄마야.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엄마! 난 엄마 딸로 태어나서 정말 행복해.”달이가 단짝친구 윤이를 끌고 앙증맞은 턱을 치켜들며 저 멀리 교문에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았다.윤이도 눈을 게슴츠레 뜨며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네 엄마는 확실히 예쁜데 이렇게 예쁜 천사가 가면을 쓴 못생긴 아저씨랑 같이 있으니 너무 아까운 것 같아.”“드라마에서 보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하잖아. 그게 바로 네 엄마랑 저 가면 쓴 아저씨를 말하는 거야. 만약 내가 너라면 난 네 엄마한테 예쁜 애인을 찾아줄 거야. 그럼 네 엄마도 기분이 좋아질 텐데.”요즘의 여자아이들은 나이는 적어도 하나같이 모두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달이가 외모를 따지니 자연스레 단짝도 외모를 따지는 친구인 것이다.윤이는 달이를 자주 데리러 오는 그 가면 쓴 아저씨가 어떻게 생겼을지 줄곧 궁금했었다.“듣기로는 가면 아저씨가 얼굴이 망가졌다는데. 얼굴에 깊고 긴 흉터가 있대. 네 엄마가 그 아저씨와 결혼하면 밤에 자다 깨서 흉터를 보면 깜짝 놀랄 것 같은데?”윤이가 말하며 저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진저리를 쳤다.달이가 자기도 모르게 우울해졌다.“네 말은 나도 생각해 봤어. 그런데 아저씨는 우리한테도 엄마한테도 너무 잘해줘. 그래서 싫어할 수 없어. 마음이 예쁜 사람이 정말 예쁜 거야.”“말은 그렇다 하지만 난 그래도 네 엄마가 더 잘생긴 아저씨랑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 넌 딸이니까 엄마를 도와줘야지.”윤이는 여전히 달이를 설득하며 달이가 자신의 엄마에게 잘생긴 애인을 찾아줬으면 했다.“어휴. 우리 엄마도 잘생긴 아저씨 본 적 있어. 그런데 좋아하지 않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싫어해. 내가 무슨 방법이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지금 알려주면 효과가 없을 테니까 알려줄 수 없어요!”“음...”차설아는 딸의 말에 말문을 잇지 못했다.원이는 한쪽에서 애어른처럼 팔짱을 끼고는 쿨하게 말했다.“얘네한테 무슨 비밀이 있겠어요. 또 어느 잘생긴 오빠나 토론하고 있겠죠. 유치하긴.”두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둘 사이의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멋지고 거만한 원이는 어린이집에서 왕자님이었지만, 아쉽게도 너무 거만하고 차갑기에 아이들은 멀리서 좋아할 뿐이었다. 아이들이 가까이하지 못하니 그는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그러나 여동생 달이는 달랐다. 달이는 귀여운 외모와 높은 감성지수로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의 귀요미를 담당했다. 하여 수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어딜 가든 친구와 함께였다.원이는 속으로 은근히 질투했다. 자신이 더 이상 여동생의 유일한 사람이 아니게 된 것 같았기 때문에.이전엔 자신을 존경하고 우상으로 여기며 무조건 자기 말을 듣던 여동생이 이제 자신의 주견이 생겨 말을 듣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반박까지 한다.특히나 성도윤을 대하는 태도에서 남매는 큰 갈등이 생겼다.달이는 성도윤을 용서하고 속죄의 기회를 주자고 했고 원이는 인간성의 추악함을 깨닫고 성도윤이 다시는 엄마에게 가까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남매는 이 의견 차이로 인해 암암리에 대립 중이었다. 오늘도 어린이집에서 서로 상대도 하지 않았고 아직 냉전 중이었다.원이는 달이보다 앞서 달이와 멀리 떨어진 반대편에 올라탔다.달이도 오늘따라 원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작은 입술을 말아 물며 뒷좌석의 다른 한쪽에 앉았다. 그러고는 창밖만 바라보았다.운전석에서 차를 운전하던 차설아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웃으며 물었다.“오늘 둘이 왜 이래. 아무도 말을 안 하네? 이상해~”“엄마, 나 오빠랑 대화하기 싫어요. 맨날 정색하고 투덜대니까 친구들도 다 무서워해요.”달이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원아, 정말이야? 어린이집에서 친구들한테 사납게 대해?”차설아가 원이
