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은 오히려 그의 반응이 재밌게 느껴졌고 이내 다시 말을 걸었다.“그 사람이 대체 뭘 했다고 욕까지 하는 거야?”강한서가 입술을 틀어 물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유현진은 그의 횡설수설 속에서 포인트를 캐치했다.원인은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그녀는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이 본인 때문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다시 그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니 웃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그녀가 금방 강한서와 결혼했을 때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그의 취향을 알아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강한서의 친구에게 접근했었다.그러나 강한서의 친구는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그녀와 말을 거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주 쿠키를 만들어 ‘뇌물'을 그들에게 주었고 강한서의 취향을 알아내려 했다.강한서의 친구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뇌물'을 받은 사람들은 강한서의 취향을 하나둘씩 알려주곤 했었다.강한서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되고 그녀와 그 일로 다투게 되었었다. 그녀는 줄곧 강한서가 그녀가 ‘뇌물'로 그의 취향을 알아낸 것에 대해 창피함을 느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리고 오늘에서야 그녀는 강한서가 그때 그녀와 싸운 이유가 동창회에서 우연히 성서원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되었던 것이었다.껍데기만 화려하다든가, 이리저리 흘리고 다닌다든가, 허영심으로 가득하다든가, 아부를 떤다든가, 머리가 꽃밭이라든가 등 말을 했었다고 했다...강한서는 그저 일부분만 그녀에게 말해줬을 뿐 사실 그 내용은 더 심각했다. 성서원이 했던 말들은 그때 당시 그녀와 강한서가 결혼할 때 대부분 사람의 생각이기도 했다.그런 얘기를 듣게 된 강한서가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좋은 음식으로 좋은 대접을 해주었는데 결국 그들은 그녀를 껍데기만 화려한 허영심 가득한 사람 취급했고 모든 불쾌한 언어들을 총동원하여 유현진을 깎아내리고 있었기에 강한서는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화를
그랬다, 강한서는 연애를 정말로 한 번도 못 해봤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애초에 강한서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신경 쓰긴 뭘 신경 써!'그녀가 나직하게 물었다.“그래서, 나한테 네 친구에게 쿠키 주지 말라 한 것도 성서원 씨의 말 때문이었어?”강한서는 이마 위에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면서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현진아, 난 종종 어떻게 말을 해야 네 기분이 상하지 않을지 잘 몰라. 사실 그날도 네가 걔들한테 선물을 줘서 화가 난 게 아니야. 내가 화가 난 건 네가 정성스럽게 만든 쿠키를 진심을 담아 선물한 건데 뒤에서 그런 말이나 듣게 되고, 게다가 손까지 다친 네 모습을 보니까 화가 났던 거야. 너한테 화낸 것도 아니었어. 내가 화상연고를 사서 메모까지 적어뒀는데 네가 보지도 않고 버린 거잖아.”“... 난 화상연고를 본 적이 없어.”강한서가 말했다.“난 분명 샀어.”강한서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억울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정말이야.”유현진은 당연히 그의 말을 믿었다. 왜냐하면, 강한서는 술에 취하기만 하면 솔직해졌으니까.강한서가 사 온 걸 그녀가 아닌, 전에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가 버린 것이었다.가정부는 신미정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었고 아마도 신미정이 가정부에게 시켜 버리라고 한 것이 틀림없었다. 흡사 신미정이 일부러 피임약을 정인월의 시야에 닿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말이다.신미정은 처음부터 그녀와 강한서의 사이가 틀어지길 바랐다.강한서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성서원을 만나자마자 불쾌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강한서는 바로 기분이 가라앉게 된 것이었다.유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때도 이렇게 솔직했다면 우리한테 이미 유치원을 다닐 아이가 있었을 거야.”민경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유현진 또한 강한서와 마찬가지로 속으로 끙끙 앓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유현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한참을 달래다 강한서는 결국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유현진은 고른 그의 숨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이튿날 아침, 의사가 다시 상태를 확인하러 왔을 땐 강한서가 이미 깨어있었다. 