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은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이미 집에 돌아갔을 거로 생각해 차설아의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저희 대표님은 이미 댁으로 돌아가셨어요. 여기는 천신 그룹이니 외부인이 오래 머무는 건 곤란해요. 회사 문을 잠가야 하니 이만 일어나 주시죠.”성도윤은 긴 손가락을 맞잡고 턱을 괴고는 예리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니요. 아직 집에 돌아가지 않았어요.”만약 차설아가 집에 갔다면, 성도윤이 못 봤을 리가 없다.“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 가신 거죠?”어이가 없는 서윤은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지금 나가지 않으시려는 건 회사 영업 비밀이라도 훔치려는 목적인가요?”성도윤은 하찮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구멍가게 영업 비밀을 굳이 제가 직접 나서서 훔칠까요?”그의 한 마디에 서윤은 반박할 길이 없었고 난처해서 말했다.“그러네요. 우리 회사가 아직 성대 그룹이 비밀을 훔치러 올 정도는 아니죠. 훔친다고 해도 대표님께서 직접 나설 필요도 없으시고. 그러니 지금 안 나가고 계속 앉아 계시는 건 사실... 우리 대표님을 잊지 못해서죠?”성도윤은 부정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그럼 설아 대표님 댁의 전화번호라도 있으세요? 가족분들께 전화해서 집에 도착했는지 물어보면 되잖아요.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이미 성도윤의 마음에 감동을 한 서윤은 작은 목소리로 제안했다.“이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집 번호를 어떻게 알고 있겠어요? 그리고 설아는 혼자예요. 연락할 가족이 없다고요.”성도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슬픔이 잠겼다.평소 소탈하고 왈가닥한 모습이지만 사실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은 차설아였다.요 몇 년 동안 혼자 분투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아, 깜빡했네요. 저희 대표님은 확실히 팔자가 기구해요. 가뜩이나 집안에 변고가 생겨서 힘든데 당신 같은 배신자한테 시집가서 어린 나이에 이혼했죠. 오늘 아침에도 사람들에게 이혼녀라고 무시나 당하시고!”“그런 일이 있었어요?”“당연하죠. 세상에 입 더
성도윤이 차가운 얼굴로 경비원에게 물었다.“알, 알겠습니다, 대표님!”경비원은 순순히 2호 엘리베이터 CCTV를 열었다.엘리베이터 내부에는 줄곧 차설아 혼자 있었는데 6층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올라탔다.남자는 차설아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차설아는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남자는 차설아에게서 전화를 건네받았다.이어서 차설아는 정신이 혼미해진 채 엘리베이터에 쓰러졌고, 체크무늬 남자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젠장!”성도윤의 차가운 눈빛은 사람이라도 죽일 것 같았다.“이 사람 누구야? 당장 찾아내!”‘배짱도 크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차설아의 몸에 올려놓은 저 팔을 반드시 부러뜨리겠어!’경비원은 안경을 고쳐 쓰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이 사람... 이 사람 전에 저희가 잡은 변태잖아요. 여자 화장실에서 몰래 동영상을 찍던 변태예요. 회사에서 이미 저 사람을 잘랐는데 어떻게 돌아온 거죠?”CCTV 화면은 변태남이 차설아를 끌어안은 채 지하 1층 주차장으로 향하는 것까지 담겼다.“지하 주차장 CCTV는? 당장 재생해!”성도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어... 그게...”경비원이 쭈뼛쭈뼛하며 말했다.“대표님, 죄송하지만 지하 주차장 CCTV가 마침 고장 났어요. 이제 바꾸려던 참인데 이런 일이...”“뭐라고?”성도윤은 경비원의 멱살을 확 잡으며 말했다.“그렇게 중요한 걸 지금 바꿔? 지금 저 변태남을 돕고 있는 거 아니야? 설마 저 변태랑 같은 편인 거야?”“아니요, 아니요. 대표님, 노여움을 푸세요. 저희는 지하 주차장의 CCTV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오히려 더 고급 입체 카메라를 구매했어요. 공교롭게도 이때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저희...”“됐어요, 시간 지체할 수 없어요. 먼저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단서라도 찾을 수 있는지 봐야 해요.”서윤은 지금 성도윤보다 훨씬 더 차분했다.성도윤이 심호흡을 하고는 차가운 얼굴로 경비원을 놔줬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전구 하나만 번쩍번쩍하며 빛을 냈다.공기 중에는 습한 곰팡내가 났고, 쥐가 찍찍거리면서 쓰레기 더미 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차설아는 허름한 돗자리 위에 누워 있었는데 힘겹게 무거운 눈꺼풀을 떴다.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다.“이쁜이, 드디어 깼어? 약 효력이 너무 세서 영영 못 깨어나는 줄 알았잖아.”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안경을 고쳐 쓰고는 차설아를 빤히 쳐다보더니 징그러운 미소를 보였다.차설아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팔다리가 밧줄에 묶인 걸 발견했다. 