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펜과 종이를 건넸다. 고여정이 정답을 쓴 종이를 접어 테이블 위에 올리고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말해.”신우가 말했다. “대학교 4학년 파티하던 날 밤, 너희 숙소 아래서.”고여정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신진성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펼쳐보았다. 위에는 “극장”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다르잖아. 너희 둘, 대체 누가 잘못 기억한 거야?”신우가 웃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여정을 바라보았다. “네 생일날 극장을 말하는 거야?”고여정의 눈꺼풀이 떨려왔다. “알면서 잘못 말한 거야?”신우가 말했다. “내가 잘못 말한 게 아니야. 내가 처음으로 너한테 입 맞춘 건, 졸업식 파티가 끝난 뒤였어. 그날 네가 취해서 잊어버린 거야. 극장에서 그때는, 사실 두 번째였어. 하지만 너한텐 첫 번째지. 그러니까 우리 둘 대답이 다 맞아.”고여정이 입술을 앙다물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생일날 극장에서는 두 사람은 사실 키스를 하지 않았다. 다만 신우가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을 뿐이었다. 진정한 첫 키스는 사귀기로 한 그 해 밸런타인데이 극장에서였다. 고여정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어렴풋이 파티장에서 자신을 안고 있던 사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누군가 친구에게 부탁해 그녀에게 해장국을 보냈던 것은 기억했다. 그녀는 한참을 알아보고 나서야 그 사람이 신우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녀가 신우에게 물었을 때, 그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고여정은 눈을 뜨고 옆에 있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처음 신우가 그녀를 따라다녔을 때, 로맨틱했고 또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사귀고 나서 그는 어쩐지 이 관계에 조금 무관심한 듯 보였다. 데이트를 할 때든, 일상에서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을 때만큼의 열정을 느낄
“왜 그래?”신우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번뜩 정신이 든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한 번도 나한테 졸업식 파티 저녁에 있었던 일을 말해 준 적이 없었어.”신우가 웃었다. “몰래 입맞춘걸, 내가 어떻게 감히 떠들겠어?”한성우가 손을 흔들었다. “그만해. 부부의 애정행각은 사절이야.”그는 아직 다른 사람의 사생활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다음 라운드에서 바로 자신이 걸려버렸다. 한성우의 운은 강한서와 비겨도 도긴개긴이었다. 그가 질문지를 펼친 그 순간, 사람들은 폭소했다. 한성우의 질문은 “20 이상, 아니면 20 이하?”였다. 그 질문에 한성우의 얼굴은 바로 어두워졌다. “누가 쓴 질문이야, 일어나봐요! 왜 강한서는 18이고 나는 20인데?”강한서는 한성우의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20 이하만 아니면 비슷하잖아. 왜 그렇게 흥분해? 설마, 이하인 거야?”한성우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강한서를 향해 중지를 치켜세우더니 남자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술을 마셨다. 그는 20 이상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강한서와 한성우가 이상한 질문 대부분을 걸러냈다. 마지막 라운드에 주강운이 걸렸고 그는 벌칙을 선택했다. 그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벌칙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가 뽑은 미션은 왼쪽에 있는 사람에게 1분간 딥키스하는 것이었다. 그 미션을 본 사람들은 유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현진: …강한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고 얼른 손을 들어 그 벌칙을 반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유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전 의견이 없지만, 아이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그녀가 말하며 공간을 확보하자, 사람들은 그제야 그녀와 주강운 사이에서 두리안 크러스트를 먹고 있는 네, 다섯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는 고개를 쳐들고 요리조리 이상한 어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말했다. “법으로도 허락하지
