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동시에 그녀는 얼른 전화를 꺼내 검색했다.“아기 새는 보통 언제 날 수 있는가?”답은 약 한 달 정도였다.그녀가 턱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의 시간이면 차씨 저택을 재건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나머지 세 사람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다.달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네 마리의 아기 새들을 향해 손을 끄덕였다.“너무 좋아요! 우리 집에 새 가족이 생겼어요! 노랑이, 파랑이, 주황이, 초롱이! 우리랑 가족이 된 걸 축하해!”원이는 여전히 시크하고 냉담한 태도로 네 글자를 내뱉었다.“유치하긴.”성도윤은 입가에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띤 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짓궂은 계획이 성공한듯 웃었다.왜냐하면 세상에는 영원히 날 줄 모르는 새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 감귤 나무 위에 있는 네 마리의 새들이다.이 새들의 이름은 카카포로, 서식지는 네덜란드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사는 새이자 지능이 가장 낮은 귀여운 바보새들이다.차설아처럼 멍청한 것이 귀엽다. 영원히 성도윤의 손바닥 안에서 날아갈 수 없는 귀여운 사람!두 아이는 이 호화로운 큰집을 좋아했다. 그들은 빠르게 이곳의 환경에 적응했다.특히나 해바라기 꽃밭은 그들이 가장 친근감을 느끼는 곳이었다. 마치 그들이 어렸을 적부터 자라온 해바라기 섬에 온 것 같이 그들은 꽃밭 속에서 술래잡기하며 즐거워했다.“원아, 달아, 조심해. 다치지 말고.”차설아는 꽃 옆의 정자에 앉아서 가볍게 잔소리했다.아이들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지 오래되었으므로, 차설아도 따라서 즐거워져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성도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주시하다가 탄식하며 말했다.“이제 보니 당신 웃는 모습이 참 예쁘네.”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대답했다.“그럼 당연하지. 난 선천적으로 미모가 타고났으니까. 이전의 당신은 눈이 먼 게 분명해.”그러나 성도윤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례적으로 자기반성을 하기 시작했다.“당신 말이 맞아. 그때의 나는 눈이
차설아는 부엌으로 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이상하게도 몇 년 만에 부엌에 와도 생소하지 않고 자신의 구역에 다시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밖에서 아무리 강한척해도 잠재적인 의식 속에서 그녀는 가정주부의 삶을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그녀는 예전처럼 빠른 속도로 상다리 부러지게 맛있는 음식들을 만들었다. 향기로운 음식 냄새는 일찍부터 집을 채웠다.그러나 전과 다른 것은 전에는 썰렁하고 쓸쓸하던 식탁이 시끌시끌해졌다는 점이다.식탁 앞에 앉은 사람들은 기대가 만발한 표정으로 음식을 기다렸다.“우와! 냄새 좋다. 엄마! 레몬 닭발 너무 맛있어요. 침까지 흘러나올 것 같아요...”달이는 줄곧 차설아가 만든 레몬 닭발을 먹고 싶었다. 매번 해줄 때마다 열 개는 족히 먹었었다.아쉬운 것은 차설아가 평소 일이 많아 직접 요리하는 시간이 적었다.그런 이유로 달이는 레몬 닭발이 식탁에 올라오자마자 배고픈 거지처럼 손으로 집어서 먹었다.“달아, 손으로 먹지 마. 보기 흉해.”차설아는 성도윤이 두 아이가 게걸스럽게 먹는다고 가정교육이 덜 되었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됐다.그런데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성도윤은 원이와 달이보다도 빠르게 손으로 닭발을 뜯으며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귀공자의 우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음...”차설아는 성도윤의 체면을 차리지 않는 모습에 조금 놀랐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윤 씨, 굶어 죽은 귀신이 붙었어요? 너무 게걸스럽잖아요.”이미 닭발 하나를 뜯어먹은 성도윤이 두 번째 닭발을 집어 들었다.성도윤은 닭발 위의 진한 국물 즙을 빨아 먹었다. 그 시큼하고 매콤한 맛은 그를 참을 수 없게 했다.“날 탓하면 안 되지.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성도윤이 닭발을 먹고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내 탓이라고?”차설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눈을 치켜뜨고 보았다.“당신 탓이지. 당신 요리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이렇게 맛있게 만드는 건 내 위를 홀려서 나까지 홀리려는 거지?”“?