다만 유현진이 아직 달콤한 잠에서 깨지 않았기에 강한서는 이불을 그녀에게 덮어주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의사는 조용히 그의 상태를 확인하곤 나가버렸다.유현진은 그렇게 오전 9시가 되어서야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강한서의 수려한 얼굴이었다. 유현진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주물럭거리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엔 왜 날 힘들게 했어?”아침부터 이 말을 들은 강한서는 다소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강한서는 그녀가 어제 말한 “의사가 한 말을 들어.”라는 말을 떠올리곤 기쁜 듯 웃었다.그가 나직하게 말했다.“어제 말한 보상 아직 못 받았는데, 언제 줄 거야?”부스스 깨난 유현진은 아직도 비몽사몽인 상태였다.“보상이라니?”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으려는 듯한 그녀를 보며 강한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강한서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유현진은 순간 정신을 번뜩 차리게 되었다.그녀는 재빨리 손을 치워냈고 그를 노려보면서 말했다.“여긴 병원이야! 정신 차려!”강한서는 살짝 웃음소리를 냈다. 장난을 그만두기로 한 그는 그녀의 머리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직하게 말했다.“일어나. 얼른 정리하고 집으로 데려다줄게.”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옷을 벗겨 확인했다. 피부발진이 많이 사라진 그의 몸을 보며 그녀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두 사람은 일어나 정리하였다. 강한서는 병원비를 내러 갔고 유현진은 그런 그를 병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병원에서 깨어났던 터라 그녀는 머리도 빗지 않았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만약 지인이 아니라면 절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것이었다.
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현진은 바로 휴대폰을 꺼내 최연서에게 연락해 어떻게든 유상수를 병원으로 오게 할 생각이었고 백혜주가 절대 아이를 지울 수 없게 방해할 생각이었다.그녀는 최연서에게 자세하게 지시하고는 전화를 끊었고 강한서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왜 그래?”강한서가 말했다.“난 네가 유상수를 불러와 불륜 현장을 잡게 하려는 줄 알았거든.”유현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백혜주는 조심성이 아주 많은 사람이야. 그 여자가 백현석을 자신의 동생으로 만들었으니 실질적인 증거가 없는 한 유상수는 절대 믿지 않을 거라고. 백혜주가 지금 급하게 아이를 없애려고 하니 이것이 제일 증거가 될 거야. 난 절대 백혜주 뜻대로 흘러가지 않게 할 생각이거든. 아이를 지운다고 해도 난 반드시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온 백혜주가 유상수에 의해 유산하는 꼴을 볼 거야!”“백혜주는 우리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유상수랑 붙어먹은 거야. 그리고 우리 엄마한테 자식을 맡긴 거고. 결국엔 우리 엄마 목숨까지 앗아갔지. 모든 건 그 여자로 인해 시작된 일이니까 그 여자에게도 내가 느낀 고통을 느끼게 해줄 거야!”강한서는 그녀가 꽉 쥔 주먹을 풀어주면서 손깍지를 꼈다.“도움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복수해도 되는데, 저런 사람 때문에 네 손을 더럽히지는 마.”유현진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혹시 너도 이런 내가 두려워?”생각을 마친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네가 나한테 제일 심하게 대했던 건 기껏해야 뺨 때리는 게 전부였잖아. 내가 이걸 나에 대한 너의 편애라고 봐도 돼?”“...”유현진은 아무 말도 없이 그의 손을 꽉 잡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넌 요구가 너무 낮아. 정말로 내가 나중에 너한테도 이럴 거라는 생각 안 해봤어?”강한서가 눈이 휘어지게 웃더니 이내 다시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 아니까. 넌 나한테 손을 대지 못할 거잖아.”유현진이 입꼬리를 올렸다.“혹시 모르지. 네가 만약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한편, 연락을 받은 최연서는 바로 다시 유상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신이 넘어져 그만 피가 흘러나왔다는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유산의 징조임을 알게 된 유상수는 아들 학교도 뒤로하고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유상수는 그녀를 데리고 제일 좋은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연서는 한주병원으로 가자며 한주병원의 산부인과가 한주시 제일 좋은 산부인과라고 말했다.유상수는 초조해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그녀가 말하는 대로 따랐다.그렇게 20분 정도가 지나고 유상수는 최연서를 부축한 채 한주병원으로 오게 되었다.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유현진과 강한서는 바로 반대편에 있던 엘리베이터를 탔다.