유현진은 밖에서 한참 있고 난 뒤에야 들어갔다. 주강운이 어떻게 그 라운드를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한서는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또 게임에 진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유현진이 자리를 비우기 전보다 더 빨개져 있었다. 아마 또 술을 마신 것 같았다. 술을 거절할 줄 모르는 바보. 그는 자신의 주량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유현진은 민경하에게 문자를 보내 강한서를 데리러 오라고 했다. 그녀는 강한서가 갑자기 취해서 헛소리를 지껄일까 두려웠다. “뽑아요.”주강운은 뽑기용 종이박스를 그녀 앞으로 건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라운드만 끝나면 집에 데려다줄게요.”유현진은 종이를 뽑으며 말했다. “강운 씨는 계속 놀아요. 전 아직 볼 일이 좀 있어서, 택시 타고 가면 돼요.”주강운이 웃었다. “만약 제가 현진 씨를 혼자 보내면, 오늘 밤 연기는 다 물거품이 돼요.”유현진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 새로운 라운드가 시작됨을 알렸다. 유현진은 어쩔 수 없이 이번 라운드가 끝나고 다시 얘기할 생각으로 말을 삼켰다. 새로운 마피아 게임의 규칙은 간단했다. 사람마다 종이를 한 장 뽑고, 각자 자신의 종이에 적힌 물건을 묘사하면 되었다. 그 중 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물건이 적혀 있고, 사람들은 각자의 묘사를 통해 누가 다른 사물인지 추측하고 그 사람을 잡아내면 마피아의 실패였다. 게임에서 진 사람은 신혼부부를 대신해 결혼식 비용을 제외한 기타 하객들이 호텔에서 소비한 모든 비용을 계산해야 했다. 7성급 호텔, 판이 꽤 커졌다. 게임 벌칙을 들은 차미주는 바로 게임에서 빠지고 싶었다. 한성우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 “무서워하긴. 지면 이 오빠가 다신 계산해 줄게.”차미주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말 지면, 넌 바로 날 버리고 가버릴 거지?”한성우가 웃으며 주머니에서 스포츠카 차키를 건네주었다. “차를 너한테 맡기면 돼?”차미주는 얼른 차키를 가져왔
1라운드에서 알아낸 정보는 너무나도 적었고 사람들은 전부 기권을 선택했다. 그렇게 바로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2라운드의 검증 기회는 고작 3번뿐이었기에 만약 검증 실패하게 되면 바로 팀에서 아웃시킬 수 있었다.그래서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에 검증할 때 신중하게 생각하고 검증해야 했다.2라운드.신진성이 입을 열었다.“포장된 물건은 조금 축축한 물건이죠.”신우가 말했다.“이걸 안 쓰면 더 편합니다.”강한서는 신우를 힐끔 쳐다보더니 묵묵히 속으로 인정했다.고여정이 말했다.“그래도 전 쓰는 걸 더 좋아해요.”이번엔 한성우 차례였다.“전 한 번도 쓴 적이 없습니다.”자신의 순서가 된 차미주가 말했다.“이것엔 여러 가지 색이 있죠. 그중에서 전 검은색 레이스가 찍힌 걸 더 좋아하고요.”강한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조준이 입을 열었다.“이걸 사용하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해요.”이어서 주강운이 설명했다.“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건 아닙니다.”유현진의 차례였다.“사용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요.”드디어 강한서 차례였다.“도중에 새것으로 바꿀 수도 있죠.”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바꾼... 다고?'유현진은 침묵을 지켰다.그녀는 대충 강한서가 뽑은 종이에 뭐가 적혀 있는지 알 것 같았다.그녀가 고개를 들고 강한서에게 눈치를 주려 했다. 그러자 강한서는 턱을 세우며 자신만 믿으라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강한서가 엉뚱하게 느껴졌다.유현진은 사람들이 다른 곳에 신경 쓰고 있는 틈을 타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짚었다.강한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알아차린 듯 엄지와 검지를 맞대 ‘OK’ 모양을 했다.유현진은 자신의 뜻을 알아챈 듯한 강한서의 모습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다만 방금 두 사람의 행동은 아마도 사람들의 의심을 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두 사람을 의심하기도 전에 신진성의 신부가 바로 사람들의 집중력을 흩트렸다.“전 하루에 세 번까지 바꿔본 적이 있어요.”그렇게