말을 마친 그녀는 닭발 하나를 집어 성도윤의 입에 밀어 넣었다.부잣집 도련님이 어떻게 이런 불경을 참을 수 있겠는가. 성도윤은 불쾌한 표정을 내비쳤다.“하하하. 너무 웃겨! 엄마, 잘했어요!”온 저녁 시크하던 원이가 드디어 그들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성도윤을 보는 눈빛도 전보다 덜 적대적이었다.원이가 이렇게 즐겁게 웃는 것을 처음 본 성도윤은 자연스레 마음이 풀려 화가 사라졌다. 이 웃음이 바로 4살 아이에게 있어야 할 천진난만함이었다.성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열심히 맛보기 시작했다.한참 웃고 난 두 아이도 식탁 위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졌던 맛있는 음식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세 사람의 만족한 모습을 보고 차설아도 만족감을 느꼈다.모든 요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이 만든 음식이 전부 비워지는 것은 가장 큰 성취감이라고 할 수 있다.밤이 되자 차설아는 오늘도 어김없이 두 아이를 재우기 시작했다.두 아이는 쌍쌍바처럼 한 명은 차설아의 왼쪽에, 한 명은 오른쪽에 누워 엄마를 꼭 안았다.두 아이는 예전에 차설아가 잤던 큰 침대에서 차설아에게 이야기를 해달라며 보챘다.“엄마, 엄마는 어떻게 잘생긴 아빠를 좋아하게 된 거예요? 말해줘요!”달이가 귀엽게 웃으며 수줍은 표정으로 차설아에게 말했다.아이는 차설아가 예전에 잘생긴 아빠를 매우 좋아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좋아하게 된 건지는 몰랐다.원이가 옆에서 애어른같이 찬물을 끼얹었다.“그런 거 말고 엄마, 대단한 이야기 해줘요. 예를 들면 어떻게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하게 됐는지, 또 어떻게 해커계에서의 거물이 된 건지, 어떻게 솜씨가 그렇게 좋은지. 다 어디서 배운 거예요?”아들의 마음속에서 차설아는 만능이고 슈퍼우먼이었다. 절대 그 못된 아빠와 엮여서는 안 되는 대단한 사람이다.차설아가 어이없어하며 눈을 감았다.“너희 둘, 그만 말하고 얼른 자!”“아, 엄마. 알려줘요. 달이 진짜 궁금하단 말이에요. 제가 맞춰볼게
밤이 깊어져서야 차설아도 마침내 두 수다쟁이 아이를 재우는 데 성공했다.정확히 말하자면 달이가 수다쟁이였다. 밤새 그녀를 졸라 성도윤과의 이야기를 하게 했으니.원이는 한사코 성도윤과의 이야기를 듣기를 거절했지만 소용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었다.결국 달이가 내린 결론은 성도윤은 좋은 사람이며 용서할 수 있다였고, 원이가 내린 결론은 성도윤은 너무 나빠서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아이들은 잠재웠지만 차설아는 오히려 잠에 들지 못했다. 그녀는 정원으로 나가 바람을 쐬기로 했다.그러나 문을 연 순간 문밖에 서 있는 성도윤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차설아는 뜻밖의 인물에 깜짝 놀랐다.“이... 이 밤에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놀랐잖아!”그녀는 남자의 높고 건장한 몸을 바라보며 부드럽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잠이 안 와서, 그리고 오늘 달빛이 너무 예뻐서 함께 보려고.”성도윤의 조각처럼 빚어진 듯한 뚜렷한 오관에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그는 미적지근하게 대답했다.“큼큼!”차설아는 일시에 말문이 막혀 잠시 헛기침했다.오늘따라 이상하다. 그같이 심장이 얼음덩이처럼 차가운 사람이 ‘달빛이 예쁘다’니, 그가 달빛의 아름다움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그녀가 보기에 성도윤은 또 이상한 수작을 쓰는 것만 같았다.“가. 어차피 애들도 자고 있고, 산책하러 가.”말을 마친 성도윤은 긴 다리를 뻗어 계단을 내려갔다.남자의 지나치게 우월한 뒷모습을 보며 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또 마음이 흔들렸지만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뒤따라갔다.어차피 원래도 바람 쐴 생각이었으니 성도윤 때문에 흥을 깨서는 안 되니까.저택의 정원은 손꼽히게 면적이 큰 곳으로, 그녀가 예전에 가장 사랑했던 곳이기도 했다.그녀가 정원이 사계절 줄기가 높은 해바라기를 정성껏 심었기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해바라기가 꽃을 피웠다. 매 한 송이가 사람 키보다도 높게 자랐다.산들바람이 스치면 화반도 바람
달을 감상하던 차설아가 문득 성도윤을 힐끗 보게 되었다. 차설아의 외모지상주의 병이 또 도져버려 남자의 완벽한 옆모습에 빠져들어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신은 너무도 불공평하다. 왜 그에게 이토록 대단한 신분과 비범한 능력을 주고 완벽한 얼굴까지 주었는가?그리고 왜 이렇게 수많은 완벽함을 주고도 감정은 주지 않은 것일까?이 사람은 마치 감정이 없는 냉혈한 같다. 정성스레 표본으로 만들어져 영원히 전시장에 전시하기에나 적합하지, 가까이 다가가고 감정을 나누는 데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다.그렇지 않으면 옆 사람들만 열받아 죽게 된다.“그동안 혼자서 두 아이를 어떻게 키운 거야?”달을 보던 성도윤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훔쳐보는 그녀를 발견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며 괜스레 썸 타는 듯한 설렌 분위기가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느껴졌다... 당황한 차설아는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뭐, 그냥 지냈지. 아이들이 말을 잘 들어서, 거의 천사나 다름없어.”사실대로 말하자면 홀몸으로 두 아이를 4년간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나날들이 아니다.