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은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이미 집에 돌아갔을 거로 생각해 차설아의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저희 대표님은 이미 댁으로 돌아가셨어요. 여기는 천신 그룹이니 외부인이 오래 머무는 건 곤란해요. 회사 문을 잠가야 하니 이만 일어나 주시죠.”성도윤은 긴 손가락을 맞잡고 턱을 괴고는 예리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니요. 아직 집에 돌아가지 않았어요.”만약 차설아가 집에 갔다면, 성도윤이 못 봤을 리가 없다.“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 가신 거죠?”어이가 없는 서윤은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지금 나가지 않으시려는 건 회사 영업 비밀이라도 훔치려는 목적인가요?”성도윤은 하찮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구멍가게 영업 비밀을 굳이 제가 직접 나서서 훔칠까요?”그의 한 마디에 서윤은 반박할 길이 없었고 난처해서 말했다.“그러네요. 우리 회사가 아직 성대 그룹이 비밀을 훔치러 올 정도는 아니죠. 훔친다고 해도 대표님께서 직접 나설 필요도 없으시고. 그러니 지금 안 나가고 계속 앉아 계시는 건 사실... 우리 대표님을 잊지 못해서죠?”성도윤은 부정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그럼 설아 대표님 댁의 전화번호라도 있으세요? 가족분들께 전화해서 집에 도착했는지 물어보면 되잖아요.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이미 성도윤의 마음에 감동을 한 서윤은 작은 목소리로 제안했다.“이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집 번호를 어떻게 알고 있겠어요? 그리고 설아는 혼자예요. 연락할 가족이 없다고요.”성도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슬픔이 잠겼다.평소 소탈하고 왈가닥한 모습이지만 사실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은 차설아였다.요 몇 년 동안 혼자 분투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아, 깜빡했네요. 저희 대표님은 확실히 팔자가 기구해요. 가뜩이나 집안에 변고가 생겨서 힘든데 당신 같은 배신자한테 시집가서 어린 나이에 이혼했죠. 오늘 아침에도 사람들에게 이혼녀라고 무시나 당하시고!”“그런 일이 있었어요?”“당연하죠. 세상에 입 더
성도윤이 차가운 얼굴로 경비원에게 물었다.“알, 알겠습니다, 대표님!”경비원은 순순히 2호 엘리베이터 CCTV를 열었다.엘리베이터 내부에는 줄곧 차설아 혼자 있었는데 6층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올라탔다.남자는 차설아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차설아는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남자는 차설아에게서 전화를 건네받았다.이어서 차설아는 정신이 혼미해진 채 엘리베이터에 쓰러졌고, 체크무늬 남자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젠장!”성도윤의 차가운 눈빛은 사람이라도 죽일 것 같았다.“이 사람 누구야? 당장 찾아내!”‘배짱도 크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차설아의 몸에 올려놓은 저 팔을 반드시 부러뜨리겠어!’경비원은 안경을 고쳐 쓰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이 사람... 이 사람 전에 저희가 잡은 변태잖아요. 여자 화장실에서 몰래 동영상을 찍던 변태예요. 회사에서 이미 저 사람을 잘랐는데 어떻게 돌아온 거죠?”CCTV 화면은 변태남이 차설아를 끌어안은 채 지하 1층 주차장으로 향하는 것까지 담겼다.“지하 주차장 CCTV는? 당장 재생해!”성도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어... 그게...”경비원이 쭈뼛쭈뼛하며 말했다.“대표님, 죄송하지만 지하 주차장 CCTV가 마침 고장 났어요. 이제 바꾸려던 참인데 이런 일이...”“뭐라고?”성도윤은 경비원의 멱살을 확 잡으며 말했다.“그렇게 중요한 걸 지금 바꿔? 지금 저 변태남을 돕고 있는 거 아니야? 설마 저 변태랑 같은 편인 거야?”“아니요, 아니요. 대표님, 노여움을 푸세요. 저희는 지하 주차장의 CCTV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오히려 더 고급 입체 카메라를 구매했어요. 공교롭게도 이때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저희...”“됐어요, 시간 지체할 수 없어요. 먼저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단서라도 찾을 수 있는지 봐야 해요.”서윤은 지금 성도윤보다 훨씬 더 차분했다.성도윤이 심호흡을 하고는 차가운 얼굴로 경비원을 놔줬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전구 하나만 번쩍번쩍하며 빛을 냈다.공기 중에는 습한 곰팡내가 났고, 쥐가 찍찍거리면서 쓰레기 더미 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차설아는 허름한 돗자리 위에 누워 있었는데 힘겹게 무거운 눈꺼풀을 떴다.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다.