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감상하던 차설아가 문득 성도윤을 힐끗 보게 되었다. 차설아의 외모지상주의 병이 또 도져버려 남자의 완벽한 옆모습에 빠져들어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신은 너무도 불공평하다. 왜 그에게 이토록 대단한 신분과 비범한 능력을 주고 완벽한 얼굴까지 주었는가?그리고 왜 이렇게 수많은 완벽함을 주고도 감정은 주지 않은 것일까?이 사람은 마치 감정이 없는 냉혈한 같다. 정성스레 표본으로 만들어져 영원히 전시장에 전시하기에나 적합하지, 가까이 다가가고 감정을 나누는 데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다.그렇지 않으면 옆 사람들만 열받아 죽게 된다.“그동안 혼자서 두 아이를 어떻게 키운 거야?”달을 보던 성도윤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훔쳐보는 그녀를 발견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며 괜스레 썸 타는 듯한 설렌 분위기가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느껴졌다... 당황한 차설아는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뭐, 그냥 지냈지. 아이들이 말을 잘 들어서, 거의 천사나 다름없어.”사실대로 말하자면 홀몸으로 두 아이를 4년간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나날들이 아니다.아이들이 착하고 말을 잘 듣는다 해도, 둘 중 한 명이라도 열이 나거나 아프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거의 며칠간 제대로 쉴 수도 없다는 뜻이다.게다가 아이와 함께 있는 것도 정력, 시간, 자유를 바치는 것이다.그녀는 틈틈이 천신 그룹을 관리하는 동시에 시간을 내 아이들과 함께하고 교육해야 했으니,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그러나 그녀는 그간의 “고생”을 말함으로써 위로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니까.“전에는 몰라서 그랬다 쳐도, 이제는 나도 아이들의 존재를 알았으니, 아빠의 책임을 피할 수야 없지. 우리가 법정까지 가야 할 필요가 있을지 잘 생각해 봐.”성도윤의 담담한 말투에 압박감이 역력하다.이에 차설아가 냉소하며 답했다.“난 종래로
“오빠가 있었다고?”성도윤은 조금 놀랐다. 차설아에게 요절한 쌍둥이 오빠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흥, 우리 오빠가 아직 살아있었으면 진작에 당신 때리고 남았어. 당신이 이렇게 날 괴롭히는 것도 다 내가 친정에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런 거잖아!”차설아가 참지 못하고 또 한 번 성도윤을 꾸짖었다.한 여자의 결혼생활이 어떤지는 친정의 실력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친정의 실력이 강해서 시댁에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시댁은 절대 홀대하지 못할 것이다. 남편이 사랑하고 아끼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손님처럼 존경하고 체면을 차릴 수는 있을 것이다.그러니 당시 그녀가 성씨 집안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고용인마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날뛰었던 원인은 성도윤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시의 그녀가 외롭고 친정에 기댈 데도 없었기 때문이다.“난 그렇게 얄팍한 사람 아니야.”성도윤이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했다.“그때는 그저 당신한테 아무 감정이 없거나 혹은 싫어해서 보고 싶지 않았을 뿐 친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어.”차설아의 마음은 조금 괴로워졌다.그녀는 일찍부터 성도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버리니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사실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나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할아버지의 결혼 제안을 허락한 거야? 이렇게 고집이 센 걸 보면 협박당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차설아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몇 년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성도윤이 먼 곳을 응시하며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그녀와의 첫 만남을 생각하며 담담히 말했다. “그건... 당신이 안쓰러워서.”그때 차씨 가문은 변고를 당했다. 차설아는 금방 아빠와 엄마를 떠나보내고 이후에는 친할아버지마저 잃었다.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던 부잣집 아가씨가 하룻밤 사이에 기댈 곳 없는 원수들 가득한 고아가 되었다.“그때 할아버지가 뉴욕에 있던 나를 굳이 불러내서 당신과 자리를 만들었었지. 그때 당신은 소복 차림에 귀에는 흰 작은 꽃