게다가 그녀는 온몸이 나른하고 힘을 줄 수 없어 사지가 밧줄에 묶이지 않았어도 일어날 힘이 없을 것이다.“당신, 당신 나한테 왜 이래? 당신에게 잘못한 일도 없을 텐데 말이야...”차설아는 모든 힘을 다해도 소리가 맥없이 나갔다.“이쁜이, 당연히 나에게 잘못한 거 없지. 다만 나 같은 변태를 만나서 운이 안 좋았을 뿐이야...”남자는 차설아 옆에 웅크려 앉더니 손을 뻗어 차설아의 얼굴을 만졌다. 부드러운 촉감에 그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쯧쯧. 예쁜 얼굴, 부드러운 피부, 굴곡 있는 몸매... 한 번이라도 즐길 수 있다면 이생에 여한이 없겠네!”그가 말을 마치고는 차설아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마치 20년 동안 무수히 환상했던 일을 한 번에 누릴 수 있을 거라는 쾌감에 빠졌다.차설아는 헛구역질이 났지만 팔다리가 묶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어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만져도 그녀는 가만히 있었는데 눈으로는 주위 환경을 탐색하기 시작했다.이곳은 빛이 거의 없는 어두컴컴한 작은 땅굴이었는데 사방이 흙으로 되어 통풍이 잘되지 않았다. 아주 먼 곳에는 작은 사다리가 있었는데 아마도 외부로 통하는 것 같았다.만약 그녀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작은 지하실은 눈앞의 변태가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혼자 몰래 파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첫 번째 피해자가 아닐 것이다. 주위에는 여자 옷이 있
변태는 예상 밖으로 똑똑했다. 그녀의 생각을 바로 눈치챘으니 말이다.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내가 당신이라면 다른 여자를 납치해도 절대 나를 납치하지 않을 거야. 내가 누군지 알아?”“네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네가 아주 예쁜 미인이라는 건 알지. 게다가 싱글이잖아. 아니면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할 리가 없어. 너를 예뻐해 주는 남자가 없으니 내가 예뻐해 줄 수밖에. 나도 지금 좋은 일을 하는 거야!”변태는 차설아의 목에 뽀뽀를 퍼부으면서 차설아의 몸을 마구 만졌다. 그리고 역시 변태답게 역겨운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차설아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반항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말로 남자의 심리적 방어선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성도윤을 알아?”“성도윤?”남자가 흠칫하더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성도윤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 성대 그룹 대표잖아, 전체 해안시를 휘두르고 있는 일인자. 성도윤은 우리 남자들의 롤 모델이지. 그런 사람을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성도윤에게 사람들이 모르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아?”“무슨 버릇?”“성도윤은 결벽증이 있는 남자야.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매우 강한 소유욕을 가지고 있다고. 그의 물건이나 사람을 건드리면 앞으로 살 길이 전혀 없어...”“그게 뭐 어때서, 설마 네가...”“맞아, 내가 바로 성도윤의 전처야.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 인터넷 검색해 봐도 돼.”차설아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내가 성도윤 전처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때 성도윤의 여자였잖아.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면 당신 절대 살 수 없을 거야. 당신이 손으로 나를 만지면 성도윤은 당신 손을 잘라낼 거고, 입술로 나에게 입을 맞춘다면 성도윤은 당신의 입을 틀어버릴 거야. 감히 나를 건드리면 당신이 곧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고. 성도윤은 당신의 몸을 토막 내어 개 먹이로 줄 거야. 죽는 것보다 못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 거라고, 평생 괴롭힘을 당하고 싶어?”차설아는 변태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
성도윤과 서윤은 원래 경찰서로 향하는 차에 앉았지만 가는 길에 성도윤은 계속 어금니를 깨물며 어떤 생각에 잠겼는지 미간을 찌푸렸다.경찰은 그가 너무 걱정하는 줄 알고 위로를 건넸다.“대표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매년 오피스텔에 이런 변태가 많이 나타나요. 그리고 변태들이 겁도 많아서 기껏해야 사진 찍지 않으면 몸에 조금 손을 댈 뿐이에요.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니 걱정...”“차 세워요!”성도윤이 차가운 눈빛을 보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왜, 왜 그래요? 대표님?”“당신들 헛소리를 들을 시간이 없어요. 지금 당장 차에서 내려야 하겠어요.”성도윤은 경찰이 주절거리는 그 몇 분 동안에 새로운 단서를 발견했다. 하지만 더 경찰과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운전기사는 성도윤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바로 길가에 차를 세웠다.성도윤이 차가운 얼굴로 차에서 내리고는 고개를 돌려 서윤에게 당부했다.