이때의 백혜주는 이미 수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수술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젊은 여자를 부축하고 허둥지둥 달려오는 유상수를 발견하게 되었다. 유상수는 급하게 걸으면서 나직하게 젊은 여자를 달래고 있었다.“괜찮아, 괜찮아. 분명 괜찮을 거야...”백혜주는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고 순간 화가 치밀어올라 왔다. 그녀는 현재 자신의 상황을 까맣게 잊은 채 소리를 질렀다.“유상수 씨,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유상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백혜주를 보더니 이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엄청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혜주야, 네가 여긴 왜 온 거냐?”유상수의 품에 있던 여자는 백혜주가 유상수의 이름을 부르자 바로 몸을 움찔 떨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백혜주는 차가워진 얼굴로 이를 갈면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오빠가 여긴 왜 온 거예요? 이 여자는 또 누구고요?”유상수가 우물쭈물하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회사 직원이야. 몸이 안 좋다길래 데리고 와 본 거야.”“어디가 안 좋길래 산부인과를 다 찾아와요? 게다가 오빠가 왜 데리고 오는데요?”백혜주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힘들게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만큼 다른 사람이 그녀의 자리를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탐내는 걸 절대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유상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런 이런 곳에서 백
백혜주는 치밀어오르는 화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배가 서서히 아파져 오기 시작했고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더니 마침 진단서를 들고 오던 백현석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곤 바로 그녀를 부축했다.“누나, 왜 그래요?”백혜주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지더니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유상수는 백현석의 목소리를 듣곤 바로 고개를 들었다. 백혜주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치맛자락이 서서히 붉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유상수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두 명의 임산부는 곧바로 응급실로 들어가게 되었다.강한서는 한주병원에 아는 지인이 있었기에 미리 지인에게 얘기해 둔 상태였다. 그랬기에 최연서가 가짜 임신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의사는 그저 최연서의 태아가 불안정하다며 약을 처방해주곤 집에 돌아가 푹 쉬라고 했다.그 말을 들은 유상수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한편 백혜주 쪽은 다행히 유산이 되지 않았고 의사는 그저 나이도 많은 데다가 갑작스럽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 출혈이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게다가 아이는 무척 건강한 상태라고 했고 태아의 심박수 등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고 했다.유상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간호사가 진단서를 들고 보호자의 사인이 필요하다며 들어왔다.백현석이 받으려는 순간 유상수가 먼저 가로챘다. 그것이 임신중절수술 확인서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지금 이게 뭐죠? 임신중절수술 확인서라니요? 누가 수술을 한다는 거죠? 잘못 가져오신 게 아니에요?”간호사도 행여나 잘못 가지고 왔을까 봐 얼른 확인해 보았다.“백혜주 님이 아니신가요? 주민등록증 확인해 보니 백혜주 님이 맞는데요?”유상수는 미간을 확 구겼다.“저희는 임신중절수술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간호사가 말했다.“하지만 본인께서 이미 임신중절수술을 하겠다고 이곳에 직접 사인하셨습니다.”간호사가 낮은 소리로 이어서 물었다.“혹시 보호자와 상의가 되지 않은 건가요?”유상수는 백혜주의 사인을 발견하곤 안색이 더욱 안 좋아지게
