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가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이미 늦었다.하지만 뜻밖에도 절친인 배경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뭐야? 이 녀석 정말 사랑을 찾은 건가?”차설아가 궁금해하던 이때, 배경윤이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녀의 하얀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는데 소녀 같은 수줍음을 보였다.“크흠!”차설아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배경윤의 팔을 잡아당기며 ‘엄마’처럼 캐묻기 시작했다.“솔직히 말해봐, 어딜 가서 신나게 논 거야? 왜 이렇게 늦게 돌아왔어?”“언니, 내가 솔직하게 말할게. 나 이번에 제대로 사랑에 빠졌다고. 나 그 사람이랑 이번 달 말이면 혼인신고 하려고. 어쩌면 우리 같이 결혼식을 할 수도 있어!”“벌써 결혼 생각을 하는 거야? 너무 섣부른 결정 아니야?”차설아는 배경윤을 위해 기뻐하면서도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전에 결혼하지 않고, 애도 낳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그건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고. 운명의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지!”배경윤은 전에 덕질만 하며 아이돌에게만 관심을 쏟아부었고, 연애나 결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런데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배경윤은 갑자기 연애를 넘어 결혼을 하겠다고 선포했다!차설아는 더 잔소리도 하지 않고 배경윤에게 말했다.“결혼까지 결심한 사람 말이야. 나한테 보여줄 생각 없어?”“당연히 그래야지!”배경윤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렇지 않아도 나 오늘 저녁에 말해뒀거든. 내일 같이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했어. 언니가 잘 봐줘.”“좋아.”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언니는 오늘 밤 어땠어? 그 1위를 한 사람과 식사 약속 있었잖아. 갔어?”배경윤이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차설아에게 물었다.“갔어, 그런데 그 사람과 식사를 하진 않았지.”차설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배경윤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어때? 1위 한 사람 누구야? 쓰레기 성도윤 맞지?”“그래.”차설아는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재는 매우 크고 깜깜했다. 그 안에는 책장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성도윤은 무표정으로 불을 켰더니 소파에 앉아 있는 성주혁을 보고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할아버지, 늦은 시간인데 주무시지 않고 왜 여기에 계세요? 저를 놀래려고 작정하셨어요?”성주혁은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벌컥 역정을 냈다.“나 자신을 놀라게 해서 이대로 죽고 말지. 아들이고 손주고 다 속을 썩여서야. 내가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왜 또 그러세요...”성도윤은 이마를 짚으며 감정을 다스리고는 성주혁 앞에 웅크리고 앉아 인내심 있게 말했다.“저한테 말해보세요, 오늘 또 무슨 일 때문에 화가 나셨어요?”“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지. 늙어서 눈도 침침해 사람 하나 제대로 못 보고 말이야.”성주혁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그는 차무진과 전장을 누비며 적을 무찌르고 의기양양했던 과거를 떠올렸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제대로 잘 걸지도 못했고, 말도 똑똑히 하지 못했고, 심지어 눈까지 침침해졌으니...성주혁이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더니 주름이 가득한 손가락으로 스크린을 짚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어휴, 내가 눈이 안 좋아서 그래. 도윤아, 이리 와서 할아버지 도와줘. 이 동영상 속 여자가 누구야? 싸움을 이렇게 잘해?”“누구요?”성도윤이 고개를 내밀고는 진지한 얼굴로 보기 시작했다.성주혁이 그에게 보여준 동영상은 바로 차설아가 도로에서 남자를 제압해 실검까지 오른 그 동영상이었다.그는 갑자기 성주혁의 뜻을 알아챘다.그래서 그는 실눈을 뜨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러게요, 이 여자가 누구죠? 조회수 찍으려고 일부러 연기하는 거 아닐까요? 사람들이 뜨려고 정말 아무 짓이나 다 하네요. 이런 건 그만 보세요, 다 가짜니까.”성도윤은 성주혁의 휴대폰을 뺏으려고 했다.그러자 휘청거리던 성주혁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경고하며 말했다.“자식, 어디서 모르는 척이야. 눈 똑바로 뜨고 봐. 영상 속