“먼저 경찰서로 가서 조서를 작성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 소식을 기다려요. 이 일이 절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돼요.”“네, 알겠습니다!”서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자에게 약속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성 대표님. 저 입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오늘 밤 있었던 일은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게요.”성도윤은 가장 빠른 속도로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으로 돌아갔다.왠지 모르겠지만 그는 차설아가 지금 심상치 않은 상황을 겪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지하 주차장에 가까워질수록 그 느낌이 강했다.그는 엘리베이터를 따라 지하 주차장을 차례로 살펴봤다.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예리한 눈썰미로 지하 주차장 안쪽,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다른 곳과는 조금 다른 부분을 발견했다.바닥 위의 도색 면은 옆과는 달리 다시 칠한 적이 있는 것 같았다.성도윤은 웅크려 앉더니 손가락으로 한 번 만져봤는데 이 자리의 밑부분은 텅 비어 있었고, 어떤 통로로 향하는 문과도 같았다.“젠장!”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 치의 망
“아닙니다, 제가 어디 그럴 배짱이 있겠습니까. 성 대표님, 살려주십시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걱정하지 마, 네 목숨은 살려줄 거니까. 앞으로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맛보게 해줄게!”성도윤은 염라대왕처럼 위엄 있게 남자의 머리를 흙까지 짓눌렀다.그 변태는 감히 반항하지도 못한 채 곧 정신을 잃었다...차설아는 아직 돗자리에 누워 있었다. 몸을 묶었던 밧줄이 풀렸고 입고 있던 옷이 거의 다 벗겨져 희고도 분홍빛을 띤 속살을 드러냈는데 세상 가장 맛있는 음식보다도 먹음직스러웠다.그녀는 미꾸라지처럼 성도윤의 발을 더듬더니 뜨거운 두 손으로 남자의 늘씬한 두 다리를 끌어안고는 예쁜 얼굴로 비비적거리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성도윤, 정말 나타났구나. 이거 환각이야?”성도윤은 차가운 얼굴을 보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의 두 다리를 꼭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여자를 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이젠 안전해. 얼른 옷 입어, 장난치지 말고!”그는 차설아가 약을 먹어 정신이 흐릿해진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차설아의 눈에 자기가 몸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해독약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나 안전한 거 아니야. 너무 괴롭고 몸이 뜨거워. 당신 좋은 사람이니까 나 살려줘. 제발 도와달라고...”차설아가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성도윤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당신이 나의 해독약이잖아. 당신이 필요해, 제발 나 떠나지 마.”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의 옷이 자연스럽게 모두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모든 속살을 드러냈다.“콜록콜록!”성도윤이 아무리 인내심이 있는 남자라고 하지만 이런 차설아는 감당할 수 없었다.그는 차설아의 턱을 치켜들더니 그녀의 눈을 보며 차갑게 물었다.“잘 생각했어?”차설아는 몽롱한 눈빛으로 남자를 보고는 입을 남자의 귓가에 대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당
차설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저 눈만 끔뻑끔뻑하며 멍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무... 무슨 일?”성도윤은 차가운 얼굴로 차설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였다.차설아는 몸에 아주 얇은 실크 잠옷을 입고 있어 바로 이불로 밖에 드러난 속살을 감추고는 계속 조심스럽게 물었다.“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좀 힌트를 주면 안 될까?”“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서 물어?”성도윤은 침대 쪽으로 걸어가면서 차설아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해서 이 일을 없던 일로 만들려는 거야?”“나 정말 기억이 안 나. 증거가 있으면 내놓아 봐. 나한테 누명 씌우지 말고.”지금의 그녀는 마치 머릿속의 일부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린 것 같았다.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어제 퇴근 후 어떤 체크무늬 사내에게 휴대폰을 빌려준 것밖에 없었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던지는 정말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어젯밤에 자기가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성도윤을 ‘괴롭혔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제발 아니어야 해. 