“엄마, 농담하는 거죠? 우리가 왜 그 나쁜 사람이랑 같이 살아요?”아니나 다를까, 원이의 반응은 격렬했다. 성도윤을 정말 싫어하는 듯했다.반면 달이는 눈에 생기가 돌며 반짝반짝 빛났다. 달이는 연예인 보는 팬의 표정을 하며 말했다.“정말이에요, 엄마? 정말 잘생긴 아빠랑 같이 살 수 있어요?”달이의 반응에 원이는 더욱 화가 나서 팔짱을 끼고 호되게 꾸짖었다.“달아, 왜 그러는 거야? 위기의식을 좀 가져. 나쁜 놈 소굴에 가게 되는 건데 뭘 기뻐하는 거야.”“당연히 기쁘지. 앞으로 매일 잘생긴 아빠 보게 될 텐데. 잡쳤던 기분까지 나아졌네. 그리고 잘생긴 아빠랑 엄마가 친구가 되면 우린 또 다른 아빠를 가질 수 있는 거잖아. 얼마나 좋아?”달이가 기쁜 이유를 조리 정연하게 설명했다.“아니야. 안 좋아. 우린 나쁜 사람이랑 친구를 해선 안 돼. 멀리해야지.”“잘생긴 아저씨가 나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같이 살면 마침 아빠에 대해 알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알 필요 없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확실해. 그 사람이 엄마를 아프게 한 건 사실이야. 경수 아빠랑 경윤이 엄마 둘 다 증인이야. 그 사람은 제일 제일 제일 나쁜 사람이야!”“아니야. 난 아빠 믿어. 아빤 나쁜 사람 아니야!”두 아이가 또다시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차설아는 두 아이의 시끄러운 다툼 소리에 저릿해 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운전에 집중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차설아는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이 큰집에 도착하게 되었다.성도윤은 정원사, 요리사 등 고용인들을 모두 물렸다. 몇백 평의 대저택에 네 식구만 살도록.그는 네 식구가 함께 지낼 날을 기대하며 일찍부터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신문을 한 장 또 한 장 펼치다 보니 날이 어두워졌다. 가족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그는 입구에서부터 들려오는 인기척을 들었다.성도윤은 신문을 내려놓고 재빨리 일어나 별장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내 아이들 아니랄까 봐 너무 예쁘네. 이리 와!
이때의 성도윤과 달이는 그녀가 수없이 상상했던 따뜻한 부녀의 모습이었다.그때 성도윤에게 시집간 그녀는 미래의 삶에 대해 기대로 가득 찼었다.그녀는 성도윤에게 귀엽고 예쁜 딸과 멋진 아들을 낳아주고 싶었다.성도윤이 딸을 안아 들고, 그녀는 아들의 손을 잡고 함께 해바라기 꽃밭을 거닐고 저녁 바람을 쐬며 행복을 느끼는 모습을 상상했었다.이제 꿈속의 화면은 실현되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열정을 불태울 수 없다...“엄마, 아직도 나쁜 아빠 미워해요?”원이는 총명하고 예민하여 차설아의 심정 변화를 쉽게 알아챈다. 원이는 마치 어린 기사처럼 용맹하게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말했다.“만약 아직도 미워하면 원이가 대신 복수해 줄게요!”“전 달이 그 녀석 같은 바보가 아니어서 쉽게 사람한테 당하지 않거든요. 엄마를 아프게 한 사람에게 그렇게 웃어주다니. 달이는 배신자예요. 제가 얼른 방법을 생각해서 잘못을 깨닫게 해야겠어요.”차설아가 담담히 웃어 보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의 말은 마음을 따뜻하게 했지만 가슴 한구석을 콕콕 쑤시게 했다.때로는 아이가 철이 들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때도 있다. 그건 삶이 아이를 성장하도록 강요하게 했다는 거니까.원이는 집안의 작은 기둥이었다. 어릴 때부터 가정을 위해 비바람을 막아야 한다는 강박적인 의식이 있었다. 줄곧 꿈이 엄마와 여동생을 지키는 것이라고도 했었다.그러나 달이는 원이에 비해 아주 단순했다. 달이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기에 마음은 투명한 물처럼 조그마한 불순물도 없이 깨끗했다.달이가 보는 세상은 아름다움 뿐이기에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않는다.정상적인 어린아이라면 달이처럼 순진무구하고 걱정거리 없이 살아야 한다.차설아도 원이가 달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매사에 즐거운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원아. 엄마 말 들어봐. 사실은 아빠랑 엄마는 사적인 원한 관계여서 둘 중 누구든 잘잘못을 따질 수 없어. 그러니까 원이는 아빠를 계속 나쁜 사람 취급할 필요는 없어.
