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도 급하면 사람을 문다는 말이 있는데, 하물며 상대는 사람을 잡아먹고 뼈도 뱉지 않는 슈퍼 맹수이니, 차설아는 적당한 선에서 멈춰야 했다.원이와 달이도 성도윤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감지하고, 재빨리 그의 옷과 바지를 꺼내 성도윤의 손에 쥐여주었다.“이번에는 이쯤에서 봐줄게요. 다음번에 또 우리 손에 잡히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줄 알아요.”원이는 턱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말했다.“너희들도 기억해. 다음번에는 진짜 아빠가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줄게!”성도윤도 카리스마 넘치게 독설을 내뱉고는, 하이힐을 신은 채로 옷을 안고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푸하하하!”차설아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작게 웃던 데로부터 시작해 큰소리로 웃었다.그녀의 방자한 웃음소리는 건물 전체를 꿰뚫을 기세였다.지난 몇 년 동안, 그녀가 본 성도윤은 늘 고상하고 빈틈없이 우아한 모습이었는데, 오늘 이렇게 낭패한 꼴을 보았으니, 일종의 환상이 와르르 무너진 느낌이었다.역시, 성도윤을 다스릴 수 있는 건 리틀 성도윤뿐이었다. “너희들, 엄마가 이번에는 이대로 넘어가지만, 절대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돼. 저 안에 있는 놈이 미치면 악마보다 더 무서워. 그러다 진짜 화나기라도 하면 너희 둘 어떻게 될지 장담 못 해. 알겠어?”차설아는 실컷 웃은 후, 심각한 표정으로 원이와 달이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교육했다.그러자 달이가 말했다.“하지만 엄마, 나쁜 아빠 성격 꽤 좋아 보이는데요? 저희가 그렇게 괴롭혔는데도 화내지 않잖아요? 마치... 우리가 해준 스타일링을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혹시 속으로 좋아하는 건 아닐까요?”차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노파심에 말했다.“아니, 쉽게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맹수라서 그래. 화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속으로는 이미 화가 치밀어 올라 어떻게 복수할지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함부로 건드리며 안돼.”달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눈을 반짝였다.“그렇다면, 우리 차라리 전략을
“엄마는 늘 우리에게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잖아요. 만약 나쁜 아빠가 이미 잘못을 뉘우쳤다면, 우리는 왜 좋은 사람이 될 기회를 주지 않는 거죠?”“우리가 잘해주면, 아빠도 우리에게 잘해 줄 거예요. 우리가 괴롭히면, 똑같이 우리를 괴롭히겠죠. 그럼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또 한 명 늘어나도록, 아빠에게 잘해주면 안 돼요?”달이는 논리정연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어릴 때부터 달이는 원이의 1호 팬이었고,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다.그래서 차설아는, 만약 언젠가 원이가 사람을 죽였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칼을 건넨 사람은 분명 달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하지만, 지금 이 두 녀석은 성도윤 때문에 아주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음, 그게. 너희 둘...”차설아는 옆에서 듣다가, 두 녀석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런 장면은 처음이었느니 말이다.“달아, 네 생각은 문제가 있어. 나쁜 놈은 그냥 나쁜 놈이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나쁜 놈에게 마음이 약해지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아니야, 만약 누구든 잘못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왜 선생님이 있고 왜 경찰이 있는 건데?”원이도 처음으로 달이가 이렇게 고집부리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차설아를 전쟁터로 끌어들였다.“엄마가 좀 말해봐요. 저랑 달이, 누구 말이 맞아요? 아니면... 우리는 그 나쁜 아빠를 용서해야 하나요?”“글쎄...”차설아는 턱을 쥐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두 아이에게 상처도 주지 않으면서 갈등도 풀 수 있을까?“엄마는 말이야. 우리가 강해져야 하는 것도 맞고, 관대해야 하는 것도 틀리지 않은 것 같아. 그 정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아주 나쁜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면 안 되고, 착한 사람에게는 기회를 줘야겠지? 그래서...”“그러니까, 나쁜 아빠의 행동에 달렸다는 거죠?”원이는 단번에 차설아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말했다.그는 마치 애늙은이처럼 정색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말도 일리가 있어요