제발 아니어야 한다고. 아니면 너무 부끄럽잖아. 앞으로 성도윤 앞에서 얼굴을 들지도 못하겠어.’“증거야 당연히 있지... 두 눈 뜨고 똑바로 봐!”성도윤이 말하고는 몸에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풀었다.구릿빛 피부가 서슴없이 드러났는데 초콜릿 같은 복근은 마치 명품 모델 같았다.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실례인 걸 알면서도 시선을 옮길 수 없었다.그리고 그녀는 남자의 피부에 아주 또렷한 ‘증거’들이 남아있다는 걸 발견했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다.“여기뿐만 아니라 등에도 있어!”성도윤이 어금니를 깨물고는 가운을 아예 반쯤 벗고 돌아섰다.그의 튼실하고 넓은 등에는 온통 손톱자국이었는데 차설아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많았다.“그게... 그게...”차설아는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아주 작은
성도윤이 입을 삐죽 내밀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반항했지. 하지만 쓸모가 있겠어? 당신이 얼마나 싸움을 잘하는데, 내가 이겼을 리가 있겠어?”“그게...”차설아는 남자의 몸에 난 상처를 다시 보자 양심에 찔렸는지 목소리를 낮췄다.“그럼 당신이 옷을 너무 적게 입은 거 아니야? 좀 반성해. 나 꼬시려고 일부러 가볍게 행동한 거 아니야? 남자로서, 특히 흔히 볼 수 없는 우수한 수컷으로서 자신을 잘 지켰어야지. 맨날 여자를 꼬시니까 그렇게 당하는 거야.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누가 당신을 지켜주겠어. 그러니 그런 일을 당해도 싸지. 인터넷에 이 일을 올려도 네티즌들은 내를 욕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자초한 거라고 말할걸?”“...”성도윤은 어이가 없었다.‘차설아랑 이런 일로 다투고 있는 내가 정신이 나갔지.’하지만 차설아는 결국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쓰레기 남자들이 여자들을 달래는 말투로 말했다.“됐어, 됐어. 너무 속상해하지 마. 그 일은 내가 너무 충동적이었어. 당신의 마음도 고려하지 않고 말이야... 이러는 건 어때? 내가 이따가 돈을 이체해 줄 테니까 가서 당귀나 구기자, 굴이나 사 먹고 몸을 좀 보양해. 남자니까 씩씩해야지!”“...”성도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차설아는 그의 마음을 잘 달래준 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눈을 크게 뜨고는 방 안을 뒤지며 자신의 옷을 빨리 찾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아무리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 황당하다고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고, 그녀가 기억할 수도 없으니 아예 없던 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설아는 성도윤과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차설아의 옷은 방 곳곳에 널려 있었는데 심지어 속옷은 소파 위에 걸려 있어 유난히 눈에 띄었다.“그게... 다른 일이 없다면 좀 자리를 비켜줄래? 나 옷을 입어야 하니까.”‘정말 눈치 없는 녀석, 내가 이런 것까지 직접 말해야 해?’성도윤은 순순히 그녀의 말을 따랐다.자리에서 일어서고는 여
배경윤을 안은 사람은 연못을 빠져나와 마당을 들어섰고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의자에 내려놓았다.“찬영 오빠, 혹시 방으로 들어온 거예요? 우리를 오해하고 누군가가 소문을 내면 어떡해요? 그럼 오빠한테 민폐 끼치는 것 같아서 미안해질 것 같아요.”배경윤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의자에 앉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싶더니 입을 틀어막으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주여, 찬영 오빠를 사랑하게 된 지 몇 년 만에 결국 만나게 되었어요. 게다가 지금 단둘이 한 방에 있다니,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요! 찬영 오빠는 역시 얼음 왕자가 맞나봐요. 날 안고 한참을 걸었는데도 힘들다고 투덜거리지도 않았어요. 눈을 감고 있어도 차가운 기운은 잘 느껴지더라고요.’몇 분 후,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배경윤 앞에서 멈추었다. 누군가가 젖은 수건으로 배경윤의 눈과 이마를 세심하게 닦아주었다. 배경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찬영 오빠,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괜찮아요. 우리 둘이 한 방에 있었다는 걸 팬들이 알게 되면 난리 날 거라고요.”“하, 이 와중에 할 말은 다 하면서 그놈한테 안기고 싶어서 쓰러진 척한 거야?”익숙한 목소리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깜짝 놀란 배경윤은 눈을 떴고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저절로 나는 진찬영이 아닌 사도현이 눈앞에 서 있었다.배경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눈에 살기가 돌았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돼?”사도현이 코웃음치고는 말을 이었다.“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널 여기까지 안고 올 것 같아? 도와줘도 욕만 먹는데 나 말고 누가 너를 이렇게 보살펴주겠어!”“찬영 오빠는 어디에 있어? 오빠한테 수작질한 건 아니지?”배경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묵었던 방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문은 굳게 닫혔고 이 방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미꾸라지를 신나게 잡는 사람한테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진찬영은 여우 같은 놈이라고!”