아이들이 착하고 말을 잘 듣는다 해도, 둘 중 한 명이라도 열이 나거나 아프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거의 며칠간 제대로 쉴 수도 없다는 뜻이다.게다가 아이와 함께 있는 것도 정력, 시간, 자유를 바치는 것이다.그녀는 틈틈이 천신 그룹을 관리하는 동시에 시간을 내 아이들과 함께하고 교육해야 했으니,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그러나 그녀는 그간의 “고생”을 말함으로써 위로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니까.“전에는 몰라서 그랬다 쳐도, 이제는 나도 아이들의 존재를 알았으니, 아빠의 책임을 피할 수야 없지. 우리가 법정까지 가야 할 필요가 있을지 잘 생각해 봐.”성도윤의 담담한 말투에 압박감이 역력하다.이에 차설아가 냉소하며 답했다.“난 종래로
“오빠가 있었다고?”성도윤은 조금 놀랐다. 차설아에게 요절한 쌍둥이 오빠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흥, 우리 오빠가 아직 살아있었으면 진작에 당신 때리고 남았어. 당신이 이렇게 날 괴롭히는 것도 다 내가 친정에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런 거잖아!”차설아가 참지 못하고 또 한 번 성도윤을 꾸짖었다.한 여자의 결혼생활이 어떤지는 친정의 실력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친정의 실력이 강해서 시댁에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시댁은 절대 홀대하지 못할 것이다. 남편이 사랑하고 아끼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손님처럼 존경하고 체면을 차릴 수는 있을 것이다.그러니 당시 그녀가 성씨 집안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고용인마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날뛰었던 원인은 성도윤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시의 그녀가 외롭고 친정에 기댈 데도 없었기 때문이다.“난 그렇게 얄팍한 사람 아니야.”성도윤이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했다.“그때는 그저 당신한테 아무 감정이 없거나 혹은 싫어해서 보고 싶지 않았을 뿐 친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어.”차설아의 마음은 조금 괴로워졌다.그녀는 일찍부터 성도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버리니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사실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나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할아버지의 결혼 제안을 허락한 거야? 이렇게 고집이 센 걸 보면 협박당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차설아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몇 년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성도윤이 먼 곳을 응시하며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그녀와의 첫 만남을 생각하며 담담히 말했다. “그건... 당신이 안쓰러워서.”그때 차씨 가문은 변고를 당했다. 차설아는 금방 아빠와 엄마를 떠나보내고 이후에는 친할아버지마저 잃었다.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던 부잣집 아가씨가 하룻밤 사이에 기댈 곳 없는 원수들 가득한 고아가 되었다.“그때 할아버지가 뉴욕에 있던 나를 굳이 불러내서 당신과 자리를 만들었었지. 그때 당신은 소복 차림에 귀에는 흰 작은 꽃
“그땐 당신이 불쌍한 줄만 알았지. 귓가에 꽂은 그 부드럽고 연약한 꽃처럼 바람 불면 시들 것만 같았는데. 이혼하고야 그 성깔을 알았어. 알고 보니 내 동정심은 오지랖이었던 거야.”성도윤이 차설아의 이혼 전과 후의 확 달라진 모습을 떠올렸다.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인격처럼 행동할 수 있는 건지.그러나 ‘연약함’이든 ‘사나움’이든 간에 모두 그의 감정을 쉽게 조종할 수 있었다.차설아가 담담히 웃었다. 그리고 복잡한 눈빛으로 성도윤을 응시했다.“나는 모든 사람이 꺼리던 차가운 성씨 집안 둘째 도련님이 이렇게 동정심 많은 사람인 줄 몰랐네. 그럼 이렇게 된 바에... 끝까지 동정해서 나랑 아이들을 놔주고 우리의 평화로운 생활을 방해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성도윤의 그윽하고 깊은 눈동자에 차가움이 스쳐 지나가더니 냉담하게 말했다.“당신 정말 나의 존재가 당신과 아이들한테 방해라고 생각해?”“그럼 아니야?”차설아가 날카롭게 이어 말했다.“아직도 몰라? 나랑 아이들 모두 당신 안 좋아해. 당신이 갑자기 우리의 세계에 들어와서 우리의 원래 생활을 깨뜨리는 건 아이들한테는 상처야.”“미안. 근데 난 오히려 아이들이 나랑 잘 노는 것 같았는데. 아이들에겐 ‘아빠’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해.”“인정해. 확실히 아빠가 필요하긴 하지. 그런데 다른 사람이 이 역할을 할 수도 있어.”성도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럼, 내 아이들에게 새아빠라도 찾아주겠다는 거야?”“맞아!”차설아는 성도윤을 단념시키기 위해 솔직하게 말했다.“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이미 남은 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찾았어. 두 아이는 더더욱 좋아하고. 우리 네 가족은 평화롭게 잘살고 있으니까 끼어들지 말았으면 좋겠어.”“삶의 동반자?”성도윤은 차가운 얼굴에 눈빛은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삶의 동반자라고?”“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당연히 알지.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야.”“세상에 대가 없