“나한텐 사찰로 간다고 해놓고 지금 여기 와서 수술받으려고 했던 거냐? 이렇게 큰일을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결정해?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한 거냐?!”백혜주의 머릿속엔 온통 최연서의 얼굴이 떠올랐고 유상수를 보자마자 그녀는 속이 메슥거려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백현석은 얼른 쓰레기통을 들고 와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백혜주는 한참이나 구역질을 했지만, 아무것도 게워 내지 못했고 그저 안색만 더욱 창백해져만 갔다.안쓰러운 백혜주의 모습에 유상수의 표정도 많이 누그러졌다.그는 침대 끝에 앉아 백혜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우리 낳기로 약속했잖아. 대체 왜 지우려고 하는 거야?”백혜주가 싸늘해진 얼굴로 손을 빼내면서 따져 들었다.“그 여자랑 언제부터 붙어먹은 거예요? 그 여자 배 속에 있는 그 잡종, 몇 개월이나 된 거죠?”자신의 아이를 잡종 취급하는 백혜주에 유상수는 바로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러나 백혜주도 임산부였고 게다가 피까지 흘린 적이 있었기에 그는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설명했다.“걔는 우리 회사 인턴이야. 전에 협력 업체랑 몇 번 미팅 간 적이 있었어. 그러다 우연히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고 다음 날 눈을 떠보니...”그는 뒷말을 삼켰다. 뒷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나도 그땐 죄책감이 들었어. 너한테 말하려고 몇 번이나 다짐했었는데, 도무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걔를 그냥 회사에서 자르려고 했는데 그날의 사고로 임신을 하게 되었대.”추악한 변명에 백혜주는 매 순간이 역겹게 느껴졌지만, 분노를 꾹 참으면서 계속 따져 물었다.“그래서, 그 여자가 아이를 낳게 내버려 두려고요? 그리고 하현주에게 했던 행동 그대로 저를 내쫓으려고요?”“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유상수는 기분이 언짢았다.“나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어. 난 걔 아빠보다 나이가 많아. 나라고 뻔뻔하게 다니는 줄 알아? 그 어린애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한테 당황한
유현아를 예뻐하던 그가, 결국엔 한 푼의 유산도 그녀에게 주지 않으려는 모습에 유현진은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는 딸을 아끼면서도 재산을 나눠주기는 싫어했다. 그 말을 들은 유현아의 반응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물었다. “너도 재산은 아들한테만 물려주고 딸에게는 주지 않을 거야?”강한서가 말했다. “너한테 줄 거야. 네가 날 데리고 다니면서 즐겁게 살면 돼. 돈이 필요하면 자기들이 벌어야지.”유현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네 아버지한테서 유산 물려받은 거잖아. 왜 네 자식한테는 그렇게 엄격하게 굴어?”강한서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집안 덕분에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시작한 건 맞아. 하지만 그냥 내 능력으로도 충분히 지금과 같은 것들을 누릴 수 있었어. 다만 시간이 조금 더 걸렸겠지. 아버지 유산은 할머니가 계속 관리하고 계셨고, 난 그 유산을 건드린 적이 없어. 만약 내가 능력 없이 그 자리에 올랐다면, 한성을 나에게 물려줬어도 지켜내지는 못했을 거야.”그는 말이 잠시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은 맥락이야. 나한테서 뭔가를 가지려면,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를 먼저 보여줘야 해.”강한서의 이런 교육 이념은 아마 정인월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유현진은 생각했다. 왜냐면 정인월이 바로 이렇게 그를 교육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민서는 반대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신미정의 얄팍한 사상과 좁은 시야의 영향을 받았다. 제대로 된 인간이 되지 못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유현진 같은 얼빠가 한 눈에 강한서를 찜했으니, 꽤 안목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왜 웃어?”강한서가 그녀의 손을 주물렀다. 유현진이 고개를 들고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재산을 나한테 다 물려주면, 네가 늙고 쇠약해졌을 때, 내가 널 차버리고 네 돈으로 젊은 남자를 데리고 살까 봐 걱정은 안 돼?”강한서: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이 여자
한열의 일은 결국 서해금과 송가람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송가람은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서해금은 이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서 오빠, 오늘 출근 안 하셨네요?”송가람은 직접 묻기로 결정했다. 강한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 신제품 발표회로 계속 바빠서 제대로 쉰 적이 없거든. 요즘 안 나쁠 때 휴가나 좀 보내려고.”송가람이 나긋하게 말했다. “쉴 때가 되긴 했어요.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바쁘기만 했잖아요. 교수님이 재검 받으러 오라고 하셔도 계속 미뤘잖아요. 오빠 건강 때문에 전 정말 걱정이에요.”“마침 휴가 중일 때 오빠가 재검 받을 수 있게 제가 교수님께 연락드릴게요. 현진 씨도 계속 여기서 오빠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운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효과가 있는지 교수님께서 확인해주시면 좋잖아요. 안 그럼 아무 명분도 없이 미혼 남녀가 계속 같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현진 씨 명성에도 안 좋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연락해줘. 고생해.”