사도현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연못 안에서 재밌게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다들 재밌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배경윤 씨랑 진찬영 씨는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고 했지만 오래 사귄 커플처럼 죽이 척척 맞네요. 진찬영 씨가 생각보다 털털하고 친절해서 신기해요. 남자들이 배경윤 씨만 유독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네요.”윤설은 사도현이 노려보는 쪽을 쳐다보면서 일부러 부채질했다.“경윤이가 매력 있는 여자라서 그래.”침묵하던 사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윤설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네가 이렇게 주시하고 있지 않았겠지.”윤설은 당황하더니 말을 버벅거렸다.“그, 그게 무슨...”“내 말이 틀렸어? 입만 열면 배경윤이 누구랑 어울리고 누구랑 친하게 지낸다는 말뿐이었잖아. 결국 네 입으로 네가 배경윤을 감시한다는 것을 밝힌 셈이지. 아니면 너도 배경윤한테 반해서 관심받고 싶은 거야? 이제는 여자랑 만날 생각인가 봐?”“도현 씨, 설마 방금 제가 장난 좀 친 것 갖고 이러는 건가요?”윤설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저는 사실만 말했을 뿐이에요. 배경윤 씨랑 진찬영 씨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요. 두 사람이 커플 같다는 말에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는데 저한테 화풀이하지 마세요. 계속 저를 따라올 필요도 없고요.”“내가 언제 너를 따라왔다고 그래?”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난 처음부터 널 따라온 게 아니야. 진흙이 싫어서 들어가지 않은 거니까 네 멋대로 생각하지 마.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너랑 상관없거든.”“도현 씨!”윤설은 사도현이 쌀쌀맞게 대답하자 화가 솟구쳐 올랐지만 곧바로 무기력해졌다. 아무리 속이고 유혹해도 사도현은 예전처럼 윤설을 애틋하게 바라보지 않았다.연못 안에서 미꾸라지를 잡던 게스트들은 사도현과 윤설을 쳐다보면서 수군거렸다.“사 대표님은 어쩜 이렇게 다정할까요? 윤설 씨를 지켜주는 수호
배경윤은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진찬영을 바라보았다. 진찬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찬영 오빠가 그걸 어떻게...”배경윤은 처음 만난 진찬영이 어떻게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는지 궁금했다.“내가 어떻게 배경윤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냐고 묻고 싶은 거죠?”진찬영이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이래 봬도 배우인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배경윤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찬영 오빠한테 계속 못난 모습만 보이는 것 같네요. 오빠가 보기에도 제가 참 바보 같죠?”“그렇지 않아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배경윤 씨는 내가 여태껏 봐왔던 연예인들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착하고 배려심 깊은 배경윤 씨가 연예인들보다 더 멋져요. 그러니까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고 아껴주세요.”배경윤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한테 위로받자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고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찬영 오빠, 정말 고마워요. 집구경을 시켜줄 테니 잘 따라와요.”배경윤은 이 집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앞장서서 진찬영에게 집구경을 시켜주었다. “여기가 주방이에요. 주로 이곳에서 요리하거든요. 그리고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외양간인데 이 암소 콩순이가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안 돼요. 아, 이곳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곳인데 심심하면 해먹에 누워서 책을 볼 수도 있어요. 맞은 편에 있는 연못 안에 미꾸라지가 많다고 들었어요. 다음에 제가 가득 잡아서 맛있는 요리를 해드릴게요.”진찬영은 배경윤의 뒤를 따라가면서 두리번거렸다. 그저 은인인 장윤태한테 보답하기 위해 출연하려고 했지만 정작 촬영 장소에 와보니 흥미가 생겼다.“미꾸라지를 잡는다고요?”진찬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지금 잡을래요?”“지금요?”“네!”“찬영 오빠, 미꾸라지 잡을 줄 알아요? 진흙이 오빠의 옷이거나 머리에 묻을 수도 있거든요. 정말 괜찮겠어요?”“여기까지 온 마당에 못할 게 뭐 있겠어요. 추어탕을 만들어 먹어도 좋겠네요. 그래요! 오