말을 마친 성도윤은 자리를 떠났다.차설아는 홀로 해바라기 꽃밭에 남겨졌고 하얗게 빛나는 달빛 아래에서 생각에 잠겼다.솔직히, 그의 제안을 고려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성도윤이 듣기 거북한 말만 늘어놓았지만, 그중 하나는 사실이었다. 바로 세상에 아이의 친아버지보다 더 아이에게 잘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그리고 하늘 아래 그 어떤 어머니도 ‘아이를 위한다'는 징크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만약 성도윤과 재결합해서 아이들이 더 즐겁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녀는 어쩌면 시도해보아도 좋을 것 같았다.하지만, 미스터 Q와 일주일 후에 구청에 가기로 약속했다!“에휴, 짜증 나!”차설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이 났다. 머리를 쥐어 잡으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두 남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자신이 너무 나빠 보였다.이런 고민 때문에, 침실로 돌아간 그녀는 밤새 뒤척이며 쉬이 잠들지 못했다.다음날, 차설아가 깨어났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떴다.“망했다!”따스한 햇볕이 그녀의 얼굴을 내리비출 때에야 비로소 깨어난 차설아는 벌떡 일어났다.커다란 방에 혼자 남은 것을 보니, 두 녀석은 아마 일찍 깨어났을 것이다.그녀는 대충 옷을 챙겨입고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깼어?”성도윤은 검은색 풀오버에 회색 바지를 입고, 긴 다리를 꼬고는 소파에 앉아 유유히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식탁에 샌드위치랑 우유 준비해놨어. 가서 먹어.”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차설아는 계단 어귀에 서서 햇빛이 그의 머리에 내리비춰 후광을 형성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떨렸다.‘이 자식, 평소에는 전시품처럼 완벽하게 차려입고 도도해서 늘 거리감을 주더니, 이렇게 편한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이 있네.’눈앞의 성도윤은 더이상 상업계 거물이 아니다. 온몸에 나른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물씬했고, 멀리서 보기만 해도 필터를 넣은 듯한 드라마 남자주인공의 모습이었다.외모에 끔뻑 죽는 차설아는 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아침 먹으라니까 왜 계속 날 쳐다봐?”성
모든 주주들이 일제히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충격이 서려 있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부대표님께서 실명했다고 하지 않았어?”“전에는 몸 상태도 많이 약해서 부대표님 자리까지 내려놓았는데 지금 보니 아주 생기가 넘치잖아?”“돌아왔다니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제 성대 그룹도 다시 살아날 수 있겠어!”주주들은 성진의 복귀를 환영해 주었다. 그들은 성진이 성도윤을 대신해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를 기대하며 중얼거렸다.성진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곧장 성도윤의 곁으로 다가갔다.“형, 미안해. 그동안 형 혼자 성대 그룹을 관리하느라 정말 힘들었을 텐데... 이젠 나도 회복했으니 형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성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성진을 응시했다.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성도윤은 심장이 순간적으로 옥죄어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성도윤은 그 생각을 깊이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회복했다니 다행이네. 앞으로 잘해보자. 우린 같은 배를 탄 사람이니까. 정말로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만 있다면 나도 네가 돌아온 걸 환영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성도윤은 마음속의 불안을 접어두고 형식적인 말로 대응했다.“역시 형은 큰 그림을 보는 사람이야. 걱정 마,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내가 형의 자리를 대신해 성대 그룹을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속에는 권력을 향한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다.순간, 주주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다.“좋아, 그럴 실력이 있다면 말이지.”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성진은 의자를 당겨서 자리에 앉았고 그의 비서인 석현이 나서서 주주들에게 새로운 전략과 방안을 설명했다.주주들은 숨죽이며 그의 말을 들었고 그들의 표정은 점점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해외 지사를 맡아왔던 만큼 확실히 사고방식이 개방적이네. 만약 이 계