“이쁜이, 드디어 깼어? 약 효력이 너무 세서 영영 못 깨어나는 줄 알았잖아.”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안경을 고쳐 쓰고는 차설아를 빤히 쳐다보더니 징그러운 미소를 보였다.차설아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팔다리가 밧줄에 묶인 걸 발견했다. 게다가 그녀는 온몸이 나른하고 힘을 줄 수 없어 사지가 밧줄에 묶이지 않았어도 일어날 힘이 없을 것이다.“당신, 당신 나한테 왜 이래? 당신에게 잘못한 일도 없을 텐데 말이야...”차설아는 모든 힘을 다해도 소리가 맥없이 나갔다.“이쁜이, 당연히 나에게 잘못한 거 없지. 다만 나 같은 변태를 만나서 운이 안 좋았을 뿐이야...”남자는 차설아 옆에 웅크려 앉더니 손을 뻗어 차설아의 얼굴을 만졌다. 부드러운 촉감에 그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쯧쯧. 예쁜 얼굴, 부드러운 피부, 굴곡 있는 몸매... 한 번이라도 즐길 수 있다면 이생에 여한이 없겠네!”그가 말을 마치고는 차설아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마치 20년 동안 무수히 환상했던 일을 한 번에 누릴 수 있을 거라는 쾌감에 빠졌다.차설아는 헛구역질이 났지만 팔다리가 묶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어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만져도 그녀는 가만히 있었는데 눈으로는 주위 환경을 탐색하기 시작했다.이곳은 빛이 거의 없는 어두컴컴한 작은 땅굴이었는데 사방이 흙으로 되어 통풍이 잘되지 않았다. 아주 먼 곳에는 작은 사다리가 있었는데 아마도 외부로 통하는 것 같았다.만약 그녀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작은 지하실은 눈앞의 변태가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혼자 몰래 파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첫 번째 피해자가 아닐 것이다. 주위에는 여자 옷이 있
변태는 예상 밖으로 똑똑했다. 그녀의 생각을 바로 눈치챘으니 말이다.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내가 당신이라면 다른 여자를 납치해도 절대 나를 납치하지 않을 거야. 내가 누군지 알아?”“네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네가 아주 예쁜 미인이라는 건 알지. 게다가 싱글이잖아. 아니면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할 리가 없어. 너를 예뻐해 주는 남자가 없으니 내가 예뻐해 줄 수밖에. 나도 지금 좋은 일을 하는 거야!”변태는 차설아의 목에 뽀뽀를 퍼부으면서 차설아의 몸을 마구 만졌다. 그리고 역시 변태답게 역겨운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차설아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반항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말로 남자의 심리적 방어선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성도윤을 알아?”“성도윤?”남자가 흠칫하더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성도윤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 성대 그룹 대표잖아, 전체 해안시를 휘두르고 있는 일인자. 성도윤은 우리 남자들의 롤 모델이지. 그런 사람을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성도윤에게 사람들이 모르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아?”“무슨 버릇?”“성도윤은 결벽증이 있는 남자야.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매우 강한 소유욕을 가지고 있다고. 그의 물건이나 사람을 건드리면 앞으로 살 길이 전혀 없어...”“그게 뭐 어때서, 설마 네가...”“맞아, 내가 바로 성도윤의 전처야.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 인터넷 검색해 봐도 돼.”차설아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내가 성도윤 전처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때 성도윤의 여자였잖아.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면 당신 절대 살 수 없을 거야. 당신이 손으로 나를 만지면 성도윤은 당신 손을 잘라낼 거고, 입술로 나에게 입을 맞춘다면 성도윤은 당신의 입을 틀어버릴 거야. 감히 나를 건드리면 당신이 곧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고. 성도윤은 당신의 몸을 토막 내어 개 먹이로 줄 거야. 죽는 것보다 못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 거라고, 평생 괴롭힘을 당하고 싶어?”차설아는 변태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