이튿날.차설아와 배경윤은 같이 어느 고급 씨푸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언니, 봐봐. 저 사람이 바로 내 남자친구 강우혁이야. 엄청 잘 생기고 훈훈하지?”배경윤은 VIP 구역에 있는 젊은 남자를 가리키더니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한 남자가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만지작거리지 않으면 식기를 정리했는데 누가 봐도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번 약속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점잖아 보이는데. 너 이런 스타일 남자 좋아했어?”차설아는 의외인 듯 웃으며 말했다.배경윤이 멋있고 카리스마 있는 차도남을 좋아할 줄 알았다. 그녀가 덕질했던 아이돌도 다 그런 스타일이었으니.하지만 점잖은 남자도 괜찮을 듯했다.듬직하고 배경윤의 말을 잘 들을 것이니 털털한 성격의 배경윤과는 서로 보완이 되었다.다만 그가 정말로 점잖은 남자인 전제하에 말이다.이때 남자가 그들을 발견했는지 바로 따뜻한 미소를 짓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경윤아!”그는 마중 오더니 배경윤 손에 든 가방을 건네받고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안부를 물었다.“자기야, 안 힘들어? 안 배고파? 자기가 좋아하는 코코넛 크랩을 시켰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자기야, 고마워.”배경윤이 활짝 웃고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차설아를 소개했다.“여긴 나의 가장 친한 언니 차설아야. 우린 친자매보다 더 친하거든. 참, 언니 엄청 대단한 사람이야. 얼굴도 예쁘게 생겼지, 머리도 똑똑하지, 회사 사장으로서 돈도 많이 벌고 싸움도 잘해 변태들을 다 물리칠 수 있어. 게다가 어려서부터 공부도 엄청 잘했고, 해...”“캑캑!”배경윤이 자기 정체를 밝힐 것으로 보이자 차설아는 다급하게 그녀의 말을 끊고는 미소를 지으며 강우혁에게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차설아라고 합니다.”“반갑습니다, 저는 강우혁입니다.”남자가 안경을 고쳐 쓰고는 예의를 갖추며 대답했다.식사 내내 강우혁은 부드럽고 자상한 모습을 드러냈다.배경윤에게 새우나
케빈은 뉴욕에 있었는데 인맥이 넓고 소식이 빨랐다.그는 거지든, 의원이든, 신분의 높낮이를 막론하고 한 사람의 신상을 이른 시간 안에 파헤칠 수 있었다.“강우혁, 나 잘 알지.”전화기 너머의 케빈이 열정적으로 말했다.“10분만 기다려, 그 사람 모든 자료를 정리해서 보낼게.”“고마워,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그렇다, 그녀는 식사 자리에서 강우혁을 인정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그녀는 오히려 완벽한 사람이 더 미심쩍다고 생각했다.배경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잘 알아보기로 했다.케빈을 기다리는 사이에 그녀는 두 아이에게 줄 예쁜 옷을 사기 위해 3층에 있는 아동복 코너로 향했다.두 아이가 생긴 후로 그녀는 아이들에게 예쁜 재킷이나 치마를 사주는 게 가장 큰 취미였다.“이거, 이거, 그리고 이것도요...”차설아는 단숨에 대여섯 벌을 사서 점원에게 일일이 쇼핑백에 잘 담아달라고 했다. 두 손으로 들기 힘들 정도로 많은 옷을 샀기에 차설아는 낑낑거리고 있었다.매장을 나서려던 그때, 차설아는 성도윤, 그리고 임채원과 마주쳤다.“씨발!”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나 오늘 똥 밟은 날인가? 왜 이렇게 재수 없어?”눈물을 글썽이던 임채원은 성도윤의 부축을 받으며 연약한 모습을 보였었는데 차설아를 보더니 안색이 확 바뀌고는 일그러진 얼굴로 차설아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목을 조르면서 소리를 질렀다.“차설아, 하늘도 결국 무심하시지 않아. 우리 아들 기일에 너를 만나게 하다니. 내가 아들을 위해서라도 오늘 너를 죽여버린다!”“억!”차설아는 두 손에 짐을 가득 들었고, 또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 때문에 미처 반응하지 못해 그녀에게 당하고 말했다.“채원아, 진정해! 손을 놔!”성도윤이 차가운 얼굴로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제지했다.하지만 임채원은 작정하고 차설아를 죽일 셈이었다.뼈마디가 보일 정도로 마른 열 개 손가락은 마치 해골처럼 흉측했다.그녀는 전신의 힘을 다해 차설아의 목을 비틀