“성 대표님, 지금 하셔야 할 말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저희는 지금 주주총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인 겁니다. 저희에게는 지금 수많은 경쟁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 내부에서도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능력 있는 인재들조차 불안함을 느껴 대거 이탈하는 상황이죠. 이대로 가다간 회사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장기준이 말했다. 직접적으로 성도윤에게 대표직에서 물러나라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의도는 뻔히 보였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어떤 해결책이 가장 좋다고 보십니까?”“그건 저도 모르죠. 제가 뭘 알겠습니까...”성도윤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장기준은 순간적으로 주춤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오준현이 나섰다.“간단합니다.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거죠. 그리고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도록 해요.”이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에 있던 수십 명의 주주들은 순간 숨을 죽였다.각자의 속셈을 감추듯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도윤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장기준 씨,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아뇨, 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성대 그룹을 위해서, 또 성 대표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장기준은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해명했다.“그럼 그 깊은 배려에 감사드려야겠군요.”성도윤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섬뜩할 정도로 서늘했다.그때, 한 주주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장기준 씨의 의견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 대표님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죠. 괜히 대표 자리를 바꿨다가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건 아닐까요?”그러자 오준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그건 여러분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한편, 성대 그룹에서.성도윤의 지각은 이미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주요 주주들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비서가 연간 그룹의 매출과 주요 프로젝트 성과를 보고했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회의실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다.“성 대표님, 보시다시피 올해 성대 그룹의 전체 이익이 계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관련 주가 역시 계속해서 하락세를 보고 있어요. 지금의 성대 그룹은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회사를 이끄는 책임자로서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실질적인 해결책이 있습니까?”7대 주주 중 한 명인 오준현이 말했다.그는 평소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매년 주주총회에서만 나타났다. 그리고 나타날 때마다 날카롭게 비판을 던졌는데 항상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성도윤을 깎아내렸다.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성씨 가문 사람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그러자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박지훈이 나섰다.“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이익을 볼 때도 있고 손해를 볼 때도 있는 법입니다. 성 대표님께서 성대 그룹을 맡은 후로 회사는 점점 성장해 왔습니다. 주가가 조금 하락했다고 이러시는 건가요?”“다들 아시다시피, 최근 몇 년간 특수 상황 때문에 대다수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성대 그룹은 그나마 하락폭이 적은 편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성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이미 파산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요?”박지훈은 성도윤을 강하게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지분은 많지 않았지만 성도윤과의 친분 덕분에 회사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그러나 오준현은 코웃음을 쳤다.“그럼 성대 그룹이 몇 달째 내리막길을 걷는 것도 성 대표님 덕분이란 말이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성 대표님께 상을 하나 드려야겠네요?”그의 냉소적인 말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오준현만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는 단순히 배경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을
