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주시윤을 만나게 된 후 그는 모든 아이디를 삭제해 버렸고 주시윤은 막대한 돈을 들여 그의 이름으로 갤러리를 만들고 청년 화가인 것처럼 꾸몄다.백현석이 딥블루 클럽 직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지만, 앞에서 대놓고 그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주씨 가문에게 밉보여서는 안 되었으니까.그러나 강한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현재 주아름이 그의 아내를 깎아내리고 있었기에 그가 얌전히 참을 수 있겠는가?답은 절대 불가능이었다.그랬기에 강한서가 그 얘기를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꺼내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그런 강한서의 말에 주아름은 하마터면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할 뻔했다.게다가 주강운 마저 그녀를 감싸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그녀는 이를 갈며 변명했다.“그거랑은 다르죠. 현석 아저씨는 한주대 미대를 나온 사람이에요. 미술계의 거장 급이라고요. 아저씨가 전에 딥블루에서 일한 것도 전부 학비를 벌기 위한 것이라고요.”강한서는 잔을 흔들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딥블루에서 일하면 얼마나 주는지 알아? 거기 직원들이 어떤 마음으로 거기서 일하는지, 단골손님인 네가 더 잘 알 거잖아. 아니야? 학비를 벌기 위한 것이라고? 하도 여기저기 거짓말 떠들어대니까 이젠 그게 진짜인 것 같지?”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강한서는 비록 팩트만 집어서 말하는 타입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법은 없었다. 오늘은... 아마도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건가?사람 중 한성우만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잘 알고 있었고 마른 웃음을 내뱉으며 분위기를 살리려 했다.“한서가 이미 많이 마셔서 지금 정상이 아니거든. 무시하고 얼른 자리 찾아 앉아.”주아름은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며 잔뜩 굳어진 얼굴로 주강운의 옆자리에 앉았다.원래 그녀는 신진성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단톡방에 주강운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신진성의 결혼식에 참석한 사진을 찍어 올렸고 마침 그걸 강민서가 봤던 것이었다.강민서는 사진을 보
이윽고 유현진은 미소를 짓더니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이런 공연 기회는 어차피 앞으로도 아주 많거든요. 게다가 오늘 이곳의 주인공은 신진성 씨와 아내분이잖아요. 저는 손님이니 당연히 이 파티의 주인공이 되면 안 되죠. 하지만 주아름 씨가 얘기를 꺼냈으니 또 아름 씨 무색하게 할 수는 없죠. 그러니... 제가 마술을 보여주는 거로 대신할까요? 그냥 가볍게 즐기면 되잖아요. 뭐 이것으로 제가 신진성 씨와 아내분에게 결혼 축하 공연하는 것으로 하죠.”한성우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마술로 미인을 보여주시면 안 돼요?”유현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살아 숨 쉬는 것으로 만들어 줄 순 있죠.”사람들은 순간 기대감이 가득 찬 얼굴로 보고 있었고 유독 강한서만이 “살아 숨 쉬는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몇 개의 말랑말랑한 공과 두 개의 그릇을 가져다주었다.그녀는 먼저 그들에게 간단한 ‘공간이동' 마술을 보여주었다.이 마술은 아주 간단했고 유현진이 고등학생 때 학교 장기 자랑 대회에서 으쓱거리며 보여준 마술이기도 했다.공을 몇 개 그릇에 넣어 이리저리 흔들면서 요란한 동작을 보였다.주아름이 피식 웃었다.“이게 마술이라고요? 어린이만 속일 수 있을 정도네요.”차미주가 혀를 차면서 빈정대며 말했다.“쯧, 그럼 주아름 씨가 보여주면 되겠네요. 도대체 어떤 마술이 진정한 마술인지 우리한테 보여주셔야죠.”주아름이 표정을 확 구기며 그녀를 노려보았다.그러나 신진성의 신부는 오히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또 어떤 걸 할 줄 아시나요?”유현진이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좀 내밀어 보시겠어요?”신부는 바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유현진은 두 개의 말랑말랑한 공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고 주먹을 꽉 쥐라고 했다. 그리고 이내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을 덮어버리고 중얼중얼하더니 손수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그녀가 손수건을 치우자 신부의 손바닥 위엔 아주 아름다운 사랑앵무 한 마리가
그러나 유현진은 화를 내지 않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제 부모님께선... 동물 중성화 수술하시는 분들이세요. 주아름 씨도 필요하시면 저한테 연락하시면 돼요. 제가 할인해 드릴게요. 마취약도 필요 없이 3분이면 바로 중성화가 가능하거든요. 비록 중성화하기 전의 동물들은 미친 듯이 날뛰지만 중성화 수술만 마치면 바로 얌전해지거든요. 절대 사람에게 달려드는 법이 없지요.”“...”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유현진의 말은 그야말로 주아름을 돌려 까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주아름도 눈치를 챘다. 그랬기에 그녀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고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유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 됐네요.”