주저함 없이 쿨한 강한서의 대답에 송가람은 또다시 자신이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강한서는 기억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같이 집안 아래 함께 지내다 보니 또 다시 한현진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황 닥터는 송가람에게 강한서처럼 건강한 심리를 갖고 있고 심지가 강인한 사람에게는 심리 암시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송가람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은서가 갑자기 밖에서 들어왔다. 아이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큰소리로 말했다. “한서 삼촌, 제가 뭐 잡았게요?”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는 송가람을 본 은서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은서는 송가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금방 돌아왔을 당시 송가람은 강한서의 본가에 자주 드나들었고 친구가 없었던 은서는 줄곧 강한서 곁에 붙어있었다. 송가람은 강한서 앞에서는 은서를 예쁘고 귀엽다고 칭찬하며 먼저 얘기를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마침 그 얘기를 들은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젠장! 저런 걸 핑계라고!’강한서의 말에 송가람의 눈빛에 순간 혐오의 감정이 스쳐갔다. 그녀는 결국 강한서가 건네는 신발 커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송가람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송가람의 눈빛은 끊임없이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소파에는 커플 쿠션이, 테이블에는 커플 컵이 놓여있었다. 벽 여기저기에는 강한서와 한현진의 웨딩 사진이 걸려있었고 심지어 테이블에는 한현진의 머리핀과 머리끈이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 여자의 생활 흔적이 묻어있었다. 송가람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커피 마실 건지, 아니면 차를 마실 건지 묻는 순간 그녀는 곧 다정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차면 돼요.”송가람에게 앉으라고 얘기한 강한서는 황씨 아주머니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전에 현진 씨에게 들었는데 오빠가 우린 홍차가 유난히 향이 좋다면서요. 차를 내리는 오빠만의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한현진이 멈칫했다. 한현진은 자신이 송가람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설마 강한서 기억 상실을 의심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강한서를 떠보는 거야?’한현진은 혹시라도 강한서가 말실수는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강한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했다.“현진 씨가 널 속인 거야. 난 차 내릴 줄 몰라. 그리고 홍차를 제일 싫어해.”송가람이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오빠는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데요?”강한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용정차.”송가람이 강한서의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용정차로 만든 계란장조림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말하며 뭔가를 떠올린 듯 강한서가 나지막이 중얼였다. “나중에 아주머니에게 만들어보라고
한현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서해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진아, 나야. 몸은 괜찮아? 푹 쉬었어?”“네, 괜찮아요.”서해금이 가식을 떨면 한현진 역시 가식으로 받아쳤다. “며칠 동안 출근을 못해서 일이 많았을 텐데 아주머니께 폐를 끼쳤네요.”“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친구가 나한테 최상급 연와를 선물해줘서 가람이에게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어. 한동안 먹으면 기력회복에 좋을 거야.”“고마워요, 아주머니. 하지만 전 괜찮아요. 지금 집에도 있어요. 아주머니 드세요.”“품질이 좋은 연와야. 밖에서 쉽게 살 수도 없어. 네 아빠도 좋아하시는 거야. 전에도 계속 더 있으면 너한테 주라고 하셨어. 네가 거절하면 네 아빠는 내가 야박하게 군거라고 생각하실 텐데.”잠시 말을 멈춘 서해금을 다시 입을 열었다. “가람이가 이미 출발했어. 아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받으면 조금 먹어봐. 마음에 들면 내가 나중에 더 보내줄게.”한현진은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겉으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주머니.”“아, 그리고 조향 대회 예선이 곧 시작될 거야. 나중에 참가자 명단을 너에게 보내줄게. 한 번 확인해 봐. 문제없으면 그대로 대회 신청할게.”“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달려가며 강한서를 불렀다. 서재에서 서류를 프린트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부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는 체념한 듯 말했다. “왜?”“빨리, 빨리, 빨리. 송가람이 온대. 집 정리 좀 해 놔!”강한서가 말했다. “뭘 정리해?”“사진이며 커플템 말이야. 송가람이 와서 보면 우리가 눈이라도 맞았다고 의심하면 어떡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우린 합법적인 사이야.”“얼른 정리나 해.”한현진은 말하며 소파 위에 있던 쿠션과 테이블에 놓인 컵, 그리고 신발장에 있던 슬리퍼까지 전부 강