“그땐 당신이 불쌍한 줄만 알았지. 귓가에 꽂은 그 부드럽고 연약한 꽃처럼 바람 불면 시들 것만 같았는데. 이혼하고야 그 성깔을 알았어. 알고 보니 내 동정심은 오지랖이었던 거야.”성도윤이 차설아의 이혼 전과 후의 확 달라진 모습을 떠올렸다.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인격처럼 행동할 수 있는 건지.그러나 ‘연약함’이든 ‘사나움’이든 간에 모두 그의 감정을 쉽게 조종할 수 있었다.차설아가 담담히 웃었다. 그리고 복잡한 눈빛으로 성도윤을 응시했다.“나는 모든 사람이 꺼리던 차가운 성씨 집안 둘째 도련님이 이렇게 동정심 많은 사람인 줄 몰랐네. 그럼 이렇게 된 바에... 끝까지 동정해서 나랑 아이들을 놔주고 우리의 평화로운 생활을 방해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성도윤의 그윽하고 깊은 눈동자에 차가움이 스쳐 지나가더니 냉담하게 말했다.“당신 정말 나의 존재가 당신과 아이들한테 방해라고 생각해?”“그럼 아니야?”차설아가 날카롭게 이어 말했다.“아직도 몰라? 나랑 아이들 모두 당신 안 좋아해. 당신이 갑자기 우리의 세계에 들어와서 우리의 원래 생활을 깨뜨리는 건 아이들한테는 상처야.”“미안. 근데 난 오히려 아이들이 나랑 잘 노는 것 같았는데. 아이들에겐 ‘아빠’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해.”“인정해. 확실히 아빠가 필요하긴 하지. 그런데 다른 사람이 이 역할을 할 수도 있어.”성도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럼, 내 아이들에게 새아빠라도 찾아주겠다는 거야?”“맞아!”차설아는 성도윤을 단념시키기 위해 솔직하게 말했다.“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이미 남은 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찾았어. 두 아이는 더더욱 좋아하고. 우리 네 가족은 평화롭게 잘살고 있으니까 끼어들지 말았으면 좋겠어.”“삶의 동반자?”성도윤은 차가운 얼굴에 눈빛은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삶의 동반자라고?”“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당연히 알지.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야.”“세상에 대가 없
말을 마친 성도윤은 자리를 떠났다.차설아는 홀로 해바라기 꽃밭에 남겨졌고 하얗게 빛나는 달빛 아래에서 생각에 잠겼다.솔직히, 그의 제안을 고려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성도윤이 듣기 거북한 말만 늘어놓았지만, 그중 하나는 사실이었다. 바로 세상에 아이의 친아버지보다 더 아이에게 잘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그리고 하늘 아래 그 어떤 어머니도 ‘아이를 위한다'는 징크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만약 성도윤과 재결합해서 아이들이 더 즐겁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녀는 어쩌면 시도해보아도 좋을 것 같았다.하지만, 미스터 Q와 일주일 후에 구청에 가기로 약속했다!“에휴, 짜증 나!”차설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이 났다. 머리를 쥐어 잡으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두 남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자신이 너무 나빠 보였다.이런 고민 때문에, 침실로 돌아간 그녀는 밤새 뒤척이며 쉬이 잠들지 못했다.다음날, 차설아가 깨어났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떴다.“망했다!”따스한 햇볕이 그녀의 얼굴을 내리비출 때에야 비로소 깨어난 차설아는 벌떡 일어났다.커다란 방에 혼자 남은 것을 보니, 두 녀석은 아마 일찍 깨어났을 것이다.그녀는 대충 옷을 챙겨입고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깼어?”성도윤은 검은색 풀오버에 회색 바지를 입고, 긴 다리를 꼬고는 소파에 앉아 유유히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식탁에 샌드위치랑 우유 준비해놨어. 가서 먹어.”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차설아는 계단 어귀에 서서 햇빛이 그의 머리에 내리비춰 후광을 형성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떨렸다.‘이 자식, 평소에는 전시품처럼 완벽하게 차려입고 도도해서 늘 거리감을 주더니, 이렇게 편한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이 있네.’눈앞의 성도윤은 더이상 상업계 거물이 아니다. 온몸에 나른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물씬했고, 멀리서 보기만 해도 필터를 넣은 듯한 드라마 남자주인공의 모습이었다.외모에 끔뻑 죽는 차설아는 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아침 먹으라니까 왜 계속 날 쳐다봐?”성