“그러면 죽길 바라는 거야?”성도윤이 차가운 얼굴로 차설아를 힐끔 보고는 의식을 잃은 임채원을 안아 들어 옆에 있는 벤치에 눕혔다.임채원은 이성을 잃었기에 차설아는 하마터면 목 졸려 죽을 뻔했다.다급해진 성도윤은 어쩔 수 없이 임채원의 뒷덜미를 쳐 그녀를 잠시 혼수상태에 빠뜨렸다. 그래서 차설아가 살 수 있었던 것이었다.성도윤은 임채원에게 큰일 없을 거로 생각했다. 잠깐 누워있으면 깨어날 것이니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는 몸을 돌려 아직 아동복 코너에 있는 차설아에게 다가가고는 차가운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아기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아동복은 왜 이렇게 많이 산 거야?”차설아는 점원과 함께 쪼그려 앉아 예쁜 옷들을 다시 주머니에 담고 있었다.성도윤의 말을 들은 그녀는 화난 말투로 말했다.“당신이 알 것 없어. 예쁘니까 샀지, 안 돼?”성도윤은 긴 다리를 구부리더니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줄무늬 양말을 줍고는 자세히 연구하기 시작했다.작고 앙증맞은 핑크색 양말은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어졌다. 손가락 세 개 크기도 안 되었기에 엄청 귀여웠고 성도윤은 왠지 마음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이 양말도 예뻐서 산 거야?”성도윤이 말하고는 양말을 차설아에게 건넸다.하지만 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가 건넨 양말을 받지 않았다.“예뻐서 산 건 맞아. 하지만 당신이 만졌으니 재수 없을 것 같아. 나 안 가질래.”“뭐?”성도윤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 여자 도대체 뭐야? 어제까지만 해도 앞으로 친구로 하자며 털털한 척을 하더니 오늘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 손에 묻은 건 다 재수 없어? 태세 전환 대박이네.’“나 아까 당신 구해줬잖아, 채원이를 쓰러뜨리기까지 했는데 나한테 이럴 거야?”성도윤은 어이가 없어 차설아 앞을 가로막고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알려줘, 내가 또 심기를 건드렸어?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차설아는 아직도 목이 따갑고 아팠다. 화도 가라앉지 않아 그대로 속사포를 날렸다.“흥, 성도윤 씨, 당신이 내 심기를
“어서, 날 때리라고. 당신 싸움 잘하잖아. 내가 피를 흘릴 때까지 때려. 아니면 나처럼 목을 졸라”성도윤은 차설아의 손을 자기 목 위로 올려두고는 농담이 전혀 섞이지 않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정,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차설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성도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저도 모르게 손을 빼내고는 그를 피하기 급급했다.“나 경고하는데 여기 CCTV 있어, 자해 공갈할 생각 하지 마.”“그럼 내가 CCTV 앞에서 당신이 날 때리는 것을 허락할게. 나 병신 만들어도, 혹은 나 때려죽여도 내가 알아서 책임질 거니까 절대 당신 원망하지 않을게!”“미친놈이네,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차설아는 겨우 그에게서 벗어나고는 멀찍이 뒤로 물러섰다. 마치 성도윤이 사나운 짐승인 듯이 가까이할 수 없었다.‘쯧쯧, 성도윤은 역시 미친 사람이네. 자기 자신까지 때리려고 하다니, 무서워서 내가 피한다!’“4년 전에 내가 당신한테 못된 짓을 한 건 맞아. 그래서 지금 나 다시 괴롭힐 기회를 주겠다는 건데 당신이 스스로 이 기회를 포기한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이 얘기 더는 꺼내지 마, 감정 상하니까.”성도윤이 차가운 얼굴로 차설아를 보더니 이내 다시 우아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차설아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씨발, 지금 나 일부러 함정에 빠뜨린 거야?’“성도윤, 당신 정말 머리가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누가 당신이랑 앞으로 더 본다고 했어? 그리고...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감정이라는 게 없는데 감정 상할 일이 뭐가 있겠어?”차설아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휙휙 넘겨주며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그녀는 다시 이 남자 때문에 기분이 상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었다.“감정이 없으면 다시 키우면 되지. 그 감정이 미움이 되었건, 원한이 되었건 난 좋다고 생각해!”성도윤이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진지하면서도 농담 섞인 얼굴로 말했다.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미친 거야?”이때, 기절했던 임
성도윤은 임채원이 약을 다 넘긴 걸 보고서는 그녀더러 옆에 있는 벤치에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했다.임채원은 아무 불평도 없이 멍한 눈빛으로 다시 벤치로 돌아갔다. 마치 영혼 없는 좀비처럼 벤치에 가만히 앉아 떠들지도 않았다.성도윤은 굳은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네가 무슨 염치로 그걸 물어봐? 채원이가 왜 저렇게 되었는지 네가 몰라?”차설아는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성도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그렇게 잘못했다면 아까 복수하지 그랬어. 여기서 나 비꼬지 말란 말이야. 당신이 내 책임을 물을 수 있을 정도로 잘한 건 없어!”