성도윤과 서윤은 원래 경찰서로 향하는 차에 앉았지만 가는 길에 성도윤은 계속 어금니를 깨물며 어떤 생각에 잠겼는지 미간을 찌푸렸다.경찰은 그가 너무 걱정하는 줄 알고 위로를 건넸다.“대표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매년 오피스텔에 이런 변태가 많이 나타나요. 그리고 변태들이 겁도 많아서 기껏해야 사진 찍지 않으면 몸에 조금 손을 댈 뿐이에요.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니 걱정...”“차 세워요!”성도윤이 차가운 눈빛을 보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왜, 왜 그래요? 대표님?”“당신들 헛소리를 들을 시간이 없어요. 지금 당장 차에서 내려야 하겠어요.”성도윤은 경찰이 주절거리는 그 몇 분 동안에 새로운 단서를 발견했다. 하지만 더 경찰과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운전기사는 성도윤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바로 길가에 차를 세웠다.성도윤이 차가운 얼굴로 차에서 내리고는 고개를 돌려 서윤에게 당부했다.“먼저 경찰서로 가서 조서를 작성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 소식을 기다려요. 이 일이 절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돼요.”“네, 알겠습니다!”서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자에게 약속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성 대표님. 저 입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오늘 밤 있었던 일은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게요.”성도윤은 가장 빠른 속도로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으로 돌아갔다.왠지 모르겠지만 그는 차설아가 지금 심상치 않은 상황을 겪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지하 주차장에 가까워질수록 그 느낌이 강했다.그는 엘리베이터를 따라 지하 주차장을 차례로 살펴봤다.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예리한 눈썰미로 지하 주차장 안쪽,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다른 곳과는 조금 다른 부분을 발견했다.바닥 위의 도색 면은 옆과는 달리 다시 칠한 적이 있는 것 같았다.성도윤은 웅크려 앉더니 손가락으로 한 번 만져봤는데 이 자리의 밑부분은 텅 비어 있었고, 어떤 통로로 향하는 문과도 같았다.“젠장!”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 치의 망
“아닙니다, 제가 어디 그럴 배짱이 있겠습니까. 성 대표님, 살려주십시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걱정하지 마, 네 목숨은 살려줄 거니까. 앞으로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맛보게 해줄게!”성도윤은 염라대왕처럼 위엄 있게 남자의 머리를 흙까지 짓눌렀다.그 변태는 감히 반항하지도 못한 채 곧 정신을 잃었다...차설아는 아직 돗자리에 누워 있었다. 몸을 묶었던 밧줄이 풀렸고 입고 있던 옷이 거의 다 벗겨져 희고도 분홍빛을 띤 속살을 드러냈는데 세상 가장 맛있는 음식보다도 먹음직스러웠다.그녀는 미꾸라지처럼 성도윤의 발을 더듬더니 뜨거운 두 손으로 남자의 늘씬한 두 다리를 끌어안고는 예쁜 얼굴로 비비적거리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성도윤, 정말 나타났구나. 이거 환각이야?”성도윤은 차가운 얼굴을 보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의 두 다리를 꼭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여자를 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이젠 안전해. 얼른 옷 입어, 장난치지 말고!”그는 차설아가 약을 먹어 정신이 흐릿해진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차설아의 눈에 자기가 몸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해독약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나 안전한 거 아니야. 너무 괴롭고 몸이 뜨거워. 당신 좋은 사람이니까 나 살려줘. 제발 도와달라고...”차설아가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성도윤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당신이 나의 해독약이잖아. 당신이 필요해, 제발 나 떠나지 마.”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의 옷이 자연스럽게 모두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모든 속살을 드러냈다.“콜록콜록!”성도윤이 아무리 인내심이 있는 남자라고 하지만 이런 차설아는 감당할 수 없었다.그는 차설아의 턱을 치켜들더니 그녀의 눈을 보며 차갑게 물었다.“잘 생각했어?”차설아는 몽롱한 눈빛으로 남자를 보고는 입을 남자의 귓가에 대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당