“원래는 할 줄 몰랐는데, 열심히 배우니까 되더라고.”“따로 배우기까지 하셨어? 무척 한가하나 봐?”“한가하다니? 아끼는 사람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것도 행복이라는 걸,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성도윤은 웃는 듯 마는 듯하게 말했다.“당신, 나랑 결혼하기 전에는 부엌에 발도 안 디뎠다고 하던데?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려고 부엌데기로 되었다며?”“누가 그래? 헛소리야.”차설아는 애써 부정했다.그녀만큼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란 여자도 또 없을 것이다.차설아는 어렸을 때부터 보통 여자아이들과는 달랐다. 인형, 예쁜 치마, 소꿉놀이 같은 걸 싫어했고, 부엌에 들어가는 건 더욱 극혐했다. 오히려 격투기, 총, 코드, 물리 화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만약 ‘자격 있는’ 성도윤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평생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고, ‘성도윤의 위를 잡는’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그때의 자신을 생각하니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남자 하나 때문에 ‘자아’도 버렸으니 말이다.“뿐만 아니라, 내 미색을 탐내서 나에게 엉큼한 맘을 먹었다고 했지?”“무슨 헛소리야!”차설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홱 몸을 돌려 감격에 겨워 변명을 늘어놓았다.“당신은 내 취향 아니야...”그제야 남자가 어느새 거실에서 부엌으로 다가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들의 거리는 지척에 불과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면 강인하고 잘생긴 남자의 턱이 바로 머리 위에 있었다.“진짜 당신 취향이 아니야?”성도윤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계속 밀어붙였다.“그런데 왜 자꾸 날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지?”“그건 그냥 우연이야!”차설아는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설득력 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라니까! 난 당신처럼 차갑고 도도한 남자 말고 다정한 남자 좋아해! 김칫국 마시지 마!”“차설아, 이렇게 비겁한 사람이었어? 어젯밤에 애들한테는 분명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성도윤은
두 아이는 일찍 깨어나 이미 성씨 가문의 큰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그들의 적응 능력은 차설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낯선 환경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생활하며, 마치 저택의 작은 주인인 듯했다.“너희 둘 뭐 하는 거야. 일어나서 엄마 찾으러 오지도 않아?”차설아는 아이들이 별장 앞 감귤 나무 옆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나뭇가지 끝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엄마, 빨리 가서 좀 보세요. 애들이 엄청 배고픈 가봐요. 계속 울어대고 입도 크게 벌리고 있어요!”달이는 차설아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고는 둥지 안의 새끼 네 마리를 가리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찍찍찍!”새 둥지에서는 이제 갓 배털이 돋아난 네 마리의 아기 새가 허약하고 힘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아직 눈도 뜨지 못한 작은 아기 새들은 입을 벌린 채 어미 새가 먹이를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엄청 배고픈가 보네. 우리 먹을 것 좀 갖다 주자.”차설아는 지지배배 우는 작은 새들을 바라보며 동정심이 생겼다.“하지만, 작은 새들은 보통 뭘 좋아하죠?”원이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작은 새들은, 아마 애벌레 같은 걸 먹겠지?’차설아는 휴대폰을 꺼내 검색하기 시작했다.어려서부터 새를 키워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네 마리를 챙겨야 하니 마음이 급했다.인터넷에서 새 키우는 법을 보고 나서야, 차설아는 자신 있게 아이들에게 말했다.“맞아, 아기 새들은 어미 새가 찾아온 벌레를 먹는대. 우리 벌레 잡으러 가자!”“야호, 벌레 잡으러 간다!”두 아이는 크게 기뻐하며 두 손을 들어 동의했다.어려서부터 섬에서 자란 두 녀석은 자연과 가깝게 지내는‘야생 아이’로 못하는 게 없었다.성씨 가문의 큰집은 높은 피복률을 자랑했고, 곳곳에 화초와 나무가 많았다. 그들 세 사람은 곧 많은 애벌레를 잡아 상자에 넣었다.그들은 다시 감귤 나무 아래로 돌아갔다. 새 둥지가 그들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차설아는 사다리를 가져왔다.“달아, 상자 이리 줘. 엄마가 아기 새들에게 줄게.”