달이의 목소리가 사색에 잠겨있던 차설아를 깨웠다.그녀는 호기심에 달이와 성도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이때 두 부녀는 대문 앞의 감귤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성도윤의 어깨 위에 앉은 달이는 작은 손을 뻗어 나무 위의 새 둥지를 가리키며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엄마! 얼른 봐요! 여기 새 둥지에 아기 새 네 마리가 있어요! 너무 귀여워!”“아, 이거였구나. 새...”차설아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달이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했다.이 아이는 항상 이렇게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놀라며 하찮은 일로도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그리고 이러한 점 때문에 달이는 하늘이 차설아에게 내려준 작은 천사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달이가 사뭇 진지하게 차설아에게 말했다.“엄마, 이 새는 그냥 새가 아니에요. 이 새들은 잘생긴 우리 아빠가 엄마한테 선물해 주는 새예요!”“나한테 주는 새라고?”차설아의 시선이 성도윤을 향했다. 봄날의 태양같이 따뜻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칼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의 쌀쌀한 눈빛으로 변했다.성도윤은 오히려 담담했다. 그는 얇은 입술을 움직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맞아. 이 새들은 네 거야. 네가 돌봐줘서 아기 새들이 날 수 있게 되면 그때 떠나.”차설아가 침묵했다.이 자식 억지 부리는 것 좀 보게? 의사는 분명 일주일만 돌보면 정상으로 회복된다고 했는데, 갑자기 새 몇 마리를 선물해서 떠날 시간을 미룬다? 정말 속이려는 게 아닌가?차설아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이 교활한 인간과 확실하게 따질 준비를 했다.“성도윤, 너...”“엄마!”달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감격에 겨워 차설아의 말을 끊었다.“저 이미 아기 새들에게 이름을 지어줬어요! 이 새는 노랑이, 이 새는 파랑이, 이 새는 주황이, 그리고 이 제일 작은 새는 초롱이... 저 엄마랑 잘생긴 아빠랑 그리고 원이 오빠랑 이 아기 새들을 열심히 키울 거예요! 앞으로 이 새들은 저랑 오빠의 형제자매예요! 그리고 엄마랑 아빠의 새로
이와 동시에 그녀는 얼른 전화를 꺼내 검색했다.“아기 새는 보통 언제 날 수 있는가?”답은 약 한 달 정도였다.그녀가 턱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의 시간이면 차씨 저택을 재건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나머지 세 사람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다.달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네 마리의 아기 새들을 향해 손을 끄덕였다.“너무 좋아요! 우리 집에 새 가족이 생겼어요! 노랑이, 파랑이, 주황이, 초롱이! 우리랑 가족이 된 걸 축하해!”원이는 여전히 시크하고 냉담한 태도로 네 글자를 내뱉었다.“유치하긴.”성도윤은 입가에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띤 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짓궂은 계획이 성공한듯 웃었다.왜냐하면 세상에는 영원히 날 줄 모르는 새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 감귤 나무 위에 있는 네 마리의 새들이다.