차설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저 눈만 끔뻑끔뻑하며 멍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무... 무슨 일?”성도윤은 차가운 얼굴로 차설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였다.차설아는 몸에 아주 얇은 실크 잠옷을 입고 있어 바로 이불로 밖에 드러난 속살을 감추고는 계속 조심스럽게 물었다.“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좀 힌트를 주면 안 될까?”“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서 물어?”성도윤은 침대 쪽으로 걸어가면서 차설아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해서 이 일을 없던 일로 만들려는 거야?”“나 정말 기억이 안 나. 증거가 있으면 내놓아 봐. 나한테 누명 씌우지 말고.”지금의 그녀는 마치 머릿속의 일부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린 것 같았다.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어제 퇴근 후 어떤 체크무늬 사내에게 휴대폰을 빌려준 것밖에 없었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던지는 정말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어젯밤에 자기가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성도윤을 ‘괴롭혔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제발 아니어야 해. 제발 아니어야 한다고. 아니면 너무 부끄럽잖아. 앞으로 성도윤 앞에서 얼굴을 들지도 못하겠어.’“증거야 당연히 있지... 두 눈 뜨고 똑바로 봐!”성도윤이 말하고는 몸에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풀었다.구릿빛 피부가 서슴없이 드러났는데 초콜릿 같은 복근은 마치 명품 모델 같았다.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실례인 걸 알면서도 시선을 옮길 수 없었다.그리고 그녀는 남자의 피부에 아주 또렷한 ‘증거’들이 남아있다는 걸 발견했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다.“여기뿐만 아니라 등에도 있어!”성도윤이 어금니를 깨물고는 가운을 아예 반쯤 벗고 돌아섰다.그의 튼실하고 넓은 등에는 온통 손톱자국이었는데 차설아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많았다.“그게... 그게...”차설아는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아주 작은
성도윤이 입을 삐죽 내밀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반항했지. 하지만 쓸모가 있겠어? 당신이 얼마나 싸움을 잘하는데, 내가 이겼을 리가 있겠어?”“그게...”차설아는 남자의 몸에 난 상처를 다시 보자 양심에 찔렸는지 목소리를 낮췄다.“그럼 당신이 옷을 너무 적게 입은 거 아니야? 좀 반성해. 나 꼬시려고 일부러 가볍게 행동한 거 아니야? 남자로서, 특히 흔히 볼 수 없는 우수한 수컷으로서 자신을 잘 지켰어야지. 맨날 여자를 꼬시니까 그렇게 당하는 거야.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누가 당신을 지켜주겠어. 그러니 그런 일을 당해도 싸지. 인터넷에 이 일을 올려도 네티즌들은 내를 욕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자초한 거라고 말할걸?”“...”성도윤은 어이가 없었다.‘차설아랑 이런 일로 다투고 있는 내가 정신이 나갔지.’하지만 차설아는 결국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쓰레기 남자들이 여자들을 달래는 말투로 말했다.“됐어, 됐어. 너무 속상해하지 마. 그 일은 내가 너무 충동적이었어. 당신의 마음도 고려하지 않고 말이야... 이러는 건 어때? 내가 이따가 돈을 이체해 줄 테니까 가서 당귀나 구기자, 굴이나 사 먹고 몸을 좀 보양해. 남자니까 씩씩해야지!”“...”성도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차설아는 그의 마음을 잘 달래준 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눈을 크게 뜨고는 방 안을 뒤지며 자신의 옷을 빨리 찾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아무리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 황당하다고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고, 그녀가 기억할 수도 없으니 아예 없던 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설아는 성도윤과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차설아의 옷은 방 곳곳에 널려 있었는데 심지어 속옷은 소파 위에 걸려 있어 유난히 눈에 띄었다.“그게... 다른 일이 없다면 좀 자리를 비켜줄래? 나 옷을 입어야 하니까.”‘정말 눈치 없는 녀석, 내가 이런 것까지 직접 말해야 해?’성도윤은 순순히 그녀의 말을 따랐다.자리에서 일어서고는 여