주강운에 관해선 강한서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해줬다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를 도와 치료를 받게 한 일이든, 간민혜의 일을 숨겨준 것이든. 심지어 그 뒤로 있었던 간민혜의 장례식을 치러준 것까지. 강한서는 이미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이유를 알 수도 없게 주강운의 원망만 샀다. 주강운은 지금까지도 간민혜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은 더 이상 전처럼 서로를 신뢰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강운 스스로 조사를 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어쩌면 본인의 손으로 철저히 조사해 진실을 밝혀야만 그의 마음속에 얽힌 응어리를 풀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이 물었다. “네가 대체 누구의 죄를 뒤집어써서 강운 씨의 원망을 받게 된 건지 알고 싶지 않아?”강한서가 시선을 내렸다. “강운이 날 원망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됐을 땐 알고 싶었어. 하지만 나중엔 그 마음이 사라졌어. 어떤 이유가 있었든, 우린 이젠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20여 년의 우정이 결국은 지금 이 지경에 이렀다. 오해가 풀린다고 해도 그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기에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 지금의 강한서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상태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이 사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 그에게 제일 간단한 방법은 바로 두 사람 사이는 뒤로 미뤄둔 채 보지도, 듣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민경하에게 말했다. “민 실장님, 서류를 주 변호사님께 보내시고 간민혜 씨가 당시 왜 나이정 씨 장례식장에서 소란을 피웠는지 조사도 계속 해주세요. 간민혜 씨가 교양도 있고 애증이 분명한 분이라면 절대 아무런 이유 없이 장례식에서 돌아가신 분을 모독하진 않았을 거예요. 조사는... 나이정 씨가 사망하기 1년 전 진찰했던 환자부터 시작하세요. 간민혜나 간민혜 씨와 관련된 사람이 환자 리스트에 있는지 알아봐요. 조사를 마치면 직접 저에게 알려주시
민경하가 갑자기 입을 열어 말했다. “대표님, 그리고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우연하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강한서가 시선을 올렸다. “뭔데요?”민경하가 서류뭉치를 뒤져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장례식장을 찍은 사진이었고 사진 옆쪽에 놓인 화환에는 나이정과 관련된 애도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젊은 여자 한 명이 주먹을 꼭 움켜쥔 채 영상 사진 속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강한서의 눈이 커다래졌다. “간민혜?”멈칫한 한현진이 사진 속 여자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간민혜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은 어쩐지 눈에 익었다. 그 얼굴은 주강운이 그의 여자친구인 척 연기를 해달라며 부탁했던 당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해줬던 메이크업의 주인공이었다. 그날 강한서가 그렇게 어두운 표정으로 불 같이 화를 낸 건 단순히 그녀가 주강운을 도와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주강운이 한현진을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로 메이크업을 받게 하고 심지어 본인은 모른 척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강운, 이 사람은 다정한 겉모습을 하고 뒤에선 대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걸까?일그러진 얼굴의 한현진을 본 강한서는 그녀 역시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한현진의 손을 꼭 잡았다. 강한서가 줄곧 한현진에게 간민혜의 사진을 보여주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주강운이 어떤 목적이었든, 산 사람 얼굴에 죽은 사람의 메이크업을 한 건 꽤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었다. 한현진은 끓어오르는 불쾌함을 누르며 시선을 올려 민경하에게 물었다. “간민혜 씨와 나이정 씨는 서로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 간민혜 씨가 왜 장례식장에 있었던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사모님 추측과는 오히려 반대예요.