이 새들의 이름은 카카포로, 서식지는 네덜란드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사는 새이자 지능이 가장 낮은 귀여운 바보새들이다.차설아처럼 멍청한 것이 귀엽다. 영원히 성도윤의 손바닥 안에서 날아갈 수 없는 귀여운 사람!두 아이는 이 호화로운 큰집을 좋아했다. 그들은 빠르게 이곳의 환경에 적응했다.특히나 해바라기 꽃밭은 그들이 가장 친근감을 느끼는 곳이었다. 마치 그들이 어렸을 적부터 자라온 해바라기 섬에 온 것 같이 그들은 꽃밭 속에서 술래잡기하며 즐거워했다.“원아, 달아, 조심해. 다치지 말고.”차설아는 꽃 옆의 정자에 앉아서 가볍게 잔소리했다.아이들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지 오래되었으므로, 차설아도 따라서 즐거워져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성도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주시하다가 탄식하며 말했다.“이제 보니 당신 웃는 모습이 참 예쁘네.”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대답했다.“그럼 당연하지. 난 선천적으로 미모가 타고났으니까. 이전의 당신은 눈이 먼 게 분명해.”그러나 성도윤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례적으로 자기반성을 하기 시작했다.“당신 말이 맞아. 그때의 나는 눈이
차설아는 부엌으로 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이상하게도 몇 년 만에 부엌에 와도 생소하지 않고 자신의 구역에 다시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밖에서 아무리 강한척해도 잠재적인 의식 속에서 그녀는 가정주부의 삶을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그녀는 예전처럼 빠른 속도로 상다리 부러지게 맛있는 음식들을 만들었다. 향기로운 음식 냄새는 일찍부터 집을 채웠다.그러나 전과 다른 것은 전에는 썰렁하고 쓸쓸하던 식탁이 시끌시끌해졌다는 점이다.식탁 앞에 앉은 사람들은 기대가 만발한 표정으로 음식을 기다렸다.“우와! 냄새 좋다. 엄마! 레몬 닭발 너무 맛있어요. 침까지 흘러나올 것 같아요...”달이는 줄곧 차설아가 만든 레몬 닭발을 먹고 싶었다. 매번 해줄 때마다 열 개는 족히 먹었었다.아쉬운 것은 차설아가 평소 일이 많아 직접 요리하는 시간이 적었다.그런 이유로 달이는 레몬 닭발이 식탁에 올라오자마자 배고픈 거지처럼 손으로 집어서 먹었다.“달아, 손으로 먹지 마. 보기 흉해.”차설아는 성도윤이 두 아이가 게걸스럽게 먹는다고 가정교육이 덜 되었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됐다.그런데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성도윤은 원이와 달이보다도 빠르게 손으로 닭발을 뜯으며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귀공자의 우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음...”차설아는 성도윤의 체면을 차리지 않는 모습에 조금 놀랐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윤 씨, 굶어 죽은 귀신이 붙었어요? 너무 게걸스럽잖아요.”이미 닭발 하나를 뜯어먹은 성도윤이 두 번째 닭발을 집어 들었다.성도윤은 닭발 위의 진한 국물 즙을 빨아 먹었다. 그 시큼하고 매콤한 맛은 그를 참을 수 없게 했다.“날 탓하면 안 되지.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성도윤이 닭발을 먹고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내 탓이라고?”차설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눈을 치켜뜨고 보았다.“당신 탓이지. 당신 요리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이렇게 맛있게 만드는 건 내 위를 홀려서 나까지 홀리려는 거지?”“?