차설아는 약간 비관적인 태도로 말했다.성도윤이 자신과 아이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 곁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만약 성도윤이 이번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앞으로 그 누구든 그들을 함부로 모욕하고 짓밟을 수 있을 터였다. 차설아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굳이 우리 곁을 항상 지키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면 그걸로 충분해요.”차설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성도윤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힘이 나. 반드시 돌아와서 너랑 아이들한테 편안한 가정을 만들어 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진심을 털어놓으며 서로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그러고 나서 성도윤은 차를 몰고 성대 그룹으로 향했다.차설아는 마당에 남아 그를 기다렸다.하지만 두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성도윤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상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아빠는 왜 또 가버렸어요? 또 우리를 버리려는 거예요?”달이는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빠를 많이 좋아하는 달이였기에 반복된 이별은 극도의 불안감을 심어준 듯했다.매번 아빠가 떠날 때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그럴 리가. 아빠는 그냥 일하러 간 것뿐이야. 일만 끝내면 금방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차설아는 달이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달랬다.“달이는 아빠가 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주말엔 쉬어야 하는데...”“그렇지만 달이 아빠는 대기업 대표님이시잖아. 많은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어. 아빠가 일을 안 하면 그 직원들은 다 굶을 수도 있다는 거야.”“그리고 말이야. 아빠가 일을 안 하면 달이가 좋아하는 예쁜 원피스는 누가 사주고 맛있는 음식과 장난감은 누가 사주겠니?”차설아는 달이가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성도윤이
전화는 진무열이 걸어온 것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매우 엄중하고 다급했다.“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오늘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인데 꼭 참석하셔야죠!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오늘?”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제야 이 일을 떠올렸다.성대 그룹의 주주총회는 매년 연말에 열렸는데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래서 그룹의 운영진들은 이 주주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보름 전부터 철저히 대비했다.성도윤은 성대 그룹의 현직 대표로서 책임지고 연간 운영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총회가 시작된 지 이미 30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주주들과 운영진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진무열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는데 성도윤은 이제야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께서 직접 날짜를 오늘로 변경하셨잖아요. 회사 문제에 대해서 의논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주주들도 그렇고 회사 운영진분들도 그렇고 일정을 조정해서 참석해 주셨는데...”“정작 대표님께서 지각을 하신 데다가 전화도 안 받으시니 다들 기분이 많이 상하셨습니다.”진무열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그도 요즘 성도윤이 차설아와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 중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따로 전화를 걸어 성도윤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주주총회만큼은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설아가 곁에 있으니 권력과 사업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어진 듯했다.“오늘 바쁘니까 회의 시간을 다른 날로 바꿀 거라고 전해.”성도윤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주말인지라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로 약속한 날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제 막 차설아와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순간에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아니, 대표님... 바쁘신 건 이해하지만 다른 분들까지 일정 변경을 해야 하는 건 좀 너무 독단적인 결정 아닙니까?”진무열은 용기를 내어 반박했다.