말을 마친 유현진은 손수건을 치웠고 주아름의 손바닥 위엔 복실복실한 자그마한 생명체가 땅콩을 들고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그 작고 복실복실한 녀석은 바로 생쥐였다.주아름과 생쥐는 순간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아름은 비명을 지르며 손바닥에 있던 생쥐를 내동댕이쳤다.마침 생쥐는 문다은에게 떨어졌고 깜짝 놀란 문다은은 뒷걸음질을 치다 그만 의자에 걸려 넘어지게 되자 신진성이 급히 그녀를 잡았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바닥에 넘어지게 되었다.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그들은 얼른 두 사람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다행히 행동이 빨랐던 신진성은 자신의 몸으로 문다은을 지켜주어 바닥에 부딪치게 되지 않았지만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부축할 때도 문다은의 안색은 창백했고 게다가 배가 살짝살짝 아파져 오는 것 같았다.놀란 신진성은 얼른 그녀를 안고 병원으로 향하려 했다.신우가 얼른 신진성을 말렸다.“일단 조준 씨가 먼저 확인하게 해줘. 조준 씨가 의사야.”조준이 바로 문다은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주아름도 뜻밖의 상황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신이 든 주아름이 유현진을 가리키며 말했다.“다 저 여자 때문이에요. 저 여자가 쥐새끼를 놓지만 않았다면 제가 이런 행동을 했겠어요?”유현진은 그녀를 무시했고 미간을 구긴
파티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파티장을 떠나갔다. 유현진이 강한서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낮게 말했다.“화장실에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나 기다려.”강한서는 손등으로 살짝 그녀의 손등을 툭 치면서 사인을 보냈다.강한서는 사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술 또한 도수가 낮았기에 사실은 취하지 않았다고 볼 수가 있었다. 그래도 속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그는 유현진의 말을 기억하면서 바로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룸에서 나온 성서원이 복도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강한서를 발견하곤 성큼성큼 걸어가 말을 걸었다.“한서야, 오랜만이다.”강한서는 멈칫하더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성서원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고 이어서 말했다.“전엔 좀 많이 바빠서 할머니 생신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네. 할머니께선 무탈하시지?”마침 화장실에서 나온 유현진이 성서원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생신 연회가 지난 지 언젠데 인제야 이런 인사를 하는 거지?'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고 이내 두 사람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 조용히 대화를 엿듣기로 했다.강한서는 대충 무심하게 대답했다.“어, 무탈하셔.”성서원이 입을 열었다.“며칠 전에 아주머니께서 우리 어머니랑 차를 한잔 마셨었거든. 아주머니께서 그러시는데 이틀 전에 병원에 가셨다가 낭종이 발견되셨대. 그래서인지 살도 많이 빠져 보이기도 했고, 계속 네가 혼자 살까 봐 걱정이라고 하시더라고.”신미정의 얘기에 유현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확실히 최근 바빴던 터라 신미정의 소식을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건 사실이었다.신미정이 강씨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유현진은 알고 있었지만, 줄곧 강한서에게 묻지 않았다.게다가 전 여사에게 신미정이 전 여사 집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구했다는 사실 또한 전해 들은 적이 있었고 아마도 신씨 가문에서도 쫓겨난 듯했다.그녀는 바빴던 터라 전 여사에게 자세한 상황을 묻지 않았었다.지금 다시 보니, 신미정은 아마도 불쌍한 척 동정심을 유발해 강한
강한서가 말했다.“머리가 지끈거려서.”유현진이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며 말했다.“이리 와.”강한서가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뭐 하려고?”유현진은 그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 위로 눕혔고 머리 마사지를 해주었다.“마사지해 주려고.”강한서는 그녀의 체향을 맡으며 얼굴을 허벅지에 묻어버리곤 눈을 감았다.유현진은 손가락에 힘을 주면서 마시지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서는 두통이 많이 사라짐을 느꼈다.“나 아까 너랑 성서원 씨가 나눈 대화를 들었어.”유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 그래? 걘 무시해.”강한서가 대충 답했다.유현진은 그의 턱을 만졌다. 무언가 손가락을 찌르는 것이 아마도 수염인 것 같았다.“혹시 그 사람이 한 말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거야?”강한서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살짝 웃음소리를 내었다.유현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 웃는 거야?”강한서가 말했다.“혹시 내가 그 여자를 걱정하고, 그 여자와 너 사이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아니야?”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이마에 올렸다.“너 정말 그 여자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구나. 그건 연기야. 일부러 내가 데려갈 수밖에 없게끔 연기하는 거라고. 