“진찬영이 온다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같이 녹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이참에 진찬영한테 잘 보여서...”“잘 보여도 소용없어요. 진찬영이 얼마나 차갑게 구는지 몰라서 그래요? 가까이 다가갔다가 기세에 눌려서 말도 못 꺼낸다니까요.”게스트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진찬영과 장윤태가 경운기에서 내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역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사람이라 그런지 정말 멋지네요. 어떻게 경운기에서 내리는 모습까지 멋있을 수 있죠? 너무 완벽하잖아요.”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걸그룹 리더 민지가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진찬영 씨, 이곳에 온 걸 환영해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어요. 제가 짐을 들어드릴게요!”민지가 진찬영의 가방을 들어주려고 하자 진찬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차갑게 말했다.“죄송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이 저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게 싫어서요.”“아, 죄송해요...”민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얼음 왕자 같은 사람이라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거절하는 모습도 멋져!’배경윤은 경운기를 주차하고는 차에서 내렸고 진찬영이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달려갔다.“찬영 오빠, 손님으로 오셨는데 가방까지 들게 할 수는 없죠. 이리 줘요! 저 보기보다 힘세거든요.”“고마워요. 가방이 무거워서 괜히 미안하네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하면서 배경윤에게 가방을 건넸다. 그러고는 미소를 짓더니 배경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모습을 본 여자 연예인들은 질투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다른 사람이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게 싫다면서 왜 저 여자한테는 가방을 주는 거야!”민지는 씩씩거리면서 배경윤을 노려보았다. 이때 사도현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저런 컨셉인 걸 어떡해요?”“아, 사 대표님. 안녕하세요.”민지는 사도현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환하게 웃었다.‘진찬영은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사 대표님이 먼저 말을 걸어주었으니
차에 오른 배경윤은 경운기에 시동을 걸었다. 뒷좌석에는 두 사람이 앉을만한 자리가 남아있었고 운전석에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배경윤은 조심스럽게 진찬영한테 말을 걸었다.“찬영 오빠, 혹시 괜찮다면 제 옆에 앉을래요? 저 운전 잘해서 차가 뒤집어질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오늘 아침에 씻어서 머리에서 냄새도 안 나요!”진찬영은 배경윤의 말에 웃더니 배경윤이 사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햇볕 아래 진찬영은 더욱 빛났고 머리를 뒤로 넘기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차가 뒤집어져도 괜찮으니 편하게 운전해요.”“차가 뒤집어지면 안 되죠!”사도현은 진찬영을 뒤로 하고 운전석에 앉으면서 말했다.“진찬영 씨는 얼굴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인데 위험한 자리에 앉으면 안 되지. 난 얼굴이 아니어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여기 앉아도 돼.”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내 옆에 앉았다는 건 각오했다는 뜻이지?”진찬영은 배경윤과 사도현을 번갈아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사도현 씨가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요? 저는 뒤에 앉을게요.”“진찬영 씨는 눈치도 빠르네요.”사도현은 진찬영을 째려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진찬영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사도현을 쳐다보더니 도발했다.“어차피 앞으로 배경윤 씨랑 계속 같이 앉을 텐데요.”장윤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눈치를 보았다.“경, 경운기 조수석에 제가 타도 될 것 같은데요. 바람도 쐬고 좋죠!”한 사람은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는 회사 대표이고 한 사람은 연예계 톱스타였기에 일개 예능 감독인 장윤태는 두 사람한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난 허락한 적 없는데요?”사도현은 장윤태를 째려보면서 조수석이 아닌 황위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진찬영은 장윤태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윤태 형, 왜 사서 고생이에요?”