성도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누가 많이 먹고 먼저 다 먹으면 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체하면 안 돼. 알겠지?”두 아이는 다시 진지하게 밥을 먹는 것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너희 먼저 먹어. 난 배불러서 잠깐 햇볕 좀 쬐고 올게.”차설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는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가서 햇볕을 쬐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김정민더러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죠, 주인님?”그는 차설아 옆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분명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을 텐데... 내가 한번 맞혀볼까?”성도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혹시 두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들은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네가 함께 즐겁게 놀아줄 수 없어서?”차설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얼굴에는 마치 어른에게 생각을 간파당했을 때의 아이처럼 놀라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꽤 잘 숨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성도윤에게 들키고 말았다.그는 차설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잘 알고 있어서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경계해야 할지...’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이해해 버리면 그건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니 말이다.“오랜 세월을 함께했잖아. 부부이기도 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또 연인이기도 했어. 원수였던 적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널 모를 수 있겠어?”성도윤은 차설아 앞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들이랑 뭘 하는지는 중
“그렇다니까?”서은아는 이를 꽉 깨물며 차갑게 말했다.“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바로 차설아한테로 갔어. 강아지처럼 따라붙더라고. 난 성도윤 얼굴조차 못 봤다니까? 진짜 한심하기도 하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제일 바보인 것 같아. 안 그러면 이렇게 화내면서 극단적인 제안을 할 이유도 없잖아.”“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차설아는 어떤 반응이었어?”성진은 손가락을 살짝 움켜쥐며 계속해서 물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무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감정을 감추려 해도 자신이 차설아에 대한 마음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어떤 반응이겠어? 당연히 좋아하겠지. 가족끼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거잖아.”서은아는 어이없어하며 성진이 뻔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불만을 쏟아내듯 말을 이어갔다.“두 사람은 처음부터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사이였어. 우리가 힘을 합쳐서 엄청난 노력을 한 것도 맞긴 하지만 결국 두 사람 사이를 더 깊이 이어준 셈이지.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바보였던 거야. 어쩌면 우리가 해온 일들도 그들을 돕는 역할밖에 못 했던 거지. 우리는 그저 한낱 도구였을 뿐이라고!”서은아가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단순히 속상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진의 질투심을 자극해 성도윤과 차설아의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싶었다.“그렇다고?”성진의 눈빛 속에는 점점 더 강한 분노와 불만이 차올랐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럼 본때를 보여줘야지.”“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네가 말한 거잖아.”성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었다.“성도윤을 완전히 무너뜨려서 빈털터리로 만들자며?”“그래, 좋아! 또다시 동맹을 맺게 됐네. 솔직히 너라는 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 처리 하나는 잘하니까 말이야. 너랑 손잡는 게 제일 마음이 놓이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서은아는 기분 좋게 말했다.“너도 만만치 않지.”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사랑해서
“눈이 다 나았다고 하길래 특별히 축하해주러 왔지.”서은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선물을 툭 던져주었다.“이렇게 신경 써주니 참 고맙네.”성진은 선물을 받으며 냉랭하게 말했다.“형이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성진아,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 거고.”서은아는 말하다가 화가 나서 소파를 두 번이나 세게 걷어찼다.“성도윤 그 배은망덕한 놈! 양심이 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서씨 가문의 미래까지 걸고 도왔는데! 그땐 내가 눈이 멀었어.”“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나도 한때 그랬었어. 너도 그때 나랑 마찬가지인 거고. 이젠 헛된 꿈에서 깨어나 제대로 앞을 봐야 할 때인 거지.”성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진작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근데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와. 너도 전에 그랬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어?”서은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가 성진을 찾아온 건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럼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서씨 가문의 모든 걸 이용해서 널 도울 수 있어. 대신 내가 원하는 건 성도윤이 완전히 무너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아니었어?”“내가 독하게 굴지 않으면 성도윤이 깨닫긴 하겠어? 누가 진짜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은아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모든 걸 잃어 봐야만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야.”“재밌는 생각이네...”성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는 서은아 같은 여자를 꽤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거침
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계속해서 물었다.“왜 따라 배우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설아의 부모님이 금슬이 좋다고 들어서 무척 부러웠거든요. 저도 설아랑 알콩달콩 지내고 싶어요.”그러자 민이 이모는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금슬이 좋은 부부로 알려진 건 맞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부부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굳이 따라 배울 필요 없다고 한 거고요. 설아 아가씨랑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돼요.”“그러면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어떤...”“도련님, 죄송하지만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도 나빠졌거든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의 말을 잘랐다.“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도 일찍 쉬세요.”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이 이모는 뒤돌아서서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혹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해도 밝히지 마세요. 궁금한 게 있더라도 계속 조사하지 마시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바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이 이모가 나간 뒤, 성도윤은 생각에 잠겼다.‘이모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비밀에 부친 일을 굳이 조사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야. 설아한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몇 분 후, 성도윤은 진무열한테 전화를 걸었다.“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잠시 멈춰. 아직은 때가 아니야.”한편, 성진의 별장.어두운 불빛과 가라앉은 분위기는 성진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정말 네가 나한테 두 눈을 기증한 거라고?”성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기증자의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청아라는 여자와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도련님께 기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현청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답했다. 두 눈은 움푹 파였고 성진이 기억하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하지만 성진은 현청아가 수술 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거라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