오늘은 성서원의 어머니를 찾아갔겠지만, 내일은 어쩌면 강운이, 아니면 성우네 집으로 찾아가 연기를 했을 거야. 그 여자는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건드려 일부러 불쌍한 척 동정심 유발할 거고 집안일을 여기저기 얘기하고 다닐 거야. 물론 좋지 않은 얘기로만. 그 여자는 지금 내 명예를 떨어뜨려 내가 스스로 그 여자를 다시 데려가게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거고.”신미정은 이기적이고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강한서가 그녀를 강씨 가문에서 쫓아냈으니 그녀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강한서를 찾아와 빌지는 않았다. 신미정은 강한서가 자존심을 굽혀 자신을 다시 데려가길 원했다.강한서는 신미정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예전에도 그의 아버지가 신씨 가문의 사업을 도와주지
유현진은 오히려 그의 반응이 재밌게 느껴졌고 이내 다시 말을 걸었다.“그 사람이 대체 뭘 했다고 욕까지 하는 거야?”강한서가 입술을 틀어 물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유현진은 그의 횡설수설 속에서 포인트를 캐치했다.원인은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그녀는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이 본인 때문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다시 그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니 웃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그녀가 금방 강한서와 결혼했을 때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그의 취향을 알아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강한서의 친구에게 접근했었다.그러나 강한서의 친구는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그녀와 말을 거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주 쿠키를 만들어 ‘뇌물'을 그들에게 주었고 강한서의 취향을 알아내려 했다.강한서의 친구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뇌물'을 받은 사람들은 강한서의 취향을 하나둘씩 알려주곤 했었다.강한서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되고 그녀와 그 일로 다투게 되었었다. 그녀는 줄곧 강한서가 그녀가 ‘뇌물'로 그의 취향을 알아낸 것에 대해 창피함을 느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리고 오늘에서야 그녀는 강한서가 그때 그녀와 싸운 이유가 동창회에서 우연히 성서원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되었던 것이었다.껍데기만 화려하다든가, 이리저리 흘리고 다닌다든가, 허영심으로 가득하다든가, 아부를 떤다든가, 머리가 꽃밭이라든가 등 말을 했었다고 했다...강한서는 그저 일부분만 그녀에게 말해줬을 뿐 사실 그 내용은 더 심각했다. 성서원이 했던 말들은 그때 당시 그녀와 강한서가 결혼할 때 대부분 사람의 생각이기도 했다.그런 얘기를 듣게 된 강한서가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좋은 음식으로 좋은 대접을 해주었는데 결국 그들은 그녀를 껍데기만 화려한 허영심 가득한 사람 취급했고 모든 불쾌한 언어들을 총동원하여 유현진을 깎아내리고 있었기에 강한서는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화를
그랬다, 강한서는 연애를 정말로 한 번도 못 해봤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애초에 강한서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신경 쓰긴 뭘 신경 써!'그녀가 나직하게 물었다.“그래서, 나한테 네 친구에게 쿠키 주지 말라 한 것도 성서원 씨의 말 때문이었어?”강한서는 이마 위에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면서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현진아, 난 종종 어떻게 말을 해야 네 기분이 상하지 않을지 잘 몰라. 사실 그날도 네가 걔들한테 선물을 줘서 화가 난 게 아니야. 내가 화가 난 건 네가 정성스럽게 만든 쿠키를 진심을 담아 선물한 건데 뒤에서 그런 말이나 듣게 되고, 게다가 손까지 다친 네 모습을 보니까 화가 났던 거야. 너한테 화낸 것도 아니었어. 내가 화상연고를 사서 메모까지 적어뒀는데 네가 보지도 않고 버린 거잖아.”“... 난 화상연고를 본 적이 없어.”강한서가 말했다.“난 분명 샀어.”강한서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억울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정말이야.”유현진은 당연히 그의 말을 믿었다. 왜냐하면, 강한서는 술에 취하기만 하면 솔직해졌으니까.강한서가 사 온 걸 그녀가 아닌, 전에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가 버린 것이었다.가정부는 신미정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었고 아마도 신미정이 가정부에게 시켜 버리라고 한 것이 틀림없었다. 흡사 신미정이 일부러 피임약을 정인월의 시야에 닿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말이다.신미정은 처음부터 그녀와 강한서의 사이가 틀어지길 바랐다.강한서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성서원을 만나자마자 불쾌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강한서는 바로 기분이 가라앉게 된 것이었다.유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때도 이렇게 솔직했다면 우리한테 이미 유치원을 다닐 아이가 있었을 거야.”