말을 마친 그녀는 닭발 하나를 집어 성도윤의 입에 밀어 넣었다.부잣집 도련님이 어떻게 이런 불경을 참을 수 있겠는가. 성도윤은 불쾌한 표정을 내비쳤다.“하하하. 너무 웃겨! 엄마, 잘했어요!”온 저녁 시크하던 원이가 드디어 그들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성도윤을 보는 눈빛도 전보다 덜 적대적이었다.원이가 이렇게 즐겁게 웃는 것을 처음 본 성도윤은 자연스레 마음이 풀려 화가 사라졌다. 이 웃음이 바로 4살 아이에게 있어야 할 천진난만함이었다.성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열심히 맛보기 시작했다.한참 웃고 난 두 아이도 식탁 위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졌던 맛있는 음식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세 사람의 만족한 모습을 보고 차설아도 만족감을 느꼈다.모든 요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이 만든 음식이 전부 비워지는 것은 가장 큰 성취감이라고 할 수 있다.밤이 되자 차설아는 오늘도 어김없이 두 아이를 재우기 시작했다.두 아이는 쌍쌍바처럼 한 명은 차설아의 왼쪽에, 한 명은 오른쪽에 누워 엄마를 꼭 안았다.두 아이는 예전에 차설아가 잤던 큰 침대에서 차설아에게 이야기를 해달라며 보챘다.“엄마, 엄마는 어떻게 잘생긴 아빠를 좋아하게 된 거예요? 말해줘요!”달이가 귀엽게 웃으며 수줍은 표정으로 차설아에게 말했다.아이는 차설아가 예전에 잘생긴 아빠를 매우 좋아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좋아하게 된 건지는 몰랐다.원이가 옆에서 애어른같이 찬물을 끼얹었다.“그런 거 말고 엄마, 대단한 이야기 해줘요. 예를 들면 어떻게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하게 됐는지, 또 어떻게 해커계에서의 거물이 된 건지, 어떻게 솜씨가 그렇게 좋은지. 다 어디서 배운 거예요?”아들의 마음속에서 차설아는 만능이고 슈퍼우먼이었다. 절대 그 못된 아빠와 엮여서는 안 되는 대단한 사람이다.차설아가 어이없어하며 눈을 감았다.“너희 둘, 그만 말하고 얼른 자!”“아, 엄마. 알려줘요. 달이 진짜 궁금하단 말이에요. 제가 맞춰볼게
모든 주주들이 일제히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충격이 서려 있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부대표님께서 실명했다고 하지 않았어?”“전에는 몸 상태도 많이 약해서 부대표님 자리까지 내려놓았는데 지금 보니 아주 생기가 넘치잖아?”“돌아왔다니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제 성대 그룹도 다시 살아날 수 있겠어!”주주들은 성진의 복귀를 환영해 주었다. 그들은 성진이 성도윤을 대신해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를 기대하며 중얼거렸다.성진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곧장 성도윤의 곁으로 다가갔다.“형, 미안해. 그동안 형 혼자 성대 그룹을 관리하느라 정말 힘들었을 텐데... 이젠 나도 회복했으니 형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성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성진을 응시했다.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성도윤은 심장이 순간적으로 옥죄어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성도윤은 그 생각을 깊이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회복했다니 다행이네. 앞으로 잘해보자. 우린 같은 배를 탄 사람이니까. 정말로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만 있다면 나도 네가 돌아온 걸 환영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성도윤은 마음속의 불안을 접어두고 형식적인 말로 대응했다.“역시 형은 큰 그림을 보는 사람이야. 걱정 마,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내가 형의 자리를 대신해 성대 그룹을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속에는 권력을 향한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다.순간, 주주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다.“좋아, 그럴 실력이 있다면 말이지.”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성진은 의자를 당겨서 자리에 앉았고 그의 비서인 석현이 나서서 주주들에게 새로운 전략과 방안을 설명했다.주주들은 숨죽이며 그의 말을 들었고 그들의 표정은 점점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해외 지사를 맡아왔던 만큼 확실히 사고방식이 개방적이네. 만약 이 계
“성 대표님, 지금 하셔야 할 말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저희는 지금 주주총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인 겁니다. 저희에게는 지금 수많은 경쟁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 내부에서도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능력 있는 인재들조차 불안함을 느껴 대거 이탈하는 상황이죠. 이대로 가다간 회사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장기준이 말했다. 직접적으로 성도윤에게 대표직에서 물러나라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의도는 뻔히 보였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어떤 해결책이 가장 좋다고 보십니까?”“그건 저도 모르죠. 제가 뭘 알겠습니까...”성도윤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장기준은 순간적으로 주춤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오준현이 나섰다.“간단합니다.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거죠. 그리고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도록 해요.”이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에 있던 수십 명의 주주들은 순간 숨을 죽였다.각자의 속셈을 감추듯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도윤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장기준 씨,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아뇨, 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성대 그룹을 위해서, 또 성 대표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장기준은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해명했다.