“네가 감히 나를 때려? 두고 봐! 우리 아빠한테 이를 거야. 우리 아빠가 널 완전히 부숴버릴 거라고!”서은아는 분을 못 이겨 울먹이더니 퉁퉁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쥐고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차설아가 이미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이다.“엄마, 엄청 멋졌어요! 나쁜 사람을 한 방에 쫓아내다니... 완전 슈퍼우먼이었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달이도 커서 엄마처럼 슈퍼우먼으로 될 거예요!”차설아는 달이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슈퍼 우먼은 무슨... 우리 달이는 그냥 예쁜 공주님이면 돼. 괜히 다른 사람에게 시비 걸진 말되 누군가를 두려워하진 마.”원이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엄마, 저 아줌마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일부러 찾아와서 우리를 괴롭히려 한 거라고요! 뺨 몇 대만 맞고 도망가게 내버려두다니... 너무 쉽게 놔준 거 아니에요?”“원이야, 오늘 충분히 화풀이했잖아. 적당한 선에서 그만둬야 해.”차설아는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저 아줌마 아무리 꿍꿍이를 가지고 왔다 해도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야. 단지 좀 삐뚤어진 것뿐이지.”“사실 저 아줌마도 피해자이긴 해. 불쌍한 사람이거든. 오늘 받은 교훈이면 충분할 거야.”차설아는 원이를 다독였다.솔직히 말해서 서은아에 대한 그녀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수단이 좀 극단적일 뿐이지 말이다.그녀는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솔직했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진심으로 성도윤을 사랑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같은 남자를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차설아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서은아같이 대놓고 싸움을 거는 유형이 아니었다. 진짜 무서운 건 뒤에서 몰래 함정을 파고 그녀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몸을 살짝 떨었다.임
겨우 눈을 뜬 서은아는 원이가 했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지난 일까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 망할 꼬맹이가... 또 너야? 지난번엔 날 강에 빠뜨릴 뻔하더니 이번엔 물총까지 쏘면서 날 도발한다고? 죽고 싶어?”서은아는 이를 악물고 원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녀는 물을 또 한 번 맞았다.원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마치 자기가 어른인 것처럼 경고했다.“아줌마는 우리 집 손님이 아니에요. 여긴 아줌마를 환영하지 않아요. 지금 당장 나가세요!”“어린놈이 감히!”서은아는 자기가 어린아이에게 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했지만 원이의 민첩함을 과소평가한 것이 실수였다.아무리 쫓아다녀도 그녀는 원이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며 풀밭에 얼굴을 처박았다. 흙이 입안 가득 들어가고 온몸이 엉망이 되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설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원아, 너무 심하게 하진 마. 그래도 여자잖아.”“엄마,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 아줌마가 먼저 덤벼든 거라니까요? 그리고 이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에요. 그냥 나쁜 놈이죠! 완전 악당이에요! 지난번에 저를 호수에 빠뜨리려고 했어요! 나쁜 사람도 봐줘야 하나요?”원이의 입이 뿌루퉁해졌다.차설아만 옆에 없었더라면 원이는 벌써 ‘필살기’까지 써버렸을 것이다.“뭐라고? 널 호수에 빠뜨렸다고?”차설아는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서은아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원이가 하는 말이 사실인가요? 정말 어린 애한테까지 손을 댔다고요?”서은아가 어릴 때부터 삐뚤어졌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아이에게까지 손을 댈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어른들끼리의 다툼에 아이를 끌어들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서은아는 가까스로 일어났지만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입 안은 흙과 풀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눈물을 글썽하