차설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앞으로 나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선생님, 어떻게 된 일이에요?”“알레르기로 인한 실신이에요. 큰 문제는 없어요.”의사는 이마를 찡그리더니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그런데, 가족분은 환자가 피 공포증이 있다는 걸 모르세요? 이미 심각한 상황이니 음식에 특히 주의하셔야 해요. 함부로 아무거나 먹어서 알레르기를 일으키면 즉사할 수도 있어요!”“어... 아무거나 먹어요?”“네. 수면제 같은 건 절대 입에 대면 안 돼요. 피 공포증을 치료하는 약이랑 반응을 일으켜, 심하면 진짜 죽을 수도 있어요!”의사의 말에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원이가 성도윤에게 수면제를 먹였다고 했었다. 잠시 성도윤을 자게 하려던 약이 이렇게 큰 영향이 있을 줄은 몰랐다.“제가 소홀했어요. 저 때문이에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그래요. 하지만 이번 일로 몸이 심하게 손상되어, 내일 아침 퇴원하셔도 집에서 일주일 정도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좋기는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고, 환자분이 화나거나 슬프지 않게 가족분들이 많이 신경 쓰셔야 해요. 뭐든 환자분에게 고분고분 순종하고, 최대한 기쁘게 해주고요...”의사는 진료기록 작성에 몰두하면서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네? 고분고분 순종까지 해야 한다고요?”차설아는 의학에 관한 연구가 깊지는 않지만, 이런 병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지금 의사의 소견을 의심하는 겁니까?”의사는 고개를 들고 매우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검사 보고서를 건네주었다.“여기 수치들 좀 보세요. 간이며 비장이며 위가 얼마나 손상되었는지. 만약 환자분이 화가 나서 심혈이 쌓인다면 절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가족분들이 좀 관심해주면 안 되나요?”“작은 수면제 한 알 때문에 내장이 손상돼요? 말도 안 돼요...”“수면제는 알레르기를 일으켰을 뿐이고, 내장의 손상은 피 공포증 때문에 복용한 약 때문이에요.”차설아는 검사 보고서의 수치들을 보면서, 잘 알지는 못하지
병실은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는 여전히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긴 속눈썹은 깃털처럼 촘촘했고, 오렌지색 스탠드는 그의 오똑한 콧등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차설아는 남자가 반응이 없자, 몸을 숙이고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관찰하니,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이 녀석, 다른 건 몰라도 얼굴 하나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조각상이라니까. 왜 이렇게 예뻐?”그녀는 남자의 완벽한 얼굴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이목구비가 아름다운 건 그렇다 치고, 성도윤은 피부까지 좋았다. 어떤 고급 스킨케어를 썼는지 모르지만, 부드럽고 매끄러운 것이 울퉁불퉁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전에 속은 경험이 있는 차설아는 경계심이 훨씬 높아졌고, 남자를 밀치며 말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똑같은 수법은 안 통해!”남자는 요지부동으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계속 연기하시겠다? 그래 좋아!”말을 마친 차설아는 장난스럽게 남자의 코를 잡고 그의 호흡을 막았다.남자는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이래도 안 일어나?”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선전포고했다.“좋아, 그럼 나의 필살기를 보여주는 수밖에!”말을 마친 그녀는 팔을 휘저으며 몸을 풀더니... 남자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또 빠르고 느리고를 반복하는 그녀의 간지럽히기 수법은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이래도 반응이 없다고?”차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마침내 성도윤이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믿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차설아는 이 남자가 깨어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그래, 일단은 믿어줄게. 지금 당신은 의식을 잃은 혼수상태가 맞아.”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남자를 정성껏 돌보기 시작했다.먼저 그에게 세수를 시켜주고, 또 약을 먹이고, 마지막으로 느린 템포의 음악도 들려주었다.의사가 편안한 환경일수록 성도윤이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렇게 편안하고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성도윤이
