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가 미스터 Q에게 성도윤과의 일을 고백했다. 그녀는 자신이 미스터 Q와 어떤 관계든 간에 그도 이 사실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 추측이 맞았네요.”미스터 Q는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당신의 선택은요?”“전 재혼하지 않을 거예요. 양육권은 더더욱 주지 않을 거고.”차설아가 매우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눈앞의 남자를 응시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듯 말했다. “그러니까 제 선택은, 당신과 혼인신고 하는 거예요.”미스터 Q가 여전히 감정변화 없이 담담히 말했다. “그래서, 절 선택한 원인은 두 아이의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서다. 맞습니까?”차설아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들 때문만은 아니에요.”“그럼 더 이상한데요...”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차설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설마 저에게 설레기라도 한 거예요?”“전 몰라요.”차설아는 남자의 스킨십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속마음은 그녀 자신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망설여졌다...“사랑이라기엔 너무 거창하고, 설렘이라기에도 맞지 않은데.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가족 같은 따뜻함을 느껴요. 상상 속의 ‘가족’의 느낌이랄까요.”“그럼 성도윤한테서는 그런 느낌을 못 받았어요?”“사실대로 말하자면, 성도윤을 처음 봤을 때도 이런 기분을 느꼈었어요. 비록 매우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전 이상하게도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꼈어요.”차설아가 왠지 모르게 점차 추억 속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에는 성도윤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의 따뜻한 감정이 다시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제가 얼마나 사랑에 미친 여자였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 사람을 처음 본 순간 저는 이미 그와 아이를 낳고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티비를 보고, 여행을 가는 모습까지 상상했었어요.”“결혼한 이후에
차설아는 미스터 Q와의 대화가 끝난 뒤, 짐을 챙겨 두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바로 향했다.멀리서 차설아를 본 아이들이 기뻐하며 옆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봤지? 저기 부모 중 제일 예쁜 사람이 바로 나랑 오빠 엄마야.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엄마! 난 엄마 딸로 태어나서 정말 행복해.”달이가 단짝친구 윤이를 끌고 앙증맞은 턱을 치켜들며 저 멀리 교문에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았다.윤이도 눈을 게슴츠레 뜨며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네 엄마는 확실히 예쁜데 이렇게 예쁜 천사가 가면을 쓴 못생긴 아저씨랑 같이 있으니 너무 아까운 것 같아.”“드라마에서 보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하잖아. 그게 바로 네 엄마랑 저 가면 쓴 아저씨를 말하는 거야. 만약 내가 너라면 난 네 엄마한테 예쁜 애인을 찾아줄 거야. 그럼 네 엄마도 기분이 좋아질 텐데.”요즘의 여자아이들은 나이는 적어도 하나같이 모두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달이가 외모를 따지니 자연스레 단짝도 외모를 따지는 친구인 것이다.윤이는 달이를 자주 데리러 오는 그 가면 쓴 아저씨가 어떻게 생겼을지 줄곧 궁금했었다.“듣기로는 가면 아저씨가 얼굴이 망가졌다는데. 얼굴에 깊고 긴 흉터가 있대. 네 엄마가 그 아저씨와 결혼하면 밤에 자다 깨서 흉터를 보면 깜짝 놀랄 것 같은데?”윤이가 말하며 저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진저리를 쳤다.달이가 자기도 모르게 우울해졌다.“네 말은 나도 생각해 봤어. 그런데 아저씨는 우리한테도 엄마한테도 너무 잘해줘. 그래서 싫어할 수 없어. 마음이 예쁜 사람이 정말 예쁜 거야.”“말은 그렇다 하지만 난 그래도 네 엄마가 더 잘생긴 아저씨랑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 넌 딸이니까 엄마를 도와줘야지.”윤이는 여전히 달이를 설득하며 달이가 자신의 엄마에게 잘생긴 애인을 찾아줬으면 했다.“어휴. 