민경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유현진 또한 강한서와 마찬가지로 속으로 끙끙 앓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유현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한참을 달래다 강한서는 결국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유현진은 고른 그의 숨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이튿날 아침, 의사가 다시 상태를 확인하러 왔을 땐 강한서가 이미 깨어있었다. 다만 유현진이 아직 달콤한 잠에서 깨지 않았기에 강한서는 이불을 그녀에게 덮어주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의사는 조용히 그의 상태를 확인하곤 나가버렸다.유현진은 그렇게 오전 9시가 되어서야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강한서의 수려한 얼굴이었다. 유현진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주물럭거리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엔 왜 날 힘들게 했어?”아침부터 이 말을 들은 강한서는 다소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강한서는 그녀가 어제 말한 “의사가 한 말을 들어.”라는 말을 떠올리곤 기쁜 듯 웃었다.그가 나직하게 말했다.“어제 말한 보상 아직 못 받았는데, 언제 줄 거야?”부스스 깨난 유현진은 아직도 비몽사몽인 상태였다.“보상이라니?”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으려는 듯한 그녀를 보며 강한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강한서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유현진은 순간 정신을 번뜩 차리게 되었다.그녀는 재빨리 손을 치워냈고 그를 노려보면서 말했다.“여긴 병원이야! 정신 차려!”강한서는 살짝 웃음소리를 냈다. 장난을 그만두기로 한 그는 그녀의 머리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직하게 말했다.“일어나. 얼른 정리하고 집으로 데려다줄게.”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옷을 벗겨 확인했다. 피부발진이 많이 사라진 그의 몸을 보며 그녀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두 사람은 일어나 정리하였다. 강한서는 병원비를 내러 갔고 유현진은 그런 그를 병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병원에서 깨어났던 터라 그녀는 머리도 빗지 않았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만약 지인이 아니라면 절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것이었다.
남자의 말에 신하리가 대답했다.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인사는 너무 빠른 것 같아요.”남자가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젠 어린 나이 아니잖아. 아버지와 아주머니께서도 계속 네 결혼 때문에 걱정이 많으셔. 특히 아주머니는 흰머리까지 많아지셨어. 만나는 사람도 생겼으니 빨이 집에 데려와 인사 드려야지. 그래야 아주머니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거야.”입술을 짓이기던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이제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요리는 저보다 몇 살이나 어리고 아직 한창 일에 집중해야 되는 시기라 저희는 최근 몇 년 사이엔 결혼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 일찍 집에 인사드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몇 년 후 열이도 배우로 자리 잡고 저희도 여전히 좋은 감정으로 잘 만나고 있어서 열이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땐 얘기하지 않으셔도 저희가 먼저 인사드리러 갈 거예요.”신하리는 남자가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일 없으면 먼저 끊을게요. 열이가 요즘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많거든요. 요즘엔 또 말도 안 되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 내서 옆에 있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주 가족 모임엔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두 분께 전해주세요.”말을 마친 신하리가 전화를 뚝 끊었다. 전화가 끊기기 바로 직전, 신하리는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둔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인 것 같았다. 물론 신하리는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수없이도 봐왔었다. 전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떨렸지만 이젠 그녀의 마음에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힘들었던 일도, 영원히 지나지 않을 것 같던 일도 결국은 시간이 모두 해결해 주었다. 생각에 잠겼던 신하리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열이 고개를 갸우뚱한 채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신하리는 조금 전 자신이 꼬집었던 한열