차설아는 남자의 말을 끊고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너무 창피하잖아!이 자식이 언제 깬 건지는 몰라도, 옆에서 쿨쿨 자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웃었을까!그녀는 남자에게 맹렬하게 쏘아붙이려다 의사의 당부를 생각해서 화를 억누르려고 애썼다.“지금 좀 어때. 아직도 어지러워?”성도윤의 깊은 눈이 차설아를 응시했다. 그는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날 이렇게 걱정한다고?”“착각은 넣어둬. 관심이 아니라 짐을 내가 다 짊어질까 봐 두려워서 그런 거야. 아직 애들이 철도 못 들었는데. 당신한테 일이 생겨서 나한테도 피해가 가면 어떡해?”차설아가 작고 예쁜 얼굴을 쳐들며 본인이 지혜롭고 이성적인 사람인 양 도도하게 말했다.“그런 거였어?”성도윤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물었다. 실망인지 아니면 흥미진진한 건지.“그럼?”차설아가 차갑게 코웃음 쳤다. 마치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도도한 공주님 같았다.“난 다른 사람을 쉽게 걱정해 주지 않아. 난 비싸거든.”“그렇다면 두 아이한테 신경 좀 써야겠는걸.”성도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두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머리도 어지럽고 기운이 없는 데다 기분까지 별로니 언제쯤 회복될지 모르겠네, 원.”“금방이야. 일주일이면 나아질 거야.”차설아는 성도윤이 아픈 척하는 건지 정말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의사가 말씀하시길 상태가 좋지 않아 신경 써서 돌보아야 한다고 했으니.아픈 척하는 것이더라도 빨리 낫도록 살뜰히 보살펴야 했다.“걱정 하지 마. 내가 책임지고 잘 보살필 테니.”차설아가 남자를 향해 진지한 태도로 약속했다.“그래? 그럼 기대할게.”성도윤이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갑자기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이 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다음날, 남자는 퇴원하여 집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성도윤은 차설아와 두 아이가 큰집에 갈 것을 제안했는데, 그 이유로는 그가 낯선 환경에서 특히 잠자리에 대해 거부감이 들기 때
아파트로 돌아가던 차설아는 두 아이가 없는 틈을 타 미스터 Q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죠?”전화기 너머의 미스터 Q는 차설아의 연락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중요한 일이 생겨서요. 지금 어디 계세요?”“그게...”남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대답했다.“지금 성심 전당포에 있어요. 처리할 일이 있어서.”“그렇군요. 그럼 언제 시간이 빌 때 아파트에 잠깐 들르실 수 있겠어요?”차설아는 남자와 중요하게 상의할 일이 있는 듯 조급한 말투였다.“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차설아의 다급함을 눈치챈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아파트로 돌아온 차설아는 그녀와 아이들의 일상용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대략 한 시간 뒤 미스터 Q가 약속대로 도착했다.“오셨네요.”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든든해지는 느낌이었다.비록 이 남자는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매번 함께 있을 때마다 가정의 온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하여 은연중에 이 소문 무성한 남자를 자기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여인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집에는 ‘남자’의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든든한 산이 되어줄 수도 있고 따뜻한 물결이 되어줄 수도 있는 그런 존재.미스터 Q는 싸늘하게 방안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정리가 다 되어있는 캐리어를 보더니 짙은 눈썹을 추켜세웠다.“이사... 하는 겁니까?”“아뇨, 아뇨. 일주일만 잠시 떠나 있는 거예요.”“어디로요?”“아, 그게...”차설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조금 어색해했다. 이 남자에게 어떻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비록 연기라고 분명히 해두었어도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들은 어느새 정이 들었다.만일 어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한다면 화내겠지?“그럼 제가 맞춰볼게요...”미스터 Q의 얇은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전남편과 화해했을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사하는