“그럼 그 깊은 배려에 감사드려야겠군요.”성도윤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섬뜩할 정도로 서늘했다.그때, 한 주주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장기준 씨의 의견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 대표님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죠. 괜히 대표 자리를 바꿨다가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건 아닐까요?”그러자 오준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그건 여러분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한편, 성대 그룹에서.성도윤의 지각은 이미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주요 주주들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비서가 연간 그룹의 매출과 주요 프로젝트 성과를 보고했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회의실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다.“성 대표님, 보시다시피 올해 성대 그룹의 전체 이익이 계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관련 주가 역시 계속해서 하락세를 보고 있어요. 지금의 성대 그룹은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회사를 이끄는 책임자로서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실질적인 해결책이 있습니까?”7대 주주 중 한 명인 오준현이 말했다.그는 평소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매년 주주총회에서만 나타났다. 그리고 나타날 때마다 날카롭게 비판을 던졌는데 항상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성도윤을 깎아내렸다.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성씨 가문 사람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그러자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박지훈이 나섰다.“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이익을 볼 때도 있고 손해를 볼 때도 있는 법입니다. 성 대표님께서 성대 그룹을 맡은 후로 회사는 점점 성장해 왔습니다. 주가가 조금 하락했다고 이러시는 건가요?”“다들 아시다시피, 최근 몇 년간 특수 상황 때문에 대다수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성대 그룹은 그나마 하락폭이 적은 편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성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이미 파산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요?”박지훈은 성도윤을 강하게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지분은 많지 않았지만 성도윤과의 친분 덕분에 회사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그러나 오준현은 코웃음을 쳤다.“그럼 성대 그룹이 몇 달째 내리막길을 걷는 것도 성 대표님 덕분이란 말이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성 대표님께 상을 하나 드려야겠네요?”그의 냉소적인 말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오준현만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는 단순히 배경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을
“네가 감히 나를 때려? 두고 봐! 우리 아빠한테 이를 거야. 우리 아빠가 널 완전히 부숴버릴 거라고!”서은아는 분을 못 이겨 울먹이더니 퉁퉁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쥐고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차설아가 이미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이다.“엄마, 엄청 멋졌어요! 나쁜 사람을 한 방에 쫓아내다니... 완전 슈퍼우먼이었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달이도 커서 엄마처럼 슈퍼우먼으로 될 거예요!”차설아는 달이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슈퍼 우먼은 무슨... 우리 달이는 그냥 예쁜 공주님이면 돼. 괜히 다른 사람에게 시비 걸진 말되 누군가를 두려워하진 마.”원이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엄마, 저 아줌마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일부러 찾아와서 우리를 괴롭히려 한 거라고요! 뺨 몇 대만 맞고 도망가게 내버려두다니... 너무 쉽게 놔준 거 아니에요?”“원이야, 오늘 충분히 화풀이했잖아. 적당한 선에서 그만둬야 해.”차설아는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저 아줌마 아무리 꿍꿍이를 가지고 왔다 해도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야. 단지 좀 삐뚤어진 것뿐이지.”“사실 저 아줌마도 피해자이긴 해. 불쌍한 사람이거든. 오늘 받은 교훈이면 충분할 거야.”차설아는 원이를 다독였다.솔직히 말해서 서은아에 대한 그녀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수단이 좀 극단적일 뿐이지 말이다.그녀는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솔직했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진심으로 성도윤을 사랑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같은 남자를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차설아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서은아같이 대놓고 싸움을 거는 유형이 아니었다. 진짜 무서운 건 뒤에서 몰래 함정을 파고 그녀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몸을 살짝 떨었다.임