우리 엄마도 잘생긴 아저씨 본 적 있어. 그런데 좋아하지 않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싫어해. 내가 무슨 방법이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지금 알려주면 효과가 없을 테니까 알려줄 수 없어요!”“음...”차설아는 딸의 말에 말문을 잇지 못했다.원이는 한쪽에서 애어른처럼 팔짱을 끼고는 쿨하게 말했다.“얘네한테 무슨 비밀이 있겠어요. 또 어느 잘생긴 오빠나 토론하고 있겠죠. 유치하긴.”두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둘 사이의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멋지고 거만한 원이는 어린이집에서 왕자님이었지만, 아쉽게도 너무 거만하고 차갑기에 아이들은 멀리서 좋아할 뿐이었다. 아이들이 가까이하지 못하니 그는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그러나 여동생 달이는 달랐다. 달이는 귀여운 외모와 높은 감성지수로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의 귀요미를 담당했다. 하여 수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어딜 가든 친구와 함께였다.원이는 속으로 은근히 질투했다. 자신이 더 이상 여동생의 유일한 사람이 아니게 된 것 같았기 때문에.이전엔 자신을 존경하고 우상으로 여기며 무조건 자기 말을 듣던 여동생이 이제 자신의 주견이 생겨 말을 듣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반박까지 한다.특히나 성도윤을 대하는 태도에서 남매는 큰 갈등이 생겼다.달이는 성도윤을 용서하고 속죄의 기회를 주자고 했고 원이는 인간성의 추악함을 깨닫고 성도윤이 다시는 엄마에게 가까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남매는 이 의견 차이로 인해 암암리에 대립 중이었다. 오늘도 어린이집에서 서로 상대도 하지 않았고 아직 냉전 중이었다.원이는 달이보다 앞서 달이와 멀리 떨어진 반대편에 올라탔다.달이도 오늘따라 원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작은 입술을 말아 물며 뒷좌석의 다른 한쪽에 앉았다. 그러고는 창밖만 바라보았다.운전석에서 차를 운전하던 차설아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웃으며 물었다.“오늘 둘이 왜 이래. 아무도 말을 안 하네? 이상해~”“엄마, 나 오빠랑 대화하기 싫어요. 맨날 정색하고 투덜대니까 친구들도 다 무서워해요.”달이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원아, 정말이야? 어린이집에서 친구들한테 사납게 대해?”차설아가 원이
“엄마, 농담하는 거죠? 우리가 왜 그 나쁜 사람이랑 같이 살아요?”아니나 다를까, 원이의 반응은 격렬했다. 성도윤을 정말 싫어하는 듯했다.반면 달이는 눈에 생기가 돌며 반짝반짝 빛났다. 달이는 연예인 보는 팬의 표정을 하며 말했다.“정말이에요, 엄마? 정말 잘생긴 아빠랑 같이 살 수 있어요?”달이의 반응에 원이는 더욱 화가 나서 팔짱을 끼고 호되게 꾸짖었다.“달아, 왜 그러는 거야? 위기의식을 좀 가져. 나쁜 놈 소굴에 가게 되는 건데 뭘 기뻐하는 거야.”“당연히 기쁘지. 앞으로 매일 잘생긴 아빠 보게 될 텐데. 잡쳤던 기분까지 나아졌네. 그리고 잘생긴 아빠랑 엄마가 친구가 되면 우린 또 다른 아빠를 가질 수 있는 거잖아. 얼마나 좋아?”달이가 기쁜 이유를 조리 정연하게 설명했다.“아니야. 안 좋아. 우린 나쁜 사람이랑 친구를 해선 안 돼. 멀리해야지.”“잘생긴 아저씨가 나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같이 살면 마침 아빠에 대해 알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알 필요 없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확실해. 그 사람이 엄마를 아프게 한 건 사실이야. 경수 아빠랑 경윤이 엄마 둘 다 증인이야. 그 사람은 제일 제일 제일 나쁜 사람이야!”“아니야. 난 아빠 믿어. 아빤 나쁜 사람 아니야!”두 아이가 또다시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차설아는 두 아이의 시끄러운 다툼 소리에 저릿해 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운전에 집중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차설아는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이 큰집에 도착하게 되었다.성도윤은 정원사, 요리사 등 고용인들을 모두 물렸다. 몇백 평의 대저택에 네 식구만 살도록.그는 네 식구가 함께 지낼 날을 기대하며 일찍부터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신문을 한 장 또 한 장 펼치다 보니 날이 어두워졌다. 가족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그는 입구에서부터 들려오는 인기척을 들었다.성도윤은 신문을 내려놓고 재빨리 일어나 별장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내 아이들 아니랄까 봐 너무 예쁘네. 이리 와!