차설아가 미스터 Q에게 성도윤과의 일을 고백했다. 그녀는 자신이 미스터 Q와 어떤 관계든 간에 그도 이 사실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 추측이 맞았네요.”미스터 Q는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당신의 선택은요?”“전 재혼하지 않을 거예요. 양육권은 더더욱 주지 않을 거고.”차설아가 매우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눈앞의 남자를 응시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듯 말했다. “그러니까 제 선택은, 당신과 혼인신고 하는 거예요.”미스터 Q가 여전히 감정변화 없이 담담히 말했다. “그래서, 절 선택한 원인은 두 아이의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서다. 맞습니까?”차설아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들 때문만은 아니에요.”“그럼 더 이상한데요...”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차설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설마 저에게 설레기라도 한 거예요?”“전 몰라요.”차설아는 남자의 스킨십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속마음은 그녀 자신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망설여졌다...“사랑이라기엔 너무 거창하고, 설렘이라기에도 맞지 않은데.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가족 같은 따뜻함을 느껴요. 상상 속의 ‘가족’의 느낌이랄까요.”“그럼 성도윤한테서는 그런 느낌을 못 받았어요?”“사실대로 말하자면, 성도윤을 처음 봤을 때도 이런 기분을 느꼈었어요. 비록 매우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전 이상하게도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꼈어요.”차설아가 왠지 모르게 점차 추억 속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에는 성도윤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의 따뜻한 감정이 다시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제가 얼마나 사랑에 미친 여자였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 사람을 처음 본 순간 저는 이미 그와 아이를 낳고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티비를 보고, 여행을 가는 모습까지 상상했었어요.”“결혼한 이후에
차설아는 미스터 Q와의 대화가 끝난 뒤, 짐을 챙겨 두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바로 향했다.멀리서 차설아를 본 아이들이 기뻐하며 옆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봤지? 저기 부모 중 제일 예쁜 사람이 바로 나랑 오빠 엄마야.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엄마! 난 엄마 딸로 태어나서 정말 행복해.”달이가 단짝친구 윤이를 끌고 앙증맞은 턱을 치켜들며 저 멀리 교문에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았다.윤이도 눈을 게슴츠레 뜨며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네 엄마는 확실히 예쁜데 이렇게 예쁜 천사가 가면을 쓴 못생긴 아저씨랑 같이 있으니 너무 아까운 것 같아.”“드라마에서 보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하잖아. 그게 바로 네 엄마랑 저 가면 쓴 아저씨를 말하는 거야. 만약 내가 너라면 난 네 엄마한테 예쁜 애인을 찾아줄 거야. 그럼 네 엄마도 기분이 좋아질 텐데.”요즘의 여자아이들은 나이는 적어도 하나같이 모두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달이가 외모를 따지니 자연스레 단짝도 외모를 따지는 친구인 것이다.윤이는 달이를 자주 데리러 오는 그 가면 쓴 아저씨가 어떻게 생겼을지 줄곧 궁금했었다.“듣기로는 가면 아저씨가 얼굴이 망가졌다는데. 얼굴에 깊고 긴 흉터가 있대. 네 엄마가 그 아저씨와 결혼하면 밤에 자다 깨서 흉터를 보면 깜짝 놀랄 것 같은데?”윤이가 말하며 저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진저리를 쳤다.달이가 자기도 모르게 우울해졌다.“네 말은 나도 생각해 봤어. 그런데 아저씨는 우리한테도 엄마한테도 너무 잘해줘. 그래서 싫어할 수 없어. 마음이 예쁜 사람이 정말 예쁜 거야.”“말은 그렇다 하지만 난 그래도 네 엄마가 더 잘생긴 아저씨랑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 넌 딸이니까 엄마를 도와줘야지.”윤이는 여전히 달이를 설득하며 달이가 자신의 엄마에게 잘생긴 애인을 찾아줬으면 했다.“어휴. 우리 엄마도 잘생긴 아저씨 본 적 있어. 그런데 좋아하지 않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싫어해. 내가 무슨 방법이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