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예요. 이 사진은 나이정 씨 동료 분께서 주신 거예요. 장례식 당시 현장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했어요. 누군가 장례식장에서 난리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사람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나이정도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심지어 세상을 뜬지 이미 8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민경하가 말했다. “나이정이라는 분은 당시 조예단 씨와 같은 병원에서 근무했어요. 두 사람은 대학시절 동기였고 직장도 같이 다녔어요.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동료 분들 말에 따르면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요. 병원에서도 서로 도우며 지냈대요. 나중에 조예단 씨는 병원을 그만 뒀고 나이정 씨는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그 병원에 다니셨어요.”“사망 원인은 심근경색이었어요. 갑작스럽게 집에서 발병하셨고 따님이 병원에 오셨을 땐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요.”잠시 멈칫하던 민경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어요. 나이정이라는 분, 구암동 고아원의 후원자세요.”한현진과 강한서가 눈을 마주치더니 강한서가 물었다. “확실한 거예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정 씨는 한주 사람이 아녜요. 여기엔 친척도 없고요. 따님이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경제적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따님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남편은 견디지 못하고 나이정 씨와 이혼하셨어요. 나이정 씨는 혼자 딸을 키우셨고 돌아가실 땐 따님은 심장 이식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앞두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나이정 씨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고 친구 분께서 따님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나서야 사망하신 걸 알게 됐어요.”“고향도 한주와는 멀리 떨어져 있고 가족도 없어서 장례식은 친구 분들과 동료들이 나서주셨어요. 후원했다는 사실도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하게 된 거고요. 1999년부터 후원을 시작하셨고 총 3번의 기부를 하셨어요. 마지막으로 후원하신 시간이 18년 전, 총 금액은 6000만 원이었어요.”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딸이 아파서 돈에 쪼들렸을 텐데, 무슨 돈으로 고아원에 기부한 거야?”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후원금은 나이정의 돈이 아니라 그녀가 다른 사람 대신 기부한 것이고 나이정에게 그걸 부탁
진희연은 하늘을 안고 병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도일준이 몸을 뒤척이자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진희연이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물 드릴까요?”도일준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입술을 짓이겼다. “들어가요.”진희연이 말했다. “날이 밝으면 돌아갈게요. 저녁엔 링거를 맞으셔서 봐 줄 사람이 필요해요. 링거 다 맞은 줄도 모르면 어떡해요.”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던 도일준이 말했다. “그럼 아이라도 침대에 눕혀요. 희연 씨는 안 자도 아이는 자야죠.”도일준이 입원한 병실은 1인실이라 침대 넓이가 1.2 m이었다. 어린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같이 자기엔 충분했다. 진희연은 주저 없이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는 몸을 일으켜 도일준에게 물 한 잔을 떠줬다.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와 도일준에게 약을 건네며 잊지 말고 복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용하게 듣고 있던 도일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틀렸어요.”간호사가 멈칫했다. “네?”도일준이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약 잘못 가져왔어요.”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여 약을 확인하던 간호사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실수로 두 병실의 약이 바뀌었던 것이다. 허둥지둥 약을 바꿔 가져온 간호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도일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일준이 담담히 말했다. “의료업계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늘 경외심을 갖고 모든 생명에 책임을 다해야 해요. 매번 이렇게 행운이 따르진 않을 테니까요.”