설명이 끝나고 누가 마피아인지 이미 명확하게 밝혀지게 되었다.게임 심판은 사람들에게 마피아를 가리키라고 했다.한성우는 차를 홀짝이며 마시면서 빙그레 웃었다.“이걸 굳이 짚어낼 필요 있어요? 오늘은 강 대표가 쏘는 거죠.”차미주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듯 말했다.“뭐야 뭐야? 누가 마피아인데?”한성우가 턱으로 강한서를 짚었다.“한서잖아.”“뭐? 왜? 왜 강한서야?”“강한서는 근시잖아. 콘택트렌즈를 어떻게 살면서 딱 한 번밖에 못 써봤겠어?”차미주는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고 계속 물었다.“그럼 강한서가 뽑은 건 뭔데?”한성우가 웃으면서 말했다.“우리가 뽑은 건 일상에 필요한 물건이야. 그리고 강한서는, 강한서는 그런 물건이고.”“...”유현진은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그녀와 같은 결혼 해본 사람은 ‘그런 물건'이 어떤 물건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순진했던 차미주는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그런 물건이 대체 무슨 물건인데? 똑바로 좀 얘기해 봐.”한성우가 소리를 낮춰 얘기했다.“콘돔이잖아.”“콘...”차미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이내 강한서가 말했던 한번 밖에 사용해 보지 않았다는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고 순간 눈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그러니까, 그럼 그동안 현진이랑 그냥 했다는 거야?'‘대박!'‘대박! 대박! 대박!'‘이런 거 이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는 거야?'유현진은 힘이 들어간 얼굴로 강한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정체로 꾸며 이 자리에 온 것을 아주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무척 창피했을 테니까.강한서는 정말... 회사 업무 외에 다른 일에는 너무나도 눈치가 없고 멍청한 것 같았다.그녀가 분명 방금 눈치를 주었고 강한서도 알아들은 듯 자신 있게 제스쳐까지 보였었다. 그녀는 그런 강한서의 모습에 정말로 그가 이해하고 있는 듯했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뽑은 것이
유현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뭐야, 취해서 이성이 가출한 거야?'다른 사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등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뭘 그렇게 재밌게 놀고 있길래 강한서가 이 모양이 된 거야?”다소 익숙한 목소리에 유현진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흰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주아름과 팔짱을 낀 채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 남자는 유현진도 아는 남자였다. 이름은 성서원이었고 예전에 강한서의 친구이기도 했으며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다만 최근 2년 동안 강한서가 그와 만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지난번에 성서원과 마주치게 된 것도 신우와 고여정의 결혼식에서였다. 그는 술잔을 들고 그녀에게 치근덕거렸고 강한서는 대충 그를 상대하곤 바로 그녀를 끌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었다.유현진은 성서원을 빤히 보고 있던 와중에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주아름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입을 열었다.“오빠, 여자친구 사귀었다면서? 그렇게 중요한 일을 왜 집에 알리지 않은 거야?”주강운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야.”“그래도 집에 알려서 집안의 허락을 받는 게 낫지 않아? 안 그러면 결혼식 얘기가 나올 때 집으로 데려갔다가 외삼촌이랑 외숙모가 반대하시면 어떡해? 그러면 시간 낭비 아니야?”유현진은 눈썹 사이를 찌푸렸다.주아름이 필터 없이 말을 해댔기 때문이었다.주강운은 그녀의 사촌 오빠였다. 그러나 그녀의 어투는 흡사 주강운을 깔보는 듯한 태도였고 그녀가 한 말은 모든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주강운이 그녀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넌 네 일이나 잘하면 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주아름은 주강운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녀는 유현진을 계속 위아래로 훑으면서 말했다.“이름이 뭐죠? 뭐 하는 사람이죠?”“차현진이요. 음악 선생님이에요.”“푸흡-”차미주는 바로 입에 머금고 있던 티를 뿜어냈다.차현진...그것은