차설아는 아기 새들을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웠다. 마치 자기 아이들을 보는 것처럼 진한 모성애를 발산했다.한 달 뒤 아기 새들이 깃털이 나고, 하늘을 날 수 있는 장면이 너무 기대되었다.“차설아, 뭘 먹이고 있는 거야?”성도윤은 나무 밑에 서서 고개를 살짝 젖히고 차설아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뭐?”차설아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감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남자의 완벽하고 입체적인 이목구비에 얼룩덜룩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마치 일본 만화 남자 주인공처럼 여름의 열기를 머금어 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예쁜 아빠, 엄마는 아기 새에게 애벌레를 먹이고 있었어요. 아기 새들이 정말 좋아해요.”달이는 성도윤에게 열정적으로 소개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애벌레들은 전부 저와 엄마, 그리고 오빠가 직접 잡은 거예요...”“애... 벌레? 켁켁!”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두피가 저리기 시작했다.세상에 무서운 것 하나 없는 성도윤이지만,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연체동물이었다. 특히 애벌레는 한 번 보면 악몽까지 꿀 수 있는 무서운 존재였다!“네! 아빠 애벌레 좋아해요? 다음에 애벌레 잡으러 갈 때 우리랑 같이 갈래요?”달이는 동그란 눈을 껌벅이며 성도윤에게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냈다.“아하하하, 그럴 것까지야!”성도윤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달이의 초대를 거절했다.원이는 옆에서 차가운 웃음을 짓더니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흥, 겁쟁이. 다 큰 어른이 돼서 벌레를 무서워하다니!”체면이 구겨진 성도윤은 애써 해명했다.“내가 언제 그딴 거 무서워한다고 했어? 그저 일이 바빠 잡으러 갈 시간이 없는 것뿐이야!”아버지로서 어떻게 해서든 두 아이 앞에서 용감하고 위풍당당한 이미지를 지켜야 했다. 아이들이 성도윤이 벌레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거짓말. 벌레도 무서워하는 겁쟁이가 어떻게 우리 가족을 지키겠어요. 엄마가 아저씨랑 헤어진 건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네요!”원이는 도도하
“지금 나보고 하는 얘기야?”차설아는 몸을 뒤로 젖히고 장난스럽게 남자를 보더니 손가락을 흔들었다.“노노노, 도련님이야말로 끝장이죠.”말을 마친 그녀는 핀셋으로 작은 애벌레를 집더니 ‘부주의’로 떨구었고, 마침 성도윤의 옷깃에 떨어졌다.“악, 징그러워. 이거 당장 치워! 빨리 치우라고!”성도윤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어머, 미안해요 도련님. 방금 손이 미끄러져서 벌레가 떨어졌네...”차설아는 웃음을 참으며 사다리에서 내려왔고, 거의 미쳐버릴 것 같은 남자를 애써 위로했다.“걱정 마. 사람을 해치지는 않아. 그저 당신 옷깃에서 꿈틀꿈틀하며 운동하고 있을 뿐이야.”성도윤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고, 엄격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차설아, 명령이야. 지금 당장 이 징그러운 물건을 내 몸에서 떼지 않으면, 내가 당신 죽인다!”차설아는 두 팔을 감싸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분노하고 있는 남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도련님, 아직도 그렇게 무섭게 말하면 어떡해요? 벌레 무서워하지 않는다면서요? 그럼 직접 떼어내면 되잖아요?”“젠장!”성도윤은 제자리에서 뻣뻣하게 서 있었다. 벌레를 떼어내기는커녕 벌레가 옷 속으로 기어들어 갈까 봐 여광으로 벌레의 방향을 감히 보지도 못했다. 온몸이 근질근질하는 것 같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잠시 존엄을 굽혀 낮은 목소리로 차설아를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맞아, 나 벌레 무서워해.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징그러운 물건을 떼어줄 건지 그냥 말해. 어서!”“진작에 인정하지! 그러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잖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굽힐 줄 아는 남자의 모습에 매우 만족했다.두 녀석은 옆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었다.달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성도윤의 정곡을 찔렀다.“예쁜 아빠, 달이도 이렇게 작은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아요. 정말 겁쟁이네요.”원이가 한마디 더 보탰다.“흥, 내가 말했지. 이 나쁜 놈은 껍데기만 번지르르할 뿐 실제로는 겁쟁이라니까!”성도윤은 자신의 체면을
“왔어요.”차설아를 데리고 야외정원으로 온 박서영이 성진의 말에 답을 했다.박서영은 이미 차설아를 온전히 믿고 있었다.만약 도망을 가거나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면 진작에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눈을 성진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뜻이었기에 박서영도 더는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어디 계셔?”“바로 앞에 앉아계시니까 천천히 말씀들 나누세요.”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 성진을 향해 박서영이 차분히 대답했다.야외정원에는 라운지 의자가 두 개 있고 그 사이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둘은 다과가 올려진 그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서영아, 넌 내려가 있어.”“도련님, 저는 그냥 없는 셈 치고 얘기하세요. 방해 안 할게요.”