“내가 말했었잖아! 도윤이만 가질 수만 있다면 망가뜨려도 상관없다고. 모든 걸 잃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을 때야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달을 거야. 그러면 내 곁으로 돌아오는 것도 시간문제지.”서은아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하, 웃기지도 않네!”차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도윤 씨는 사람이에요, 물건이 아니라. 그쪽이 부순다고 해서 부서질 존재가 아니라고요.”“그리고 도윤 씨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도윤 씨가 대기업 대표님이든, 그저 평범한 사람이든 나랑 아이들은 절대 그 곁을 떠나지 않을 거니까요.”“차설아,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직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아서야. 만약 도윤이가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받는 존재로 된다면? 도윤이와 엮이면 너까지 불행해지는 상황이라면? 그때도 떠나지 않을 자신 있어?”“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네까짓 게 어떻게 장담해? 사람이 발밑으로 내쳐지는 건 한순간이라고. 그러면 도윤이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거야. 결국 모든 사람이 도윤이를 외면할 거고 도윤이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무너질 수도 있어. 그렇게 된다고 해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첫째, 그럴 리 없어요. 둘째, 그렇게 될 때까지 제가 가만히 있을 것 같나요? 무너지면 제가 다시 일어서면 돼요. 비록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저한테도 나름대로 운영하는 작은 회사는 있거든요. 그 정도면 우리 가족이 먹고사는 데 부족할 게 없을걸요?”차설아가 말하는 ‘작은 회사’는 신흥 IT 강자인 천신 그룹과 거대한 자본을 가진 KCL 그룹이었다.하지만 두 그룹 모두 차설아의 소유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서은아도 그녀 앞에서 저렇게 우쭐거릴 수 있었다. 만약 서은아가 알게 된다면 얼굴도 들지 못하고 도망쳤을 것이었다.“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겨우 작은 회사라고 말이야. 그걸로 성대 그룹 같은 대기업을 살리겠다고? 꿈도 크네. 만약 진짜 도윤이를 위한다면 헤어지
“차설아 씨, 지금 절 협박하는 건가요?”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차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그건 아니에요.”차설아는 다시 한번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은아 씨가 저를 반대하는 건 좋지만 본인이 억울한 것처럼 절 비난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은아 씨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닌 듯싶어서요.”차설아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은아에게 약속했었다. 성도윤의 세상에서 물러나 두 사람을 이어 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전제는 서은아가 성도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를 위한 선택을 할 거라는 믿음이었다.그녀의 사랑이 이 정도로 극단적인 방식일 줄 모르고 말이다. 성도윤의 건강까지 해칠 정도라면 차설아는 더 이상 그를 서은아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만약 언젠가 도윤 씨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전 도윤 씨에게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이 세상에서 성도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차설아였다.그의 곁을 떠났던 건 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떠나고 보니 두 사람 모두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고통에 빠졌다.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두 사람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함께 극복해 나가는 게 그들에게 맞는 방식이었다.진정한 행복은 서로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말도 안 돼!”서은아는 눈을 붉히며 집착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내가 도윤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럴 일은 없어! 난 평생 도윤이만 사랑할 거고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그를 망가뜨리는 일도 할 수 있다고!”“서은아 씨, 진짜 미쳤어요? 그쪽은 사랑이 뭔지도 몰라요. 서은아 씨가 사랑하는 건 서은아 씨 자신 뿐이에요!”차설아는 서은아의 광기 어린 발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사랑이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