나중에 주시윤을 만나게 된 후 그는 모든 아이디를 삭제해 버렸고 주시윤은 막대한 돈을 들여 그의 이름으로 갤러리를 만들고 청년 화가인 것처럼 꾸몄다.백현석이 딥블루 클럽 직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지만, 앞에서 대놓고 그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주씨 가문에게 밉보여서는 안 되었으니까.그러나 강한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현재 주아름이 그의 아내를 깎아내리고 있었기에 그가 얌전히 참을 수 있겠는가?답은 절대 불가능이었다.그랬기에 강한서가 그 얘기를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꺼내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그런 강한서의 말에 주아름은 하마터면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할 뻔했다.게다가 주강운 마저 그녀를 감싸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그녀는 이를 갈며 변명했다.“그거랑은 다르죠. 현석 아저씨는 한주대 미대를 나온 사람이에요. 미술계의 거장 급이라고요. 아저씨가 전에 딥블루에서 일한 것도 전부 학비를 벌기 위한 것이라고요.”강한서는 잔을 흔들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딥블루에서 일하면 얼마나 주는지 알아? 거기 직원들이 어떤 마음으로 거기서 일하는지, 단골손님인 네가 더 잘 알 거잖아. 아니야? 학비를 벌기 위한 것이라고? 하도 여기저기 거짓말 떠들어대니까 이젠 그게 진짜인 것 같지?”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강한서는 비록 팩트만 집어서 말하는 타입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법은 없었다. 오늘은... 아마도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건가?사람 중 한성우만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잘 알고 있었고 마른 웃음을 내뱉으며 분위기를 살리려 했다.“한서가 이미 많이 마셔서 지금 정상이 아니거든. 무시하고 얼른 자리 찾아 앉아.”주아름은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며 잔뜩 굳어진 얼굴로 주강운의 옆자리에 앉았다.원래 그녀는 신진성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단톡방에 주강운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신진성의 결혼식에 참석한 사진을 찍어 올렸고 마침 그걸 강민서가 봤던 것이었다.강민서는 사진을 보
이윽고 유현진은 미소를 짓더니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이런 공연 기회는 어차피 앞으로도 아주 많거든요. 게다가 오늘 이곳의 주인공은 신진성 씨와 아내분이잖아요. 저는 손님이니 당연히 이 파티의 주인공이 되면 안 되죠. 하지만 주아름 씨가 얘기를 꺼냈으니 또 아름 씨 무색하게 할 수는 없죠. 그러니... 제가 마술을 보여주는 거로 대신할까요? 그냥 가볍게 즐기면 되잖아요. 뭐 이것으로 제가 신진성 씨와 아내분에게 결혼 축하 공연하는 것으로 하죠.”한성우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마술로 미인을 보여주시면 안 돼요?”유현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살아 숨 쉬는 것으로 만들어 줄 순 있죠.”사람들은 순간 기대감이 가득 찬 얼굴로 보고 있었고 유독 강한서만이 “살아 숨 쉬는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몇 개의 말랑말랑한 공과 두 개의 그릇을 가져다주었다.그녀는 먼저 그들에게 간단한 ‘공간이동' 마술을 보여주었다.이 마술은 아주 간단했고 유현진이 고등학생 때 학교 장기 자랑 대회에서 으쓱거리며 보여준 마술이기도 했다.공을 몇 개 그릇에 넣어 이리저리 흔들면서 요란한 동작을 보였다.주아름이 피식 웃었다.“이게 마술이라고요? 어린이만 속일 수 있을 정도네요.”차미주가 혀를 차면서 빈정대며 말했다.“쯧, 그럼 주아름 씨가 보여주면 되겠네요. 도대체 어떤 마술이 진정한 마술인지 우리한테 보여주셔야죠.”주아름이 표정을 확 구기며 그녀를 노려보았다.그러나 신진성의 신부는 오히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또 어떤 걸 할 줄 아시나요?”유현진이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좀 내밀어 보시겠어요?”신부는 바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유현진은 두 개의 말랑말랑한 공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고 주먹을 꽉 쥐라고 했다. 그리고 이내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을 덮어버리고 중얼중얼하더니 손수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그녀가 손수건을 치우자 신부의 손바닥 위엔 아주 아름다운 사랑앵무 한 마리가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