성도윤은 싸늘한 표정으로 차설아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슬픔이 담긴 얼굴을 하고서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채원이의 아이가 당신 때문에 죽었어. 채원이도 당신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정말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없어? 정말 자기에게 아무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나...”차설아는 말문이 막혔다.어떻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그녀는 4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죄책감에 시달렸다.다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이 사고로 그녀는 평생 자신을 자책할 수는 없었다.“그날, 나는 피범벅이 된 채원이를 안고 병원으로 향했어. 의사 선생님께서는... 조금만 일찍 와도 아이를 살릴 수 있었고, 채원이도 굳이 자궁을 제거하는 수술을 할 필요 없었대. 조금만 일찍 왔어도.”성도윤의 깊은 눈망울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그는 눈시울이 붉어졌는데 정말 고통스럽고 슬퍼하는 것 같았다.그는 잠긴 목소리로 차설아에게 물었다.“왜 채원이를 밀었어? 내가 이미 사회에 나가지도 못하게 했잖아. 당신이 볼 수 없는 곳에 보냈는데도 왜 당신은 채원이를 놓아주지 않았던 거야?”“나...”차설아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저 제자리에 서 있었다. 손바닥에는 어느샌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해명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성도윤에게 그녀가 먼저 임채원을 찾아간 게 아닌, 임채원이 그녀를 불렀다고 알려주고 싶
성도윤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였다.그는 그동안 이미 이 일들을 모두 봉인했고 다시는 꺼내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남은 평생 딴생각하지 않고 조용하게 속죄하며 살려고 했다.그런데 하필이면 차설아는 돌아왔다.성도윤은 더는 전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을 할 수 없었다.“내가 당신을 미워한다고 했었지. 인정해. 한동안은 당신이 미웠어, 목 졸라 죽이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가장 미워하는 건 나 자신이야. 내가 우리 두 사람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했어. 내가 모든 걸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내가 너무 느리게 반응해서 이 비극을 막지 못했어...”성도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우람한 체구의 그는 등을 돌리더니 몸을 살짝 떨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에게 이 슬픔을 모두 삼키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차갑고 자존심이 강한 그에게 이렇게 취약하고 불쌍한 모습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는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가여워 보였다.지난번, 그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 건 형님의 장례식장에서였다.그녀의 마음도 덩달아 괴로워졌고, 저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와 그녀를 경고했다.“성도윤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 그럼 너에게만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거야!”결국 차설아는 그저 몇 마디 위로를 건넸다.“다 일어난 일인데 이제 와서 뭐 어떡하겠어? 이제 내려놔!”내려놓는 것 빼고는 다른 방법도 없었다.“내가 뭐라도 하는 게 좋겠어?”차설아가 성도윤을 향해 물었다.성도윤은 심호흡을 하며 마침내 마음을 가다듬었다.그는 천천히 몸을 돌리고는 평소처럼 차가운 얼굴을 드러냈다.다만 빨개진 눈가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당신이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채원이를 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줘. 채원이가 착한 여자는 아닐지라도 악독한 여자는 아니잖아. 채원이도 그동안 힘들었고 비참한 삶을 살아왔어...”‘형은 그렇게 채원이를 사랑했으니 만약 형이 살아있었다면 세 식구는 행복하게 살았을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차설아는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차성철이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핑계를 대며 다급히 끊었다.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지금, 차설아는 차성철과 덤덤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몇 초 후, 차성철이 전화를 받았다.