이때의 성도윤과 달이는 그녀가 수없이 상상했던 따뜻한 부녀의 모습이었다.그때 성도윤에게 시집간 그녀는 미래의 삶에 대해 기대로 가득 찼었다.그녀는 성도윤에게 귀엽고 예쁜 딸과 멋진 아들을 낳아주고 싶었다.성도윤이 딸을 안아 들고, 그녀는 아들의 손을 잡고 함께 해바라기 꽃밭을 거닐고 저녁 바람을 쐬며 행복을 느끼는 모습을 상상했었다.이제 꿈속의 화면은 실현되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열정을 불태울 수 없다...“엄마, 아직도 나쁜 아빠 미워해요?”원이는 총명하고 예민하여 차설아의 심정 변화를 쉽게 알아챈다. 원이는 마치 어린 기사처럼 용맹하게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말했다.“만약 아직도 미워하면 원이가 대신 복수해 줄게요!”“전 달이 그 녀석 같은 바보가 아니어서 쉽게 사람한테 당하지 않거든요. 엄마를 아프게 한 사람에게 그렇게 웃어주다니. 달이는 배신자예요. 제가 얼른 방법을 생각해서 잘못을 깨닫게 해야겠어요.”차설아가 담담히 웃어 보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의 말은 마음을 따뜻하게 했지만 가슴 한구석을 콕콕 쑤시게 했다.때로는 아이가 철이 들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때도 있다. 그건 삶이 아이를 성장하도록 강요하게 했다는 거니까.원이는 집안의 작은 기둥이었다. 어릴 때부터 가정을 위해 비바람을 막아야 한다는 강박적인 의식이 있었다. 줄곧 꿈이 엄마와 여동생을 지키는 것이라고도 했었다.그러나 달이는 원이에 비해 아주 단순했다. 달이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기에 마음은 투명한 물처럼 조그마한 불순물도 없이 깨끗했다.달이가 보는 세상은 아름다움 뿐이기에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않는다.정상적인 어린아이라면 달이처럼 순진무구하고 걱정거리 없이 살아야 한다.차설아도 원이가 달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매사에 즐거운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원아. 엄마 말 들어봐. 사실은 아빠랑 엄마는 사적인 원한 관계여서 둘 중 누구든 잘잘못을 따질 수 없어. 그러니까 원이는 아빠를 계속 나쁜 사람 취급할 필요는 없어.
달이의 목소리가 사색에 잠겨있던 차설아를 깨웠다.그녀는 호기심에 달이와 성도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이때 두 부녀는 대문 앞의 감귤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성도윤의 어깨 위에 앉은 달이는 작은 손을 뻗어 나무 위의 새 둥지를 가리키며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엄마! 얼른 봐요! 여기 새 둥지에 아기 새 네 마리가 있어요! 너무 귀여워!”“아, 이거였구나. 새...”차설아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달이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했다.이 아이는 항상 이렇게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놀라며 하찮은 일로도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그리고 이러한 점 때문에 달이는 하늘이 차설아에게 내려준 작은 천사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달이가 사뭇 진지하게 차설아에게 말했다.“엄마, 이 새는 그냥 새가 아니에요. 이 새들은 잘생긴 우리 아빠가 엄마한테 선물해 주는 새예요!”“나한테 주는 새라고?”차설아의 시선이 성도윤을 향했다. 봄날의 태양같이 따뜻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칼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의 쌀쌀한 눈빛으로 변했다.성도윤은 오히려 담담했다. 그는 얇은 입술을 움직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맞아. 이 새들은 네 거야. 네가 돌봐줘서 아기 새들이 날 수 있게 되면 그때 떠나.”차설아가 침묵했다.이 자식 억지 부리는 것 좀 보게? 의사는 분명 일주일만 돌보면 정상으로 회복된다고 했는데, 갑자기 새 몇 마리를 선물해서 떠날 시간을 미룬다? 정말 속이려는 게 아닌가?차설아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이 교활한 인간과 확실하게 따질 준비를 했다.“성도윤, 너...”“엄마!”달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감격에 겨워 차설아의 말을 끊었다.“저 이미 아기 새들에게 이름을 지어줬어요! 이 새는 노랑이, 이 새는 파랑이, 이 새는 주황이, 그리고 이 제일 작은 새는 초롱이... 저 엄마랑 잘생긴 아빠랑 그리고 원이 오빠랑 이 아기 새들을 열심히 키울 거예요! 앞으로 이 새들은 저랑 오빠의 형제자매예요! 그리고 엄마랑 아빠의 새로