“그러게 말이야. 괜히 나섰다가 눈치만 보게 되었네.”장윤태는 뒷좌석에 올라타고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배경윤은 고개를 돌려 사도현을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비가 와서 바닥에 물이 고였던데 그거나 핥아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사도현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강아지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았다. 화가 난 사도현은 경운기에서 뛰어내렸고 배경윤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두 사람은 함께 매점으로 들어갔고 배경윤은 진찬영을 위해 비싼 생수를 찾고 있었다.“제일 좋고 비싼 물로 주세요. 제일 좋은 걸로요!”배경윤은 진찬영이 평소에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기름과 설탕이 들어간 음식을 적게 먹고 깨끗하고 고급 브랜드에서 판매하는 물만 마셨다. 하지만 마을 매점에는 일반 생수밖에 없었기에 비싼 생수를 살 수 없었다.배경윤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5만 원짜리를 여러 장 꺼내면서 말했다.“이 돈으로 비싼 생수를 주문해 주세요. 저의 오빠가 그런 생수만 마시거든요.”사도현은 매점의 진열대에 기대고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말했다.“입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비싸고 말고 할 게 뭐 있다고 그래? 다 같은 거 아니야?”“네가 뭘 안다고 그래!”배경윤은 사도현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생수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야. 어떤 생수는 살짝 단맛이 맴돌아서 마실 때마다 기분이 좋지만 어떤 생수는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악취만 나서 입도 대기 싫거든.”배경윤은 분명 생수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얼핏 들으면 나쁜 남자를 악취 나는 생수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사도현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넌 아직도 참 순진하구나? 물도 겉면만 보면 안 되지만 사람은 더더욱 그래. 아까 그 진춘영인지 진찬영인지 하는 놈도 말이야! 겸손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따뜻한 사람이라고? 내가 보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 너처럼 재벌가에서 자란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유혹해서 사기 치려는 거야. 넌 또 바보처럼 웃으면서 좋아하더라. 그럴 거면 차라리 네 재산을 아예 다 주지 그래?”“사도현, 찬영 오빠는 내가 제일 존경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이야. 그러니까 함부로 찬영
진찬영은 배경윤 앞으로 걸어가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혹시 장 감독님이 얘기하신 배경윤 씨인가요? 독특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아, 네! 저 맞아요.”배경윤은 고개를 들고 맑은 호숫가를 담은 듯한 진찬영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고는 멍하니 바라보면서 넋을 잃었다.‘역시 찬영 오빠는 잘생겼어. 어떻게 사람이 조각보다 더 각진 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 영상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잘생겼다고! 신이 공을 들여 만든 사람이 바로 찬영 오빠일까?’배경윤이 진찬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찬영은 먼저 손을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겨우 진찬영의 손을 잡았다. 진찬영의 손은 차가웠지만 배경윤의 손에 땀이 흥건해서 어쩐지 낯부끄러웠다. 손을 잡는 순간, 배경윤은 이곳이 천국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앞으로 일주일 동안 손을 씻지 말아야겠어!’“잘, 잘 부탁드려요!”배경윤은 잔뜩 긴장한 채 말하더니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건넸다.“이건 제가 길가에서 꺾은 들꽃인데 찬영 오빠한테 드릴게요. 들꽃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저의 마음을 담았어요.”“들꽃이라고요?”진찬영은 꽃다발을 건네받고 천천히 냄새를 맡아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주인공을 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빛이 났다.“많은 꽃다발을 선물 받았었지만 이런 들꽃은 처음이라 기뻐요. 이렇게 예쁜 들꽃을 선물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 마음 소중히 간직할게요.”“괜, 괜찮아요! 마음에 든다면 매일 산에 올라가서 들꽃을 따다 줄게요!”배경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헤프게 웃었다. 경운기 뒤에 앉은 사도현은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째려보더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화가 난 사도현은 곁에 앉아 있는 장윤태를 향해 말했다.“진찬영인지 진천영인지 겸손하다면서요? 그런 놈이 나처럼 여자를 많이 만나본 사람보다 더 능숙하게 여자를 유