‘이렇게 뻔뻔한 여자였어?’‘사랑하긴 개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들어 안 도와주면 죽어버리겠다는 표정으로 사정하지만 않았어도 난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거라고.’신하리의 이런 뻔뻔한 거짓말은 한열도, 수화기 너머의 남자도 믿지 않았다. 남자는 심지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히 볼멘소리하지 마. 네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온 가족이 다 알아.”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신하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마나 세게 휴대폰을 꽉 움켜쥔 건지 손톱마저도 조금 하얗게 질려있었다. 시선을 내린 신하리가 실소를 터뜨렸다. “하도 시간이 오래 되어서 잊으셨나보네요.”“뭘?”신하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 첫사랑은 남자였어요. 처음 좋아했던 사람도 남자였고요.”신하리의 옆에 앉아있던 한열은 그녀의 통화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한열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신하리를 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지, 그럼 여자겠어?’하지만 한열과 달리 윤명훈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에 폭풍이 몰아쳤다. ‘설마 신하리에 대한 루머가 사실이었다는 거야?’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풋, 소리 내 웃었다. “장난하지 마.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넌 키스신도 한 번 찍은 적 없어. 너희 바닥에서야 그런 널 도도하다고 하겠지만 난 알아. 넌 남자와 스킨십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심지어 숨결만 느껴져도 본능적으로 구역질을 하잖아. 그런 네가 남자친구를 사귀어?”이를 악문 신하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연이 얘기 안 해요?”“뭘?”“그날 제작발표회에서 제가 주연이 보는 앞에서 제 남자친구와 키스한 거.”...상대방이 말이 없자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주연이 안 믿을 것 같아서 보여준 거예요. 맞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살짝 만지는 것도 전 역겨워요. 주연도 같은 생각이었겠죠.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잘 아니까. 저도 열이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한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하리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의 말에 속상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분명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를 위해 돌을 막아줬을 리가 없었다. 그런 마음에 아니라면, 그에게 장난을 치며 관심을 끌었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내가 너무 상처 되는 말을 하긴 했어.’여전히 고민하는 한열의 귓가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한열이 멍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신하리가 배를 끌어안은 채 폭소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찔끔 흘린 그녀는 웃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똥강아지, 너 솔직하게 얘기해.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해 본 적 없지?”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는 신하리의 얼굴엔 슬픔이라곤 전혀 없이 온통 장난기뿐이었다. 그제야 또라이 같은 여자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윤명훈도 운전석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티베탄 마스티프는 사촌 누나 앞에서만 순한 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한열을 길들이는 사람이 있다니. 역시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는 법이었다. 수치와 분노를 동시에 느낌 한열이 바득 이를 갈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신하리를 물어버릴 것처럼 말했다. “제가 사귀었던 사람은 신하리 씨가 손가락 다 사용해도 부족할 거예요!”“소꿉놀이 같은 연애 말하는 거야?”신하리가 야유 섞인 말투로 한열을 놀렸다. “설마 첫 키스 상대가 나였던 거 아냐?”순간 뜨끔한 한열의 몸이 어색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저 한열을 놀리려던 신하리는 그의 반응에 당황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 나야?!”한열이 창피함을 못 이겨 버럭 화를 냈다. “아니거든요!”하지만 한열은 거짓말엔 너무 소질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신하리에게 이렇게 빨리 모태 솔로라는 사실을 들켰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거짓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인식한 한열이 자포자기하며 말했다. “제가 신하리 씨와 전에 했던 건 첫키스 아녜요. 제가 일부러 신하리 씨 기분 더럽게 하려고 한