서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을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서은아 씨?”차설아는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드디어 절 보셨군요?”서은아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차설아의 감정이 너무나도 안정적이었기에 방금까지 확신했던 그녀의 생각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당연하죠.”차설아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옆자리를 가리키며 덤덤히 말했다.“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늦게 올 줄은 몰랐네요. 생각보다 멘탈이 좋은가 봐요?”서은아는 차설아의 반응을 보고 더욱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에 겉모습은 눈이 먼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 표정 하나하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서은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차설아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설아 씨도 멘탈이 대단하시네요.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뻔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원수지간인데도 이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셔서 참 고맙네요?”서은아는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차설아는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달이야, 착하지? 엄마가 이 아줌마랑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너는 민이 이모랑 잠깐 놀고 올래?”“싫어요! 이 아줌마 나쁜 사람 같아요. 아줌마가 엄마를 괴롭히면 어떡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으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서은아를 노려보았다.“게다가 이 아줌마 분명 아빠를 뺏으러 온 거예요. 전 절대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걱정 마, 달아. 아빠는 영원히 네 아빠야. 그 누구도 달이 아빠를 빼앗아 갈 수는 없어. 엄마가 이 아줌마랑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빠에 대한 얘기 말이야. 그러니까 엄마 말 들어. 가서 민이 이모랑 놀고 있어, 알겠지?”“알겠어요. 위험하면 꼭 소리 질러요! 제가 바로 달려와서 엄마 지켜줄 거예요.”차설아가 여러
성도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서은아는 차설아의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차설아가 달이와 함께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낮인데도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움직임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설마...’“엄마, 한번 맞혀봐요! 달이가 뭘 그렸게요?”달이는 차설아 앞에 앉아 물감으로 나비 한 마리를 그렸다. 그리고는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음... 강아지?”“틀렸어요! 달이가 그린 건 나비예요! 틀렸으니까 엄마 간지럼 태울 거예요!”달이는 해맑게 웃으며 차설아 품에 파고들어 그녀를 간질였고 두 사람은 잔디밭 위에서 장난을 치며 한바탕 웃었다.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가운데 그 장면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뜻해 보였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은아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차설아, 넌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난 거야? 성도윤이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사랑해 주는 데다가 너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오빠도 있고, 또 배경수, 배경윤 같은 친구도 곁에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똑똑한 아이까지 있다니...’‘근데 나는?’서은아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키우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에 따뜻한 기억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가까운 친구나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고 게다가 최근 아버지께서는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며 사생아까지 낳았다. 앞으로 그녀가 받을 사랑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었다.‘그래서일까? 내가 성도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 것도.’서은아에게 성도윤은 어둠 속 유일한 한 줄기 빛이었다. 그 빛은 오직 그녀만을 비춰주던 것이었는데 차설아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 모든 걸 빼앗아 간 사람인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고!’서은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것을 가로챈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엄마, 한 번 더 할래요! 그림을 그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