겨우 눈을 뜬 서은아는 원이가 했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지난 일까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 망할 꼬맹이가... 또 너야? 지난번엔 날 강에 빠뜨릴 뻔하더니 이번엔 물총까지 쏘면서 날 도발한다고? 죽고 싶어?”서은아는 이를 악물고 원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녀는 물을 또 한 번 맞았다.원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마치 자기가 어른인 것처럼 경고했다.“아줌마는 우리 집 손님이 아니에요. 여긴 아줌마를 환영하지 않아요. 지금 당장 나가세요!”“어린놈이 감히!”서은아는 자기가 어린아이에게 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했지만 원이의 민첩함을 과소평가한 것이 실수였다.아무리 쫓아다녀도 그녀는 원이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며 풀밭에 얼굴을 처박았다. 흙이 입안 가득 들어가고 온몸이 엉망이 되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설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원아, 너무 심하게 하진 마. 그래도 여자잖아.”“엄마,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 아줌마가 먼저 덤벼든 거라니까요? 그리고 이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에요. 그냥 나쁜 놈이죠! 완전 악당이에요! 지난번에 저를 호수에 빠뜨리려고 했어요! 나쁜 사람도 봐줘야 하나요?”원이의 입이 뿌루퉁해졌다.차설아만 옆에 없었더라면 원이는 벌써 ‘필살기’까지 써버렸을 것이다.“뭐라고? 널 호수에 빠뜨렸다고?”차설아는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서은아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원이가 하는 말이 사실인가요? 정말 어린 애한테까지 손을 댔다고요?”서은아가 어릴 때부터 삐뚤어졌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아이에게까지 손을 댈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어른들끼리의 다툼에 아이를 끌어들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서은아는 가까스로 일어났지만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입 안은 흙과 풀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눈물을 글썽하
“내가 말했었잖아! 도윤이만 가질 수만 있다면 망가뜨려도 상관없다고. 모든 걸 잃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을 때야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달을 거야. 그러면 내 곁으로 돌아오는 것도 시간문제지.”서은아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하, 웃기지도 않네!”차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도윤 씨는 사람이에요, 물건이 아니라. 그쪽이 부순다고 해서 부서질 존재가 아니라고요.”“그리고 도윤 씨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도윤 씨가 대기업 대표님이든, 그저 평범한 사람이든 나랑 아이들은 절대 그 곁을 떠나지 않을 거니까요.”“차설아,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직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아서야. 만약 도윤이가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받는 존재로 된다면? 도윤이와 엮이면 너까지 불행해지는 상황이라면? 그때도 떠나지 않을 자신 있어?”“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네까짓 게 어떻게 장담해? 사람이 발밑으로 내쳐지는 건 한순간이라고. 그러면 도윤이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거야. 결국 모든 사람이 도윤이를 외면할 거고 도윤이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무너질 수도 있어. 그렇게 된다고 해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첫째, 그럴 리 없어요. 둘째, 그렇게 될 때까지 제가 가만히 있을 것 같나요? 무너지면 제가 다시 일어서면 돼요. 비록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저한테도 나름대로 운영하는 작은 회사는 있거든요. 그 정도면 우리 가족이 먹고사는 데 부족할 게 없을걸요?”차설아가 말하는 ‘작은 회사’는 신흥 IT 강자인 천신 그룹과 거대한 자본을 가진 KCL 그룹이었다.하지만 두 그룹 모두 차설아의 소유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서은아도 그녀 앞에서 저렇게 우쭐거릴 수 있었다. 만약 서은아가 알게 된다면 얼굴도 들지 못하고 도망쳤을 것이었다.“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겨우 작은 회사라고 말이야. 그걸로 성대 그룹 같은 대기업을 살리겠다고? 꿈도 크네. 만약 진짜 도윤이를 위한다면 헤어지
“차설아 씨, 지금 절 협박하는 건가요?”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차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그건 아니에요.”차설아는 다시 한번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은아 씨가 저를 반대하는 건 좋지만 본인이 억울한 것처럼 절 비난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은아 씨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닌 듯싶어서요.”차설아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은아에게 약속했었다. 성도윤의 세상에서 물러나 두 사람을 이어 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전제는 서은아가 성도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를 위한 선택을 할 거라는 믿음이었다.그녀의 사랑이 이 정도로 극단적인 방식일 줄 모르고 말이다. 성도윤의 건강까지 해칠 정도라면 차설아는 더 이상 그를 서은아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만약 언젠가 도윤 씨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전 도윤 씨에게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이 세상에서 성도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차설아였다.그의 곁을 떠났던 건 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떠나고 보니 두 사람 모두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고통에 빠졌다.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두 사람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함께 극복해 나가는 게 그들에게 맞는 방식이었다.진정한 행복은 서로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말도 안 돼!”서은아는 눈을 붉히며 집착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내가 도윤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럴 일은 없어! 난 평생 도윤이만 사랑할 거고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그를 망가뜨리는 일도 할 수 있다고!”“서은아 씨, 진짜 미쳤어요? 그쪽은 사랑이 뭔지도 몰라요. 서은아 씨가 사랑하는 건 서은아 씨 자신 뿐이에요!”차설아는 서은아의 광기 어린 발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사랑이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