한열이 입술을 짓이겼다. “제가 신하리 씨와 공개 연애를 선택한 건 신하리 씨가 저에게 감독님을 소개해주길 바랐기 때문이었어요. 우린 서로가 원하는 걸 해주기로 계약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제가 신하리 씨를 도와준 거라고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신하리 씨는 이번에 저 때문에 진짜로 다쳤어요. 이건 제가 신하리 씨에게 빚 진 거예요.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지 얘기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멈칫한 신하리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눈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탑 아이돌을 쳐다보았다. ‘이 바닥에 아직도 이렇게 단순한 자식이 있었어?’아무리 신하리가 한열에게 유리한 계약 조건을 달았다고 하더라도 계약 연애는 한열에겐 이득보단 손해가 더 많았다. 게다가 유명한 감독과 작품을 하고 싶다면 사촌 형인 송민준에게 부탁해도 충분했다. 굳이 신하리와 엮일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 한열의 SNS 댓글은 눈에 띌 정도로 악플이 늘었다. 여자친구인 신하리도 공개 연애 후 수많은 악플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극단적인 성향을 지닌 팬들은 그녀의 영정사진을 만들어 죽은 쥐과 칼날과 함께 넣어 택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니 한열 쪽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전 신하리가 한열 대신 돌을 맞은 건 그가 얼굴을 다쳐 연예계 생활에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된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죄책감 때문에 한열에게 이렇게라도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이 자식, 정말 멍천한 거였잖아?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신세를 졌다며 은혜를 갚겠다고 하다니. 이런 멍청해서야 대체 어떻게 인지도를 올릴 수 있었던 거야?’‘고담시 한씨 가문은 모두가 알아주는 명문가잖아. 그런 집안에서 대체 어떻게 이렇게 멍청한 아들이 나올 수 있는 거지? 눈치 빠르고 꿍꿍이가 많은 사촌 누나와 형에, 심지어 12살짜리 막내 동생도 쟤보다는 똑똑하겠어.’잡혀가서도 인질범 편을 들어줄 것 같은 한열의 모습에 신하리는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졌다. 한
윤명훈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인터넷에 떠도는 스캔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동안, 이 미친 인간들은 경찰서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한열의 반항적인 성격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윤명훈은 충분히 버거웠다. ‘하지만 이젠 한 명이 더 늘었잖아. 젠장. 그 놈의 돈 벌기가 점점 더 힘드네!’비록 화가 치밀긴 했지만 의식을 잃은 신하리와 한열 몸에 묻은 피를 보자 윤명훈도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하리 씨는 어때?”“안 죽어요.”한열이 신하리가 꼬집던 허리를 어루만지며 쓰러진 척 연기하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연기할래요?”그제야 천천히 눈을 뜬 신하리는 한열의 눈빛과 반말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누나 연기가 좀 실감났어?”흥, 콧방귀를 뀐 한열이 시선이 저도 모르게 신하리의 뒤통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머리숱이 많아 얼마나 많이 다친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날아온 돌멩이는 힘이 꽤 실려있었다. 옆에 있던 한열의 귀에도 돌멩이가 무겁게 머리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신하리는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제외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는 심지어 티슈를 뽑아 뒤통수의 피를 닦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열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티슈로 상처 닦으면 안 돼요. 더럽잖아요.”“더러우면 걸레라고 하겠지, 왜 티슈라고 부르겠어?”신하리가 억지스러운 논리를 늘어놓았다. “티슈로 엉덩이를 닦을 땐 왜 더럽다고 하지 않는 거야?”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티슈로 엉덩이를 닦지, 치질을 닦는 건 아니잖아요.”멈칫하던 신하리가 순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장난스레 말했다. “너 아이돌 이미지는 버린 거야? 아이돌 입에서 어떻게 엉덩이니, 치질이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어?”한열이 불퉁한 말투로 대답했다. “머리 상처에 출혈이 꽤 있었어요. 티슈로 닦으면 상처에 먼지가 붙어서 염증이 날 거예요. 나중에 흉터
한열의 마음에 남아있던 감동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사람이 신고를 마치고 나오자 경찰서 밖은 이미 수많은 기자와 팬들로 둘러싸였다. 경찰서 앞이었던 만큼 경찰들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 현장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한열이 신하리를 감싸며 차에 오르던 그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열!”한열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란 크기의 돌멩이가 한열을 향해 날아왔다. 한열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누군가 나타나 온 몸으로 돌멩이를 막았다. 신하리였다. 그 돌은 신하리의 뒤통수에 부딪혔다. 극심한 통증에 신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몸이 앞으로 휘청였다. 한열이 무의식적으로 신하리를 부축했다. 미간을 찌푸린 신하리가 손을 뻗어 돌멩이에 맞은 곳을 만졌다. 뜨뜻하고 축축한 촉감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펼치자 빨간색의 피로 흥건했다. 신하리의 부축하고 있던 한열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창백했다. 돌을 던진 사람이 큰소리로 질타했다. “개 같은 자식!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투표해서 널 데뷔시켰는데. 연애도 부족해서 이젠 뭐, 성추행? 