장윤태가 경운기 뒷좌석의 난간을 붙잡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도현을 향해 외쳤다.“사 대표님, 꽉 잡지 않으면 튕겨 나갈 수도 있어요! 길이 험해서 잘 잡고 있으세요.”사도현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때문인지 오늘따라 사도현이 더 멋져 보였다. 깔끔하던 회사 대표가 아닌 야생적인 남자의 모습이었다.“진찬영이 누구죠?”사도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장윤태한테 물었다.“사 대표님, 진찬영은 연예계에서 유명한 남자 배우예요. 연기 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겸손하거든요. 예능에 출연하는 배우는 아니라서 잘 모를 수도 있어요.”장윤태는 거칠게 부는 바람을 견뎌내면서 사도현을 향해 외쳤다.“남자 배우라고요?”사도현은 남자라는 말에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계속해서 물었다.“몇 살인데요? 어떻게 생겼어요? 어떤 스타일인데요?”“아마 사 대표님보다 세 살 정도 어릴 거예요. 너무 잘생겨서 어릴 때부터 연예인 할 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대요. 언뜻 보기에는 차갑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에요. 진찬영이 겸손하기도 하고 조용하게 지냈지만 진찬영한테 푹 빠진 사람이 엄청 많아요. 배경윤 씨도 진찬영의 팬이라기에 제가 섭외했거든요. 그럼 배경윤 씨도 고정 멤버로 몇 회차 출연하겠다고 했어요.”장윤태는 점점 어두워지는 사도현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배경윤은 운전에 집중했고 경운기 특유의 소리 때문에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차에서 내렸다. 장윤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배경윤 씨, 어디 가세요?”“들꽃이 너무 예뻐서 따다가 우리 진찬영 씨한테 주려고요.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인데 어떻게 선물도 없이 만나러 가겠어요.”배경윤은 말하면서 허리를 굽혀 길가에 예쁘게 핀 들꽃을 하나둘 꺾기 시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들꽃은 햇볕 아래에서 유난히 빛났다. 이때 사도현이 입을 삐죽 내밀더니 차갑게 말했다.“꽃을 마음대로 꺾으면 안 된다는 거 몰라? 이렇게 생각이 없
배경윤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내가 매일 울면서 윤설 앞에 무릎이라도 꿇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아니면 억울하다고 이곳에서 내 목이라도 그을까?”“그럴 필요 없어.”사도현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적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지는 말았어야지. 이곳 사람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 같아?”사도현은 모든 게스트가 윤설을 맞이하면서 안부를 물을 때, 배경윤이 진심이든 아니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먼저 다가가서 인사해야 한다고 여겼다. 모두 배경윤 때문에 촬영이 미루어졌다고 생각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더 큰 미움을 살 것이다.“나랑 상관없으니까 비켜. 난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여보든지!”말을 마친 배경윤은 손에 쥐고 있던 책을 얼굴 위로 덮고는 해먹에 누워 다리를 꼰 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가 재수 없어 보일 수는 있지만 윤설처럼 앞뒤 다르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드는 사람한테는 재수 없게 구는 게 맞아!’윤설은 매니저의 부축을 받아 뒷마당으로 걸어갔고 사도현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도현 씨, 배경윤 씨가 쉬고 있으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요. 저는 배경윤 씨를 용서했다고 여러 번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우연히 일어난 일 때문에 배경윤 씨를 자꾸 비난하지 말아요.”누가 들어도 윤설은 아량이 넓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여자들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던 사도현도 윤설이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사도현은 배경윤을 내려다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윤설이 착하니까 널 봐준 거야. 고마운 줄 알아.”“흥!”배경윤은 콧방귀를 뀌었다. 윤설의 얕은수에 사도현이 넘어갈 줄 몰랐던 것이다. 이때 감독 장윤태가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찬영아, 벌써 다 왔다고?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내가 마중 갈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줘. 정말 고마워!”“진찬영 씨가 온 걸까?”배경윤은 장윤태의 목소리를 듣고는 얼굴에 덮은 책을 내팽개치더니 재빨리 일어났다. 그러고는 앞을 막고 있는 사도현과 윤설을 뒤로 하고 장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