“설아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너답지 않게 먼저 연락해서 놀랐어. 별일 없지?”차성철은 남부 지역에서 인력과 물자를 모아서 보물과 함께 가라앉은 배를 찾으려고 했었다. 배에 있던 보물은 하나도 찾지 못했고 차성철은 점점 지쳐갔다.차성철은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혼자 지내다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당장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래서 차설아의 연락을 받고 마음이 더 무거워졌던 것이다. 차성철은 먼저 연락한 차설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차설아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이상, 먼저 차성철에게 연락할 리 없었다.“오빠, 그렇게 진지하게 물을 필요 없어. 기쁜 일이 생겨서 오빠한테 알려주려고 용기 내서 전화한 거야.”차설아는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애교 섞인 어조로 말했다.“들어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무엇이 우리 설아를 기쁘게 했는지 들어나 볼까?”차성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음... 우리 집에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는 사용인이 한 명 들어왔어. 월급을 적게 주는데도 군소리하지 않고 아주 부지런하게 일해. 오빠, 이런 사용인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차설아는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수줍어했고 다른 사람에게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차성철과 성도윤은 원수 사이였기에 성도윤을 사용인이라고 둘러댔다.“그래? 네가 편하면 돼.”“너무 편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다가 이런 사용인이 우리 집에 오게 된 건지...”“사용인을 쉽게 믿지 말고 계속 지켜봐. 집에서 너를 보살피는 사람인데 만약 겉모습에 속아서 경계하지
차설아는 깨어난 척하면서 기지개를 켜고는 성도윤이 떨어진 방향을 향해 말했다.“도, 도윤 씨? 도윤 씨가 어떻게 저의 방에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변태 같아요. 그리고 장난감이라고 한 건 뭐죠? 도윤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어요.”성도윤은 차설아가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자존심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고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당신 말대로 나는 뻔뻔스러운 변태 같은 남자야. 그래서 아이가 있는 여자의 방에 가만히 들어가서 장난감 역할을 자처하곤 했어. 주인님이 깨어났으니 이제는 주인님을 모시고 내려가서 음식을 대접해야지.”“음... 그래요. 푹 자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요. 당신의 상황극에 맞춰줄 테니 어서 옷부터 갈아입혀 줘요.”차설아는 긴 팔을 뻗고는 성도윤이 옷을 갈아입혀 주기를 기다렸다. 성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의 불을 켰고 편안한 잠옷을 찾아서 갈아입혀 주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어 섰고 애틋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차설아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옷을 입은 뒤, 성도윤은 차설아의 가는 허리를 감싸면서 귓가에 속삭였다.“나를 유혹해 놓고 혼자 발 빼는 게 어디 있어? 당신이 모르는 척한다는 걸 다 알아. 나중에 우리 둘 다 몸이 회복하면 오늘 진 빚을 제대로 갚아야 할 거야. 알겠어?”“흥! 변태 같은 당신을 다시는 방 안에 들이지 않을 거예요. 이 손 치워요.”차설아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성도윤의 팔을 툭 쳤다. 어릴 적부터 독하게 마음먹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했던 차설아는 여린 면을 내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성도윤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져서 연약한 모습이거나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예전에 사도현이 차설아를 보면 ‘사랑스러운 여왕’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래서였다.차설아는 성도윤만 보면 저도 모르게 거만한 모습 대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두