박서영은 차설아는 완전히 믿지만 혹시나 성진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둘을 만나게 하는 것 자체가 아주 모험적인 일인데 만약 자신이 자리에 없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박서영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방해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야.”“난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옆에 제삼자가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하지만...”“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차가운 표정을 한 성진을 보면서도 용기 내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더 냉랭해진 태도라 박서영은 어쩔 수 없이 내려갔다.“알겠습니다, 그럼 차라도 가져올게요.”박서영은 내려가기 전에 차설아를 향해 부탁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그녀가 알겠다는 듯 저를 향해 눈썹을 움직여주니 박서영은 한결 안심이 됐다.박서영이 나가고 넓은 정원에는 성진과 차설아만이 남게 되었다.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한 정원이라 협곡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그대로 받을 수 있던 그곳에는 부드러운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어 아주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이름이 뭐예요?”고개를 들고 바람을 느끼던 차설아는 들려오는 성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여한이 없다는 말까지 하는 차설아에 측은지심이 생겨난 박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나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차설아 씨 말고는 도련님이랑 맞는 눈이 없어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부담 갖지 마요. 이건 내가 진이한테 빚진 거니까 내가 갚을 거라고 했잖아요.”“그럼 내일 오전 두 분 만나게 해드릴게요.”그 말에 박서영은 마음을 독하게 먹으려고 심호흡을 하며 방을 나섰고 그날 밤을 차설아는 뜬 눈으로 새우게 되었다.하지만 잠을 설친 건 성도윤도 마찬가지였다.차설아와 연락이 안 된다는 사도현의 말에 자신도 연락을 해봤지만 차설아는 줄곧 묵묵부답이었다.그래서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을 때 성도윤은 차설아가 올린 새 스토리를 확인하게 되었다.[내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어, 오직 너뿐이야.]해바라기를 안고 활짝 웃는 사진을 저런 문구와 함께 올렸는데 꽃을 사본 사람이라면 해바라기의 꽃말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진심이 가득한 그 스토리를 본 성도윤은 차설아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나 싶었다.아무 소식 없다가 갑자기 저런 자신을 올리는 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암시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 그는 순간 오만해졌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이유를 알고 싶어 처음으로 그녀의 스토리에 댓글을 달았다.“너 지금 어디야?”하지만 그는 한참을 기다려도 차설아에게서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이미 끝난 사이이니 연락을 할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답답했던 성도윤은 새벽 두 시에 비서에게 연락했다.“진무열, 차설아 현재 위치 알아보고 나한테 보내.”보스의 전화에 잠에서 깬 탓에 정신이 흐리멍텅했던 진무열은 눈을 비비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보스, 저는 비서지 해커가 아닙니다. 스토리에 올린 사진 한 장 보고 위치를 어떻게 알아냅니까?”“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내일 아침 날 밝기 전까지 무조건 알아내.”말을 마친 성도윤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잠에 들었지만 새벽에 임무를 전달받은 진무열은 자신이 또 뭘 잘못했나 싶어 어리둥절하기만
박서영의 망설임을 보아낸 성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불편해?”“아니요, 불편한 게 아니라... 그분을 꼭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박서영은 원래 대충 아무 핑계나 대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아는 성진이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겨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 같아 거절 대신 저런 질문을 한 것이다.“당연히 봐야지.”“만약 그 사람이 정말 나한테 눈을 기증해준 사람이라면 나 대신 어두운 여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나한테 새로운 삶을 선사해준 그런 은인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리 마련할게요...”주먹을 꼭 쥐고 말하는 성진의 의지가 강해 보이기도 했고 또 괜히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아 박서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차설아와의 만남은 없을수록 좋겠지만 그래도 수술 전이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내일 오전 열 시에 별장으로 모셔올 테니까 두 분 얘기 나누세요.”“그래, 수고했어.”처음으로 박서영을 대놓고 칭찬한 성진은 밤바람을 느끼며 내일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달을 향해 고개를 든 그가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몸속에 갇혀있던 영혼이 움찔거리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 아름다운 별빛도 얼마 안 있으면 보겠네.”성진을 방으로 데려다준 박서영은 곧바로 지하실로 향했다.차설아는 그곳에 놓인 하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도 표정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장기를 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보관창고 같은 모습이었다.“아까 도련님이랑 달구경 좀 했어요. 3일 뒤에 수술하는 거 도련님도 동의하셨어요. 하지만 기증자가 차설아 씨라는 말은 못 했어요.”박서영의 말에 눈을 뜬 차설아가 천장을 보고 웃으며 담담히 답했다.“당연히 말 못 하겠죠. 그 사람이 알면 안 받으려고 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도 나 위해서 자기 눈을 성도윤한테 내어줬겠죠.”“그러게요.