간호사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약을 내려놓고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진희연이 호기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도일준 씨, 약이 바뀐 건 어떻게 아셨어요?”도일준은 고개를 돌리고 말이 없었다. 대답을 해주지 않으려나, 생각하던 찰나, 도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엔 의사였어요. 그래서 약에 대해 잘 알고 있죠.”“그래서 지난번 하늘이 상처를 치료해주시는 손길이 능숙하셨던 거네요.”진희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엄청 훌륭하신 의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이 멍해졌다. “아니야 난—”강한서가 한현진의 말을 자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네가 말 안 해도 난 느낄 수 있어.”“느끼긴 뭘 느껴!”한현진은 어이없다는 듯 강한서를 찰싹 때렸다. “나라고 너한테 부탁 안하고 싶은 줄 알아? 둘째 삼촌과 경영권 다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너를 보는 게 마음이 아파서 그랬어. 신제품 발표회 파티가 있던 그 날을 제외하면, 네가 6시간 이상 잔 적이 있기는 해? 지금 네 다크써클 좀 봐봐. 지난번 같이 밥을 먹었을 때 오빠도 나한테 몰래 물어 봤었어. 혹시 네가 어디 아픈건 아니냐고. 네가 꼭 정기를 다 뺏긴 사람 같대. 너 지금 임산부인 나보다도 더 피곤해보여. 강한서, 넌 안 느껴져?”강한서: ...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마음이 아파?”기가 찬 한 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안 아파! 난 그저 네가 하루 24 시간 내내 일에만 매달려서 우리 셋 먹여 살릴 돈이나 벌었으면 좋겠어!”강한서는 기쁘면서도 조금은 막연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너 돈 좋아하잖아. 내가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널 주면 네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랬지.”한현진이 찰싹, 강한서를 밀어냈다. “네가 과로로 몸에 무리라도 오면 내가 그렇게 많은 돈 해서 뭐하라고. 아이의 양육을 전부 나에게 맡길 생각은 하지마! 일 때문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난 남편, 아이 다 버리고 네 재산만 들고 재가할 거야.”강한서가 멍하니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쩐지 고생 끝에 드디어 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 듯 한 믿을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손을 뻗어 한현진을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몸 챙기면서 하고 있어. 임신 때문에 겪는 네 고통을 내가 덜어줄 수는 없겠지만 다른 건 나에게 다 맡겨도 돼.”한현진이 강한서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팔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알았어. 부탁할게.”바로 그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놓아주며
“아파?”강한서가 또 다시 물었다. 고개를 가로졌던 한현진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허리가 조금 아파. 조금 전에 눌렸거든.”강한서가 한현진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애들 이름도 못 지어줬는데.”한현진: ...“나도 이름을 뭐라고 지을지 생각 안 해봤는데.”강한서가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 이름 짓자. 만약...”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현진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그런 부정 타는 소리 하지 마.”이때 검사를 마친 의사가 진단서를 가지고 나오며 말했다. “변연전치태반이예요. 심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해요. 될수록 누워서 하루 쉬셔야 해요.”강한서가 눈을 깜빡이며 한현진의 손을 입술에서 떼어냈다. 그가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물었다. “선생님, 제 아내와 아이 모두 괜찮은 건가요?”의사가 말했다. “괜찮아요.”강한서가 말했다. “하지만 하혈을 했잖아요.”“하혈은 변연전치태반의 증상 중 하나예요. 출혈량이 많지만 않다면 활동을 줄이고 누워서 휴식만 잘 취하시면 돼요.”“하지만 조금 전 밀쳐져서 허리를 부딪쳤어요.”“네.”의사가 말했다. “그럼 일단은 돌아가셔서 먼저 얼음찜질을 하다가 온찜질하세요. 이틀 정도면 붓기가 빠질 거예요.”강한서: ...“허리를 부딪쳤는데 배가 괜찮다고요?”의사가 반문했다. “허리를 부딪쳤는데 배가 왜요?”그 말에 강한서가 침묵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한서를 보며 의사가 말을 이었다. “허리를 부딪친 것 때문에 하혈한 건 분명 아녜요. 변연전치태반이 있은지는 조금 됐을 텐데 아마 모르시고 계시다가 마침 허리를 부딪치고 하혈했다는 걸 알게 되시면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걸 거예요.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에요. 아이는 무사해요. 아내 분도 괜찮으시고요. 이름은 집에 가서 마음 좀 진정 시키고 천천히 지으시죠. 울면서 이름을 짓는 것도 그리 좋은 건 아니잖아요.”강한서: ...창피해