팬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지어 옆에서 질서를 유지하던 결찰들도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돌을 던진 그 사람이 달려들려고 하자 경찰이 얼른 앞으로 나서 제압했다. 그 사람은 심지어 바닥에 제압당한 채 여전히 욕설을 내뱉으며 난동을 부렸다. “네가 이런 인간이란 걸 진작 알았다면 차라리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투표를 했을 거야! 넌 정말 네가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정말 팬들이 네 재능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그 반반한 얼굴 아니었으면 너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긴 했을 것 같아? 팬들 덕에 넌 아이돌이 될 수 있었던 거야. 팬들이 아니면 넌 아무 것도 아니라고!”구경 중이던 사람들과 기자들이 미친 듯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한열은 신하리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그녀의
신하리는 말하며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저 정신병 있는 거 다들 아시죠?”그 말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얼마 전, 신하리가 한 드라마 촬영 중 현장에서 갑자기 귀신에 쓰인 사람처럼 아무런 안정장비도 하지 않은 채 6미터가 넘는 곳에서 뛰어내려 뼈가 부러진 사건이 있었다. 다들 신하리에게 왜 뛰어내렸냐고 묻자 그녀는 아래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그러나 당시 상황을 증명해 줄 동영상은 없었고 그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듣고 지나보냈었지만 지금 신하리의 입으로 직접 그녀에게 정신병이 있다고 말하니 그때의 사건을 떠올린 사람들은 순산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이건 분명한 경고였다. 마치 난 심신이 미약한 사람이라 너에게 정말 염산을 뿌려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으니 내 말을 장난으로 가볍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신하리의 등장으로 [아기 고양이]의 라이브 방송의 인기는 더 뜨거워졌다. 댓글에도 다양한 의견이 더 많아졌다. [사랑에 눈이 먼 연예인 1위! 보상은 산에서 산나물 캐기 18년!][신하리 미친 거 아녜요? 이렇게 대놓고 협박이라니.][면전에 협박하는데 아직도 신고하지 않는다고? 증거가 없는 거야, 아님 애초부터 한열을 모함하고 있었던 거야?][성추행을 한 사람도 경찰서에 신고했는데 당한 사람은 대체 뭐가 무서워서 신고하지 않는 거야.][지난번에 스스로 신고한 인간은 아직도 감옥에서 사회봉사 중이예요.][만약 지금 당장 신고한다면 전 아기 고구마 말을 믿을 거예요. 계속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는 건 오히려 한열을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작당 모의에 더 가까워 보여요.][지금 루머를 퍼뜨리는 건 너무 쉬운 일이 됐어요. 스크린샷 몇 장이면 바로 스토리를 짤 수 있으니까요.]여론이 점차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멀어지자 [아기 고구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예요? 아
신하리의 라이브 방송 연결 요청에 [아기 고구마]가 잠시 멍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옆을 바라보던 그녀가 곧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 미세한 행동을 포착하지 못했지만 한현진에겐 들키고 말았다. [아기 고구마]는 혼자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그녀의 옆에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모인 사람들과 진실 규명을 바라는 팬들이 미친 듯이 댓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겁쟁이! 네가 그러고도 무슨 남자야! 사건이 터지면 뒤로 물러나 여자친구가 나서서 모든 걸 감당하게 하다니. 네 팬이었다는 게 너무 후회돼!][끼리끼리는 과학이라잖아요. 한열이 이런 쓰레기라면 신하리도 그리 좋은 인간은 아니지 않겠어요? 연결해요.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죠.][언니! 얼른 입도 벙긋 못하게 증거를 뿌려버려요. 저런 인간은 아이돌을 할 자격이 없어요.][경찰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난 영원히 한열을 믿을 거야!][덕질에 도덕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나보네.]...[아기 고구마]는 사람들의 부추김에 신하리와 라이브 방송을 연결했다.신하리의 모습이 라이브 방송 화면에 나타나자 카메라는 신하리의 얼굴을 향해 바짝 다가갔다. 후드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신하리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그쪽 대신 경찰에 신고했어요. 얼른 오세요.”카메라가 홱 회전하며 한주 용하구의 경찰서 대문을 비췄다. 그에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순간 멍해졌다. ‘신하리, 미친 거야? 어제 저녁에도 한열 대신 해명해주더니.’[아기 고구마]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 전 신고한다고 안 했어요.”신하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한열이 그쪽을 성추행했다면서 신고를 안 해요? 성모 마리아세요? 방송으로 울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보다 신고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요? 경찰은 그쪽을 도와줄 수 있는데도 싫다고요?”네티즌들도 신하리의 말을 따라 댓글을 남겼다. [맞아요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