“하느님도 도련님의 억울함을 느꼈나 보죠.”“기증자는 어떤 사람인데? 남자야? 여자야? 성씨 가문의 사람이야?”성진은 기쁘긴 했지만, 생각은 꽤 신중했다.세상에 공짜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그는 진실부터 파헤쳐 보기로 했다.“그게...”박서영은 성진이 기증자에 이렇게 관심을 가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손톱을 뜯으면서 아무렇지않게 말했다.“여대생인데 집안에 돈이 부족해서 저희 모집 정보를 보고 건강 검진 결과를 보내왔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만약 눈을 기증한 사람이 바로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는 차설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수술을 반대할 것이고, 심지어 크게 화를 낼지도 몰랐다.“아, 가난한 여대생이라...”성진은 이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몸을 팔고, 누군가는 신장을 팔고, 심지어 누군가는 목숨을 팔기도 했다. 한 쌍의 눈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이 시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만약 그녀가 정말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면, 돈을 섭섭지 않게 챙겨드려. 가능하다면 그녀와 가족의 남은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해.”성진이 매우 의리 있게 말했다.그는 비록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잘 진행될 거예요. 도련님, 수술을 받으실 거예요?”박서영은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는지 기쁜 마음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안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내 자신을 사랑해. 그리고 누가 괜히 시각장애인이 되고 싶겠어? 만약 정말로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복수해서 설아를 내 곁에 단단히 붙잡아 놓을 거야.”“도련님, 시력을 회복하면 첫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 설아 씨를 되찾는 거예요?”“그럼!”성진의 눈빛은 확고해 보였다.“그동안 난 설아에 대한 마음이 더욱 확고해
박서영은 이렇게 슬프고 비관적인 성진을 보며 마음이 아파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도련님은 그 여자 때문에 너무 많이 변했어요. 예전의 도련님은 이렇게 비관적이지 않았어요...”울먹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야. 그녀를 만나면서 더욱 나 자신으로 변해버린 거고.”성진은 깊고도 막연한 초점 없는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를 언급할 때마다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행복감을 감출 수 없었다.“아니잖아요!”박서영은 이해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 도련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감정은 사람을 얽매이게 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고요. 분명 그때 성도윤 씨는 도련님을 상대로 패배했잖아요. 도련님이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지금 성대 그룹은 도련님이 지배하고 있었을 텐데, 결국엔... 그 여자를 위해서 어떻게 성도윤 씨한테 골수와 눈을 내어줄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때까지 저희는 구석에서 세월이나 한탄하면서 보름달을 구경하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렸잖아요. 너무 억울해요!”박서영의 말을 듣고 있던 성진은 손가락을 움찔하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그렇다. 예전의 그는 사고가 명확하고,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랑에 눈이 멀어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배부른 나머지 할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사랑 때문에 죽지 못해 안달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의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그런 사람 중의 한명이 될 줄 몰랐다.“도련님,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박서영은 흔들리는 성진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잘 모르겠어.”아주 진솔한 대답이었다.“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사랑에 미친다고 하잖아. 나는 이미 그래봤으니까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과연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몰라.