서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을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서은아 씨?”차설아는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드디어 절 보셨군요?”서은아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차설아의 감정이 너무나도 안정적이었기에 방금까지 확신했던 그녀의 생각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당연하죠.”차설아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옆자리를 가리키며 덤덤히 말했다.“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늦게 올 줄은 몰랐네요. 생각보다 멘탈이 좋은가 봐요?”서은아는 차설아의 반응을 보고 더욱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에 겉모습은 눈이 먼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 표정 하나하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서은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차설아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설아 씨도 멘탈이 대단하시네요.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뻔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원수지간인데도 이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셔서 참 고맙네요?”서은아는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차설아는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달이야, 착하지? 엄마가 이 아줌마랑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너는 민이 이모랑 잠깐 놀고 올래?”“싫어요! 이 아줌마 나쁜 사람 같아요. 아줌마가 엄마를 괴롭히면 어떡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으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서은아를 노려보았다.“게다가 이 아줌마 분명 아빠를 뺏으러 온 거예요. 전 절대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걱정 마, 달아. 아빠는 영원히 네 아빠야. 그 누구도 달이 아빠를 빼앗아 갈 수는 없어. 엄마가 이 아줌마랑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빠에 대한 얘기 말이야. 그러니까 엄마 말 들어. 가서 민이 이모랑 놀고 있어, 알겠지?”“알겠어요. 위험하면 꼭 소리 질러요! 제가 바로 달려와서 엄마 지켜줄 거예요.”차설아가 여러
성도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서은아는 차설아의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차설아가 달이와 함께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낮인데도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움직임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설마...’“엄마, 한번 맞혀봐요! 달이가 뭘 그렸게요?”달이는 차설아 앞에 앉아 물감으로 나비 한 마리를 그렸다. 그리고는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음... 강아지?”“틀렸어요! 달이가 그린 건 나비예요! 틀렸으니까 엄마 간지럼 태울 거예요!”달이는 해맑게 웃으며 차설아 품에 파고들어 그녀를 간질였고 두 사람은 잔디밭 위에서 장난을 치며 한바탕 웃었다.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가운데 그 장면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뜻해 보였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은아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차설아, 넌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난 거야? 성도윤이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사랑해 주는 데다가 너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오빠도 있고, 또 배경수, 배경윤 같은 친구도 곁에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똑똑한 아이까지 있다니...’‘근데 나는?’서은아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키우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에 따뜻한 기억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가까운 친구나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고 게다가 최근 아버지께서는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며 사생아까지 낳았다. 앞으로 그녀가 받을 사랑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었다.‘그래서일까? 내가 성도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 것도.’서은아에게 성도윤은 어둠 속 유일한 한 줄기 빛이었다. 그 빛은 오직 그녀만을 비춰주던 것이었는데 차설아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 모든 걸 빼앗아 간 사람인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고!’서은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것을 가로챈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엄마, 한 번 더 할래요! 그림을 그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