원이와 달이는 식탁 앞에 앉아 성도윤과 차설아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이는 인쌍을 찌푸리고는 원이를 향해 말했다.“오빠, 아빠랑 엄마는 뭐 하고 있기에 아직도 내려오지 않는 거야? 음식이 식으면 맛없단 말이야. 아직 뜨거울 때 같이 먹었으면 좋겠어.”어른들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원이는 턱을 괴고 생각해 보았다.“나올 때가 되었는데 왜 안 나오는 거지? 아빠가 엄마를 괴롭히고 있는 거 아니야?”“흥! 아빠를 용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엄마를 괴롭히는 거지? 우리가 가서 아빠를 혼내주자.”두 아이는 주먹을 꽉 쥐고는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이때 민이 이모가 맛있게 끓인 국을 들고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흥분한 달이와 원이를 말렸다.“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 먼저 식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도윤 도련님과 설아 아가씨는 피곤해서 쉬고 있을 거예요. 간만에 휴식하는 거라 방해하면 안 돼요.”“쉬고 있을 거라고요?”원이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을 이었다.“엄마는 오후 내내 쉬고 있었잖아요. 저녁도 안 드시고 또 잔다는 뜻인가요? 그러다가 배가 고파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죠?”“그, 그건... 예전에 설아 아가씨는 실면해서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곁에 도윤 도련님이 계시니까 마음이 편해서 푹 주무실 수 있는 거고요. 어른들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아요.”민이 이모는 어린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서 식은땀을 흘렸다.“자, 얼른 식사부터 하세요. 조금 더 기다리면 두 분이 식사하러 내려올 수도 있잖아요.”민이 이모는 위층에 있는 차설아의 방을 힐끗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도련님은 식사 시간이 끝나기 전에 설아 아가씨를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아. 어쩌면 좋지?’민이 이모의 예상과는 달리 성도윤과 차설아는 이불만 덮고 자고 있었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복근이 손에 닿자 깜짝 놀랐다.‘이건 꿈이 아니야! 이런 복근을 나의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다니, 꿈에 절대 나올 리 없는 초콜릿 복근이
성도윤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마치 청심환이라도 먹은 듯 마음이 안정되었다.생각이 많았던 그녀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눈앞의 행복을 놓쳤다.어쩌면 득보다 실이 많았었다.현재의 삶을 잘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보기로 결심했다.성도윤은 차설아를 위로하고 밥하러 주방으로 갔다.오늘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큰 관문이었다. 처음으로 주방에 선 성도윤은 모든 요리 실력을 발휘하여 세 명의 입맛을 동시에 만족시켜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했다.화원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과 은은하게 전해지는 음식 향이 더해져 삶이 더없이 행복하고 평온하게 느껴졌다.오늘 불쾌한 일을 겪은 차설아는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다.졸음기가 없었던 그녀였지만 방금 겪은 일로 힘들었던 그녀는 잠이 들었다.“설아야,설아야.”비몽사몽인 그녀의 귓가에는 낮고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입으로 중얼거리며 이불을 감싼 그녀는 계속 쿨쿨 잤다.“아직도 잠에서 덜 깬 거야? 밥이 다 되었는데 가져다줘?”성도윤은 희미한 조명 아래에 서서 차설아의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저녁 내내 바쁘게 움직여 한 상 가득 음식 준비를 마친 성도윤은 마치 선생님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차설아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방에 들어온 성도윤은 깊게 잠든 차설아를 차마 깨울 수가 없어 조용히 그녀의 귓가에 혼잣말을 했다.“당신이에요?”꿈꾸듯 비몽사몽인 차설아는 애교를 부리며 손을 내밀어 성도윤의 목을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뽀뽀.”이 말을 들은 성도윤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뽀뽀라고... 진심이야?”성도윤의 기억 속에서 차설아가 이렇게 열정적이고 부드러운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갑작스러운 차설아의 적극적인 사랑에 놀란 성도윤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당신의 입술... 어디에 있어? 왜 닿지 않는 거야? 뽀뽀하게 얼른 가까이 들이대 봐.”자신이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 차설아는 혀를 꼬며 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