“그래요. 그러면 이따 올릴 거니까 일단 로그인해 주세요.”’박서영이 핸드폰을 건네면서 차설아더러 자기 SNS 계정에 로그인하라고 했다.핸드폰을 받아쥔 차설아는 매우 협조적으로 SNS 계정에 로그인했다.구조를 요청할 기회는 많았지만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박서영도 차설아가 진심으로 속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점차 믿게 되었고, 다소 놀라면서 말했다.“생각보다 자기 눈을 내놓을 만큼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군요. 그래서 저희 도련님이 당신을 이렇게 미치도록 사랑했던 거군요. 당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저에게 주는 칭찬이에요?”차설아가 박서영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단지 남에게 빚지는 것을 싫어할 뿐이에요.”“저희 도련님께서 원하는 것이 바로 그거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도련님이 계속 바보 같이 지내는 것을 두고볼수 없어요. 박서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고통은 결국 도련님만 겪는 거잖아요? 이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저는 도련님께서 좀 더 냉정해져서 설아 씨를 곁에 뒀으면 좋겠어요.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요. 연애의 신 같은 건 도련님한테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박서영은 어릴 적부터 성진 부모의 교육을 받아 성진 한 사람만을 위해 헌신하며, 성진을 위해 무조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 성진은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그중에서 배회하는 사람이었다.이런 사람은 완전히 흑화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착한 모습을 보이면 끝없는 심연에 빠질 뿐이다.이번에는 박서영이 한눈파는 사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박서영은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한때 냉혹하고 교활하며 결단력 있는 성진이 반드시 돌아와야만 했다.차설아는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박서영에게 물었다.“그동안 성진은 어떻게 지냈나요?”“시각장애인이 뭘 어떻게 지냈겠어요.”박서영은 고개를 저으며
박서영은 그녀를 믿지 못하겠는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정말 기꺼이 두 눈을 내놓을 생각이 있으신가요?”그녀는 세상에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분명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제가 성진한테 빚진 걸 갚는 거예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어요.”차설아가 말했다.“저를 못 믿겠다면 제가 무사하다는 것을 굳이 알릴 필요 없어요. 다만 그때 가서 일이 커지면 알아서 처리하세요.”거짓말할 마음도 없는 차설아는 진심으로 이 일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었다.항상 성진의 헌신 덕분에 남의 인생을 도둑질한 것처럼 느꼈고, 가끔 즐거울 때도 불안한 마음에 죄책감을 느꼈다.이 기간에 성진에게 연락하지 않았지만, 밤이 깊어질 때마다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이 남자가 어떤 어둠 속에 처해있을지, 어떤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를 상상했다. 어쩌면 원수의 손에 잡혔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가능성이 마치 비수처럼 심장에 꽂혀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기만 했다.차설아는 더 이상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빚을 한 번에 갚고 싶어 했고, 그렇게 되면 그나마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럼 어떤 방법으로 무사하다고 전할 건데요?”박서영은 차설아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여전히 경계하는 어조로 물었다.“SNS에 올리면 되죠.”차설아가 웃으면서 말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위험에 처했을 때 SNS를 올릴 마음이 있겠어요? 제가 SNS를 올려버리면 적어도 제가 안전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SNS만 올리게요?”박서영은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SNS면 충분해요.”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차성철도, 배경윤도, 선우 시원도 각자 바빴기 때문에 그녀를 신경쓸 새도 없었다.이럴 때 SNS를 올리면 최소한 무사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좋아요. SNS 올리는 것만은 허락해 줄게요.”박서영이 여러 번 고민