이와 동시에 그녀는 얼른 전화를 꺼내 검색했다.“아기 새는 보통 언제 날 수 있는가?”답은 약 한 달 정도였다.그녀가 턱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의 시간이면 차씨 저택을 재건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나머지 세 사람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다.달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네 마리의 아기 새들을 향해 손을 끄덕였다.“너무 좋아요! 우리 집에 새 가족이 생겼어요! 노랑이, 파랑이, 주황이, 초롱이! 우리랑 가족이 된 걸 축하해!”원이는 여전히 시크하고 냉담한 태도로 네 글자를 내뱉었다.“유치하긴.”성도윤은 입가에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띤 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짓궂은 계획이 성공한듯 웃었다.왜냐하면 세상에는 영원히 날 줄 모르는 새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 감귤 나무 위에 있는 네 마리의 새들이다.이 새들의 이름은 카카포로, 서식지는 네덜란드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사는 새이자 지능이 가장 낮은 귀여운 바보새들이다.차설아처럼 멍청한 것이 귀엽다. 영원히 성도윤의 손바닥 안에서 날아갈 수 없는 귀여운 사람!두 아이는 이 호화로운 큰집을 좋아했다. 그들은 빠르게 이곳의 환경에 적응했다.특히나 해바라기 꽃밭은 그들이 가장 친근감을 느끼는 곳이었다. 마치 그들이 어렸을 적부터 자라온 해바라기 섬에 온 것 같이 그들은 꽃밭 속에서 술래잡기하며 즐거워했다.“원아, 달아, 조심해. 다치지 말고.”차설아는 꽃 옆의 정자에 앉아서 가볍게 잔소리했다.아이들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지 오래되었으므로, 차설아도 따라서 즐거워져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성도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주시하다가 탄식하며 말했다.“이제 보니 당신 웃는 모습이 참 예쁘네.”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대답했다.“그럼 당연하지. 난 선천적으로 미모가 타고났으니까. 이전의 당신은 눈이 먼 게 분명해.”그러나 성도윤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례적으로 자기반성을 하기 시작했다.“당신 말이 맞아. 그때의 나는 눈이
차설아는 부엌으로 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이상하게도 몇 년 만에 부엌에 와도 생소하지 않고 자신의 구역에 다시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밖에서 아무리 강한척해도 잠재적인 의식 속에서 그녀는 가정주부의 삶을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그녀는 예전처럼 빠른 속도로 상다리 부러지게 맛있는 음식들을 만들었다. 향기로운 음식 냄새는 일찍부터 집을 채웠다.그러나 전과 다른 것은 전에는 썰렁하고 쓸쓸하던 식탁이 시끌시끌해졌다는 점이다.식탁 앞에 앉은 사람들은 기대가 만발한 표정으로 음식을 기다렸다.“우와! 냄새 좋다. 엄마! 레몬 닭발 너무 맛있어요. 침까지 흘러나올 것 같아요...”달이는 줄곧 차설아가 만든 레몬 닭발을 먹고 싶었다. 매번 해줄 때마다 열 개는 족히 먹었었다.아쉬운 것은 차설아가 평소 일이 많아 직접 요리하는 시간이 적었다.그런 이유로 달이는 레몬 닭발이 식탁에 올라오자마자 배고픈 거지처럼 손으로 집어서 먹었다.“달아, 손으로 먹지 마. 보기 흉해.”차설아는 성도윤이 두 아이가 게걸스럽게 먹는다고 가정교육이 덜 되었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됐다.그런데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성도윤은 원이와 달이보다도 빠르게 손으로 닭발을 뜯으며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귀공자의 우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음...”차설아는 성도윤의 체면을 차리지 않는 모습에 조금 놀랐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윤 씨, 굶어 죽은 귀신이 붙었어요? 너무 게걸스럽잖아요.”이미 닭발 하나를 뜯어먹은 성도윤이 두 번째 닭발을 집어 들었다.성도윤은 닭발 위의 진한 국물 즙을 빨아 먹었다. 그 시큼하고 매콤한 맛은 그를 참을 수 없게 했다.“날 탓하면 안 되지.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성도윤이 닭발을 먹고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내 탓이라고?”차설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눈을 치켜뜨고 보았다.“당신 탓이지. 당신 요리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이렇게 맛있게 만드는 건 내 위를 홀려서 나까지 홀리려는 거지?”“?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