“하하. 성도윤 씨랑 데이트하고, 선우가문의 도련님과 애정 어린 농담을 주고받고, 배씨 가문 도련님과 술 마시는 시간은 있으면서 저희 도련님을 찾을 시간은 없었나 보죠? 저희 도련님을 잊어버릴 정도로 바빴나 봐요.”서영이 흥분한 나머지 차설아의 목을 직접 움켜잡으면서 말했다.“그거 알아요? 당신이 성도윤 씨랑 얽히고설켜 있을 때, 저희 도련님은 좌절감에 스스로 인생을 끝내려고 했어요. 손목에 상처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아무리 칼날을 숨겨봤자 어떻게든 찾더라고요. 그렇게 강하던 사람이 이제는 약해빠져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요. 알아요?”차설아는 저항하지도 않고 박서영이 자기 목을 조르는 대로 놔두었다.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녀의 두 눈에는 핏줄이 보이기 시작했다.“흥. 절대로 당신이 쉽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박서영은 그제야 차설아를 놓아주며 차갑게 말했다.“당신한테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이 저택으로 데려온 거예요.”“켁! 켁! 켁!”차설아는 잠깐의 질식 때문에 기침하면서 숨을 헐떡이며 박서영에게 물었다.“제가 어떻게 죗값을 치르기를 원해요?”“아주 간단해요. 저희 도련님의 시력을 돌려주면 돼요.”박서영은 앞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그동안 저는 도련님을 위해 거부반응이 없고 잘 맞는 한 쌍의 눈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지만, 아쉽게도 찾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설아 씨의 건강 검진 데이터를 우연히 얻게 되었는데 아주 특별한 두 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마침 저희 도련님한테 빚진 것도 있으니까, 설아 씨의 눈을 저희 도련님의 눈과 바꾸는 거 어렵지 않겠죠?”차설아는 박서영의 최종목적을 듣고 침묵하고 말았다.“제 눈이 정말 성진한테 맞나요?”그때 성도윤이 실명했을 때도 눈을 물색하고 다녔는데 오직 혈연관계가 있는 성진의 눈만 거부반응이 없었다.그때는 성도윤이 빨리 낫기를 바라면서 성진을 신경 쓰지도 못했다.하지만 마음의 빚 때문에 계속 숨이 안 쉬어졌다.만약 자기 눈으로 성진의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마음의 위로 때문이라
차설아는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온통 흰색 인테리어인 낯선 이곳은 영안실에 온 기분이었다.“드디어 깨셨군요, 약효가 너무 강해서 무려 사흘 동안 혼수상태였어요. 이러다 죽어버리는 줄 알았어요...”창가에서 한 여자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에게는 생과 사가 그저 자거나 깨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경계 태세로 창가를 바라보던 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당신이었어요?”그날 밤 병원에서, 몰래 차설아의 병실로 들어간 그녀였다.“저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네요. 영광이에요.”박서영은 창가에 앉아 꽃다발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녀의 옆에 놓인 꽃병에는 이제 막 정원에서 따온 해바라기가 꽂혀있었다.박서영은 황금빛으로 만개한 해바라기 줄기를 비스듬히 잘라 하나씩 예쁘게 꽃병에 꽂아 넣었다.“저희 주인님께서는 설아 씨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해바라기라면서 정원에 해바라기를 심으라고 했어요. 이제는 만개했는데 볼 수 없어서 너무 아쉬워요. 마치 다른 사람한테 보이지 않는 주인님의 마음처럼 말이에요.”이때 박서영은 눈빛이 차가워지면서 꽃가지를 단단히 잘라버렸다.“주인님이라 하면 성진을 말씀하시는 거예요?”차설아는 사고가 날카로운 사람이라 바로 상대방을 추측해 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일편단심이면서 실명한 사람은 성진뿐이었다.“도련님을 아직 기억하고 계셔서 다행이네요. 도련님 정성이 헛되지 않았네요.”박서영은 차설아가 성진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 그나마 그녀를 향한 증오가 줄어드는 듯했다.“정말 성진이에요?”차설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온몸이 무기력해 마치 마비된 것처럼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박서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저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마취제 때문에 잠깐 의식을 잃고 침대에 누워있었을 뿐이니까요.”차설아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리 일어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